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누가복음15:25-32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인 상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그런데 그 강한 힘을 가진 상어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부로 향하는 강한 힘만큼, 정작 자기 자신의 아가미를 제대로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외부의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강한 철문을 달아 놓았더니, 내부의 사람들이 평상시 그 문을 지나들 때도 큰 문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지요. 여하튼 상어는 잘 통제되지 않는 아가미로 인해 잠 잘 때도 쉬지 않고 아가미를 계속 움직여야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상어의 입장에서 보면, 참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할만한 일들입니다. 소위 교회 일에 열심인 분들이 더 시험 받기 쉽고, 문제를 만들기도 쉬운 법인데, 그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거나 아예 거리를 둔 사람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일하다가 어쩌다 보니, 관심을 갖다가 어쩌다 보니, 최선을 다해 섬기다가 어쩌다 보니 다 생기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지요. 에너지는 많은데 그 에너지를 통제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간과될 때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의 패턴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힘과 에너지도 선택적으로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지요.물론 그 선택의 기준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좋은 방향으로만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거나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언제든지 상처받고 시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기형도라는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에 참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소개합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적이나 방향을 나름대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은 그런 것 없다고 하는 사람조차 사실은 개인이 인식을 못했을 뿐이거나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정해준 방식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그런데 그 삶의 목표나 희망이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세상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입니다.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남처럼 잘나고 싶은 것에 대한 질투.남들이 올라선 것처럼 나도 오르고 싶은 질투. 그래서 미친듯이 살았는데,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허망함을 발견한 것이지요. 질투로 세상만 바라보다,정작 세상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은 사랑하지 못했던 현실을 깨달았던 겁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단의 한 후배 목사님이 올린 글을 읽으면서 이 시를 다시 한 번 읽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인의 자기고백처럼 목사님의 툭 던지는 말한마디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자기성찰적인 글이었습니다.

 

“저녁 예배 찬양이 이런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차마 부를 수가 없다. 자유하지 못한 목사여서… 늘 어디나 계신 분이 주님이라고, 그러니 니들 마음만 열면 된다고 스무살 교인들에게 자주도 말해왔는데, 나는 차마 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는데…

개척교회 몇 년째… 

애리조나에 콩 나듯 누가 칭찬할 일이 있어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하셨다' 고… 거짓말이다.가끔 진짜 그렇게 고백할 때가 있지만,  마음 속 깊숙이 흐르는 강물 같은 교만은 나랑 하나님이랑 안다.

애리조나에 선인장 나듯 계획했던 대로 안된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에서 마음이 멀어진 목사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다. 환경과 남탓을 하던지 아니면 내 실패를 인정하던지… 

감독님과 큰 교회 은퇴목사님이 이러신다. 

목회의 결과로부터 자유하라. 큰 교회는 바쁘기만하고 좋은 것 없다. 나도 큰 교회 만들고 은퇴하면 저 말은 꼭 할꺼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남들보다 잘 나가는 목사가 되고 싶은, 재미없는 마음이 가슴에 거머리이다. 젖꼭지 옆에 붙어서 심장을 빨아 먹는다. 웅크리고 누울 수 밖에 없다. 

아침밥을 굶고, 뭘 길게도 써보고, 처음 만난 선배님들의 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어도 잠깐 따뜻해진 마음은 그 안에 쓰레기를 발견한다. 

누가 설교를 하러 올라오면‘얼마나 잘하나?’를 먼저 생각한다. 쓰레기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 큰 교회 담임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 말할 때 내 귀의 각도가 달라진다. 쓰레기다.

개척교회 잘 키워 놓으면 어디서 나를 찾아줄까… 교회를 키운 팔할은 이 생각이다 

지금도 이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을 생각을 하니까… 좀 솔직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보이겠지? 하고 기대한다. 쓰레기다.재활용도 안 된다. 

내일은 아내 생일인데 여기서 이런 거 쓰고 있다 쓰레기다.

하나님의 법은 없고, 인정받고 잘나가고 싶어 하는 그 쓰레기만 가득하다.죽어도 안 없어진다. 죽으면 없어질까?”

 

이 글의 제목이 “나는 니느웨로 가고 있다”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은 니느웨인데,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해 가기 위해 배밑창에 숨어 있던 요나처럼 자신의 현재 상황을 비유한 것이지요. 너무나 솔직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 목사님은 다시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정을 토로하였지만, 이미 니느웨로 향해 가고 있는 주님의 종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맥락과 처한 상황은 아주 상이하지만,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본문 말씀의 구절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돌아온 동생을 질투심에서 바라보았던 그의 형 이야기 입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그 제목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탕진하고 다시 돌아온 동생에게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온 탕자를 안아 준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로 언급되기도 하지요. 그와는 달리 형은 실제 이야기 속에서나 이 비유를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극 안에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설움이,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극 밖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멀어지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비유에 나타나는 형의 심리적 상태는 질투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 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아마 이를 바라보는 형의 감정은 정말 복잡했을 겁니다. 어느 때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밭일에 충실했던 형. 맏아들로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집안을 세우는 책임을 묵묵히 지켜온 믿음직한 형.그런데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하고 돌아온 사이에 말썽쟁이 동생이 돌아왔다고 동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지요. 동생도 얄밉지만, 이를 알고도 받아준 아버지 때문에 더 서운했습니다. 순종하며 일하느라 마음 편히 놀아 보지도 못한 자신의 처지와 대조되는 동생을 바라보며 질투심이 폭발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극중의 인물인 형의 입장에 서 있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인간적인 심리상태로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그런데 이 비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에 초점을 둔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형은 죄인들과 세리, 창녀와 같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유대 종교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눈에 벌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천국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질투심이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구원이 그들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집에 남아 묵묵히 일을 한 맏아들처럼 집을 나갔다 돌아온 작은아들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자녀가 된 것은 자식들이 행한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못난 자식도 부모의 자식입니다.결과적으로 형으로 묘사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앙생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한 율법적인 신앙생활도 결국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신들처럼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지 않고 게으르거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비유에서처럼 동생을 자기의 기준으로 정죄하고 만 것이지요.깨끗하고 의로우며 성실한 자기와는 달리 동생은 언제나 기준에 미달하는 문제아 혹은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식으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버린 것이지요.

 

질투는 언제나 오해를 양산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자기가 해 온 일들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가질지 모릅니다. “나도 차라리 돈이나 원없이 쓰고 실컷 놀다가 들어올 걸”하고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지 못하고 산 자기가 바보같이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스스로를 종처럼 여기고 산 것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그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신실한 맏아들의 모습 아닙니까? 다만 시기하고 질투하는 닫힌 마음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지요. 그것 역시 자신의 욕심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은 맏아들, 곧 종교 지도자들이야 말로 상어처럼 힘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그들이 가진 약점이 바로 그 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은 언제나처럼 질투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남들 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오르려는 질투의 힘. 하지만 정작 그것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은 갖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쉬지 않고 호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임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허무함을 벗어나는 길이니 말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누가복음13:1-5

 

한자어로 ‘참척(慘慽)’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참혹한 슬픔을 뜻하는 말로써, 오래 전부터 유교 문화권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비극적인 상황’을 가리킬 때 사용해 왔습니다. 부모의 죽음에는 천붕(天崩)이라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참척은 자식을 잃고 가슴이 참혹할 만큼 내려앉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비통함이 짐승처럼 치솟아 통곡하는, 말그대로 인간의 가장 처절한 순간을 묘사한 것이지요.

 

지금은 작고한 여류 작가 박완서씨가 남편을 폐암으로 잃은 지 석 달 만에 다시 외아들을 잃고 난 뒤, 참척의 슬픔 속에서 쓴 자신의 일기를 후에 책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가 책 제목이었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하나님께 외쳤던 소리였던 것이지요.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주신 것인지 한 말씀만 해달라고 몸부림치며 간구한 기도였습니다. 책 중에서 작가는 고통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상을 당한 이에게 정중한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작가를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자식을 잃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릴 줄 알았는데, 여전히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참척을 겪고 나서 기막힌 애통과 절망이 당연히 에미인 자신의 목숨도 단축시킬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남들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에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해보았다는 것이지요. 이와 함께 그는 하나님께 묻고 싶더라는 겁니다. 도대체 왜 아들을 이렇게 빨리 데려갔느냐고 말이지요.


작가는 행여 순간적인 실수로 거두어 간 것은 아닌지 분노가 치밀어 대들기도 하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한 말씀만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끝내 아무런 말씀을 주지 않으셔서, 작가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 우리 시골에선 자식을 앞세운 에미한테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가 끔찍해 소름이 끼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한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닌가. 나야말로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창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가 없고, 먹지 않았는데도 수족을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박완서 작가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무고한 죽음과 불행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언급된 두가지 비극적 사건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 사건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었습니다.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희생제를 드리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 학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당시 반로마적인 기질이 매우 강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투쟁이든 로마에 대해 강경하게 맞설 태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의 한 형태가 아닌가 라는 추측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해가 될 만한 소지가 많은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들이 당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 너희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으니 조심하라’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다른 한편으로는, 피식민지 백성에 대한 제국의 탄압을 문제 삼기 보다,오히려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난하는 듯한 오해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 대한 부연 설명도 없이 바로 실로암 망루와 관련된 사건으로 대화의 화제를 돌리셨습니다. 이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었습니다.실로암은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한 저수지 이름인데, 예루살렘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다고 합니다. 무너졌다고 하는 탑은 바로 이 두 지역의 경비를 위해서 세워 놓은 것이었습니다.사고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해인지 아니면 부실 공사나 고의적 과실에 의한 인재의 성격인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위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사고였다는 것이지요.

 

지난 주 남아프리카 모잠비크 지역에 사이클론으로 인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할 지라도,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저 언론보도를 통해 스쳐 지나가듯 듣고 잊어버리는 우리들에게 사고는 그저 죽은 사망자의 수와 피해의 정도만 관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갖는 그 비통한 마음마저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자신의 문제로 내면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전히 일부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하지만, 결국 달리 해석하면 당연한 결과라는 판단도 숨어 있는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당시 유대 사회의 상황도 모든 것을 인과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이나 처벌의 근거도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건이 다 원인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의도적인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닌 자연적 재앙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 재앙일수록 그 원인을 죄의 문제와 연관을 시켜서 어떻게든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에 대해 그것만큼 분명하고 쉬운 답도 없었을테니 말이지요. 그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9장 1절 이하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소경이 된 것은 당사자의 죄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라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타날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이지요. 

 

쉽게 말해, 재난을 당하고 삶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하고 나눌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갈릴리의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더 큰 죄인이라 그런 것인 줄 아느냐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따지자면 모두가 다 똑같은데, 그들이 특별히 큰 죄를 범해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죄로 인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실로암 탑 사건의 희생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그들은 당연히 죽을 만한 이유가 있고, 너희는 당연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구별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온 종일 곡기도 끊고 방구석에서 참척의 절망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분을 죽이고 또 죽이며 울분을 토했던 박완서 작가의 마음이 조금씩 변화되었던 계기도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우리를 위해 당신은 독생자까지 주셔야 했는가?”를 묻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늘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더라는 겁니다.자신의 아들이 당연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한번도 묻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지난 몇 해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뒤에, 희생자 가족 중의 한 분이 이런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식을 잃고 생각해 보니, 이전에 대형사고로 인해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마음이 먼저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그 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사고였을 뿐이었는데, 막상 자식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까 그들의 고통이 똑같이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는 것이지요. 막연한 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의 잘못인가 온통 그 원인에만 골몰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회개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지요. 시선이 바뀌고 삶의 방향도 전환되는 겁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이제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일 보듯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해야 할 일을 지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2000년 전 십자가의 사건이 이제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되고, 참척의 고통을 지금도 어디선가 겪고 있을 그들의 문제가 나의 아픔이 되어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형제 자매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울부짖었던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을까요? 

 

Keep going

누가복음13:31-35

 

지금으로보면청년에해당하는나이에예수님은세상과맞서하나님나라의복음을선포하셨습니다. 복음서의여러군데에서도언급되고있는것처럼머리둘곳이없을만큼바쁘게사역을하셔야했지만, 그로인해겪어야할반발과위협은오히려커져만갔습니다(마8:20). 인간적으로생각해보면, 그고충은이루표현할수없을만큼힘들었을겁니다. 겟세마네동산에올라기도하실때에, 제자들에게“내마음이근심에쌓여죽을지경이다”고고백하신것만봐도알수있습니다(막14:34). 물론모든것을아버지의뜻에맡기셨지만, 비켜갈수없는운명을받아들이기위해서인간적고뇌의과정을겪으셨던것이지요.

 

가끔씩자식을키우면서비슷한느낌을가질때가있습니다. 부모의입장에서는어떻게든자식이잘되기를바라는마음으로무엇이든아낌없이주고싶지요. 그래서사랑을듬뿍담아주기도하지만, 때로는강하게질책하며자녀가바로서기를가르쳐주기도합니다. 그런데그때마다자녀로부터받는반발이생기는경우가있습니다. 오히려관계가어색해지기도하고점점멀어지는것같은느낌이들기도하지요. 사실어떤인간관계이든누군가를사랑하려면이런고충은각오해야합니다. 오죽하면바울은사랑의모습을오래참음과인내로표현했을까요? 그만큼힘들다는증거입니다.    

 

그래서사랑은단순한감정의표출이아니라해야만하는당위성을의지로실천해내는것이라고말하는겁니다. 한마디로, 해야하니까해내는것입니다. 왜그렇게해야만하냐고요? 사람이니까, 사람답게사는것이니까그렇습니다. 사람답게사는것이무엇이냐고요? 그것은우리를창조하신하나님의말씀대로사는것이지요. 살아있는생명을아끼며사랑하며살라는것이하나님의뜻이었습니다. 이를위해예수님을참사람의모범으로보내주신것이고요. 그래서예수님도십자가의고뇌를견뎌가며, 끝까지우리를사랑하신것아닙니까?

 

가끔목회를하면서, 처음제가품었던생각을다시떠올릴때가있습니다. 오래전저희어머니가식당을운영하면서음식에대한자신의신념을저에게말씀해주신적이있었습니다. 왜냐하면재료로들어가는비용이너무많이드는데다그정성에비해가격이턱없이낮아서, 제가그이유를물었기때문이었습니다. 장사를통해이윤을잘남기지못하시는것같아노파심이들었던것이지요. 그런데그때제게어머니가이렇게말씀해주시는것이었습니다. 손님들에게파는음식을내놓을때는, 우리가족을먹이기위해만드는심정으로준비하신다고말이지요. 가족들의건강과기쁨을생각하며, 식당에서파는음식도똑같이만들어내놓으신다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소위대박이나서손님이늘어나장사가잘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대중적인입맛에길들여진손님들에게는그다지큰호응을얻지못했습니다. 이미조미료를통해자극적인음식을만들어판매하는식당이일반화된상황속에서, 혼자만의신념만가지고는생각처럼참쉽지않은일인지도모릅니다. 다행히도저희어머니는이에크게개의치않고본인의생각대로음식을지금도같은방식으로만들어식당을운영하고계십니다. 일부소수의단골손님들과말그대로가족처럼식탁을함께나누고있는셈이지요. 여하튼목적은이룬것아닐까요?

 

저는목회도같은맥락에서생각해보곤합니다. 성도님들을대할때, 내피붙이인가족을대하듯사랑을나누는것이좋은목회가아닐까하고말입니다. 말씀을가르치고양육을하는것도마치자녀를대하듯, 그리고내자녀가잘변화되어성장하기를바라는마음으로행해야한다는생각이듭니다. 저는우리아이들이참좋은인생의멘토를만나서삶의극적인변화를경험했으면하는바램이있습니다. 부모가줄수없는인생의의미나목적, 그리고꿈에대한이야기를대신해줄수있는그런좋은멘토말이지요. 아마도모든부모들이갖는똑같은심정이아닐까싶습니다. 마찬가지의입장에서저의목회를되돌아보곤합니다. 그러면제가얼마나부끄러운지모릅니다. 한없이부족한것만이아니라때로는책임을회피하는것이라는죄책감이들기도합니다.

 

그렇다고강하게질책하며가르침을권면하지못한모습을지적한것은아닙니다. 저는제아이들을양육하면서도자율의식을강조해왔습니다. 지난주설교를통해말씀드린것처럼, 스스로반성하는능력이없이외부로부터주입되는생각이나행동은언제나부자연스러운법입니다. 그래서저는여유를가지고기다리는방법을택했습니다. 그런데그게정말더어렵다는것을자주느낄때가많았습니다. 오래참고기다리는것처럼사람을힘들게만드는것도없기때문입니다. 내심자율적이고보다열린신앙을주장하는것이더솔직하고, 내가정말사랑하는가족과같은성도들에게할수있는최선의목회방향이라고스스로생각할때가많았습니다. 적어도진심이었으니까요. 그런데진심이다통할것같은데그게아니더군요. 음식이좋으면손님들로붐빌것같은데, 세상이다자기생각만같은게아닙니다. 현실속교회도그점에서는다를바없는가봅니다.

 

진심이라는게, 서로통할때까지정말참길고도지루한과정을거쳐야한다는사실을깨닫게됩니다. 때로는속상하기도하고, 한계를느끼게만들기도하지요. 그래도내가족이니까, 그리고내자식처럼소중한이들이니까맘대로안될걸알면서도계속하게만드는겁니다. 마종기시인의<우화의강>이라는시에보면이런대목이나옵니다. “사람이사람을만나서로좋아하면 두사람사이에물길이튼다. 한쪽이슬퍼지면친구도가슴이메이고  기뻐서출렁거리면그물살은밝게빛나서 친구의웃음소리가강물의끝에서도들린다. 처음열린물길은짧고어색해서 서로물을보내고자주섞여야겠지만한세상유장한정성의물길이흔할수야없겠지. 넘치지도마르지도않는수려한강물이흔할수야없겠지.” 정말진심이통하고, 서로가족처럼, 때론친구처럼지내기위해세월의인내가필요하다는것이지요.

 

우리개인의삶도이럴진대, 모든인류의죄를위해오셔서짧은시간동안자신의모든것을내어주셔야했던예수님의마음은얼마나힘들었을지말하지않아도짐작이됩니다. 무엇보다사랑의표현을받아들이려하지않았던당시세대의풍조와사람들에게는그저도전과반발만낳을뿐이었으니더힘이드셨을겁니다. 오늘본문을보면, 차라리이곳을떠나라고하는바리새파사람들의우려를볼수있습니다. 물론분봉왕인헤로데의위협때문이기도했지만, 사실은자신들의입장도크게다르지않았던것으로보입니다. 예수님이전한복음의소식은당시지배세력이었던유대의종교지도자들이나정치지배층에게는심각한도전으로받아들여졌기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단순한종교문서를넘어서그자체로하나님의말씀의권위를가지고있던율법을훼손하는듯한언행을일삼는예수님이눈에가시같은존재였을겁니다. 가는곳마다놀라운기적을행하면서예수님의주변에수많은사람들이몰려드는것을보면서정치권도위기감을느꼈을겁니다. 게다가왕중의왕이라불리니, 지배층의입장에서는도저히그대로내버려두기어려운성가신존재로보았을가능성이크지요. 그래서떠나라고조언같은위협을한것이아닌가라는의구심이듭니다.

 

하지만정작예수님을힘들게만든것은지배세력의끊임없는죽음의위협이아니었을지도모릅니다. 오히려하나님의나라, 그기쁜복음의소식을전하고가르쳤음에도불구하고이를깨닫지못하고오히려반발하며대드는우매한사람들과그렇게만든현실상황이아니었을까요? 아무리사랑을베풀어도마음을열지못하는사람들과그들의마음을그토록굳게만든세상의현실이마치변화되지않는벽처럼여겨지지않았을까요? 


그러나예수님의대답은매우단호했습니다. 오늘도내일도그다음날도내길을가겠다는굳은다짐이었습니다. 끝까지이길을가겠다는의지를표명하신것이지요. 이부분을영어번역본에서는“Keep going”이라는표현을사용했는데, 지속적으로주어진소명을이루어나가시겠다는뜻이보다강하게전달이되는것을알수있습니다. 지속적으로행하여나가실길에대해서예수님은귀신을고치고병을치유하는일이라고말씀하셨습니다. 이는예수님이전하시는복음을가로막는시대의가치체계와인간의삶을병들게만드는모든악그리고이를통해고통받는사람들을다대상으로하신말씀이라고볼수있습니다. 복음의성취를위해이러한모든방해세력에끝까지맞서싸우시겠다는결의를다지신것이지요. 

 

러시아의대문호인톨스토이는기독교적세계관을바탕으로많은작품을쓴것으로잘알려져있습니다. 특히그가주목했던생각가운데하나가바로“Keep going”하는삶의끊임없는변화와성장에대한것입니다. 성장한다는것은멈추지아니하고지속적으로변화되는것을의미하는데, 기독교신앙이바로이를강조하고있다는것이지요. 바울의고백처럼날마다자신이죽는경험은결국새롭게되기위한끊임없는변화의과정과다르지않다는뜻입니다. 그래서오늘도내일도, 또그다음날도우리는계속“Keep going”해나갈수있는것이지요. 톨스토이가“죽음을기억하라”고강조한까닭도이와연관이있습니다.   


그는작품을통해죽음을기억하는만큼오늘을소중하게여길수있는방법도없다고역설하였습니다. 죽음을통해현재의매순간이삶의소중한선물로다가올수있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그때비로소삶의변화를받아들일수있으며, 주어진시간을풍요롭게채워나갈수있다는겁니다. 그래서그는영원하다는말도단지시간의길이를뜻하는것이아니라얼마나시간이풍족하게채워지는가의문제로바꾸어생각했던것입니다. 

 

예수께서전하고자한복음의메시지도다르지않다고생각합니다. 오늘도내일도그리고또그다음날도끊임없이그길을계속해서나아가겠다고하신말씀은결국주어진현재의매시간을하나님의뜻을따라풍요롭게채워간다는것을의미하는말씀이라는것이지요.  그러니쉽게포기하거나주저앉지마시기바랍니다. 우리의인생은Keep going 해야합니다. 매순간을주님이주신복음의능력안에서채워나가시기바랍니다. 오늘도내일도그리고또그다음날도그길을쉬지말고가시기바랍니다. 

빛으로 인도하소서

고린도후서 4:1-6

 

지난 주간 세인트루이스에서 연합감리교회 교단특별총회(Special General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총회는 교단의 최고입법기구라 할 수 있는데, 지난 40여년간 동성애와 관련된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감독회의(Council of Bishops)의 제안에 따라 이 문제와 관련된 쟁점 법안만 다루는 특별총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대로, 총회의 결과 연합감리교회는 현 장정(Book of Discipline)의 입장을 고수하여 동성애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미국사회는 동성결혼에 대해 지난 2015년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결 이후 사회문화적인 인식이 이미 옹호하는 추세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특히 대도시 지역과 젊은층 사이에서는 더이상 LGBTQI라 불리는 성적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매우 개방적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East-Bay 지역만 하더라도, 만일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언행을 취한다면 곤란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자녀세대들은 이에 대한 논쟁 자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지 모릅니다.그만큼 인식의 기준과 폭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에서의 인식이 전면 개방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과 달리,교회는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의 율법은 동성간의 성적 행위에 대해 엄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장 27절의 말씀을 통해 응당한 처벌을 받을 부끄러운 죄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질문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의 문자적 이해만을 가지고 실제 문제에 그대로 말씀의 적용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만일 구약의 유대 율법 규정을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그대로 적용시키다 보면 우리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둘째는 ‘성경이 말하는 죄 가운데 유독 동성애와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동성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동성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와 추악한 탐욕 그리고 악을 도모하는 모든 행위가 응당 다 처벌을 받아야 할 죄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질문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의문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지요.

 

그럴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기독교의 가르침이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구두로 직접 전해 주신 것 뿐만 아니라 보여주신 행동 그리고 그 이면에 담긴 숨은 메시지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될 수도 있을만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묻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속셈이지요.이 부분을 읽다 보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두가지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시험하듯 묻는 바로 그 속셈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사실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별짓는 것인데, 이것은 언제나 소외된 이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논쟁 자체 보다 구별이 목적이 되면 대개 남는 것은 갈등과 상처 뿐이 될 가능성이 높지요. 

 

사람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또 다른 속성은 율법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도 있는 폭력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가해 행위 뿐만 아니라 시선이나 말로도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다른 이로부터 받게 될 상처에 대한 공포감은 인간을 언제나 궁지로 몰고가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폭력적인 위협에 결코 굴하지 않으셨지요.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예수님의 대답은 죄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지요.그러니 똑같은 죄인인 우리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칫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문제 삼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간음이 물론 율법에 어긋난 죄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크고 작은 죄에 대해서 그들도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그럼 모든 죄를 묵인하라는 것이냐며 항의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그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잊지 않으신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빛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한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힘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지요.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아는 능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어도, 지식의 빛이 없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바로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빛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도 나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사도바울은 이를 지혜의 빛이라고 하여 이 빛이 우리 마음과 이성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예컨대, 캄캄한 동굴에 빛이 들어오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빛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건 빛에 의해 반사된 것을 우리의 눈이 감지한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의 여러 현상을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떤 사회 현상을 인식할 때도 우린 어떠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그대로만 가지고 판단을 해서는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 때 신앙인은 어떤 인식을 하는가 하면, 주어진 지혜의 빛,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현상을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곧 지혜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막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해공작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방해는 세상의 탐욕적인 가치와 세력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정작 무섭게 만드는 두려운 적은 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빛을  선포하셨지만, 이를 가장 심하게 거부한 이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지혜의 빛을 막는 가장 큰 방해세력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빛은 유대의 복잡한 율법에 비해 매우 단순했습니다.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았으니 그저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을 주시며 이를 실천하는 길을 가르쳐 주셨지요. 바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죄인들과 세리와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스스로를 빛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진리가 자기로부터 나온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사랑이 아닌 폭력이었고, 평화가 아닌 갈등과 분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아니 우리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평화와 화해의 시대 보다 갈등과 분열로 고통받았던 기억이 더 크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어쩌면 스스로를 빛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했던 잘못된 인식이 만든 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지난 특별총회의 현장에서 모든 진행과정을 지켜 보며,매우 가슴 아픈 오늘 교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나뉜 것은 단지 투표수 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상을 보는 인식만큼 서로의 마음도 갈라져 있었습니다.같은 공간에서 두 쪽으로 쪼개져 똑같은 하나님을 향해 서로 다른 찬양을 부른 상황을 바라보며, 과연 오늘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치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 조국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특별히 금번 총회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교단의 대표자들은 소위 전통주의 모델을 교회의 공식적 인식과 입장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회에서 선택된 전통주의 모델은 단순히 동성애와 관련된 인식이나 입장을 정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징벌적 조항까지 덧붙인 수정 법안이었습니다.이제 앞으로 교단 사법위원회의 합헌 결정만 나오면, 여러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처벌이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분쟁과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최선의 길인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지혜의 빛이라도 된 것처럼 자기의 입장만 주장하는 이 세대에, 주님의 말씀이 빛이 되어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뿐입니다.   

 

개판 오분 전

누가복음 6: 20-26

 

행복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불현듯 떠오른 질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딸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 아이에게 네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사실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도 갖게 해서 자기 하는 일에도 좀 더 집중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심이 좀 있었던 것이지요.그런데 아이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이 기뻐하거나 만족해 하는 것을 보면 행복해 진다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고, 또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꿈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고, 다시 그 목표에 대한 성취를 위해 결국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틀에 박힌 강박관념으로 돌아가 버리는 대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지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저에게 거꾸로 딸아이가 갑자기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물을 땐 몰랐는데, 막상 대답하려 하니까 참 막연하고 말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설교나 강의를 하면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정작 내 자신에게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스스로 물어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게 행복은 무엇이었던가? 언제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고 확신을 갖는 것일까? 때론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추상적인 행복감을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와 실제 살면서 느끼는 만족이나 확신의 대상이 다르지는 않았는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통해 자기 만족감을 얻고 있으며,어디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면 아마 자기가 가진 행복의 실체가 조금은 드러날 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고 보니까 목회도 자기만족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본질과는 별개의 성공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며 살았던 이면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으로 세상에 소신 있는 자녀를 키우자고 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경쟁에서 앞서가기를 바라는 쿨하지 못한 아빠였는지도 모릅니다.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눈으로 아이의 시선도 바꾸어 버리려 했던 것이지요. 속내가 들어나니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여든이 넘도록 평생 물질로 살아온 한 할머니 해녀에게 리포터가 묻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것 같은데 왜 사용 안하세요?” 그러자 할머니도 그걸 사용하면 한 사람이100명 몫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노라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리포터가 “그런데 왜 안 하세요?”라고 되묻자, 돌아 온 답은 바로 “그렇게 하면 나머지99명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에게 행복의 기준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던 것이지요.

 

황동규 시인의 시 가운데, “꿈, 견디기 힘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거기에 보면 꿈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가는 삶의 전부”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해녀 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의 눈에 요즘 많은 현대인들은 불행한 것처럼 보일 지도 모릅니다. 기껏 인생의 꿈을 신분증에 다 들어간다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신분증이 곧 자기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오직 신분증을 얻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고 심지어는 옳은 것이라 여겨서 다음 세대에게까지 강요하며 대물림하려는 오늘의 세상을 과연 행복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 본문 말씀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으려니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개념이 마치 폭탄선언처럼 짜릿하게 들려올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세속적 가치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도전이 될 만큼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꾸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종이 아기 예수를 일컬어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는 비방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예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비방 받는 표징이란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가르침으로 어떤 이들은 넘어지게 만들고, 반대로 믿음을 가지고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일으켜 세우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현실에서는 그처럼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뜻이지요.흔히 팔복이라 말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행복한 이로 표현한 사람의 눈에 세상은 불행한 모습인 반면, 불행하다고 말한 사람의 눈에 세상처럼 행복한 곳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볼까요? 한 구절만 읽어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갖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가난하고 주린 자가 행복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 발 물러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100여년 전 미국의 교계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가 있었습니다. 개인의 영적 구원의 문제에 매달리던 교회가 세상에서의 소명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가난이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태도 그리고 능력의 문제로 간주되던 시절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난도 대물림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조차 안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한 결과이지요. 그래서 사회복음을 주창하던 이들 가운데는 교회가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며 개탄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였다는 것이지요. 하늘의 복을 구하며 모여든 가난한 이들 말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하여 불행을 맛보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주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던 사람들이 모여든 곳. 그곳이 바로 교회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빈자들의 교회가 빈자들을 위한 교회로 둔갑해 버렸다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의 모임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발전으로 번영을 누리는 사회에서 굳이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사회와 다름없이 계층화 되어 가는 현상을 지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지요.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면서 그저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일종의 만족감을 얻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교회가 이와 비슷한 현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그것은 홈리스가 교회에 들어와 함께 예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매우 극단적인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인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늘의 복이 아닌 세상에서의 행복 추구가 신앙의 대전제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서의 성공과 안락이 믿음의 목표가 되어버린 지금,어쩌면 우리도 그것을 기준으로 믿음을 평가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염려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본문 24절은 이런 우려를 갖고 살아가는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요한 사람들은 이미 너희가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영원한 생명을 통해 구원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흔히 인생을 불꽃처럼 한순간에 비유하는데, 잠시의 쾌락과 편리를 위해 영원한 소망을 포기하며 살 것인지를 되묻는 말씀입니다.물론 이것이 현실에서는 어떠한 행복도 찾을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떤 행복을 구하며 살 것인가의 선택에 관한 질문인 것이지요. 저 역시 설교를 써 내려가면서 제 딸 아이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제게 질문했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딸의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우리 아이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오늘의 설교 제목을 보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개판 오분 전”이라는 속어를 써서 불경스럽게 여기는 분들도 계시겠지요.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개판'의'개'는 개(犬)가 아니라 한자로 열릴 개(開)자를 뜻하는 말입니다.한국 전쟁 당시, 전쟁의 위협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그 때 피난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밥을 배식했다고 하지요. 배식을 담당한 사람은 밥이 다 지어지기5분 전이 되면 “개판 오분전”이라는 말을 외쳐서 식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즉 개판 오분전은 밥을 짓고 있는 솥의 나무판을 열기5분 전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는 겁니다.전쟁의 한 가운데,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쁨의 소식이었던 셈이지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의 의미 보다 민족의 아픔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씩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북새통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서 벌이는 또다른 전쟁터 같은 모습입니다. 개판 오분 전에 남보다 먼저 앞서서 기회를 놓치 않으려 벌이는 나만의 긴박한 싸움터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무엇을 얻은 것인가요? 정말 행복하신가요? 어쩌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여러분의 삶에 다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이 보다 더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기다려 왔던 개판의 목적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지금 먹고 돌아서면 또 허기져서 갈급해 하는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새로운 세상이 열려서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복된 그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지금이 바로 그 판이 열리기 5분전인 것처럼,오늘도 행복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