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꺼기를 버리고

마가복음 8: 27-30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라는 지역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매우 난감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시 그의 행적과 말씀에 대해 들어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그들에게 한가지 도전이 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보이는 모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하신 부분은 그들이 보는 시선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선의 기준이 다른 것이지요.내가 보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눈을 빌어서 보는 것인지의 차이라는 겁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 이라고 대답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요. 당시의 유대 사회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쁜 평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는 칭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시선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지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한마디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뛰어난 영적 스승의 지위로만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고백한 겁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주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지요.비슷한 고백을 사도 바울도 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얻은 뒤 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무엇이 변화되었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살기를 띠고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해 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환한 빛에 잠시 눈을 잃었다가,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의 안수를 받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시력을 회복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주님을 만난 뒤,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를 바로 시선의 변화에서 찾은 것이지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 새로운 시선의 변화. 그것을 바울은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물으시는 질문, 곧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대답하시려고 합니까?지금은 그 때와는 세상이 사뭇 달라졌으니, 다른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비교하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랫동안 교회 생활 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으니, 근사한 다른 표현들을 찾으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러분의 시선입니다.여러분이 보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결국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의외로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한국 장년층들은 이런 주관식 질문에 익숙하지 않아서,자기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기준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한 책을 읽다가 거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오래 전 우리나라의 의학박사 한 분이 세계 최초로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상용화시키는 데에는 미국과 프랑스 다음으로 밀렸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백신을 다 만들어놓고도 우리나라 주무부서인 보건사회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허가를 줄 인증 기준이 우리나라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정말 한국 관료사회는 못말린다고 늦은 대처에 실망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외부에서 기준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상황에서, 우리만의 기준을 만든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회의 많은 부분들에서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학문의 영역에서도 외국에 나가 훌륭한 이론이나 연구들을 배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에는 익숙해 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적용은 하는데, 우리의 고유한 이론적 기준을 만드는 것은 왠지 주저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 가운데 하나가 똑같은 옷 차림새입니다. 저는 지금 20년 가까이 이 지역에서만 살고 있는데, 여태 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도 그렇겠지만, 누구를 따라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패션에 대한 기준이 다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보면 특정한 브랜드의 제품이 하나 유행했다 하면 온 국민의 유니폼이 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단결도 잘한다고 이런 성향들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기만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그만큼 큰 사회적 손실도 없을 겁니다. 이런 풍토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고전인 <장자> “천도편”에 보면 윤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과 제나라 왕인 환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어느날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던 윤편이 환공에게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며 질문합니다. 그러자 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다시 윤편이 묻습니다. “그 성인이 지금도 살아있습니까?” 환공이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대답을 하자, 바로 윤편이 대답하지요.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찌꺼기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윤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규격이나 치수가 정확하지 않던 시기라 수레바퀴를 만들 때 축에 깎아서 끼우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느슨해도 안되고 너무 빡빡해도 안되니, 더도 덜도 말고 적당히 깍아서 맞추어야만 했습니다.그러니 믿을 것은 자신의 손 감각 말고는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로는 전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왕이 읽고 있던 성인의 말이라는 것. 그건 분명 인생에 참 중요한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 내게도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그래서 찌꺼기라고 불렀던 겁니다. 사실 찌꺼기는 한자어로 “조백(糟魄)”이라고 해서 술 찌꺼기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그러니까 먹으면 술맛이 나긴 해도 진짜 술은 아닌 것을 일컫는 말인 셈입니다. 결국 윤편이 왕에게 성인의 글이 찌꺼기라고 한 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읽으며 마치 자기가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현대 사회에 커다란 반향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가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도전을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혹여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또 신앙생활하면서 여러가지 듣고 한 것을 통해 마치 진짜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겁니다. 어쩌면 시선의 변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찌꺼기를 진짜처럼 착각하고 따르던 신앙은 아니었는지요?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진짜 제자라도 된 것 같아서, 자신은 고고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던 모습은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어 보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기준은 세상이 가르쳐 준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말한 그대로 따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시선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찌꺼기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물으시는 진짜 질문의 의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내 삶의 기준이 진정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고백을 행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선의 변화를 통해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곱게늙자!

마가복음7:31-37

 많은성도님들로부터자주듣는말가운데하나가바로“믿음이무엇인가?”라는질문입니다. 그도그럴것이그리스도인이라면결국믿음을갖는다는것인데, 그믿음이라는것에대한정의가말처럼쉽지않아서많은이들이어려움을겪고있는것이사실입니다. 저역시수많은설교를통해서믿는다는것이결국무엇을의미하는가에대해이야기하면서도, 정작한두마디로정의내린다는게참쉽지않다는것을종종경험하곤합니다. 

물론예전에는믿음이뭐냐고물으면, 뭘묻느냐고그냥믿으면된다고하는이야기를들을때도많았습니다. 참아이러니죠. 믿는게뭔지몰라서묻는데그냥믿으라니말입니다. 살아가면서그와비슷한질문들이생겨나는것을다들경험해보셨을겁니다. 사춘기가지나면서는도대체사랑이란게궁금해서견딜수가없었던때가있었습니다. 소설이나시를통해사랑이라고하는말을들으면알것도같고, 가슴에무언가감동을주는것도같은데정작사랑이뭐냐고물으면금새꿀먹은벙어리처럼되곤했습니다. 누구에게물어보면조그만게까져가지고별걸다묻는다는핀잔을받기일쑤였습니다. 

 나이를조금먹다보니까인생이뭔지, 사는게뭔지궁금해지기시작합니다. 그래서나이드신분들께인생이뭐냐고물으면돌아오는답은여전히크게다르지않습니다. 사는게뭔지알수없으니, 묻지말고그냥살라고말이지요. 한마디로알수없다는겁니다. 철학에서는이렇게아무리애를써도완전히알기어려운것을가리켜“부조리”라는개념을사용합니다. 사랑이나인생이나알듯모를듯해서모순으로가득차이해하기난해한부조리의대상이라는것이지요.

 그래서부조리한인간에게필요한것이공부라는생각이듭니다. 어떻게든알려고부딪쳐보는것이지요. 공부는관성처럼본능대로사는게아니라그걸이겨내려는힘입니다. 저도그냥본능대로주어진것따라사는게싫어서공부하기시작했습니다. 그리고공부를통해아이러니하게도믿음에대한하나의정의를얻게되었습니다. 믿음이사실은공부하는것이라는사실입니다. 공부를중국말로읽으면“쿵푸”라고한이야기를들으신적이있을겁니다. 쿵푸는관성을이겨내는훈련입니다. 본성에이끌려저절로사는게아니라그것을이겨내려는부단한노력과힘이요구되는것이바로쿵푸의기본입니다.

 같은맥락에서믿음을이렇게정의내릴수있습니다. 바로본능에이끌려그냥살아가는것이아니라육신의유혹을이기기위해끊임없이공부하는것이라고말이지요. 중요한건어떻게공부하냐는것이겠지요? 이를잘보여주는성경의말씀이하나있습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에나오는사도바울의고백입니다. 

 “나는그리스도와함께십자가에못박혔습니다. 이제살고있는것은내가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내안에서살고계십니다. 내가지금육신안에서살고있는삶은, 나를사랑하셔서나를위하여자기몸을내어주신하나님의아들을믿는믿음안에서살아가는것입니다” 

 결국믿음이란공부는날마다자신을버리는연습이라는겁니다. 그런의미에서인생도하늘나라가기위해버리는연습을하는것이고, 사랑도그러한인생을살기위해자신을버리는연습이라할수있습니다. 놀라운사실은자신을버리면그때부터그리스도가내안에서나를위해일하신다는겁니다. 그러니믿음이면족한것이지요. 그분이내안에서나를위해사신다니그것만큼감사한일이또어디있습니까? 사랑이신그분이내안에계시고, 영원한생명이신그분과함께사는것이니인생의의미도달라질것아니겠습니까?

 그러니믿음으로사랑하며산다는것은한마디로자신을버리는연습을하는공부라고정의내릴수있습니다. 사실은이것이인생을가장행복하게만드는지름길이라는것이지요. 그런데막상살다보면그게말처럼쉽지않다는걸피부로느끼게됩니다. 그래서제가젊은이들에게신앙훈련을하며항상이야기하는하나의모토가있습니다. 바로“곱게늙자!”는구호입니다. 이것은외면적인모습을두고하는말이아닙니다. 흔히나이를먹어가면서잘버려지지않는것중의하나가사실은자기자신이라는점에놀라게될때가많습니다. 

 믿음으로사는것이결국은자신을버리는연습이라고했는데, 실제인생은그반대로사는경우가많다는것이지요. 저도요즘들어애들에게점점잔소리가부쩍늘었다는것을느끼곤합니다.  이걸깨달았다는건그래도아직상태가양호하다는증거입니다. 하지만안좋은신호가나타나는게, 남의얘기를잘귀담아들으려하지않는다는겁니다. 더군다나저에대해조금이라도부정적인이야기같으면, 듣기보다자신을방어하기위한변명을늘어놓거나상대방의주장을강하게누르고싶은욕망이생겨날때도있습니다. 

 요즘젊은이들이이렇게남의말은잘안듣고자기말만줄곧하려는어른들을비꼬아“꼰대”라고부릅니다. 믿음생활도잘못하면영적으로비뚫어진꼰대가될수있습니다. 자기를버리는연습을하지않으면그렇게된다는것이지요. 그래서평생믿음공부해야하는겁니다. 그것이바로곱게늙는방법입니다. 다시말해영적으로영원한생명을얻는길이기때문이라는것입니다. 

 저는같은맥락에서오늘본문의말씀에접근해보고자합니다. 본문의내용은갈릴리호수에도착한예수께서귀먹고말더듬는사람을만나그의문제를해결해주셨다는이야기를전하고있습니다. 그런데흥미로운점은예수님이그를치유하실때, 행하신말씀입니다. 예수님은직접자신의손가락을그의귀에다넣고침을뱉어그의혀를만져주고나서는하늘을우러러"에바다"하고탄식을하셨다고합니다. 우리말로'열려라' 하고외치신것이지요. 

 도대체무엇이열려야한다는뜻으로그런말씀을하신걸까요? 한가지단서가되는말씀을이사야서35장에서찾아볼수있습니다. 이사야는앞으로세상을구원할메시야가오시면소경이눈을떠서보게하고, 귀머거리가귀가열려서듣게하고, 벙어리가혀가풀려노래를하게될것이라는예언을한바있습니다. 그것이바로하나님의구원이성취되는증거라는선포와함께말이지요. 이를본문의말씀에적용하면, 결국예수님의치유사건은단순히질병을고치신기적의이야기가아니라, 자신이세상을구원할메시아라는사실을알리기위한선포였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그런데이를적나라하게밝히기위해그렇게말하셨다고하기에는어딘가미심쩍은부분이있습니다. 왜냐하면치유의기적뒤에사람들에게아무에게도알리지말라하셨기때문입니다. 결국은말하지않아도다알게될사실이었다는겁니다.

 그래서저는다른관점에서해석하는것이더수긍이갑니다. 그것은마가복음7장의전체맥락에서예수님의의도를이해하는방식입니다. 사실7장전체의말씀은복음이이방세계로넘어가면서발생한사건들을기록하고있습니다. 그런데유대인들가운데많은사람들은여전히유대밖세상을이방인으로배척하고있는것처럼보입니다. 그것은초대교회의유대계그리스도인들도크게다르지않았습니다. 자신의과거전통에서얽매여벗어나지못한결과입니다. 한마디로자기를버리는연습을게을리한것이지요. 

 그모습이마치귀먹은척, 앞못보고말할줄모르는것같아보였던겁니다. 남의말듣고도안들리는것같이행동하고, 뻔히도움을필요로하는사람들을보면서도못본체하고, 전하라는복음도입을막고말하지않았던것이지요. 영적인꼰대들이되어버린겁니다. 사실은그들의입과귀가아니라마음이꽉막혀있었던셈이지요. 그런의미에서주님이에바다, “열어놓으라”고탄식하신것은바로그들을향해던진말씀이었던것이라이해할수있습니다. 영적으로온통막혀버린꼰대같은이들에게, 제발“곱게늙자”고탄식하신것이지요. 

 사랑하는열린교회성도여러분, 주님의명령대로우리의믿음생활이날마다자기를버리는연습이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 진정으로사랑하며사는공부를게을리하지않는겁니다. 그래서영적으로변함없이영원한젊음을누리는그리스도의자녀들이되시기를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날마다자신을버리는연습을행하는저와여러분모두가될수있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합니다.

보자기의 신앙

마가복음7:1-8

 지금은사라진풍경이기는하지만, 오래전물자가부족하던때에책가방이아닌보자기에책을싸서어깨에졸라메고학교를다니던시절이있었습니다. 흔히“책보”라고불리던것이었지요. 네살이많은누나가처음학교갈때, 그걸메고가던모습이참신기하고부러웠던생각이떠오릅니다. 얼마안가책가방을선물로받은뒤에는더이상그모습을볼수가없었습니다. 더이상책보를메고다니는‘시골뜨기’를현실에서는보지못하게된것이지요. 

 희한한게책가방이나책보나머릿속에는언제나똑같이네모난모양으로만기억된다는것입니다. 네모난책과필통을싸놓아서그런지책보의생김새는늘네모나보였습니다. 그런데책보를풀어서책을다꺼내놓으면그저평범한한장의보자기로돌아가버립니다. 더이상책보의모습은어디에서도찾을수가없습니다. 아무리속에있는물건을꺼내도속빈네모형상이변함없는책가방과는완전히다른모습인것이지요.

 그러고보면보자기는언제나무엇을싸느냐에따라그모습이달라진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떡을싸면떡모양의떡보자기가되고, 옷을싸면둥그스레나온옷보자기가 됩니다. 예전에흔히보던다방아가씨의손에들려있던커피보자기는누가보더라도그안에무엇이있는지짐작할수있는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싸맨보자기를푸는순간보자기는원래의모습으로되돌아가고, 마치어떤특정한모습을띤것같았던이전의형태는사라져버리지요.

 형태만이아니라보자기안에무엇이들어있느냐에따라주는느낌이달라지기도합니다. 요즘도한국법원에서는관련서류들을보자기에싸서가는경우가많다고합니다. 법복을입은판사의손에들린보자기는실제종이무게와상관없이중압감을줍니다. 반면에결혼식을앞두고신부집에보내는패물함을싼보자기는모두를궁금하게만드는힘이있습니다. 값어치가얼마나나갈지모르지만, 그누구도그보자기를풀때의묘미를잊지못할겁니다.

 하지만대부분의사람들이그보자기자체를귀하게여기는경우는드뭅니다. 더군다나보자기가헤지거나볼품없이생긴경우에는더더욱그렇습니다. 겉만보고판단한다면보자기는참보잘것없는취급을받을가능성이높습니다. 실제로제결혼식을앞두고저희어머니가저혼자살던자취방에귀한금붙이하나를들고오신일이있었습니다. 그것으로결혼예물준비를하려고큰맘먹고가져오신귀중품이었습니다. 그런데싸가지고오시면서일부러낡은보자기로적당히휘감아서, 마치값나가지않는물품하나를대충덮어놓은것처럼보이도록하셨다고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집앞에다와서택시에서내리며계산을하는통에가져온보자기를골목길입구에내려놓고그냥들어오신것이었습니다. 얼마의시간이지나도록새까맣게그사실을잊고있다가, 너무나놀라서황급히어머니는신발도제대로신지못하고길가로뛰어나가셨습니다. 다행히도그때까지낡은보자기에싸인금붙이는그대로거기에있었습니다. 아마도낡은보자기안에귀중품이있으리라고아무도상상하지못했던까닭이겠지요.  

 이처럼보자기는그자체로값어치를매기거나형태를이야기하기보다무언가를싸맬때, 그용도와가치, 그리고형태가드러난다는특징이있습니다. 그렇다고보자기자체로그가치를말하기어렵다는뜻은아닙니다. 왜냐하면보자기가갖는유용함은누가뭐래도분명하니까말입니다. 무엇이든싸맬수있는유연함은보자기만이가진특별한능력이라고할수있을겁니다. 작은구슬뭉치에서부터파마하고난여자의머리그리고 커다란자동차까지크기만된다면보자기로싸지못할것은아무것도없기때문입니다.

 제가오늘보자기에대해이렇게장황하게늘어놓는까닭은보자기의장점처럼우리의신앙도그렇게닮아가면좋겠다는생각때문입니다.   마가가전하는오늘의복음서말씀은유대의정결예법과관련하여일어난한사건에관한것입니다. 바리새파사람과몇명의율법학자들이예수께와서, 제자들이손을씻지않고음식을먹은것에대해항의를합니다. 유대인이장로들의전통을어기고부정한손으로먹었으니문제가있다는것이지요. 그러자예수께서하나님의계명을따르는것이아니라사람의전통을고수하는그들이야말로위선자라며오히려그들을나무라신것이바로마가가전하는오늘말씀의내용입니다. 

 이부분을보다명확하게이해하기위해서는먼저유대의율법학자들이강조한장로들의전통과예수께서말씀하신하나님의계명이어떠한차이가있는가를알필요가있습니다. 본래유대인들에게율법이란두가지의미를갖고있었습니다. 하나는출애굽의과정에서하나님이모세에게주셨다는십계명입니다. 다른하나는흔히모세오경이라부르는구약성경의처음다섯권을말합니다. 그런데이둘은모두하나님의뜻에따라지켜야할법도를이야기는하고있지만, 결국세부적인삶의다양한부분에대해서는개인이해석해서적용해야하는도덕적원리만을제공하고있을뿐입니다. 예컨대, 오늘날스마트폰을어떻게사용해야하는가와같은질문은성경을아무리뒤져도나올리만무합니다. 그러니성경이가르쳐주는원리를가지고적용하여해석할수밖에없다는것이지요.

 그래서감리교의창시자인웨슬리가성경을이해하기위해서전통과체험, 그리고이성을강조한까닭도이와연관이있다고할수있습니다. 거룩한하나님의말씀이삶의방향을제시해주고는있지만, 그것만가지고세상의모든일들을그대로적용시키기는어렵기때문입니다. 그래서웨슬리는판례처럼교회의오랜전통속에서말씀을어떻게이해할것인가의방법을얻거나, 개인적인체험속에서말씀이전하는방향을깨달을수도있고, 합리적인이성의추론을통해말씀을적용할수있는판단력을갖게될수있다고보았던것입니다. 물론성경이모든것의중심이라는사실은분명하지만, 이네가지신학적기준, 곧성경, 전통, 체험, 이성을통해하나님의가르침을현실속에서제대로실천하며살아갈수있다고웨슬리는주장했던겁니다.

 그런의미에서유대의율법도도덕적원리를제공하는원천(resource)의역할만을가지고있었을뿐입니다. 하지만사람들은여기에만족하지못했습니다. 보다분명하게적용시킬수있는기준을얻고싶었던것이지요.  그래서주전4-5세기부터서기관으로알려진율법전문가들이등장하기시작합니다. 그들은커다란도덕적대원리에만족하지않고, 이를실제삶에적용하여하나하나규칙들을써내려갔습니다. 엄청난분량의세부규칙과규정들을만들어낸것입니다. 이렇게해서오랫동안전해진내용이바로“장로들의전통”이라고불리던구전율법입니다.

 그중의하나가본문에기록된손을씻는행위에관한것이었습니다. 이것은단순히위생적인이유때문이아니라의례적인정결문제와관련된것이었습니다. 그래야거룩한일이라고생각했다는것이지요. 실제로당시장로들의전통에따르면, 모든식사전과요리가바뀔때마다일정한순서에따라손을씻도록되어있었다고합니다.   만일이를지키지않으면부정한일이기때문에악령이침범할수있다고믿었다는겁니다. 나아가유대교회에서파면을당할수도있는엄중한위반이기도했습니다. 실제로어떤유대의율법학자는로마의감옥에투옥되었을때주어진물을마시지않고손을씻는데사용하다가갈증으로죽음에이르기까지했다는이야기가있습니다. 손을씻는의식이그들에게얼마나종교적의미가강했는지를보여주는사례라할수있습니다.

 예수께서위선이라고보았던것은바로이를두고하신말씀입니다. 위선은다른말로표현하자면앞뒤가다른모습입니다. 일치하지않는다는것이지요. 목적과수단이다를때도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아름답게만들자면서하는일은참추하다싶은일을하게되면그야말로위선이아닐수없습니다. 하나님의가르침을지킨다면서결국그에합당한행동을하지못하면그야말로위선적인신앙이라할수있을겁니다. 주여! 주여! 그의이름은잘도외치면서, 하나님의뜻대로행하지않는자는천국에갈수없다는예수님의말씀도이를두고하신것이지요.

 하나님의계명과장로들의전통사이에괴리가생기면이런위선적신앙이발생한다는겁니다. 그렇다고전통을무시한다는뜻이아닙니다. 우선되어야할것을분명하게하라는말씀인겁니다. 하나님의계명이있고난뒤에전통도의미가있는것이지요. 사랑이라는대명제가늘우선되어야하는까닭이여기에있습니다. 그래서신앙도본질적인것은잘지키고자노력해야하지만, 비본질적인것에는좀더자유함을얻을필요가있습니다. 그리고무엇보다그모든것을행할때는사랑으로바라볼수있는마음이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의말처럼사랑이없으면, 그건아무소용도없는일이될테니말입니다.

 그런의미에서오늘우리에게필요한신앙이보자기같은모습이었으면좋겠다는생각이듭니다. 그자체로는별것아닌것같아보이지만, 모든것을감싸안을수있는보자기의신앙말입니다. 그래서누군가를보듬어안아주고, 그상처를싸매어줄수도있을것같은신앙, 그것이오늘우리에게필요한진정한그리스도인의모습이아닐까요? 더불어자기의모양이아니라남을감싸안을때자신의모습을드러내는것처럼, 자신을남에게맞추어줄수있는이타적사랑의신앙이오늘우리에게필요한모습이아닐까요? 

 네모난상자처럼자기안에모든것을쑤셔넣고맞추려고하는각박한오늘의삶속에서, 하나님의교회가그리고그리스도의자녀들이사랑과정감이묻어나는보자기같은신앙을펼쳐서, 이세상을감싸안을수있게되기를간절한마음으로기도해봅니다.   

 

  

  

살림의 기적

요한복음6:53-58

요한이전하는예수님의말씀은바로생명의빵인자신의육신과피를먹을때, 영원한생명을얻을수  있다는메시지로요약할수있습니다. 성서일과에의해말씀을전하다보니, 오늘까지연속해서3주동안똑같은내용을전하는것같은느낌이듭니다. 두주전에는생명의빵과썩어없어질빵을구별하면서성만찬의의미를함께나누었습니다. 지난주에는생명의빵이가진특징을전하면서, 그빵을먹기위한방법이무엇인가하는것을믿음이라는관점에서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생명의빵에대한강조는지난두주와크게달라진것은없습니다. 다만56절에서언급된것처럼생명의빵이신그리스도예수의‘살을먹고그피를마시는사람은내안에있고, 나도그안에있다’는말씀에집중하여그의미를여러분과함께나누어보고자합니다.

먼저53절의말씀에대한질문으로부터시작하려고합니다. 예수님의말씀은‘인자의살을먹지아니하고그피를마시지아니하면너희속에생명이없다’고하셨습니다. 왜예수께서는인자의살과피를먹어야만생명이있다고말씀하신걸까요? 우리가배우기로는하나님의말씀으로세상을창조하셨고, 사람은흙으로빚으신뒤에코에생기를불어넣어주셔서살아있는영적인존재가된것이아니었던가요? 그런데하나님의아들, 곧인자인예수님은왜자신의살과피를통해서만생명이있다고말씀하신걸까요?

사실53절을보면, 이말씀을통해예수님은생명에대한새로운정의를내리고있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곧, 생명은인자의살과피를먹었는가, 그여부에달린문제라는것이지요. 예수님의생명에대한정의를그대로따르면, 지금우리가살고있는것은우리가이미그리스도의살을먹고피를마셨기때문이라고볼수있습니다. 생명의빵이신그리스도를취했기때문에살고있다는것이지요. 물론이것은이미두주동안이야기한대로영적인생명에대한이야기입니다. 지구라는이땅덩어리위에는지금도그리스도를받아들이지않고서살아가는수많은사람들이존재하고있습니다. 육의존재로는분명히생명의빵이없이도살아갈수있다는말입니다. 그러니까예수께서생명의빵을취해서살수있다고정의내리신생명은말그대로영적인생명을뜻하는말씀이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

여기서우리는생명에대한예수님의정의와관련해서흥미로운사실을하나발견하게됩니다. 하나님은인간을만드시면서자신의생기를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것은바로하나님의숨이었습니다. 흙으로빚은육체가있어도, 그숨이없으면인간은살수가없습니다. 숨이들고나는반복적인과정이멈추어버리는순간, 인간은육체가있어도생명을잃어버린존재가되어버리는것이지요. 결국우리몸은하나님의‘숨’을먹고마시며산다는뜻입니다. 예수께서자신의살과피를먹고마시라하신것을그대로하나님의말씀에대입해보면, 결국인자의살과피가하나님의숨과같은뜻으로하신말씀이라는결론을얻게됩니다. 생명의빵이바로하나님의숨이었다는말씀입니다. 요한은이미예수를하나님의말씀이육신이되어온분이라고소개한바있습니다(요1:14). 또생명을빛이라하면서, 예수님을참빛으로표현하기도했습니다. 55절에서예수님의살과피를참양식과참음료로선포한것처럼말입니다. 그러니생명의빵을하나님의숨이보이고만질수있는형태로주어진것이라한들큰문제는없을지도모르겠습니다. 하나의비유적표현으로보면말이지요.

하지만예수께서자신의살과피를통해살수있다고하신말씀은단순히비유적표현에그치는말씀이아니었습니다. 실제로삶의궁극적인목적이무엇이되어야하는지를분명하게제시하고자했다는뜻입니다. 밥을먹으면밥으로말미암아살아가듯이, 예수님의살과피를먹고마시면예수님으로말미암아살아갈수있어야합니다. 57절에서예수님은“내가아버지때문에사는것과같이너희도나로인해살것”이라고하셨는데, 같은뜻으로이해할수있는말씀입니다. 예수께서육신의몸을입고이땅가운데사신것은오직하나님의뜻이었습니다. 그래서아버지의말씀으로세상을사신것이라하신겁니다. 그러니그리스도의자녀들도이제예수님이가르쳐주신하늘의말씀을따라살아가라고명령하신것이지요. 우리의몸이밥을먹고생명을유지하지만, 궁극적으로숨이끊어지면아무소용이없는것처럼, 예수님으로말미암아사는것이얼마나중요한가를강조하신말씀이었던겁니다.

그렇게될때비로소‘너희가내안에, 너가너희안에있는” 상태가될수있다는것입니다. 사실자주듣는말이기는한데어쩐지어색하기도하고참오묘한느낌을갖게만드는말씀이아닐수없습니다. 물론주님과하나가되는상태라고이론적으로정의내릴수있습니다. 그러나주님과하나가된다는것은오해를낳을수있을뿐만아니라(자기가하나님이되었다는착각), 구체적으로하나가되는상태를어떻게실현할수있을지에대해서는말하기가쉽지않기때문입니다. 그래서이구절을보다현실적으로이해하는데도움이될만한철학개념하나를소개하려고합니다. 프랑스철학자인가브리엘마르셀의‘상호주관적매듭’이라는개념입니다. 그에따르면세상은나와나아닌그무엇으로이루어져있습니다. 그무엇은나와상관없이도그냥있는모든것들을통칭하는말입니다. 내가알든모르든간에원래거기있던모든것들말입니다. 적어도그무엇이나에게의미있는2인칭의“너”가되기까지는말이지요. 

만일세상에‘너’라는존재가없다고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궁전같은곳에아름다운장식과고급의가구들이즐비하더라도, 사람은아마얼마의시간이지나면무료해지고, 또다시흥미를잃어버리고고독감을느끼게될가능성이높습니다. 사람들사이에있더라도마찬가지이지요. 아무리주변에사람이많아도, 내게의미있는“너”가없으면섬에갇혀사는것과다를바없는생활을하게됩니다. 말그대로혼자사는삶인것이지요. 이것은반대로나도누군가에게거기그냥존재하는그무엇과같은3자일수있다는사실을말해줍니다. 그래서마르셀은사랑이가능해지는순간은제3자로존재하는그무엇이바로‘너’가될수있을때라고말합니다. 그것도어느한쪽만이아니라양쪽모두서로에게‘너’가되는순간을말이지요.

이를잘보여주는징표로포옹을예로들수있습니다. 포옹을하면내가다른사람을안는것같지만, 동시에나역시다른사람에게안기는행위입니다. 악수할때도그렇지요. 악수는내가다른사람의손을잡는것이지만동시에내손이다른사람의손에잡히는행위이기도합니다. 그래서김남조라는시인은아예“그대가있음에내가있네”라고시를쓰기도했습니다. 포옹을내가먼저다가가했어도, 결국내가안을수있는그사람이있기에나도안길수있게되었다는의미인것이지요. 이것을예수님이하신말씀에적용해서생각해보겠습니다. 생명의빵을먹음으로주님이우리안에, 우리가주님안에거하게되었다는말씀은이제서로에게나와너의관계가되었다는것을의미합니다. 아무의미도없는것이아니라내게소중한존재가되었다는뜻이지요.

그런데예수님과의관계가특별한이유가있습니다. 그것은주님과“나와너”라고하는상호주관적매듭으로엮인사랑의관계가어떻게해서가능할수있었는가하는점입니다. 바로54절에하신말씀처럼아무연관도없던“그”를살리셔서“너”로만들어주신다는것이그핵심입니다. 예수님께의미있는“너”라는존재가될수있었던것은그를살리기위해서였다는것이지요. 반대로사람들도그리스도의살을먹고피를마심으로써, 이제그리스도를그무엇이아닌나를살리신구주로받아들이게된관계를만든겁니다. 

흥미로운사실은살린다는말의우리말명사형인‘살림’이이관계를잘나타내준다는것이지요. 살림은말그대로죽어있는것들에생명을부여하는일체의행위입니다. 예전에는가정주부들이집에서살림한다고말을한적이있습니다. 집안에있는모든것들을살려내는기적을주부들이했던겁니다. 죽은가구를닦아서보기좋은장식품으로살려내기도하고, 생명력을잃어버린채소며과일을먹을수있도록조리해서살려내고, 말안듣는아이들잘타일러서사람답게클수있도록양육해서살려내며, 세상살이에지쳐서죽어가는남편들다독여서밖에서사람구실잘할수있도록살리는일. 그살림을엄마들이해낸것이지요. 그런데엄마들이그렇게살려놓은것들을우리말로‘살림살이’라고했습니다. 

예컨대, 가재도구같은것을우리는살림살이라고하고결혼할때살림살이장만한다고말하기도했습니다. 그런데살림살이는생명이없는것이죠. 다만엄마의손길이닿을때생명을얻는것입니다. 다르게표현하면엄마의숨이거기에머무를때살아나는것이라할수있습니다. 살림을통해생명을주는것이지요. 예수님이우리에게행하신일이바로이와같습니다. 죽은살림살이같던세상의그무엇에불과한우리를, 생명의숨을불어넣어주셔서살리신것입니다. 그래서우리를안아주심으로내가너희안에, 그리고너희가내안에함께하는듯한생명의기쁨을주신것이지요. 이것이바로생명의빵을통해주시는놀라운살림의기적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요한복음6:41-51

중국에서 전하는 이야기 중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흔히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통치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중국의 모택동 주석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그의 통치이념이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사용한 슬로건도 “It’s the economy, stupid (경제가 답이다, 바보야)”이라고 했는데, 영어의 이코노미도 결국은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한마디로, 먹는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담으로 “중국 사람들은 네발 달린 것 중에는 책상,하늘을 나는 것 중에는 비행기, 물 속을 다니는 것 중에는 잠수함 빼고는 다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먹는 문화가 발달한 중국에 대해 비꼬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중국인의 세계관 속에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반증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무엇보다 인간의 삶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먹거리를 그렇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중국의 음식문화가 가진 창의력과 발전을 함부로 이야기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먹는 것을 통해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중국인의 전형적인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니까 말이지요. 

같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도 먹는 것과 관련한 생각과 가치관은 중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예전에는 가족의 인원을 물을 때, “입이 몇이냐?”고 툭 던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족의 수를 밥 먹는 입으로 계산한 것이지요.사람수도 우리 한자 문화권에서는 ‘인구(人口)’라고 해서 먹는 입의 수로 세지 않습니까? 요즘 식으로 따져 보면,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니 머리로 세는 것이 날 법도 한데, 희한하게도 우리는 머리를 동물의 수(마리)를 셀 때나 사용하지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신화도 재미있는게 다 먹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단군신화를 보면 동물인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잘 먹는 것이지요.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먹을 수 있는 게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욕입니다. 우리말은 욕도 먹는다고 표현하는데, 그야말로 욕먹을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욕을 제대로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 교단의 가장 큰 대형교회인 명성교회에서 일어난 담임목사의 부자세습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명성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장로교회 통합측 총회 재판국은 교단의 합의사항을 무시하고 명성교회의 목사 세습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교인들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 조차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를 욕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가뜩이나 교회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더 상황을 악화시킨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를 대하는 당사자들이나 세습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발언은 굉장히 욕에 굶주린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당사자인 아버지 목사는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은혜”라고 말을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싸구려 신앙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목사를 닮아간다고 그를 따르던 교인 중 하나는 “하나님도 아들인 예수에게 세습했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언까지 하여 원성을 듣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속된 말로 “욕을 바가지로 퍼먹는” 대형 사고를 친 것입니다.

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바로 다음에는 “신을 죽였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신이 스스로 죽어서 신앙이 불필요하거나 신이 없으니 믿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 신을 죽였다고 한탄한 말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들이 참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말입니다.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고자 합니다: “왜 먹지 않아도 될 욕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먹게 된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먹어야 할 것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 준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생명의 빵이라는 말을 들으며 오래 전 출애굽의 역사를 떠올리던 이들은 혼란을 겪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매일의 양식이 어찌 사람일 수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게다가 일부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이 다 민족의 영웅인 모세가 행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본문 앞의 35절을 통해 너희가 먹을 생명의 빵은 결코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한 것이라며 광야의 만나와 분명하게 구분을 지어 주셨습니다. 49절에서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다는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빵이 가진 영생의 능력과 구별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미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보면 6장의 앞부분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도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가르쳐 줍니다.시간이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언젠가는 육신은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으니 진짜 기적은 허기를 채우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지요.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빵이 가진 진정한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그 생명의 빵을 구별하여 먹을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빵을 구별하여 먹고 그래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는 것이지요.그것이 바로 안 먹어도 될 욕을 먹는 교회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종합하면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이 몇가지 해답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빵의 출처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의 빵은 인위로 만들어진 가공 제품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준 빵입니다. Made in Heaven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제조방식이나 먹는 법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메뉴얼(Manual)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소위 말해 “짝퉁”이라는 이야기입니다.유효기간도 한정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변함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맛있는 빵이 주는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지만, 생명의 빵이 주는 은혜는 결코 변함이 없는 법이니 이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빵의 유통 방식과 판매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생명의 빵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이 땅으로 직접 보내신 현지 직통 제품입니다. 그것도 아무 대가를 치룰 필요가 없는 공짜입니다. 한마디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은혜라고 부르는 이유이지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보내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이에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입니다.그렇다고 값없이 주셨다 해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여 결국 생명의 빵을 짓밟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지요. 신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를 행한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도 바로 먹어야 할 생명의 빵을 먹지 않고 경시한 결과가 아닐까요? 참된 선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그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은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욕 먹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빵을 먹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생명의 빵을 먹으면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빵을 먹는 방법을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것과 나를 믿는 것의 두가지 방식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한 걸음 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를 믿는 것입니다.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그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빵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세상의 빵은 먹어버리면 사라져 버리지만, 생명의 빵을 먹으면 오히려 더 풍성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빵은 누가 먹어버리면 없어져 버리니 함께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으로 인해 서로 먹기 위해 분쟁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빵을 먹으면 먹는 이는 사라지고 그리스도 만이 살아서 그로 인해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의 입장과 유익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함께 서로 살아갈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길이 열립니다.사실 이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이기도 했지요. 함께 나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기적은 그들이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은 것 보다,사실은 생명의 빵, 곧 그리스도 예수를 내 안에 모실 수 있었다는 사실 아닐까요?생각해 보십시오. 적은 물량으로 여러 사람 먹이는 것이 기적인지 아니면,모두가 정말 한 마음처럼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인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 살아있다는 생명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기쁨입니다. 함께 하시니, 두려움과 좌절감이 아니라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냥 기대어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니,힘도 되고 여유도 생겨납니다. 그러니 살맛이 나는 것이지요. 요즘 말대로 잘 먹고 잘 사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조금은 입에 쓰고 때로는 귀찮고 주저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신 생명의 사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