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출애굽기 12:12-14

로마서 13:8-10

 

지난 주 한국에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장면의 사진으로 인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동네 선배 여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건방지다는 이유 하나로 여학생들이 한 학생에게 집단 폭행을 무자비하게 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금 한국에서는 청소년의 중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를 위해 입법 청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물론 처벌의 강도를 높여서 이와 같은 폭행 사건을 줄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원점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생명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까지 만들면서도 양심의 가책 조차 느끼지 못하는 비정한 현실에 대해 모두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장면은 장애아동들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 아동의 부모들이 마음을 돌이켜 학교 건립에 찬성해 줄 것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장애 아동을 위한 시설이 동네에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도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장애인 특수학교가 생기면 왜 자녀 교육에 문제가 생기고, 집값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지독하게 이기적인 님비(NIMBY)현상 아닌가요? 결국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비정한 현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오히려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요? 오히려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빚을 진다는 것은 갚아야 할 의무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결국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좋다고 하는 감정의 표현이나 선택적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의무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사건을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 시대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건강한 사회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서로에게 행해야 할 바를 다하기 보다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짓으로 빚을 더하는 비정상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갚아야 할 빚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산 지경에 이를 만큼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 중 하나는 사랑을 빚으로 표현한 사도 바울의 정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우리에게 빚처럼 주어진 까닭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인해 늘 빚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모든 정성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겁니다. 나아가 받은 사랑의 빚을 서로에게 갚아 나갈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빚에 대한 서로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오직 사랑의 빚만을 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빚진 자처럼 살 때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과 유혹, 힘과 물질적 풍요의 욕망에 사로 잡혀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정작 갚아 나가야 할 빚에 대해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빚이 해야할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기 힘들도록 막아서는 일종의 문턱(threshold)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사랑 하기 보다 부를 얻고 힘을 과시하며 자기 자신의 편안함 만을 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생명을 자신의 기분에 들지 않는다며 마구 유린하고, 생명을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는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물고기가 맨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이 물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물고기가 태어나 물 밖에 올라와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살던 곳이 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현실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태어나 자라나면서 매순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 가지요. 첫 걸음마를 떼는 순간처럼 인생은 끊임없이 앞에 놓인 문턱을 넘어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는 두려움으로 물러서기를 여러 번 하다가 마침내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다음 단계로 성장해 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용기와 자신감도 생기지요. 그러면서 또 다른 문턱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문턱 앞에서 주저앉게 되면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은 고사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자신감마저 잃어 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장이 멈추고 제자리 걸음을 하며 점차 퇴보해 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의 본문은 이와 같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문턱의 의미를 다른 맥락에서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땅에서 구하기 위해 끝까지 말을 듣지 않던 애굽에 커다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 살아있는 모든 첫 열매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 죽음의 사자가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해서 사람들은 유월절(파사: Passover)이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마치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사를 많이 드린다 해도 마음 속에 품은 죄와 악한 행동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 어떠한 희생 제물도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음의 문턱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얻게 하신 겁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곧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오늘 우리의 삶에 놓인 여러 문턱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자라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생명을 자기 맘대로 밟아버리고 상처를 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생명을 세상의 헛된 재물과 편견과 견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상처를 보살피고 억눌린 생명에게 자유와 평안을 줍니다. 금과 은 보다도 작은 생명 하나의 가치도 소중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삶의 문턱에 다다라도 또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빚질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져야 할 유일한 빚입니다.”

걸림돌

마 16:21-25

 

시인 정현종의 작품 가운데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만남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만남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마주침으로부터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될 인연까지 실로 다양한 만남을 갖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만남을 다 마음 속에 담아 두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냥 스쳐 지나가듯 흘려 보내는 편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만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 들어온 우연한 만남 조차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말이지요. 누구나 또다른 누군가의 방문객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군가도 나에게 한 명의 방문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 찾아 온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를 어마어마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결국 그의 일생을 함께 공유하는 동반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남의 소중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재확인시켜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듯 스쳐 지나가는 인연 하나에도 의미가 없는 만남은 없는 법입니다. 무시해도 좋을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존재입니다. 해서 교회를 찾아 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할 때도 마음 속에 그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만남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악연’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청객처럼 다가오는 것이지요. 애써 피하기도 하고 굳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만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에둘러 표현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걸림돌”이라는 표현입니다. 원어로 보면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 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스캔달scandal”의 어원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자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사용하셨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예고를 듣고는 한사코 만류하는 제자에게 ‘스칸달론’, 곧 걸림돌이라고 지적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던 스승의 길을 사람의 생각으로 막아서는 제자의 모습이 마치 걸림돌 같다고 비판하신 것이지요.

사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면 베드로의 심정을 전혀 납득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스승이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데 이를 만류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베드로에게 역정을 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그가 스승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두운 세상에 참된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 빛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물질적 부나 권력의 소유를 추구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현실의 어두운 욕망으로부터 진정한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 주는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승리의 화신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 땅의 소산과 민족의 정통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로마 제국과의 일전을 통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의 일로만 놓고 본다면 참담한 실패와 낙오의 길이 아닐 수 없었던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계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시각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었습니다. 복음을 믿지 못하는 불순종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한 베드로에게 걸림돌이라고 비판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베드로에게 사용한 “스칸달론”을 예수께도 똑같이 적용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7절을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헬라어 어원이 바로 ‘스칸달론’ 입니다. 당시 유대의 율법과 전통에 반하는 말씀과 사역을 행하시던 예수님을 일부 유대인들은 걸림돌처럼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청객과 같은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원하지 않는 손님처럼 예수님을 대한 것이지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걸림돌로 생각했습니다. 불청객처럼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이로 인해 과거와 현재를 지나며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역사에 대한 기대도 품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둘 다 놓치고 만 꼴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의 복을 제 발로 걷어 찬 셈인 것이지요. 이에 대해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이에게 바로 하늘의 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자신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면 어떨까요? 행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고 서 있는 이 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닐까요? 마치 우리를 위해 지금도 역사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을 불청객처럼 외면하고 등진 모습은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요청과는 반대로 우리 서로도 마치 불청객을 맞이하듯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마디로 지금도 여전히 하늘의 복을 걷어차며 사는 삶이 아니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걸림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24절의 본문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삶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궁극적 기준이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시선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 삶의 목표도 나의 욕구를 채우는 자기만족에서 자신을 넘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변화는 언제나 쉽지 않은 법입니다. 때로는 반발이 따르기도 합니다. 예컨대 개혁과 변화를 시도하다 보면 이에 반대하는 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 사회의 종교적 위선과 부패를 비판하시던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발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서로가 걸림돌이 되는 형국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길을 향해 가는 걸림돌인가 아니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인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제자들과 바로 오늘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걸림돌이 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비록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지만, 하늘의 복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내려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처럼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그 복을 잃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때문에 세상이 말하는 걸림돌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떤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하늘의 복을 받을 만한 디딤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나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방문객으로 맞이하여 그와 함께 동행하는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맞나요? 비록 세상이 여러분을 걸림돌로 여길 만큼 인정해 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불청객 같다 해도,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맞이한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인의 정체성

마태복음 16:13-19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다소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껏 스승의 뒤를 따라 다니며 여러 사역의 현장을 목격하고, 증거하시는 말씀들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제자들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질문 자체는 제자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제자들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여과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지금까지도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동일한 고대 근동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당대의 뛰어난 스승이나 종교 지도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적 지도자나 선지자로 본다는 것은 매우 우호적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부 유대 성전세력들이 비판한 것처럼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같은 극단적인 평가는 면한 것이니 말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대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이렇게 급작스러운 질문을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서 행하신 것일까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갖는 당시의 의미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정확한 의도는 파악할 수 없지만, 한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점은 거대한 도시의 위용 앞에서 제자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되짚어 보시려는 의도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도시의 이름이 로마의 황제를 따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그 도시가 평범한 곳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 받던 로마의 황제를 기리는 신전과 이를 우상화시킨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도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문에 이러한 도시적 배경 속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더냐”고 묻는 예수님의 의도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현실의 위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제자들이 분명한 신앙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려는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질문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풍랑 속에서 구해 주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명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주지시켜 주셨습니다. 풍랑이 위협이 되는 외적 요인이라면, 위압감을 주는 도시와 우상숭배의 문화는 유혹을 줄 수 있는 외적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외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신앙의 근본을 잘 지키고 있는지 재차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처럼 유혹거리가 날마다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파고 앞에 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당장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낡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거대한 현대사회의 톱니바퀴 같은 현실 속에 신앙은 참 초라하고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점점 고령화 되어가면서 결국은 교회 건물이 빈 공간으로 남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천년 전 당시 상황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대로 당시 사람들도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일로 바라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삶이 편해 지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도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이들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장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의 진로도 불분명한 상황인데, 바쁜 시간 쪼개어 교회에 가는 것도 그렇고 신앙과 관련된 일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비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아예 자식들에게 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미리 엄포를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도 엄격한 규정을 내려버리는 것이지요.

저도 그렇게 해서 인생을 올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업을 마치고 인생살이를 조금이라도 해 보신 분들은 그 이유를 다 이해하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조급함과 그 틈새를 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현실은 우리의 선택을 언제나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늘 신앙적으로 흔들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매우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그 때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이지요. 베드로의 이 대답은 2천년 교회 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제자와 그들이 세워 갈 교회에 주셨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겁니다. 이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의 나라에서도 매고 풀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이지요. 이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교회에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꾸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 땅에 그대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소명에 가까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명을 통해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모습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교회의 정체성을 이야기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본인에 대한 정체성을 묻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를 믿는 제자와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2천년이 흐른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새로운 길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과 새롭게 마음을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지금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맞나요?” 바라기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의 입술과 결단을 통해서 분명한 제자와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눈 먼 사람

마태복음 15:10-20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의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의 전통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장의 3절에서는 이를 장로들의 전통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란 오경에 기록된 율법 이외에 율법의 원리를 현실 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유대 랍비들에 의해 정리된 일종의 생활 규범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탈무드는 이러한 장로들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에 의해 율법을 해석하여 적용한 규범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에게 장로들의 전통은 그 자체로 율법과 마찬가지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적용한 것이니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적 사항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문제를 삼았던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을 동일한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사람에 의해 해석된 구체적인 생활 규범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장로들의 전통은 말 그대로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도덕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사회적인 위신과 더불어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전에 종교적 전통에 따라 손을 씻는 것이 갖는 의미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위생의 문제도 그렇고, 먹는 것 하나에도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합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 씻는 전통을 강조하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하셨습니다. 식전에 손 씻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보다 앞서야 할 율법의 정신이 위배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전통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되어야 할 것은 전통으로 명문화된 세부적인 규칙 그 자체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손 씻는 일처럼 명문화된 규칙 하나하나를 아주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하여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손 씻는 행위 보다도 마음을 씻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행위에는 유독 신경을 쓰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그들의 위선을 꼬집은 것이지요. 정말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먹는 것 때문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것 조차 보지 못해 세상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눈 먼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기는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나, 뭘 좀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나 매한가지라는 지적입니다. 서로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먼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누가 누구를 인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다가는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 보셨던 겁니다.

그렇다고 인도하는 길잡이가 적어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부모들이 종종 자식들에게 “너 보다 똑똑한 아이와 어울려 놀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비교우위에 대한 사회적 강박관념을 갖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 자식도 남보다 나은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첩경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눈 먼 사람과 그들 중 길잡이가 되는 이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 먼 사람’이라는 말의 헬라어 어원이 “tufao, τυφόω”인데, 그 의미가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우리 말에 흔히 “뜬구름 잡는다”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쭐대며 으쓱댄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확실한 상황과 자만에 빠진 상태를 동시에 갖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예수께서 하신 말에 적용해 보면, 뜬구름 잡듯이 절대적인 해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마치 무언가를 다 아는 것인양 우쭐대며 우겨대는 꼴과 다름없다는 겁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눈 먼 사람이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눈 먼 길잡이’ 라고 칭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이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길잡이도 큰 틀에서는 눈 먼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길잡이라고 해서 남보다 월등하게 난 사람을 뜻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좋은 길잡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으며 행여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먼저 감수하여 뒤 따라 오는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듯 “잘 난 사람”이라기 보다는 믿고 따를 만한 “든든한” 사람인 것이지요.

교육학의 절대 명제처럼 주장되는 말 가운데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의 수준이 결국 교육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눈 먼 길잡이가 가져올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하다는 것이지요. 교육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한자로는 가르칠 교(敎)를 써서,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배움에 앞서 가르침이 선행되는 것이지요.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education’의 어원인 라틴어 ‘educare’ 는 본래 젖을 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엄마가 젖을 주면 아이는 그걸 먹고 양육 받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주는 쪽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젖먹는 힘을 다해 먹어야 하는 아이의 몫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움이 상대적으로 동양보다는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젖을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에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바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교육의 질을 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참된 배움과 양육이 가능하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어떤 상황인가요?

교육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한자 구절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번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방식이 매우 자의적이지요. 교육의 목적과 방향 보다는 외적인 교육 환경에만 집중하려는 시각이 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요즘 현대 사회의 교육에서는 이로 인해 오히려 “교육열”을 조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한다는 생각도 그래서 나온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는 미국 땅 만해도 학군을 따라 사람들이 밀집해 살 뿐만 아니라 덩달아 집값도 오르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의 이주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자체 보다는 오히려 축복과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보려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시각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맹자의 엄마야 말로 정말 맹한 사람 아닐까요? 적어도 두 번의 이사는 실패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시선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해 집니다. 맹자가 뛰어난 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의 교육만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라는 관점입니다. 오히려 첫번째 공동묘지 옆에 살 때는 아이에게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두번째 장터 옆에 살면서는 생존 현장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살아있는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란 주장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한 뒤에야 비로소 참교육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이지요. 때문에 마지막 세번째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간 맹자는 그 때까지 보고 경험한 바를 통해 이제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육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모든 것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배움의 의지를 키워나갈 때 교육의 방향과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사성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동적인 배움의 과정을 통해 교육의 참 목적인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이유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교사나 학생, 목사와 변호사, 그리고 의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교육은 바로 그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오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이 지금도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위기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비춰지기 보다, 오히려 세상이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비판이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눈 먼 길잡이와 눈 먼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교육을 덜 받았거나 지적인 수준이 형편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와 교인들의 수준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과 방향이 퇴색되고 변질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육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질문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의 배를 채우듯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길잡이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르침과 배움의 중심이 흔들리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영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야 말로 눈 먼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