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虎口)와 대마(大馬)

요한일서 5:1-6   

요즘은 비속어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쉽게 속임을 당하는 이를 일컫는 말 가운데 ‘호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본래 문자적 의미는 호랑이의 입 또는 아가리라는 뜻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례는 사실 바둑 용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바둑은 쉽게 생각하면 상대편의 돌을 자신의 돌로 둘러쌓아 이기는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상대편을 돌 세개로 둘러싸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데, 상대방이 그 안에 돌을 넣는 실수를 범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의 입 안으로 들어가 잡아 먹히는 형국과 같다하여 바둑에서는 호구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흔히 상대방으로부터 손쉬운 이용감이 되는 사람을 ‘호구’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놀음판처럼 이미 다 짜놓은 판에 아무 것도 모르고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는데,바로 그들이 호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그것이 의도되었건 아니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건 간에 마치 짜맞추어진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눈치 없이 아무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칭 호구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처럼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결국은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한 대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이라는 바둑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호구가 되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호구 취급을 받을 때는 기분 나쁜 것은 물론이고 커다란 상실감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호구 취급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들도 악착같이 교육시키는 것 아닌가요?심지어 호구를 면하기 위해 다른 이를 호구 만들어도 좋다는 그린라이트를 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니었나요?

그 결과 세상은 마치 지뢰밭 같은 곳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를 호구 만들어 승리하기 위해 매설해 놓은 지뢰가 세상을 이미 병들게 해 버렸다는 겁니다. 이제는 세상을 순진하게 사는 것도 호구 취급받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순수,순진, 순결과 같은 말이 더 이상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순전한 사랑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조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낙망하고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어딘가에 늘 있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듯이, 호구인 줄 알았던 돌이 대마처럼 결코 패배를 모르는 큰 힘을 얻게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비록 세상의 경쟁방식과 여건으로 보면 무모해 보일지라도, 묵묵히 삶의 원칙을 가지고 가는 대마가 결국 진정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믿음을 거두기에는 아직 일러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통쾌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은 본문 4절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법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바로 그 앞절에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현실 속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현실성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세상살이와 분리해서, 세상과는 상관없이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만 보고 살면 된다는 현실 도피적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요한이 살았던 당시의 영지주의의 입장이 그와 같았습니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악한 세상을 인정하지 않고,오직 영의 세계만 강조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관심을 두지 않고 회피하거나 배격하며 사는 신앙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바로 앞장인 4장 20절에서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은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왜곡이 되어 있어도 끝까지 대면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세상은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순수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이 정글과 같은 세상을 살기에는 마냥 어리숙해서 늘 당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늘 가난하고 쉽게 당하며 사는 호구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요한의 가르침은 믿음과 세상살이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잘 믿는다고 세상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안 믿는다고 해서 못사는 것도 아닌 것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자의 모습을 바로 다음 구절인 5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당연해 보이는 말씀이지만, 당시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가진 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바꾸어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뒤의 구절인 5장 11절에서 요한은 그 증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이 바로 그 아들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반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특히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동어반복같은 말씀입니다. 믿음을 고백한 여러분들도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그러니까 생명을 얻을 수 없어”라고 한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거꾸로 그들의 눈에는 이렇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마치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내가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면, 내가 너를 책임져 줄게 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말 그대로 호구가 된다고 하면 믿기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먼저 반발심부터 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한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생명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점차 잃어버리고,수많은 호구들을 양산하는 문제를 낳고 말았습니다. 죄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 모순된 고리를 끊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에 반하는 모든 죄와 모순의 고리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진리를 다시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2천년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새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흔히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다고 하지요. 그건 바로 십자가의 부활이 지금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나의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고난을 통해 내 마음이 아프고, 그의 부활을 통해 나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식이 다치면 부모가 아프고,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기뻐합니다. 분명 다른 존재인데, 마치 한몸을 이룬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갖게 되는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처럼 한몸을 이루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 때 어떤 믿음이, 또 어떤 소망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비록 세상이 나를 호구 만들어도 주안에 살면서 대마로 사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순진한 것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하고 살아갈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끝끝내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바로 믿음 안에 있는 이유입니다.  

열매맺는포도나무

요한복음15:1-8

 

지난열흘간저는북가주지역의한인코커스에서기획한종교개혁성지탐방을하고돌아왔습니다. 95개조반박문을통해종교개혁의불씨를일으켰던루터로부터쯔빙글리와칼뱅, 그리고감리교의모태운동이되었던영국웨슬리의발자취를따라가는순례의여정이었습니다. 2년전사도바울의소아시아전도여행지였던터키-그리스순례길이대개오래된유적지탐방이었다면, 이번성지순례는중세의성당과종교개혁이후의교회를방문하는길이라고말할수있을겁니다. 그래서거의여행의막바지에다다랐을무렵에는성당의위용과이채로운모습에도크게놀라지않을만큼모두가익숙해질정도가되어버렸습니다.  

물론쾰른대성당을비롯한대부분의성당과교회는유럽의찬란했던역사를그대로담고있을뿐만아니라믿음의선배들이가진신앙열정과자부심을그대로느낄수있을정도로대단한건축물이아닐수없는것이었습니다. 유럽의아름다운풍경만큼이나우리에게는이국적이면서도경이로운감정을갖게하기에부족함이없었습니다. 사진이나이미지를통해서보는것과는비교가될수없을만큼놀라운예술작품그자체였습니다.

이를달리생각해보면, 그토록중세의카톨릭교회가교회건축에열을올릴수밖에없었던이유를조금은이해할수있을것만같기도합니다. 지금도우리말로“성당”, 곧거룩한집이라고부를만큼, 교회는단순한건축물이상의의미를갖고있었기때문입니다. 일상언어로예배를드리거나출신배경과학력의수준에상관없이신앙생활을할수있는오늘날과는달리, 종교개혁이전의신자들에게신앙생활은자기방식대로쉽게행할수있는성격의것과는거리가멀었습니다.  일부사제들만이예배를독점하고있었고, 성경말씀조차읽기힘든라틴어를사용하여일반신도들은마음대로말씀을접할수도없는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성당이라하는하나님의집에서예배하고, 그곳에장식된화려하고도경이로운성상이나이미지를통해신앙생활을유지하는것이그들에게는특별할수밖에없는일이되어버린것입니다.

저역시놀라울만큼웅장하고아름다운교회건축물을보면서하나님과의신비로운관계를체험하는듯한인상을받았던것이사실입니다. 그안에있는것만으로도주님과의교제가이루어지는것만같고, 거룩한영적체험을하고있는듯한느낌을받았습니다. 아마도대부분의사람들이그와비슷한생각을했는지도모르겠습니다. 그런데시간이지나면서, 아무리좋은것이라도자주보면그감동이줄어든다는말처럼점점무뎌지는것을경험하게되었습니다. 함께순례의길을동행하던여러분들도“또성당이야”라는말을무심코하는것을목격하기도했습니다. 특히세계최고의고딕양식을자랑하는독일의쾰른대성당을방문하고나니, 나머지교회건축물들은말그대로“거기서거기”처럼느낄정도로감동을주지못하는상황이벌어지기도했습니다.

이것은아마도오랜역사를거쳐오며점차신앙의본질이흐려지게된원인과도연관이있다는생각이듭니다. 만일교회의건축물을통해신앙생활의정수를누릴수있다고생각했다면, 더더욱영향을받았을가능성이큽니다. 더높이, 더크게, 그리고더화려하게수놓은건축물을통해하나님을만나고영적인체험을할수있다고믿었던중세카톨릭교회가점차무너질수밖에없었던이유가여기에있다는것입니다. 하나님과의순수한교제를교회예배당안에있는것과동일시할때나타나는현상이자결과라는겁니다. 성령의역사를경이로운건축물안에거한다는사실을통해이룰수있다고믿는착각의산물이아닐수없습니다. 과연이런왜곡된신앙을통해참된믿음의열매를맺을수있겠습니까? 

면죄부를판매하면서까지엄청난교회건물을세우려했던중세교회가개혁의대상이될수밖에없었던까닭이바로여기에있습니다. 포도나무의비유를통해교회의본질을분명하게가르쳐주셨던예수님의말씀을생각해보면, 그이유를더욱  분명하게알수있습니다. 예수께서포도나무안에거하는지체가되라고하신말씀은결코교회의건물안에머물러있는성도의모습을가리키고있는것이아닙니다. 물론교회의예배당안에서하나님을찬양하고기도와말씀에몰입할수있다는것은그자체로도매우은혜로운모습이아닐수없습니다. 하지만우리가머물러야할포도나무는단순히형체를가진교회의예배당이나교황을중심으로하는카톨릭교회의조직처럼제도로서의교회를의미하는것이아닙니다. 예수님도스스로를포도나무라고하지않으셨습니까?

다시말해, 우리가정말머물러야할곳은바로그리스도이신예수님이되어야한다는것입니다. 우리가생명을얻을수있는길이바로그분께있기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장6절에도기록되어있듯이, 주님은스스로를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통해우리는생명의진리를얻을수있습니다. 그분이바로우리에게영원한생명을향해가는길입니다. 그러므로나무에서떨어진가지가생명을잃어버릴수밖에없듯이, 예수님으로부터떨어진그어떤신앙의형태도결코영적인열매를맺을수없는법입니다. 

그런의미에서중세교회가무너진결정적원인도궁극적으로는교회가예수라는포도나무에서떨어져나왔기때문이라고할수있습니다. 열매맺지못한가지가되어버렸다는뜻입니다. 사실이비유는당시예수께서율법과성전의전통에얽매여있던유대사회를비판하며하신말씀이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말씀을율법의형식과성전의  권위에만국한시키려했던유대교의모습이결국열매맺지못한가지나다름없다고지적하신겁니다. 예수님은본문8절의말씀을통해이를다른각도에서설명해주시기도했습니다. 열매맺지못하는가지의모습을제자로서의삶을살아가지못하는것에견주어설명하신겁니다.

사실제자로산다는말은한마디로스승의가르침을따르는삶이라고도할수있습니다. 예수님의가르침은매우분명한것이었습니다. 바로“서로사랑하라”는계명이었습니다. 본문바로뒷구절말씀인10절에서예수님은계명을지킬때주님의사랑가운데머물수있다고하셨습니다. 이는두가지사실을알려주는말씀입니다. 하나는포도나무의열매를사랑이라고가르쳐주고있다는사실입니다. 다른하나는주님의가르침을따라제자로살아갈때비로소포도나무안에거하는지체가될수있다는사실입니다. 결국제아무리화려한건물을짓고, 율법에아무리능통하더라도사랑하지않으면그것은쓸모없는가지나다를바없다는것입니다.

유대의형식적율법주의처럼중세교회가개혁의대상이될수밖에없는이유도여기에서찾을수있습니다. 교회가세상을사랑하기보다, 오히려세상을자신의욕망과유익을위한도구로삼았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이는남에게큰잘못을범하거나해를끼치지만않으면된다는소극적의미보다더강력한요구라고할수있습니다. 교회가사랑하지않으면, 결코포도나무의지체로남아있을수없다는말씀입니다. 무엇을크게잘못해서가아니라사랑을하지않는다는이유만으로도교회는반성과참회를해야한다는것이지요. 그것이바로예수님이말씀하시는포도나무의열매맺는방식이라는것입니다. 

금번종교개혁지를탐방하면서,저는교회개혁을위해자신의삶을헌신했던믿음의선각자들을떠올리면서, 동시에오늘우리시대의교회가처한현실을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우리자신은또다른종교개혁의대상이아닌주체가맞는가?’라는질문과함께말입니다. 분명한사실은우리가개혁의대상이아니라주체가되기위해서는먼저열매맺는포도나무의가지와같은역할을행하고있어야한다는점입니다. 그리고이를분명하게알수있는기준은지금우리가서로사랑하며살고있는지그여부에달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그렇다면서로사랑한다는기준은무엇을가지고말할수있을까요?금번순례의여정중에저를감동시킨것은비단역사적교회의건축물이나종교개혁가들의발자취만이아니었습니다. 여행의막바지에함께동행했던한목사님의간증은무엇보다진한감동을가져다주는순간이었습니다. 금번에함께동행하기도했던목사님의둘째아들은자폐증을갖고있습니다. 누구에게맡기고올수가없어서목사님내외는어쩔수없이아이를데려오게되었습니다. 오랜만에나온여행이었지만, 결국두부부는한순간도중증자폐증을앓고있는아들에게서눈을뗄수가없었습니다. 남들처럼탐방에집중하기가어려웠습니다. 그러니여행이라기보다는오히려더힘든순례의과정이될수밖에없었다고합니다. 

벌써15년간을그렇게지내다보니참으로어려움이많았던것으로보입니다. 아무리부모라하더라도, 보통아이들과는다른행동을보이는아들을쉼없이지키고돌본다는것은말처럼쉬운일이아니기때문입니다.그런데목사님이종교개혁지를탐방하는도중에이런간증을하는것이었습니다. 우리가각양각색의다양한교회건물과주택들을보면서감탄하지만, 사실은우리자신도각기개성이다양한집의모양을갖고살고있는것이라고비유한겁니다. 그러고보면목사님의자폐아아들도다만일반적인사람들과는다른형태의집에머물고있는것에불과하다는것이지요. 그속에서자기만의세계를사는것뿐이라는겁니다.

하나님은특정한집이나보편적인어느형태를가진이들만을위해세상을창조하시지않으셨습니다.생명이있는모든것들을창조하시고,이름을붙여주셨습니다. 이를통해모든것은그나름대로의의미와가치를갖게되었습니다. 생명이있는존재마다모두그자체로목적이되는축복을주신겁니다. 모두가사랑받을만한충분한이유를다부여해주신것이지요.그래서그목사님은만일하나님께서지금그아들을다시선택할것인가라는선택권을주신다하더라도, 결국자폐증아들을선택할것이라고힘주어말하였습니다.

저는그목사님의간증을들으며이런생각을해보았습니다.우리가사랑하고또사랑받는것은그럴만한이유나조건이충족되기  때문이아니라는사실을말이지요. 거기에있다는사실만으로도사랑받고사랑할충분한이유가되는것입니다. 따라서서로를사랑하는것은나아닌다른이를그대로받아들이고인정하는것에서부터시작하는것임을알수있습니다.예수님의말씀처럼내몸처럼다른사람을대할뿐만아니라, 설사나랑완전히다르다하더라고그것을이해하고포용하는것이바로서로사랑하는모습이라는것을깨달을수있습니다.

지난27일분단된한반도의상황을상징적으로보여주는판문점에서역사적인사건이있었습니다. 남북한정상이만나한반도의평화와화해,그리고통일에대한합의문을발표하게된것입니다. 약10cm밖에되지않는경계를두고지난65년의시간을반목과갈등으로보낸우리민족에게역사적변화를알리는신호탄이되는사건이아닐수없습니다. 물론여전히갈등과분열의씨앗이남아있다하더라도, 일단평화의길을열어가기위해첫발걸음을성큼내디뎠다는사실만으로도매우의미있는감격적순간이라말할수있습니다.

저는종교개혁지탐방을마치고돌아오는길에,이소식을접하며이런생각을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아니라교회의제도와의식에머물러개혁의대상이되었던중세교회의가장큰오점은바로서로사랑하기보다생명을도구로삼았다는점이었습니다.비록나와는다르다할지라도, 모든생명은충분히사랑받아야하고, 따라서서로사랑하는것은당연한의무입니다.그것이바로예수님의계명이기도했습니다.그러나교회는한생명의소중한가치보다물질과권력에눈이멀어사랑을잃어버렸습니다. 오직자신의유익만을구하며예수의사랑가운데머물기를포기해버렸습니다. 그것이바로청산의대상이된이유였습니다.

남북한이갈라져반세기이상을반목하며살아온남과북도이제는 너무나도다른체제와환경, 그리고생활방식을갖게되었습니다. 이제는다시함께산다해도그과정이쉽지않을만큼그간격을좁히는것은여간어려운일이아닐겁니다. 그렇다고해서우리가다르다는것이서로를향한사랑과배려도무의미하다는것을뜻하는것이아닙니다. 여행을하며다른문화와환경에감동하는것은말그대로익숙했던나의것과는다른것을있는그대로받아들일수있었기때문입니다. 다르다는것을인정하고,그것의가치를그대로존중할수만있을때비로소여행도참의미를갖게되는겁니다.

바라기는남북한의평화와화해, 그리고통일의노력도이와같이서로의다름을인정하며받아들이는것에서부터시작할수있기를소망합니다. 이를통해서로를존중하고상생의길을모색할수있어야합니다. 그것이바로서로사랑하는포도나무의열매를맺어가는길입니다. 그때비로소우리는하나된포도나무의모습을회복할수있을것입니다.  급격하게변해가는환경과정세속에서오늘우리의교회가그리스도예수의가르침을따라열매맺는삶을살아갈수있기를소망합니다. 서로사랑하며그리스도의몸된교회로모두가  열매맺는포도나무의지체가될수있기를간절히축원합니다. 

부활의 증인

누가복음24:45-48

 

오늘본문은부활의증거를나타내는여러에피소드중의한부분에해당합니다. 부활의아침에일어난빈무덤에서의사건과함께자주인용되는말씀이기도합니다. 이이야기도부활의날을그시점으로하고있습니다. 그날에엠마오로내려가는두제자에게예수님이동행하시며스스로를나타내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그들은다른제자들과마찬가지로그분이누구이신지를깨닫지못하였습니다. 16절을보면이를누가는눈이가려져있었기때문이라고표현하고있습니다. 영적인눈이뜨이지않아서볼수없었다는뜻입니다. 그런데엠마오에다도착한뒤함께머물기로한집에서예수님은그들에게성찬의의식을베풀어주십니다. 그러자비로소제자들은그분이누구이신지를깨닫게됩니다. 

하지만흥미로운점은31절에기록한대로예수께서떡을떼어주신것을받고나자눈이떠져그가주님이라는사실을깨닫게되었는데, 정작보이지는않았다는기록입니다. 예수님을알아보지못한이유가눈이가려져있었기때문이니까, 눈을뜨게되면서주님을알아보게되는것은매우당연해보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이보이지않는다고하니재밌는표현아닌가요? 이말은결국부활의주님을보는것은육안으로확인하는수준이아니라결국은영적인깨달음과연결되어있다는사실을분명하게알려주는대목이아닐수없습니다.    

오늘본문은바로이에대한설명부분이라고해도무방합니다. 곧부활하신예수께서제자들이깨달아야할부활의진실이무엇인가를분명하게제시해주는말씀이라는것이지요. 그것은이미성서에서도기록되어있는말씀이었습니다. 본문은이를이렇게요약합니다: “그리스도께서육신의몸으로이땅가운데오시어우리의죄를대속하시기위해십자가의고난을지셨습니다. 그리고죽음으로아버지하나님의뜻을완성하시고, 우리를향한그사랑을확증시켜주셨습니다. 이와함께죽은자가운데다시살아나시므로그리스도를믿는자마다멸망치아니하고영원한생명을얻을수있다는사실을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통한하나님의사랑이이제우리에게부활의소망을안고사는은혜까지이르게된것입니다.”

이것이바로부활을설명하는핵심입니다. 예수님이제자들에게가르쳐주신부활의진실이라는것이지요. 그러니육안으로본다해서이진실이깨달아질리가없는겁니다. 오직믿음의눈외에는받아들일수있는내용이아니기때문입니다. 그래서영의눈이뜨이면, 오히려보이는것만가지고믿으려들거나진실이라고생각하지않는법입니다. 그런의미에서진짜눈을뜨는순간은예수님이말씀하신것처럼, 보지않아도믿을수있는바로그때라는것이지요.

그렇다고부활의증거가아무흔적도남기지않는법은아닙니다. 예수님은그흔적을발견할수있다고말씀하고계십니다. 바로증인들을통해서가능하다는것입니다. 본래증인이란말은헬라어로”μάρτυς martys” 입니다. 법적인용어로사용할때는, 어떤사건의진실을알거나, 그사실여부를증명해줄수있는사람이란뜻입니다. 일반적으로목격자란의미와동일하게사용할때가많지요. 그런데헬라어martys는영어로순교(martyr)의어원이되는말이기도합니다.  단순히목격하고증거했다는의미가아니라, 순교의십자가를짊어지는사람이되었다는뜻입니다. 

따라서예수님이제자들에게증인이되라고하신말씀은단순히부활을목격했으니그것을사람들에게알리라는좁은의미로만해석할것이아니라는것이지요. 다시말해, 증인이되라는것은예수님의순교를너희도함께동참해서, 그것을통해나타내보라는보다적극적인의미로하신말씀이라는것입니다. 우리도자기의십자가를짊어질수있을때, 비로소그리스도의부활을증거할수있다는뜻입니다. 무엇보다이것만이우리가확인할수있는진정한부활의증거라는의미이기도합니다.

어떤의미에서이땅의교회가부활의증거가되어야한다는뜻이라할수있습니다. 성도가그리스도의뜻에동참하는거룩한제자로서의삶을살아가는것, 그게바로부활의증거가되는길입니다. 교회가세상의빛과소금의역할을감당하기위해세상과는구별된거룩한신앙공동체로바로서는것, 그게바로부활의증거가되는것이지요. 이제그누구도예수님을육안으로보는것은불가능합니다. 그리고진짜눈이뜨이면보이지않는게당연해집니다. 그러니부활의증거로볼수있는것은오직그리스도의살아있는지체가되어살아가는교회와이에속한성도들의삶말고는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눈으로볼수있는모든것이다증거가되는것도아닙니다. 화려한예배건축물이부활의증거가될수는없습니다. 수많은사람들이모여활발하게돌아가는교회의프로그램들로증거를삼을수도없습니다. 하나님의말씀과뜻이교회와성도를통해오롯이증거가될때비로소진정한증인의자격을얻을수있는것입니다. 증인으로서의삶을우리가살아갈수있을때, 그것이바로주님께서명령하신증인의소명과역할을다하는것이라말할수있습니다.

따라서증인이되기위해우리는십자가의순교자가되는길을걸어갈수있어야합니다. 그것은자기를십자가위에스스로못박는자기부인의길입니다. 그리고자기의십자가를짊어지고세상의풍조와는구별된삶을살아가라는뜻입니다. 소금처럼짠맛을내기위해먼저자신이녹아지듯부인되어야하고,  이땅의어둠을밝히기위한빛을내기위해먼저자신을태워버려야만합니다. 

자기를부인하는순교자와같은증인이되는길을보여주는단적인사례가운데하나가바로시선입니다. 자기의눈으로만보지않는것이지요. 요즘유행하는말가운데“내로남불”이라는말이있습니다. 내가하면로망스인데남이하면불륜이라는말입니다. 왜그런일이벌어질까요? 그것은모든것을자기중심적으로만보기때문입니다. 그래서자기자신을성찰하기보다는다른사람을비판하고자기생각대로만판단하게되지요. 저도가끔그런경험을하는데, 이상하게시선이흐릿하면잘들리지도않는경우가많습니다. 남의말을듣지않고자기할말만하게되는이유가이것입니다. 교회가세상을비추는빛이되지못하면, 거꾸로세상으로부터비판을듣게되는상황이옵니다. 그런데그때듣지않으면잘못된시선도고칠수없습니다. 그러니세상으로부터그런비판이오기이전에먼저순교하는마음으로자신을버리고복음의증인이되어세상을향해빛과소금이될수있어야하는것이지요.

우리한국의대표적사상가중한분인함석헌선생의말중에“자기로부터의혁명”이라는것이있습니다. 예전에한창학생운동이활발한때가있었는데, 당시많은청년들이정의와도덕적선으로잘무장이된것처럼보였다는겁니다. 그런데이들이사회로진출하고나서도그만큼세상이정의롭고도덕적으로선한상태였는가하면그렇지않았다는것이지요. 적어도양으로보면그래야하는데, 전혀그렇지못하더라는겁니다. 그이유를함석헌선생은사회의혁명을주장하는개인들이정작혁명되지않은채혁명을하고있었기때문이라고지적하였습니다. 쉽게말하면세상의변화를주장하지만이를주장하는개인은변화가되지않은결과라는것입니다. 나만빼놓고남만변하라고소리친꼴이된것이죠. 한마디로“내로남불”의전형이었다는겁니다. 

지난주한인총회에서도비슷한경험을하고돌아왔습니다. 모두가교단전체의변화된모습을한결같이주장하면서앞으로닥치게될위기를넘어서야한다는주장들을여러관점에서제시했습니다. 그런데다른한편으로교단의변화를주장하는우리자신은과연변화하고있는가라는질문을하게되었습니다. 혹시우리도내로남불하고있는것은아닌가라는의문을갖게된것이지요. 

우리가한가지잊고있는사실이하나있습니다. 그것은십자가의사건이결코우리와무관한남의일이아니라는점입니다. 결국주님을십자가의길로이끈것은바로우리자신이었습니다. 나는그자리에없었다는변명은비겁한주장일뿐입니다.  그것역시증인이아니라는것을스스로증명하는변명일뿐입니다. 2000여년이나지났으니우리는사실상그논란에서자유로운것이아닌가생각할수도있습니다. 하지만여전히부활을믿는교회와신앙인들에게십자가의사건은여전히진행형입니다. 지금도우리는어쩌면예수님의손에, 그리고그의가슴에상처를주는못질을하고있는지도모릅니다. 

당시예수를따르던제자들은변화된세상을꿈꾸었습니다. 하지만세상의변화를꿈꾼것은일부제자들만이아니었습니다. 모두가서로다른모습으로제각각의변화를꿈꾸었죠. 나름대로모두가삶의혁명가였던셈입니다. 하지만예수님은분명하게말씀하십니다. 모두가증인이될수있는것은아니라고말이지요. 변화된세상, 곧부활의세상을목격할수있는축복은그냥얻어질수있는것이아니라는겁니다. 스스로십자가를짊어질수있는자. 자기를부인하고하나님의자녀로회개하며시선을돌이킬수있는자. 자기의생각으로가득차내로남불하는것이아니라자기로부터변화와혁명을일으킬수있는자. 바로그들만이진정한부활의증인이될수있는것입니다. 

과연오늘저와여러분은이시대의진정한부활의증인이맞을까요? 오늘우리의시선을다른누군가에게던지기이전에자기자신을되돌아볼수있기를바랍니다. 부활의시작은바로지금여기, 우리자신에서출발한다는사실을잊지마시기바랍니다. 

 

 

믿음 보다 강한 증거는 없다

요한복음20: 19-31

 

지난 주 우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죄와 탐욕으로 죽어가던 이 땅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어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가게 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에게 부활은 그저 일어났을지도 모를 하나의 표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역사적 사건이자 생명의 구원을 허락하신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19절에 ‘문을 모두 닫아 걸어 놓고 있었다’는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외부와는 철저하게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비단 폐쇄적인 공간에 움츠리고 있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그들의 마음도 완전히 소외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더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제자들은 커다란 상실감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을 혼돈과 좌절의 상태에서 점점 외부와는 철저하게 단절된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대면도 자신들이 직접 찾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제자들을 먼저 찾아와 만나주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비록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듯 문은 닫혀있었지만,예수님은 그 가운데를 지나쳐 제자들을 직접 찾아 만나주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이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은 마술쇼에서나 볼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을 신비한 현상으로 바라보려는 생각과 일치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만을 가지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 증거는, 결국 육신에 난 상처 자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마치 환생하듯 다시 사는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도 이러한 모순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더 세심하게 관심두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닫힌 문도 통과하는 신비로운 영의 세계나 육신의 환생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는 사실이 결코 핵심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보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통해 우리가 더 깊이 깨달아야 할 핵심부분은 무엇일까요? 이를 알 수 있는 단서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와 하신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의 증거는 표징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지처럼 덧없는 육신에 주님께서 진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지요.비록 살아는 있어도 주님과 동떨어져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당시 제자들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말씀입니다.더이상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부활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도 결국은 생기를 잃어버린 마른 뼈와 같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쁜 소식은 바로 이들에게 전하는 생명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사후를 한세기 가량 지난 시점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르던 직계 제자나 동시대의 신앙인들과는 달리 이후의 세대는 신앙적으로 불신과 의문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지속시킬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눈으로 보던 때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적어도 예수님을 보며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처럼, 자신들도 눈에 보이는 확증을 얻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부활 이후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확신하며 신앙을 지속시켜 나갈 것인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부활은 곧 주님의 임재 혹은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으로 함께 하지는 못해도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는 확증만으로도 신앙의 중심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내 안에 다시 사셔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얻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의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해서 그 능력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듣고 믿어지는 것이라 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로운 현상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 의미하는 바, 곧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 보다는 불신과 의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셔서 부활의 증거를 보이실때도, 도마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활의 소식을 다른 동료들로부터 들은 셈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람이 전하는 말가지고 판단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차라리 자신의 두 눈으로 손바닥에 난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고 만져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찾으신 뒤 8일이 지난 후에 다시 예수님이 그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이때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상태는 예수께서 처음 방문 하셨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시며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신다고 했지만, 이들에게 아직까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26절에서 문이 잠겨져 있었다는 부분은 단절되어 살아가는 그들의 고립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그들은 여전히 철저하게 폐쇄된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직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던 겁니다. 

이처럼 불안과 단절, 그리고 불확실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기방어 전략이 바로 의심입니다. 도마가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닫힌 문을 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렵고 불안하니까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아셨던 예수님은 처음 방문하셨을 때처럼 도마에게- 사실은 의심을 가진 모든이에게- 자신의 상처난 몸을 직접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 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복된 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징을 보고 나서 믿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 것을 확인한 것이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주님의 상처가 그 자체로 믿음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 상처를 통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향해 부어주시는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이를 깨닫지 못하면 그저 육신의 흔적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지요. 부활의 소망은 눈에 보이고 또 만져보아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보여주는 사랑이 더이상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는 믿음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내 안에 부활의 주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리라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활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그래서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많은 표징을 보여주어도,이보다 더 큰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령을 통해 얻는 믿음 만큼 강한 증거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 믿음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