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

요한복음 10:22-30

 

<어린 왕자>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는 인간성의 본질을 책임이라는 말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의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기도 하는 말이지만, 그가 말한 책임을 ‘공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그가 가진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상태, 그것이 바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본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로마서 12장 15절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공감’에 관한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 바꾸면, 책임지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예수님은 이 책임을 계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공감을, 그리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해서는 책임을 이야기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께서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지요.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죄 가운데 고통받는 우리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공감의 증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대속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책임의 완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은 한마디로 대속의 사랑을 완수하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책임이었던 셈이지요.나아가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공감과 책임의 완수를 통해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도의 사명이라고 보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한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의 공감 능력이 늘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 보다,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입니다.그래서 생텍쥐페리도 책임을 이야기한 것인지 모릅니다. 책임이 없이는 공감도 어렵고,따라서 사랑도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의 몸처럼 여기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그나마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효기간이 긴 책임과 사랑, 곧 공감은 한 몸을 이룰 때나 가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17장 21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도 이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포도나무의 비유처럼,하나님 안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성취되는 모습이라고 보셨던 것이지요. 서로 하나가 되어 공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마음이 굳은 이들조차 이를 믿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이를 보여주는 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진정 그리스도가 맞는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구원자였습니다. 힘으로 그들을 짓밟고 있던 제국의 힘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일어날 시온의 왕국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정체가 미덥지 못합니다. 아니, 믿음이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경한 언행을 일삼는 거짓예언자처럼 보이기 까지 했습니다.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처벌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가 말한 그리스도가 맞다는 자기 시인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겁니다. 어차피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정답은 애초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미국의 인구센서스 조사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니까, 반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 중에 “당신 미친 것 아니냐?”는 문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객관적이고 납득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미친 사람이 그렇다고 이야기 할지도 의문이지만, 미친 상태에 대한 정의도 불분명해서 대답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만 가지고 그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결과를 믿는 사람도 많지 않게 되겠지요. 

 

예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않은 이유를 또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의 가장 첫 장에 나오는 말은 그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요.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풀이하면 우리가 말로 부르는 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라는 것이 갖는 한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로 그 의미를 다 담아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맞는가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빗겨 대답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메시아 상을 갖고 있으니, 대답을 준다 해도 자기방식대로 이해하여 오히려 오해만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대답하시기 보다,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통해 알려 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어떻게 불리는가 보다, 그리스도가 행할 본질적 역할이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미 그 일,곧 하나님의 일을 증거해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몰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선포하고, 표적을 행해 보여주셔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주님의 양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을 갖는 반면 주님의 양이 아닌 이들은 의심으로 인해 결코 믿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신 내 양은 이미 정해진 특정한 양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누구는 날 때부터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사실 모든 양은 다 주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양은 모두가 다 그분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내 양이라고 구별하여 지칭하신 것은, 목자의 소리를 구별하여 듣고 따르는지 그 여부를 밝힌 것이지요. 말하자면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입니다.그런데 그 은혜를 알고 따르는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양으로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성도라 불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상과 구별된 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애초부터 주님이 말씀하신 내 양의 범주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 구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목자의 소리를 듣고 구분하여 따르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양은 자기 목자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숨은 보화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지는 의문이 가는게 사실입니다.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스스로 당혹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치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나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어디서 주어 온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목자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은 후천적인 경험과 훈련이 병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갖는 것에는 개인의 실천적인 의지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믿음을 인간의 의지로만 보아서도 곤란합니다.그것은 율법주의의 폐해처럼 믿음도 개인의 행위로 보아서, 결국 구원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을 수 있는 것도 받은 은혜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목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 능력도 주님이 주신 은혜라는 이야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목자를 구별하는 것도 사랑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란 뜻입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지난 주에도 우리 교회 송보름 집사님이 첫 아이를 출산하여 병원 심방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늘 신생아를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갓난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응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여하튼 아기는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와 체취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이지요. 엄마의 배 속에서 9개월 동안 한 몸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그 결과 엄마와 아기 간에 공감의 정도 역시 매우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것은 점차 엄마에게 모성으로 나타나고, 아기에게는 엄마와의 애착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아빠와 달리 본능적으로 아기의 상태를 공감하는 능력이 엄마에게 특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만큼 아기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달리 말하자면, 아기를 향한 사랑이 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우리의 관계를 비유하신 까닭도 이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본래 포도나무의 관계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라는 겁니다.다만 죄로 인해 떨어져 나간 가지들, 곧 목자의 소리를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떠나버린 양들이 발생해 그렇게 보이지 않는 현실이 생긴 것 뿐이지요. 그래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면서 동시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우리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한 순간도 자신의 양같은 우리를 그의 시야에서 버려두지 않으시는 신실한 목자라는 점입니다. 그 사랑과 돌봄은 우리 인간과 달리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치 갓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고 아기를 위해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금새 사라져 버리는 유효기간이 정해진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양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도 유효기간이 없는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공감 가능성도 유효기간이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남은 것은 그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우리의 책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받은 은혜에 걸맞게 책임 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양이라 부르시는 주님의 그 애틋한 마음을 공감하면서,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 무엇보다 값없이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 나가는 진정한 참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갈릴리

요한복음21:1-6

 

오래 전 한 미국 이민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밤늦게 교인들이 모여서 철야기도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누군가 교회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건장한 소방관들이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그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불이 난 줄 알고 신고를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인들이 큰 소리로 “주여 주여 주여”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 소리가 동네 주민들에게는 마치 “Fire!, Fire!, Fire!”하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웃지못할 해프닝이기는 하지만,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때 정말 성령의 불이 붙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지요.그래서 주변 사람들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요? 뜨겁게 불타오르는 초기 이민자들의 영적인 모습이 연상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간절했던 우리 이민 초기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오늘날 현저히 그 위세가 줄어들고 있는 한인교회의 상황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플로리다에서 열린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주류 교단에 속한 우리 한인 교회들에게 최근 주변의 여러 외적 조건은 녹록치 않은 상황입니다. 동성애 문제로 인해 발생한 교단 내부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이민자의 감소로 인한 한인교회의 성장 지체는 당면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총회에 모인 많은 한인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며 앞으로의 대책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 습니다.  

 

그런데 저는 총회의 논의 진행과정 중에서 한 가지 염려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부의 지도자들이 한인교회의 입장을 너무 한 방향으로 몰아가다 보니, 다양한 견해를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우려가 생긴 것입니다. 앞으로의 한인교회 대표 기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도,위에서 일부의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일방적으로 알리는 형식(Top-down)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구성원들이 함께 토론에 참여하여 공동의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물론 교회를 앞에서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눈에 보일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아무리 선한 의도와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맡기고 의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 임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먼저 앞서가기 전에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남의 신앙은 단순한 불장난 정도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것만 영적으로 뜨겁다는 착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일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에 성령의 불로 자기 내면을 비추어 성찰해 볼 수 있는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한인총회에서 말그대로 회의를 통해 논쟁만 벌이고 온 것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은혜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러 동료 목사님들의 말씀을 통해 도전도 받고 감동을 체험할 수 있어서 은혜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 강사로 말씀을 전한 김영봉 목사님의 설교는 현재 여러 위기에 직면한 한인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매우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설교를 통해 김 목사님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크리스텐덤 패러다임(Christendom Paradigm)’에 빠져 있다고 정의를 내렸습니다.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이란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 세상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일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다수자의 위치를 차지하거나,믿는 이들이 힘을 합하여 기독교 국가를 세워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신앙이 그렇습니다. 결국은 교회의 목표가 어떠한 형태이든지 힘을 얻는 것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성장하고 물량적으로 커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미국 교회나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이러한 열망과 믿음으로 교회의 목표를 세워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러다임의 시각으로 현재의 교회를 보게 되면, 결과적으로 위기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말그대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수적으로 줄어들고,기껏 성장한다는 교회들도 수평 이동을 통한 성장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보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 조차도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숙한 제자를 길러내기 보다 겉으로만 비대해 보이는 영적 비만에 빠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 갇혀 교회의 위기를 말하고,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한인교회의 리더쉽이라면 한번쯤 진정한 복음의 의미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설교의 핵심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시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크레스텐덤 패러다임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이 땅에 힘있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가리워진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고 그렇게 살게 하자는 데 목적을 둔 것이지, 그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자는 것 자체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복음의 능력은 권력이나 물질적인 돈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아프게 하는 원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강요하고 돈으로 유혹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낮아지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강압이 아니라 감동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이러한 시각으로 오늘 교회의 쇠퇴를 바라보면, 어쩌면 지금이 더 정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그 증거입니다. 비록 핍박 받고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고 교회다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교회를 키우거나 역량을 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부활의 증거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을 지키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성도의 신앙을 지켜내는 교회의 모습. 그것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과연 위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회로 볼 것인가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처럼 성장과 물량주의의 시각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오히려 지금은 복음의 진정성을 찾아가기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조차, 누가 더 높은 곳에 앉을 수 있는가를 따지던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가르쳐 준 바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양적 성장에만 두고,이것이 어렵게 된 현실을 위기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나무라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은 높거나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 하신 곳은 바로 갈릴리였지요. 갈릴리는 당시 유대 사회의 계층구조로 본다면,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디베랴 바닷가가 바로 갈릴리 호수입니다.디베랴는 후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부른 지명인데, 이는 이미 갈릴리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장 낮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이미 황제의 논리, 곧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물고기를 낚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마4:18-24)고 하신 말씀대로, 교회의 사역들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었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 빠진 신앙으로 교회는 결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당시 많은 제자들은 여전히 강성한 유대의 왕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그 시작이라고 생각했지요.그 모습을 요한은 마치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부재한 교회,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아무리 사람을 낚는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교회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갈릴리로 돌아간 이유, 곧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사랑으로 품을 수 없다면 교회는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량적 성장과 화려한 외면을 목적을 목적으로,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힘과 능력에만 의존하여 사람을 낚으려는 교회의 모습은, 결국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한 빈 그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있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이것은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그 방향을 따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쪽이든 던지라 하는 쪽으로 던질 수 있는 순종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인교회의 어려움 속에서 교단을 탈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조직을 구성해서 버틸 것인가 라는 방향도 중요한 문제인건 분명하지만, 그보다 오늘 우리 교회들이 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했던 제자들처럼, 교회의 본질적 목적을 지키고 있는가 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교회의 위기가 아닌 기회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가야할 갈릴리로 향해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그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많은 한인교회가 앞으로 미래 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위기에만 시선을 빼앗겨 근시안적인 대책을 세우고,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와 이해관계만 따지려 드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교회에 주님이 가라고 명하신 우리의 갈릴리는 어쩌면 지금 교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지금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미래 세대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시선은 앞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교회의 사명을 이어나갈 그들에게 향해 있어야 합니다. 보다 멀리 시선을 두고, 조금은 더디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천히 주님과 함께 그물을 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 때 비로소 교회가 거두어야 할 열매가 차고도 넘치는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주침을 넘어서

요한복음20:24-29

 

지난주우리는부활의기쁜소식을함께나누었습니다.그리스도의부활을믿는것은기독교신앙의핵심입니다.다른종교는물론이고세상과그리스도인들을구별시키는가장중요한차이라고할수있습니다.물론부활은십자가의죽음을전제합니다.신앙적으로적용해보아도,자기를부인하지않고거듭날수없는법이지요.역으로부활의소망이없는죽음은의미가없습니다.사람들의비아냥처럼부활이없는십자가의죽음은어리석고,오히려사람들을시험들게만들뿐입니다.그런의미에서그리스도의십자가죽음과부활은우리에게생명의가치를제대로알려준사건이었습니다.우리를향한하나님의지극한사랑을확증한구원의역사라는것이지요.이를믿는자마다죽어도죽지않는영원한생명을얻을수있으니말입니다.

 

그런데문제는많은이들이이러한부활의진정한의미를받아들이기힘들어한다는사실입니다.그것은예수님의제자가운데하나인도마도마찬가지였습니다.사실본문에등장하는도마는십자가처형과부활을직접목격할수없었던모든시대의사람들을대표하는인물이라할수있습니다.처음, 부활하신예수께서죽음의공포에사로잡혀문을걸어잠그고숨어있던제자들을찾아가주셨을때,도마는그자리에없었습니다.말하자면체험을통해증언한사도들과다른입장에있었던이들의상황을보여주는것이지요.실제로요한복음이기록될시기에는이미예수님의행적을직접체험한세대가세상을떠난지한참지난때였습니다.그러니까이전시기와달리눈으로보고믿을수있는신앙이불가능한시점이었던것이지요.이러한상황속에서흔들림없이신앙을유지하고,부활의소망을지키는것은아주중요한문제가아닐수없었을겁니다.오늘본문말씀은이러한배경하에서기록된것이라할수있습니다.

 

물론사도라통칭되는제자들도처음부터부활하신예수님을알아보았던것은아닙니다.예수께서직접보여주신증거를눈으로확인한뒤에야인정할수있었던것이지요.사도들은예수님을직접본제자들이었습니다.그러니까예수님의상처를보고확실히부활을믿을수있었던것이지요.초대교인들에게이부분은매우중요했습니다.왜냐하면대부분의사람들은이증인들을통해부활의확실한증거를삼아믿을수있었기때문입니다.비록많은사람들이본문의가장중요한구절로“나를보지않고도믿는사람은복이있다”고도마에게하신예수님의말씀을언급하지만,분명한사실은기독교신앙의뿌리인부활의증거는사도들이직접보고전한것에서시작했다는점입니다.이들이보고체험한부활의증언은기독교신앙의뿌리라고해도과언이아니라는것이지요.

 

사실예수께서제자들을처음부르실때도, “와서보라”는말씀을하셨습니다(요1:39).직접보고자신이메시야라는사실을깨달으라고하신것이지요.그러니까보고믿는다는것을무작정비난할수도없는노릇입니다.어쩌면거꾸로보고믿는게더어려울수도있을것이란생각을해봅니다.예컨대, 우리가예수님당시시대를살았거나아니면오늘이시점에예수님이찾아오신다고가정해보십시오.오히려눈으로보고나서더믿음이가지않을수도있지않을까요?그래서당시많은유대인들이예수님을업신여기고반대했던것아닐까요?

 

그렇다면도마에게“나를보지않고도믿는사람이행복하다”고말씀하신이유는무엇일까요?바꾸어말하자면,요한은어떠한의도로이런말씀을전하고자한것일까요?이미언급한대로초대교회를비롯해오늘날까지부활에대한그리스도인들의믿음은직접보고체득된것이아닙니다.베드로전서1장8절말씀에도,“여러분은그리스도를본일이없으면서도그분을사랑하고그분을보지못하면서도믿고있으며또말할수없는영광스러운기쁨으로넘쳐있습니다”라는구절이나옵니다.보고서야믿을수있다는생각과거리가먼이야기입니다.사실상그런믿음은불가능한일이기때문입니다.오늘날우리그리스도인들의신앙이다보지않고도믿는믿음아니던가요?우리는그시대의사도처럼예수그리스도의부활의흔적을본적은없지만,그들의증언과신앙고백을통해부활을확신하고있는것아닙니까?

 

여러분은어떠신가요?확실히그리스도의부활을믿고계십니까?예수님의말씀처럼우리도그날에부활의역사를통해영원한생명을얻게될것을믿고계신것이맞나요?

 

지금그렇다고하신분들중에대부분은보고믿는신앙을가지고대답한것이아닙니다.이미하나님의말씀을통해예언되고예수님의선포를통해알려진그사실을믿는것이지요.그리고이를눈으로확인했던사도들의증언을통해확신을갖게된것입니다.그것은오늘날소위말하는과학적증거와는다른의미입니다.검증이불가능하기때문입니다.요즘처럼검증되지않으면,믿지못하는세상에서불신의대상이되는이유이지요.그렇다고이것을말그대로믿을만한것이못된다고말할수없습니다.과학적증거라는것은보통경험을통해보편적인타당성을얻는것을의미합니다.쉽게말해, 1+2=3이라는공식은누가해도똑같이나오니검증이나예측이가능하지요.반복속에서도동일한결과를가질수있다는것이바로그특징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의십자가죽음과부활은일회적인사건이었습니다. 2000년전그리스도를통한대속의은총으로이미우리는죄로부터자유함을얻게된것이지요.그분의핏값으로우리는용서를받았고,그분의부활로우리는생명을얻은것입니다.그러니현실적으로이사건이반복적으로이루어질필요가없는것이지요.과학적증거없이는부활을믿을수없다고하는사람들에게이사건은,그래서우연적인것으로간주됩니다.어쩌다한번일어난우연적인사건일뿐이라는것이지요.그것도확실하지않은.그렇다면예수님은우리에게“어쩌다마주친그대”라는말이됩니다.아무의미없이지나칠수도있는마주침의대상이라는뜻이지요.

 

사실우연적인마주침이라는말안에는믿음과불신을가르는한가지단서가담겨있습니다.예를들어보겠습니다.우리는길을걸으며하루에도수많은사람들과마주칩니다.그중에기억에남는사람들은실상손에꼽을만큼적지요.기억에없다고해서보지않은것은아닐겁니다.그러니까마주침이‘본다’는우리의감각적경험을확신시켜주는것은아니라는뜻이지요.다만우리가마주침속에서기억하는것은본것에의미나가치를부여하기때문입니다.잘생겼다거나아니면우연히마주침의순간어떤생각이떠올라서그것을통해그사람이기억되는것이지요.

 

과학적검증을요구하는사람들의말처럼부활을우연한마주침이라고한다해도,한가지변함없는진실은그것이보지못했다는사실을증거해주거나아무의미가없는일회적사건이라고말할수없는이유가바로여기에있습니다.보았다는증거는사도들의경험을통해증언이되고있고,부활의의미는지난2000년동안수많은그리스도인들의신앙고백을통해반복되고있기때문입니다.

 

저의개인적신앙고백도마찬가지입니다.우연히도저는기독교신자인부모님의아들로태어나신앙을가질수있었습니다.일회적인것으로보자면,그것도우연적인마주침이고검증불가능한사건입니다.하지만부모님의증거를통해,저역시신앙을고백하게되었습니다.그리고이제는더이상이모든것이그저우연한마주침이아니라,저에게는매우의미있는사건이되었습니다.십자가의고난처럼자기를부인하는삶이얼마나고귀한것이며,부활에대한확신이얼마나삶의소망이되는가를깨달았기때문입니다.

저는도마에게말씀하신보지않고도믿는믿음은어쩌면실제눈으로보고안보고를의미하는것이아니라는생각을해봅니다.애초부터그것은중요한문제가아니었으니말이지요.우연한마주침속에서의미를갖도록만드는것은눈으로보는것이아니기때문입니다.따라서예수께서오늘우리에게도전하는이믿음의의미를다시한번곰곰히생각해볼수있기를바랍니다.보지않고도믿는믿음은단순히지나치는우연한마주침을넘어서,그리스도의부활의의미를우리삶속에되새길때가능한것입니다.그리고그말씀가운데살아가는믿음입니다.그것이바로2000년전우연한마주침처럼우리를찾으신그리스도의부활이지금도우리의삶속에여전히실현되고있는이유가아닐까요?

참을 수 없는 부담

요한복음20:1-10

 

부활은 온 인류에 전한 소망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활을 일시적인 육체의 소생이나 윤회처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환생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두가 현실에 기반한 생각일 뿐입니다. 현재의 삶을 지속시키거나, 지금 보다 나은 형태의 삶을 바라는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재의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아침 마리아와 제자들이 목격한 빈무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부활의 시작은 바로 죽음이고, 그 죽음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는 것이라는 뜻이지요.그래서 무덤이라는 죽음의 공간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부활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완전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자기는 죽고 철저히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육신의 소유나 욕망에 대한 집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버리고 죽어야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천국잔치를 미리 체험하는 것처럼,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삶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미리 경험하는 겁니다. 그러면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호흡하는 매 순간마다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사회만 하더라도, 부활절이 그 본래적 의미와 상관없이 성탄절이나 발레타인데이처럼 상술의 대상으로 변화된 징후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 전후로 증가하는 카드나 엽서 회사의 매출은 그래도 수긍이 갈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토끼 모양의 장난감과 디자인으로 도배되고 울긋불긋한 계란으로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면서 언젠가부터 부활의 상징이 토끼와 계란으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이 생길 정도입니다. 물론 이렇게 이미지화해서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기억되어야 할 본래적 의미가 변색되거나 지워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무덤을 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만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그들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가지고 판단했던 것이지요.그래서 빈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이미 그들에게 예고하신 부활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했습니다.이는 당시 그들의 처지를 잘 보여주지요. 아마도 그들에게 십자가의 사건은 절망과 두려움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의미처럼, 부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이 십자가 사건은 말그대로 절망적인 죽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크지요. 눈에 보이는 영광은 갈망하면서도 고난은 피하려는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기 좋고 귀로 듣기 좋은 것만 취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갖기 쉽다는 겁니다. 높은 곳에 앉기를 좋아하고 관심 받으며 사람들의 이목에 집중했던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다를 바 없는 얄팍한 신앙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눅11:43).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이가 진정한 신앙을 가진 제자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16:24). 한마디로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빈무덤을 바라보며,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깨닫는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그 죽음의 무덤에서 새롭게 부활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가장 큰 차이를 메시아에 대한 시각에서 찾은 바 있습니다. 유대교는 여전히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지만,기독교는 이미 기다리던 메시아의 강림을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이 이를 확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저 넋놓고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라는 겁니다. 이를 그는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지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이것이야말로 “깨어있으라(눅21:3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며 사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사건입니다.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약속 사이에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새로운 소명입니다. 거룩한 책임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의지하는 철저한 자기버림의 신앙입니다.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얻은 부활의 선물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종들을 교회의 직분자로 임명하고 함께 축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교회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는다고 세상의 직분처럼 위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값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곤란합니다. 아무리 땅에 떨어진 교회의 권위라 해도, 직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지체로 특별히 부름을 받는 일입니다. 그만큼 영적인 위신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다만 교회의 직분은 관심을 더 많이 받고, 영향력을 그만큼 크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지고 더욱 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임직하는 모든 분들이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안고 주님의 섬김에 헌신하며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며, 증거할 수 있도록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함께 격려하며, 오늘 이 고백과 결단의 순간을 증거하여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세운 교회가 더욱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도록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와 함께 부활의 열매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맺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누가복음23:33-43

 

오늘본문에는십자가에달린예수님을향해조롱과비판을행한세부류의사람들이등장합니다. 첫째는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정말하나님이택하신자가  틀림없다면, 자신이나구하라며비아냥거렸습니다. 둘째는로마의병정들입니다. 그들은예수님에게신포도주를주면서“만일유대인의왕이틀림없다면자신을구해보라”고조롱하였습니다. 셋째는예수님과함께십자가형을당한두죄수중의한사람입니다. 십자가형이주로정치범들에게행해지던당시의식민지체제상황을고려해보면, 아마도로마제국에저항하던독립운동가가아닌가유추해볼수있습니다. 그는예수님에게“진정그리스도라면, 너와우리를구원하라”고비난하였습니다. 세사람모두예수님을향한태도가부정적이었다는점에서는다르지않습니다. 그들은한결같이예수님을그리스도로인정하지않았습니다. 그래서정말그리스도가맞는지확증해보이라며조롱했던것이지요. 이는예수님이광야에서사단에게받은세가지시험과거의다를바없었습니다. 


그런데이세부류의사람들은당시초대기독교교회가맞서싸워야할특정한세력들을상징적으로보여줍니다. 복음서전반에걸쳐묘사되고있는것처럼유대교는예수님을그리스도로받아들이지않았습니다. 오히려하나님의가르침에어긋나는문제거리정도로밖에여기지않았습니다. 그래서예수를따르던당시많은이들에게정말그가그리스도가맞다면, 과연이런십자가사건이가능할수있겠는가반문했던것이지요. 반면병정으로대표되는로마제국은세속적힘을과시하며예수에게그에상응하는능력을요구했습니다. 정말왕과같은권력을가지고있다면힘으로증명해보라는것이지요. 사실많은식민지유대백성들도이를기대하고있었던것으로보입니다. 옛다윗왕시대의부흥을다시되찾을수있을것이라는기대를가지고있었던겁니다. 


죄수로묘사된세번째사람의입장이이를잘보여주고있지요. 유대의민족적시각에서보면그는어쩌면영웅으로추앙받을만한애국자인지도모릅니다. 그에게구원은로마의식민지배로부터민족의해방을이루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죽음을무릅쓰고로마정권에저항하다가결국십자가사형을받는처지가되었는지도모릅니다. 그의입장에서생각해보면, 예수님의행적은도대체이해하기힘든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큼많은민중의지지를받고영향력을가지고있는사람이그힘을제대로써보지도않고십자가에달려있다는사실이도저히납득이가지않았던것이지요. 너무나비현실적이고허무한주장만늘어놓고, 정작무고하게죽어가는사람들을그저바라보고만있는그가원망스러웠을겁니다. 


입장의차이에따라내용은약간다르지만, 결국이들의주장속에서찾을수있는한가지공통점이있습니다. 그것은그리스도의능력이현실적으로나타나야한다는사실입니다. 그것이힘이든아니면기적이든당장눈으로볼수있는형태로드러나야한다는것이지요. 표적을구하던유대인들이나, 힘으로지배관계에놓여있던로마제국과식민지유대민족이납득할수있으려면그만한능력을보여주어야만예수를그리스도로인정할수있다는뜻입니다.  유대인의왕이라고쓰인십자가의죄수명패는이들의생각을단적으로보여주는대목이아닐수없습니다. 그호칭은예수가 유대인의왕을사칭하고민중을호도한죄수라는뜻이니, 당시예수를조롱하며비판하던이들의판단이어느정도인지를아주명확하게보여주는것이지요. 


사도바울은당시의상황을이렇게묘사하기도했습니다. 십자가사건은유대인들에게거리끼는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미련한것이라고말입니다(고전1:23). 하지만믿는사람에게그것은하나님의능력이라고주장했습니다. 비록세상에보여지는모습은한없이초라하고무능력해보일지모르지만, 믿음의눈에그것은온인류를구원의길로인도하는놀라운능력의사건이라고본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기독교신앙의핵심은언제나역설적이었습니다. 공생애기간동안예수님이선포한복음의핵심도세상의논리와는다른‘모순투성이’었던것처럼말입니다. 십자가의고난과죽음을통한생명의완성은이를극적으로보여준사건인것이지요. 그래서구원을이야기하면서도예수를믿으라고하지, 그능력을보고아는것이라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이행하신기적을보아야믿을수있다는태도는진정한믿음이라고보기어렵다는것이지요. 율법을지키거나선지자의행실을본받는것도믿음의본질이라고생각하지않았습니다. 오직예수를믿는그믿음만이기독교신앙의정수라고가르쳤습니다. 

 

이를잘보여주는예시로본문의마지막에한인물이등장합니다. 예수님과함께십자가에달린두죄수가운데또다른사람입니다. 그는예수를비난하던다른죄수를나무라며예수님께주님의나라에들어가실때자신을기억해달라고간청합니다. 예수님이구원의길이라는믿음의고백을행한것이지요. 마치믿음이란이런것이라고보여주는것처럼말입니다.


지난한주간뇌출혈로의식을잃고중환자실에누워계신장모님을뵈러한국에다녀왔습니다. 매일장모님을보기위해대학병원중환자실을오가며, 그곳에서고통으로신음하는이들과사경을헤매는여러환자들을볼수있었습니다. 주말에도응급환자들은끊임없이들어왔고, 그중에어떤이들은회복되지못하고싸늘한주검으로병실을떠나기도했습니다. 우리가의식하지못하는순간에도고통받고아파하는이들이그렇게많다는사실에새삼놀라지않을수없었습니다. 

 

중환자실의면회시간이저녁1시간으로정해져있었기때문에, 그시간이되면환자를보기위해가족들이초조한마음으로중환자실이열리기를기다리며문앞에대기하곤했습니다. 모두가주어진시간이되면일제히뛰어들어가, 지난하루의시간동안환자에게어떤호전이있었는지를먼저살펴보게됩니다. 특히저의장모님처럼전혀의식을찾지못한응급중환자의가족들은초조하면서도간절한마음으로환자를찾습니다. 저와가족들역시매일간절한마음으로찾아가말씀과기도로하루의만남을시작하곤했습니다. 감사하게도여러성도님들과주변지인들의기도덕분에위독한상태는잘넘어선상황입니다. 그런데아직까지도의식을회복하지못하셔서, 저희는하루빨리눈을뜨실수있도록하나님께서역사하시기를매일간절히기도했습니다. 

 

물론기대한것만큼눈에띠는변화가있었던것은아닙니다. 기적과같은일이눈앞에벌어지기를바라는마음이야간절하지만, 아직하나님의뜻은아닌가봅니다. 앞으로더길고도험난한과정이있을지도모릅니다. 어떠한경우에는우리를시험에들게할만큼힘든상황이벌어질수도있습니다. 염려와걱정에서완전히자유로울수없다는사실도알고있습니다. 그런데도저희에게한가지믿음이생겼습니다. 그것은보면서알게된체험이아닙니다. 성경에나오는기적이야기처럼병상을갑자기일어서게하실것이란확신도아닙니다. 그런바램이없는것은아닙니다. 한번만이라도눈을마주치고앉아이야기를나눌수있으면좋겠다는소망이야간절하지요. 그러나저희가갖게된믿음은그런것이아니었습니다. 오히려앞으로일어날어떠한기대가아니라, 지금이순간에도주님이저희와함께하고계시다는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그믿음으로하나님앞에간절히기도합니다. “들으시고응답하여주시기를” 말이지요. 그응답은오늘예수께서하신언약의말씀이면족합니다. “너는오늘나와함께낙원에있을것이다.” 이말씀이큰위로와힘이됩니다. 이렇게라도병상에서어머님을오랜시간보면서저희가족이그동안못다한만남을갖게하신것에감사할수있었기때문입니다. 이번일을통해긍휼한마음으로저희를위해기도로중보하시는많은분들의사랑을새삼깨닫게하셨기때문입니다. 무엇보다지금주어진모든것의소중함을다시돌아보게하신것에감사를드립니다. 

 

오늘고난주일을맞이하여, 우리를위해자신의몸을십자가위에서찢기신그리스도의살과피를함께나누고자합니다. 죽음으로우리를생명의길로인도하신가장극적인역설의사건에함께참여하는것입니다. 성찬의예식에참여함으로써“오늘나와함께낙원에” 있을것이라는주님의언약을온몸과마음으로체험하는여러분모두가될수있기를바랍니다. 감사하는마음으로나오십시오. 그리고언약의말씀을통해힘과위로를얻으십시오. 예수가우리의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는믿음으로구원의놀라운기적을체험하는저와여러분모두가되시기를주님의이름으로간절히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