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명(視思明)

누가복음 5:1-11

 

지난 주 설교에서 경청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오늘은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듣고 보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중국 고전인 논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공자는 군자가 깊이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의 것을 예로 들었는데, 그 중에 “視思明 聽思聰”이라고 해서 보고 듣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볼 때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 생각을 깊이 해야 하며,들을 때도 지혜롭게 분별하기 위한 생각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명하게 분별하며 듣는 것을 ‘경청’이라는 말로 설명하여 지난 주 말씀을 나누었으니,오늘은 정확하게 보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은 게네사렛 호수,혹은 디베랴 바다로도 불리는, 그러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뒤, 호숫가에서도 아마 따라온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이지요. 사실 초기 감리교 운동에 관한 역사를 보면,순회설교자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는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모인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며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했다는 기록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가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뜨겁게 일어난 증거가 있었던 것이지요.

 첫 제자들을 만나게 된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당시 호숫가에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인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배가 정박해 있는 상태였습니다.그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잡기 위해 노력하였지만,아마도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모양인 듯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올라서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지요. 사실 있는 그대로만 생각해 보면, 당시 뱃사람이던 시몬이나 그의 동료들에게는 다소 어이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말씀이나 전하는 율법 선생이, 그것도 전직이 목수라고 알려진 낯 선 이가 배를 타고 나가서 자기가 던지라고 하는 곳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니, 평생 어부로 살았던 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만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과는 별개로 이 사건의 기록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다’ 라는 말의 의미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본다 (see, eido)’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첫번째는 예수님이 호숫가에 정박한 배에 오르기 이전에 그 상황을 보셨다는 2절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보신 것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뜻은 아닌 듯 합니다.  실제로 본다는 말의 헬라어‘에이도eido’는 육안으로 본다는 뜻 이외에도, 주의 깊게 보고 깨닫거나 자상하게 돌본다는 두가지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그것은 아마도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고자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해 빈 손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돌보신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님이 보셨다고 한 말의 의미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처음부터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돌봄의 시선으로 시몬과 그의 동료들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또 다른 본다는 말이 등장하는 구절을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시몬이 그물을 던지고 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러자 이를 보고 시몬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떠나가라며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만큼 예수님 앞에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변화가 일어났던 겁니다.신앙의 첫 출발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몬에게 이러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은 것이 감사해서 그랬을까요?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운 좋은 날에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는 일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드리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던가요?물론 일이 잘 풀리고 지위나 재물의 복을 얻게 된다면 감사할 내용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믿음을 다짐하게 만드는 힘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일은 뜻대로 안 풀릴 수 있고, 가진 것 조차 내려놓아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몬을, 그리고 우리를 주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서게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시몬이 보았다는 말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위에서 언급한 대로 본다는 말의 헬라어 ‘에이도 eido’는 주의 깊게 보고 깨달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본다는 것은 두가지 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지만,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해 낸 것은 오직 뉴튼 한 사람 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을 교회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지금이 교회가 다시 사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주의 깊게 본다는 것의 또 다른 뜻은 꼭 눈으로 봐야만 깨닫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이 든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건 꼭 눈에 보여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잘 해 준 것 하나 없는 무심한 부모에게 조차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보여주지 않아도 받은 게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몬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된 까닭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그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란 믿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가망 없는 자신의 인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과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시사명.진정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바라보는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지난 2007년 4월에 우리 교회는 연회의 허가를 얻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예배당 건물로 이전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오기 전 이 건물은 백인 회중들이 예배를 드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이전을 한 뒤에도, 주중에는 주변 미국 분들이 자주 교회를 찾곤 했습니다. 특히 홈리스들이 새로운 목사가 왔다고 하니, 도움을 청하러 자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처음에는 대처방법을 잘 몰라서 무조건 돈을 주다가, 여러분들의 조언으로 전문기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그들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주 찾은 한 홈리스가 있었습니다. 60대 초반의 백인여성이었는데, 심각한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찾아 오면 뭔가를 이야기 하며 하소연했는데, 정작 저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영어문제라기 보다는 술 때문에 혀가 꼬인 상태여서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습니다.

 한동안은 돈을 줘서 보냈더니 그것 때문인지 잊을만하면 또 찾아 오는 것이었습니다.저도 더이상 그 방법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다음에 왔을 때는 뭔가 목사로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궁리해 봐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다시 찾아와서 횡설수설 늘어놓기 시작하자,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막무가내로 소리치며 욕설을 퍼부을 때는 제 스스로 좌절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희한하게 욕설은 들리더군요.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저로서는 자신감도 줄어들고, 이렇게 해서 과연 제대로 된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회의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그냥 끝까지 들어주리라는 생각으로 그 옆에 앉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잘 안 들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는 했지만,들어야 뭔가 말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거리를 점점 좁혀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끝까지 알아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자기 이야기를 다 마친 뒤 저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하다, 결국 그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어차피 소통이 안될 바에,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나님, 긍휼한 마음으로 이 여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알콜중독에서 헤쳐나올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소서’ 라는 기도를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자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저를 와락 끌어 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들으려 하는 제 기도가 비록 그 역시 알아들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통했던 모양입니다. 

 그 일이 지난 후 바로 몇 주 뒤에 교회에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한국 유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한국에서부터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던 청년이었습니다.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에 유학까지 와서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친구들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에 갈등이 깊어져 분열되는 사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이 청년은 교회로부터 상처를 안고 신앙에 대한 불신을 동시에 갖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 날도 교회에 다니던 친구와 신앙 문제로 논쟁을 벌이며, 이젠 교회를 다시는 가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하며 길을 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있는 한 교회가 눈에 들어 오더라는 겁니다. 무심코 그 앞을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때 마침 홈리스 한사람이 교회 문앞에서 그 교회의 사람처럼 보이는 이에게 소리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는 거에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만일 교회의 목사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저 교회사람으로 보이는 저 이가 홈리스에게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대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이 신앙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교회로 돌아가겠노라고 말이지요.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여러분도 짐작하실 것입니다.좀 전에 이야기한 홈리스와 저와의 이야기를 눈으로 본 것이지요. 물론 제가 직접 했던 것과 그 청년이 보고 느낀 것 사이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제가 느낀 것 이상으로 감동적 장면을 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의 기억 속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려는듯 홈리스를 품에 안고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의 모습으로 남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기억의 차이 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일로 인해 이 청년의 믿음이 회복되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만의 확고한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 때 제가 너무 말을 잘 알아 들어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냥 말로 대충 이야기하고 돌려 보냈더라면, 그 청년의 신앙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요?그렇다고 제가 마더 테레사라도 된 것 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가까이 다가간 것이 전부였고, 알아듣지 못해 해줄 것이라곤 기도 밖에 없어서 그리 한 것 뿐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만일 그 여인의 말을 잘 알아듣고 좋은 답변을 주어서 그로부터 좋은 칭찬과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들었다면,아마 저는 제가 행한 일에 대해서 자기 도취감에 빠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역사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홈리스 여인과 청년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영향을 미친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을 통해서 였지요. 저는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긍휼과 돌보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은 보이는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믿음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청년이 보았던 것은 보이는대로가 아니라 믿음대로 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 청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보심이라고 생각합니다.들어야 할 것이 단순히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보아야 할 것도 바로 보이지 않는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이를 통해 우리를 긍휼한 자비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아닐까요? 여전히 우리 시대에 많은 것들을 우리는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때로는 그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심판까지 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이럴 때 일수록 믿음으로 세심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사랑의 힘으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돌보는 믿음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시사명.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의 시선을 바로 세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경청할 때

누가복음4:22-30

 

지난 주 우리가 속한 연회, 곧 California-Nevada Conference의 감독님이 소집한 Gathering of Orders에 다녀왔습니다.매년 우리 연회에 속한 모든 목회자들을 소집하여 교회의 사역에 관한 전반적인 방향이나 선교 방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목회자들끼리 한 해를 준비하며 서로간에 격려하며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소집 공고가 난 뒤 바로 등록을 하고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연회에서 제공한 호텔보다 훨씬 저렴한 호텔을 찾을 수 있어서 재빠르게 예약을 서둘러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값이 싼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호텔이 도시의 외곽에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모임 장소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에 묵었던 분들이 한결같이 멀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떨어져 있으니까 혼자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또 멀다는 생각 때문인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바로 둘째 이유와 연관이 있었습니다.바로 기차 소리입니다. 둘째 날 아침에 같은 호텔에 묵었던 분들이 어제 잠을 잘 잤느냐고 묻길래, 저는 아주 잘 잤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새로 지은 호텔이라 전 흡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기차가 지나다니느라, 잠을 도통 편안하게 잘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 호텔 방에서 바로 길 건너가 기찻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사실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는 귀를 먹은 것 아니냐는 타박을 여러 번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무언가에 집중하면 잘 못 듣는 편이어서 그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웃어 넘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에서 검사를 해 보니 일반인에 비해 청력이 떨어지는 난청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그래서 남들은 기차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그 밤에 저는 아무 방해없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걱정할 만큼 완전히 청력에 장애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불필요한 것은 선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하는 저 나름대로의 습관이 저를 단잠에 들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흘려보낸 것이지요. 한자어로 보면 듣는다는 말도 문(聞)과 청(聽)이라는 두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문은 우리의 귀가 들어오는 문처럼 그대로 소리를 듣는 상태일 때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 청은 똑바른 마음(덕)을 가지고 귀로 듣는 것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듣는 셈인 것이지요.그래서 소문은 그냥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인 데 반해, 경청은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은 결국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탁한 시대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혼탁하면 구별하고 판단하기가 어렵지요.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혼란하여 시끄러운 상태에서는 소리도 분간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들리는 소리는 많은데, 분간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이럴 때일수록 불필요한 소리는 버리고, 중요한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선택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 방법은 바로 경청하는 것입니다.똑바른 마음을 가지고 주의깊게 듣는 것이지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똑바른 마음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이미 나누었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복음이란 것은 결국 복된 소리입니다. 그런데 복되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마음의 기준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해 믿음으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예수께서 몇 번이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귀로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으면 결코 그 소리는 복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 소리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오늘 본문의 사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요.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 가운데 61장을 골라 선포하셨습니다. 분명 쓰여진 그대로 읽은 것인데, 말씀과는 다른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껄끄럽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신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파격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물론 믿는 자들의 귀에는 복음으로 들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과는 전혀 다른 모순된 현실에 물들어 살아가거나,특히 현실에서 이득을 조금이라도 누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듣기 거북스러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의 선포 이후 유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사람들이 기껏 한다는 반응이 ‘네깟 녀석이 뭘 아냐’는 식의 비아냥입니다. 뭣 하나 내세울만한 것 없는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달갑지 않았던 까닭입니다.차라리 비웃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은 편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 죽게 만들려는 매우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토록 독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예수님의 급진적인 사상과 주장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자유 시장 경쟁 체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속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내용을 읽은 것이긴 했지만, 예수님이 앞으로 행하실 사역의 방향이기도 했던 선포의 내용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첫째와 꼴찌가 뒤바뀔 수도 있는 혁명적 주장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어떤 이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사상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할만한 부분을 많이 담고 있지요. 무엇보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입장에서 현재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하기 힘든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사고를 통해 당시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가슴에 기름을 부은 격인 사례를 덧붙이시지요. 사렙다 마을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사렙다 과부는 비록 이방인 과부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엘리야를 알아보고 극진하게 대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이방인 장군으로 문둥병에 걸렸지만,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순종하여 병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출신배경이나 신분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경청하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둘 다 은혜로운 간증일 수 있는 사례들인데, 당시 이 이야기를 듣던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회당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릴 모의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귀가 막혀서 복된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급기야 감정이 폭발하여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고 만 것이지요.

 

금번 Gathering of Orders에서 다룬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역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2월 말에 Saint Louis에서 열릴 교단의 특별총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한인총회의 임원으로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총회의 결과로 인해 교단은 물론 한인교회에 어떠한 결과를 미치게 될 것인가 그 추이를 지켜보며 대책을 몰두해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미 미국 연방 대법원은 지난 2015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복음주의 진영(Evangelical Protestant)에 속하는 교단을 제외하고, 미국 장로교와 성공회,그리고 루터교 등 미국의 주류 개신교회(Mainline Protestant)들도 이를 인정하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연합감리교회는 미국의 주류 개신교회 가운데 최대 규모의 교단입니다.지난 50여년간 미국 사회의 논쟁처럼 교단에서도 동성애와 관련된 찬반 논란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6년 교단의 최고 의결기구인 총회에서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양한 집단의 의사를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대안을 제시하고 이 사안만을 다룰 특별총회를 금년 2월에 갖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2년여 넘는 토론 끝에 특별위원회는 세가지 모델을 총회에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현재의 동성 결혼과 동성애자 안수에 반대하는 장정을 고수하고, 이에 더하여 처벌 조항을 강화시킨 전통모델(Traditional Plan)입니다.둘째는 교회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특별위원회와 감독총회가 동의한 하나의 교회 모델(One Church Plan)입니다. 이는 기존의 동성 결혼이나 안수에 관한 조항을 교단 헌법에서 삭제하는 대신, 개별 교회와 목사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허락한 방안입니다.마지막으로 셋째는 연대적 총회 모델(Connectional Conference Plan)입니다. 현재 다섯개의 지역총회를 동성애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보, 중도, 보수의 세개 총회로 재편성하여, 각자의 신념에 따라 교단헌법을 적용하자는 방안입니다.

 

연합감리교회가 이러한 대안을 제시한 까닭은 동성애에 관한 진보와 보수의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 극단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상대방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묘수를 낸 것이지요. 이 세가지 제안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한 법적인 해석을 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저도 장정의 교리와 사회원칙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매우 신중하게 읽고 나서야 수긍이 갈만큼 복잡합니다. 무엇보다 법리적 해석이 미국 사회를 합리적으로도 이끈 공로도 있지만,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을 매우 단정적이고 비인간화시킨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법적인 용어를 가지고 벌이는 이 지루한 논쟁 그 자체로 교회의 상처가 오히려 깊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시간을 가지고 이 복잡한 논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여러분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열린 토론과 대화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함께 점검하는 시간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이를 위해 오늘은 한가지 점만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교단이 내리게 될 결정은 물론이고,그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을 정리할 때, 먼저 귀를 세밀하게 기울이는 신앙의 훈련을 해보시라는 권면입니다. 

 

당시로서는 다소 파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아가 결국에는 그를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폭력적인 집단 감성을 기억해 보십시오.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마음으로 분별하며 들어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분하게 경청하지 못하면 감정이 먼저 앞서는 법입니다. 자기의 입장에 빠져서 다른 이들의 은혜 조차 거부했던 유대인들의 전철을 오늘 우리가 밟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경청할 때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여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KY Castle

느헤미야 8:1-3, 누가복음 4:16-21

 

최근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에 “SKY캐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한 번도 드라마를 본 일이 없어서 아주 자세한 극의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여러 기사를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의 영어 이니셜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자녀를 명문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는 상류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스카이 캐슬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남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잣대를 가진 그들만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이지요. 물론 성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한번쯤 올라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기적 탐욕과 비인간적 가치관은 욕망의 말로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바벨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시지푸스(Sisyphus)의 신화’는 결국 다시 굴러 내려오게 될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것이야말로 무서운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오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허무함이 사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형벌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지요. 다만 그것이 벌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높아지려고 쌓으려 한들,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허무한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근원을 죄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일체의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인간의 욕망이 곧 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사망, 곧 허무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는 죽음이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치열한 입시경쟁과 출세의 욕망으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가져온 드라마의 이야기처럼,여전히 피라미드 같은 경쟁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 현실도 수많은 죽음을 양산하고 있지요. 많은 이들은 마지 못해 살면서, 마치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영적인 죽음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회는 이러한 현실을 오히려 더욱 부추기는 듯한 모습입니다. 교육의 목적이 언제부터인가 경쟁에서의 승리가 된 지 오래고, 잘 사는 것의 기준도 비교우위에 있는가의 여부가 되어 버린 현실입니다.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는 게임같은 현실에서 누군가는 절망과 암울한 결과를 언제나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참담할 뿐입니다. 그것이 정녕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모습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 만들어 가길 원하시는 “하늘의 성”, 이상적인 ‘스카이 캐슬’은 어떤 모습인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인 느헤미야서부터 살펴보겠습니다.사실 느헤미야의전체 핵심내용은예루살렘성곽의재건과신앙부흥이라고할수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말하는예루살렘성이 뜻하는 바에 주목해야 합니다.그것은 특정한 민족의 도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하나님나라를나타내주는 하나의 징표로써,하나님의백성들이거하는도성을의미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성곽의재건은단순히건축물을고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궁극적으로신앙의기초를세우는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라는 것이지요.당시총독이었던느헤미야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 바벨론의 포로귀환후성전재건을위해 치밀하게계획을세우고, 온갖 이민족의 방해 공작과 술책,그리고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학자 에스라를 비롯한 많은 유대 백성들도 재건과보수를 통해 세우고자 한 성이결국은하나님에의해 이루어질SKY Castle,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믿음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요.예루살렘 성벽보수가완료된이후에,유대 백성에게는한가지커다란숙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벽의 재건 완공으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외부의건축물이완성되었지만,사람들의영적인내면문제까지완벽하게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하나님의말씀을선포해 줄 것을 부탁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백성들의 갈급함은자발적으로율법의말씀을듣고자모두가 한마음으로모여서, 말씀한구절한구절에감동하며하나님앞에엎드려영광을올려드리는 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성이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진짜 스카이 캐슬을 완성하는 것은 외면적인 성벽의 보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영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 말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외적인 건축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교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마찬가지이지요.교회를 다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우리가 사는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믿음만 가지고 살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물론 어떤 이들은 예배를 할 때 만큼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시 현실의 근심을 잊는다 해도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명확하게 응답을 받기도 쉽지 않지요.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장 큰 기도의 열매는 자기가 구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신앙의 문제’로 돌릴 수 있는 걸까요? 

 

이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를 신약의 본문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예수님이 이사야61장에 선포된 내용을 읽으시면서 오늘 이것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읽은 이사야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눈먼자에게 눈뜸을,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주신다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SKY 캐슬은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 또는 소유의 많고 적음의 구별이 없는 그런 세상이라는 것이지요.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적어도 인간의 욕망으로 쌓아가는 모래성 같은 세상과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아마도 성벽을 재건하고 모인 백성들이 듣고 싶었던 말씀도 이와 같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경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들 조차 이 말씀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 학교 윤리나 도덕 교과서에 쓰여진 대로만 산다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옳은 일을 하고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이 언제나 다른 일었다는 점이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지요.사랑, 나눔, 정의, 평화. 이런 말은 하지만, 정작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될 것 같으면 가차없이 상대방을 비난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는 상식과 기준조차 무시해 버리고,내게 불편한 일에는 아무리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이라도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 아니던가요? 한마디로 신앙적인 부조리가 만연한 모래성 안에 우리가 갇혀 사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의 선포는 어쩌면 장차 이루어질 소망에 가까운 일들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회당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감격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당하게 생각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마치 지금 삶의 숙제와 무거운 짐을 교회로 가지고 와서 진심으로 기도하는데,이루어졌다는 응답을 받으면 여러분도 똑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일단 기분이 좋기는 한데, 대체 뭐가 이루어진 것인가 되묻지 않을까요?

 

제가 유학을 오기로 결심했을 때,제 스승 중의 한 분이 이런 말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진짜 공부는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그 과정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입니다. 학과 공부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의 정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믿으면 그 댓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말하자면 믿음도 열매가 따로 있을 것이란 기대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속상해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믿음은 그 자체가 열매입니다. 대가를 바라며 행하는 믿음은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조건을 달고 하는데 어떻게 그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믿는 것 자체로 열매를 얻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 사랑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그 자체로 열매이다. 그래서 첫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짝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확답을 얻는다고 해서 열매가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결혼이 열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뒤에 엄청난 재앙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고 병자를 고친 것을 복음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려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 믿고 변했다고 성공 사례를 간증하던 이가 어느 날 나락에 빠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옥에 갇힌 몸이 해방이 되었다 해서 정말 자유로운 삶을 얻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세상이 창살 없는 감옥 같다고 여기는 사람은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좋은 성적과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받거나,남부럽지 않은 직장이나 직책을 얻고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소망을 가지고 나온 청년들 있나요?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 가고 훌륭한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온 부모님들 있나요?돈을 더 벌어서 좋은 차에 근사한 집에 사는 것이 인생의 재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 않나요? 

 

그런데 한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지금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응답을 받는다고 해서 다 이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진짜 SKY Castle,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의미없는 씨앗은 결코 의미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씨앗은 허무한 모래성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성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그렇다고 현실의 문제는 다 잊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께서 하신 선포의 말씀은 장차 앞으로 얻게 될 열매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무언가에 붙들리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그리고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허무한 모래성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집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그 믿음 안에서 씨앗을 뿌릴 때 그것으로도 이미 열매는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진짜 SKY 캐슬에 초대된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왕년에(Used to be)

요한복음2:1-11

 

가나혼인잔치에관한이야기는예수님이공생애를시작하며행하신첫번째기적사건으로알려져있습니다.사건의배경이된혼인잔치는지금도그렇지만당시유대사회에서매우중요한개인의대사로간주되었습니다.일반적으로혼인식은수요일에치러서일주일동안부부는물론온동네가축제분위기에빠졌다고합니다.결혼한부부는요즘처럼신혼여행을가는것이아니라집에머물면서일주일간결혼예복을입은채로가정을개방해놓고,사람들로부터왕이나왕후와같은대접을받았습니다.가난과중노동으로지친삶의무거운짐을잠시잊고적어도일주일동안은축제속에서인생의즐거움을만끽하는시간이었던겁니다.

 

아마도기적사건의배경을혼인잔치에서시작한이유도삶에지친일반민중들에게축제가주는삶의활력소를보여주고자한것이아닌가생각해볼수있는대목입니다.고단한삶의현실에서아무런희망없이살아가는이들에게,이땅에서는누릴수없을것같던희망찬세상을보여주고자한것이지요.더불어혼인관계는유대인에게하나님과의관계를나타내는상징적표현이기도했습니다.따라서혼인잔치는하나님과의언약이성취되는구원의날을보여준다고할수있습니다.진정한하늘축제가열리는날인것이지요.그날에이땅의암울했던고통과궁핍,그리고억압의현실은사라지고,누구나주님의신부가되어왕같은대접을받는다고생각해보십시오.여기저기서기쁨과감격의환호성이울려퍼지지않을까요? 한마디로가나의혼인잔치는구원의천국잔치를보여주는것이라해도틀리지않습니다.

 

그러고보면본문에서기록된표징이라는말에주의를기울일필요가있습니다.흔히기적이야기라고말하는데,실제로복음서는기적이라는단어대신에표징이라는말을사용하고있습니다.기적은말그대로알수없는미지의상황이발생할때쓰는말입니다.때로마술과혼돈하는이유이기도합니다.물이포도주라는물질로변화되는기이한현상에만주목하기때문입니다.실제로성서에는이와같이신비한현상에대한이야기가많이언급되고있습니다.어떤이들은성경이기이한현상을엮어놓은기적의책이라고부르기도합니다.그래서오히려오늘날과학적이고합리적인사고를하는현대인들에게는의심과시험의대상이되기도하지요.

 

하지만성경은기적의역사로그치는신비한이야기가아닙니다.성경은지금도우리가운데역사하시는살아있는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말씀의목적은기적과같이기이한현상그자체를말하는것에목적을두고있는것이아닙니다.표징이라번역된헬라어“세메이온”은우리에게전하고자하는하나의메시지일뿐입니다.무언가를가리키는표시와같은것이지요.곧그자체가궁극적대상이아니라무언가를가리키고있는안내판과같은역할입니다.그러니신비로운현상이중요한것이아니라그것을통해우리에게전하고자하는메시지가무엇인지를아는것이더중요하다는뜻입니다.

 

그런의미에서본문의이야기는물이포도주로변하는표징이전에몇가지중요한표징들을통해우리에게메시지를전하고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크게두가지관점에서접근할수있는데,하나는이이야기를듣는유대인을향한표징입니다.본문에보면,잔치중에포도주가떨어져마리아가예수님에게부탁을하는구절이나옵니다.그때유대의정결예법에따라준비해둔돌로만든물항아리여섯개를가져오라고예수님이일꾼들에게명을내리지요. 당시유대인의정결예식에따르면,집에들어오기전에발을씻거나음식을먹기전에꼭손을씻도록했는데물항아리는그것을위해준비해둔것이었습니다.

 

그런데중요한단서,나아가하나의표징이되는부분이있는데바로항아리의숫자입니다.유대인들에게수는단순히숫자이상의의미를갖는상징적성격을가지고있었습니다.성경에서도자주인용되듯이,일곱(7)은완전수를의미합니다.반면에여섯은하나가부족한것으로항상부정적의미로사용됩니다.계시록에서악마를나타내는표식으로666이라고한것만봐도알수있습니다.흥미로운사실은본문의이야기에등장하는물항아리의수가여섯개라는점입니다.이것은정결예법과같이유대율법이가진불완전성을표징한것이라할수있습니다.말하자면, 진정한천국잔치는율법을통해얻을수있는자리가아니라는것이지요.예수그리스도의은혜로인해얻을수있는축복의자리라는뜻입니다.

 

이를보다명확하게보여주는증거가또다른표징에서나타나지요.바로포도주와관련된이야기입니다.당시가나혼인잔치의메시지는헬라문화권에있던이방인들에게도선포되어야했습니다.사실헬라인들에게는디오니소스라는술과축제의신이있었습니다.요즘은잘이해가되지않을지도모르지만,고대인들에게축제는매우특별한의미가있었습니다.일상에지친사람들이축제에서‘엑스터시(ecstasy)’와같이특별한황홀경을통해영적인환각에빠지는경우가많았습니다.그것이마치육신의구원을얻는것처럼생각하기도했다는것이지요.술은이를도와주는도구가되었습니다.아마도삶에분명한목적과방향을상실하고,현실의무거운짐을지고살아가는사람들에게이것은일종의탈출구와같은역할을했던것으로보입니다.

 

후에사도바울도초대교회의성도들에게술취하지말고방탕하지말라고권면한까닭도마찬가지의맥락에서이해할수있습니다.포도주의표징은이를분명하게제시해주지요.우리를진정구원의상태로이끄는것은바로그리스도예수의보혈이라고말입니다.그저빈주전자에술을채워서애주가들의기분을좋게하는것이아니라,앞으로장차맞이하게될천국잔치는그리스도가주시는보혈을통해얻을수있게될것이라는뜻이지요.지난2000년동안교회가주님의살과피로빵과포도주를나누는이유가바로이것입니다.다시말해,가나혼인잔치의기적이야기는물로포도주를만든기이한현상이아니라,장차우리를위해피흘리실그리스도예수로인해얻게될구원의신비로운사건을가르쳐주고자했다는것이지요.십자가의놀라운영광을나타내주신사건이라는뜻입니다.

 

따라서물이포도주로변하는표징은이를대하는우리들의모습을반영한것이라고도볼수있습니다.물이포도주가되는것은질적인변화를의미하지요.물론물에포도를담그고오랜시간이지나면그효소작용으로인해포도주가되는법입니다.그런데가나혼인잔치의표징은그자리에서이루어집니다.예수님을통해서말이지요.다시말해우리가하나님의말씀을통해변화되어야할모습은시간과함께연륜이쌓이듯묵은신앙이아니라는겁니다.지난주세례의의미를통해이야기한것처럼,그리스도를통해완전히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것이지요.그리스도안에서새사람이되는것입니다.오래된낡은육신의습관에서벗어나,그리스도의보혈로깨끗이씻김받고영의사람으로완전히변화되는것이지요.그것이바로표징을통해우리에게전하는참메시지입니다.

 

지난주토요일에우리가속한Bay 지방주최로선교전략이벤트가있었습니다.교회성장과선교적마인드를활성화시키기위한방향과전략을여러교회지도자들로부터듣고함께의견을나누는자리였습니다.그런데강사목사님중의한분이우리가앞으로새로운시대를맞이하여살아있는교회와성도가되기위해서피해야할한가지습성에대한이야기를하는것이었습니다.우리말에“왕년에”라는말이그것입니다.영어로도“used to be”라고해서예전에는이랬지라는과거지향적태도를지칭한것이었습니다.

 

여전히예전에자신이했던방식이나예전에좋았던시절을운운하며새로운시대를준비한다면,많은시행착오를겪을수밖에없습니다.그것은시대적변화에상관없이율법적전통을그대로중시하는유대인들이나퇴폐풍조를만들어내는폐해에도불구하고새롭게변화시키려들지않는이방인들의모습과다를바없습니다.무엇보다모든변화의중심에는옛과거의명성이나화려했던순간에대한추억이아니라하나님의말씀이있어야한다는사실을잊어서는안됩니다.더군다나교회는그리스도의핏값으로세운하나님의집이아닙니까?그러니교회나성도나그리스도예수안에서‘왕년의추억팔이’에빠져있는것이아니라새롭게거듭나야합니다.그럴때비로소하나님의말씀속에살아숨쉬는생명력있는교회와성도의모습을회복하게될것입니다.

 

 

눈물의 이등분

누가복음3:21-22

 

교회력에따라지난주부터우리는주현절기간을보내고있지만, 동시에오늘을주의세례주일로도지키게됩니다. 주의세례주일(Baptism of the Lord)은예수께서세례요한에게직접세례를받으신것을기념하면서, 이로부터시작할공생애의의미를다시한번되돌아보도록가르치고있습니다. 성서일과에의해선택한본문인누가복음의내용도예수님의세례에관한기록을담고있는말씀입니다. 이에대한보도를다른공관복음서에서도언급하는것을보면, 이사건이가진의미가작지않다는사실을직감할수있습니다. 

 

오늘본문의저자인누가의기록에따르면, 이미당시많은사람들이세례를받은것으로보입니다. 그중에는유대교의신봉자들도포함되어있었습니다. 물로죄를씻어내는의식이일반대중에게는일면매우편리한방법이기도했기때문입니다. 한마디로대중적방식이었다는뜻입니다. 죄를씻어버리는의식은대부분의종교에서구원을받는행위나다름없는것으로이해되는종교의식이라할수있습니다. 예컨대, 힌두교의한분파에서는그들이믿는신의형상을실은수레가지나갈때몸을던져자신을밟고넘어가면죄가사라진다고믿는이들도있다고합니다. 생각만해도끔찍한고통이아닐수없지요. 경전중심의종교에서는수만권의책을줄줄암송할정도로다이해해야구원의길에들어설수있다고믿는다고하니, 그에비해물로몸을씻는행위는매우단순한방식이아닐수없다는것입니다.  

 

적어도형식면에서는누구나할수있는방식이라는점에서대중적이라는뜻이지요. 그래서세례요한은물로세례를주는것의의미를분명하게밝혀두고자합니다. 바로세례의이유가‘회개’에있다는것입니다. 물로몸을깨끗이씻어내는행위에앞서삶의중심이변화되어야한다는사실을강조한것이지요. 나아가그변화의중심에바로그리스도예수가계시다는점을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옛사람은죽고다시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것이바로세례의의미라는사실을말입니다.

 

그런데놀라우면서도논란이될만한뜻밖의상황이벌어집니다. 그리스도이신예수께서세례를받기위해사람들이모여있던요단강에나타나신것이지요. 유대교에속한이든아니면그것과전혀상관이없는사람이든, 결국인간이흠을가진유한한존재라는점에대해서는누구도부인할수없는사실입니다. 그러니까누구라도자신의죄를고백하며물로깨끗이씻김받고자나온것은자연스러운행동이라할수있다는겁니다. 문제는세례의대상이다름아닌그리스도예수라는점이었습니다. 죄가없으시고흠이없는하나님의아들이세례를받을필요가전혀없어보였기때문입니다. 오히려사람들에게의심을사거나, 세례를베풀고있던요한과비교될가능성이더커보일수있었던것이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께서세례요한으로부터물세례를받으려하신까닭은무엇이었을까요? 사실이러한질문을한다는것자체가아무런의미가없어보일수도있습니다. 왜냐하면그렇게따지다보면, 굳이하나님의아들인예수께서이땅에내려오셔야할이유도없어보이기때문입니다. 그것도십자가의죽음을통해하나님의뜻을완수한다는것자체가도통이해가되지않는이야기로들리기때문이지요. 전능하신하나님께서이루지못할일이없으실텐데굳이이토록논란거리가될만한방식을택한이유를쉽게납득하기가어렵다는겁니다. 그런의미에서질문은하나님의계획을성취하기위하여가능한모든방법중에서왜이런방식을택하신것인가를묻지않을수없습니다. 그리고이를통해과연하나님은어떤결과를얻고자하신것인지를질문하게됩니다. 비록우리가얻을수있는해답은그에대한작은단서를통해유추를해보는정도에그칠지도모르지만말이지요. 

 

이러한질문에관한단서가될만한부분을면밀히살펴보기위해오늘본문에기록된대로예수님이세례를받을때일어난몇가지정황을다시주목해보고자합니다. 요한으로부터세례를받고나서예수님은하늘을향해기도를올립니다. 아마도우리가궁금해하는것처럼아버지의뜻이무엇인지를재확인하셨는지도모릅니다. 그에대한아버지하나님의응답인지그순간하늘이열리는신비로운현상이발생합니다. 하늘이열린다는것은마치경계가분명하게구분된두공간을가로막고있던문이열리는상태를연상시킵니다. 하늘과땅의경계가무너져, 그구별이없어지고양쪽의소통이원활하게이루어질수있는길이열렸다는것이지요. 

 

오래전동서독을가로막고있던베를린장벽이무너질때, 사람들은– 특히여행이자유롭지못했던동독사람들은– 자유로운여행이가능한기회가열렸다고환호한바있습니다. 우리도한때금강산관광과개성공단을통해북한땅을밟게되었을때, 금단의문이열리고남북의소통이가능해졌다고기뻐한일이있었습니다. 비슷한용례를개인사에서도찾아볼수있는데, 예컨대국가고시에합격한사람에게“이제출세길이열렸다”는말을사용하는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갈수없던새로운영역으로한걸음내딛게되는길이가능해졌다는의미인것이지요.

 

그런의미로예수님의세례후나타난신비로운현상을이해해볼수있습니다. 하늘과땅의경계가무너지고, 이땅의사람들이하나님의나라로향해갈수있는길이열린사건이라는겁니다. 그리고그길이어디있는가를분명하게가르쳐주신것이지요. 바로이땅에육신의옷을입고낮고낮은베들레헴의말구유에서나시고, 요단강의수많은군중들사이에서함께머물러세례를받으신그분. 가난하고소외된자의고민과아픔을들어주시고그들의친구가되어주신참벗. 그리고사람들의온갖모욕과왜곡을뒤로하고온인류의죄를홀로지시기위해무거운십자가를짊어지고그위에피를흘려돌아가신어린양. 하지만죽음의권세도물리치시고사흘만에다시살아나셔서영원한생명의길을직접보여주신부활의주님. 그래서내가곧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말씀해주신예수그리스도를통해우리는하나님의나라를향한열린통로를얻게되었다는뜻입니다.

 

그런데이지점에서모든것을계획하신하나님은‘왜이초역사적사건의배경을세례의식이열린강가로정하신것일까?’라는또다른질문을하지않을수없습니다. 우선그이유를물이만물의뿌리이자생명의원천이라는사실과연관시켜찾게됩니다. 사람뿐만아니라생명이있는모든동식물은반드시물을필요로합니다. 특히사람의몸가운데70%가물이라고하니, 흙으로만들어졌다고하는말이무색하게느껴질만큼생명의근원으로서물의중요성을다시생각하지않을수없습니다. 물론현실의시장가치와는커다란격차가있는것이사실입니다. 생명에없어서는안될중요한것이지만, 물값은거의없지요. 그런데금은사는데없어도큰지장이없지만, 값은물과비교도할수없을만큼큽니다. 

 

그도그럴것이물은왠만한곳을파다보면나오는반면, 금은정말운좋은사람들의눈에만발견되는희소성을갖고있기때문입니다. 그런데반대로물을금처럼찾기힘들다고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해도끔찍해지지않을수없습니다. 과연지구상에 존재하는생명체중에얼마나살아남을수있을까요? 그럼에도불구하고시장의가격으로물질의가치는물론삶의기준에까지적용시키려하는현대사회가얼마나위험한상태에이르렀는지다시생각해보지않을수없습니다. 그만큼생명의보편성이갖는의미보다물질의가치를중요시여기며사는세상은하나님이창조하신생명우선의원칙에서많이동떨어진상황이라는것을직시할필요가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생명의원칙이약화되는만큼많은것이오염되고고갈되어가고있는현실을마주하게됩니다. 그흔한물도이제는제법돈을치뤄야마실수있는대상이되어버린것이지요. 아마물질에대한가치를지금처럼무차별적으로추구하다보면, 언젠가가장보편적인생명의원천이던물마저고갈되는상황에처하게될지도모르겠습니다. 노아의시대에죄에빠져타락한세상을물로심판하셨던하나님의뜻이새삼그중요성을떠올리게합니다. 그런데이제는그마저도어렵게되었습니다. 더이상물로심판을행하지않으시겠다고약속까지해주셨으니말입니다. 대신하나님은이땅에독생자그리스도예수를보내주셨습니다. 그를통해생명의가치를다시살려주신것입니다. 바로그의눈물을통해서말이지요.        

 

일본의기독교사회운동가이자빈민촌의성자라고불리던가가와도요히꼬목사님의시가운데“눈물의이등분”이라는글이있습니다. 가가와목사님은러일전쟁이후극심한경제난으로힘들어하던고베의빈민굴에서소외된사람들을돌보며, 세상을변화시키는사회운동에도적극참여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당시일본에는‘고가에시’라고해서, 아이를다시하늘로반품한다는의미로양육할수없는아이를제손으로죽이거나돈을받고남에게떠넘기는일들이비일비재한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살아남은아이들이마지막으로연명할수있는곳이바로빈민굴이었습니다. 가가와목사님은그렇게맡겨진아사직전의아이하나를데려다기릅니다. 하지만영양실조로인해끝내아이가죽고말지요. 그래서죽은아이를끌어안고목사님은눈물을하염없이흘렸다고합니다. 그때눈물방울이아이의얼굴에떨어져서마치죽은아이가흘리는눈물같더라는겁니다. 이를두고그는‘눈물의이등분’이라는말을사용한것입니다.     

 

이제처음제기했던질문으로돌아가볼까요? 왜하나님은예수께서굳이거치지않아도될물의세례를받도록이끄신것인가. 오래전노아의홍수가세상의죄를씻기위한물의심판이었다면, 요단강에서행하신주님의세례는이땅을구원하기위해흘리신하나님의눈물과같습니다. 죽어가는생명들을향한한없는사랑의눈물이었던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예수님의물세례는하나님의눈물을세상속에나타내신사건이라할수있습니다. 그눈물로죽어가는생명들을살리고자하는하나님의끝없는사랑의표현인셈입니다. 그래서하늘도울고땅도우는눈물의이등분과같은사건이일어난것이지요. 

 

생명의원천물마저천대받고점차고갈되어가는현실속에아직희망이남아있습니다. 그것은바로생명을변화시켜살릴수있는물이있기때문입니다. 바로눈물이지요. 이미그리스도를통해하나님은자신의눈물을보여주셨습니다. 이제남은것은그눈물의값을제대로치르며사는우리의몫만남았습니다. 그런말이있지요. 눈물은거짓말을하지않고, 눈물은매로도다스리지못하는변화의힘이있다고말입니다. 오늘그리스도의세례를통해진정한눈물의힘을보았다면, 여러분에게주어진앞으로의삶속에서그눈물에어긋나지않는생명력넘치는삶을그리스도안에서사시는저와여러분모두가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