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요나

요나 3:1-5, 마가복음 1:14-20

 

새해를 맞이하여 목회 계획을 점검하면서, 개인적으로 요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사명이라는 것에 적극 동감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구원과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양육하는 개인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눈에 띠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조바심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만을 놓고 보더라도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가 먼저 해야할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되물어 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과연 한 영혼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행여 교회의 사역자가 담임목사의 목회에 일방적인 도구가 되어 버리고, 교인들도 교회의 행정적인 업무나 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반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 수입이 증가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되어버린 비정상적인 상황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도 변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되짚어 보기 위해서 입니다. 행여 교회를 생각한다며, 정작 교인 하나하나의 삶에 대해서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부족한 자신의 연약함과 무관심을 탓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대형교회의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가 “주의 종에 대적하면 하나님이 치워버리신다”는 말씀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이지만,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생각해 보면 거의 공갈 협박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에게 대들면 없던 병도 생기고 삶에 어려움이 닥친다는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목사가 더 기도하지 못하고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목사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도 교회의 역할을 온전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목사가 곧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교회를 사유화하거나 교인들을 도구화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전에 전도사님 중 한 분이 저에게 “교회가 나서서 좀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데, 저는 지금도 그 교회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속으로 생각하며 교회를 말한 것 아닌가 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교회론에 대해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헷갈릴 만큼, 우리는 실제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매우 불확실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교회란 정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란 결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예배당, 그리고 예배와 교회 사역에 필요한 도구를 제외하면, 교회는 단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적 의미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 어떠한 정의를 통해서만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문제의 소지가 있는 교회를 교회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교회에 대한 일정한 정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하튼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 개념적 정의’를 과연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신약의 복음서 말씀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던 예수께서 그물질 하던 어부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이를 하던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곧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소명에 관한 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도를 이야기할 때마다 “따른다”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말뜻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가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가 되는 목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사람 낚는 어부”는 고기 낚는 어부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까지 제자들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물질의 목적이 바로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반면에 사람을 낚는 어부는 그물질의 목적을 사람에 두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도 결국은 그 목적을 사람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세나 건물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나 일 중심의 교회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인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지키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명 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교회가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생명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나누기 위해 각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주셨을 때,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배에 남겨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여기서 그물을 버렸다는 말은 어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겨두고 떠난 배는 소유한 재산과 삶의 터전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며, 그곳에 아버지마저 남겨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사사로운 인간관계 마저도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두고 길을 떠났던 아브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결국 제자가 되는 길, 혹은 바꾸어 표현하자면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는 첫 출발은 바로 버리고 내려놓는 ‘포기’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바로 교회와 제자를 정의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선택은 그 외 다른 것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나서고자 하는 선택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여기던 것들을 포기해야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기독교 신앙을 “떠남”이나 “내려놓음”의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의 말씀처럼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예수께서 하신 첫 선포의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다른 말로 포기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래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어’는 옳은 선택을 위해 잘못된 부분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제자의 자세를 바로 포기에서 찾으신 것이지요. 복음을 따라서 구원을 갈망하며 모이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회개라는 포기의 행위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제자가 된다는 것 혹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춘다는 말의 의미는 더이상 물고기를 목적으로 삼는 삶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목적으로 하는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회개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바로 구약에 등장하는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적국의 심장부인 니느웨로 들어가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너무 겁이 나고 마음도 내키지도 않아서 가라는 곳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서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기 위해 물고기를 포기했는데, 요나는 오히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욕망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요나의 신세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해 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신세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고 그 끝은 결국 멸망 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지요. 이후 그는 물고기의 배에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위한 고기잡이, 물질 숭배와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이 지배하는 세상을 포기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이 자리도 요나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과 부르심으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제자로 부르신 겁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시대의 또다른 요나로 우리 모두를 부르신 것이지요. 사람 낚는 요나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인생역전

요한복음 1:43-51

최근 전세계적으로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 열기가 이상적으로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장규모가 현재 143조에 이르고 대표적 가상화폐인 비트코인 시장 총액만도 60조 가량에 이른다고 하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가실 겁니다. 특히 비트코인은 온라인에서 존재하는 말그대로 가상의 화폐로써 은행과 같은 중개자를 두지 않고 거래자들끼리 직접적으로 현금을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현실 화폐를 대치할 수도 있다는 기대로 사람들이 투자 열풍이 불기 시작해서, 가상 화폐의 가치가 지금은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화폐가치보다 엄청나게 뛰어버린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상화폐에 대한 관심은 로또나 주식투자와 같은 투기적 목적으로 과열되고 있어서, 정부가 규제를 곧 시작한다는 보도가 있을 만큼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한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유지하고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하기 때문에, 일확천금을 얻어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요즘처럼 청년실업이 장기화되고, 직장인들도 정년을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경제 상황에 사람들이 단기적인 투기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인생역전을 노리는 흙수저 인생들의 일탈이라고 정의 내릴 만한 사건이라는 겁니다.

누군가 투자를 해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서민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문제는 정말 잘살아 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해서 자기 이득을 올리는 검은 손입니다. 결국 소수의 투기 세력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일이니, 더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이는 또 다시 대박을 한 번 터뜨려서 인생역전을 해보겠다는 참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 뻔합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현실을 대하며, 오늘 우리는 일확천금 보다 더 확실하게 인생역전을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으로 향하는 진정한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생역전을 꿈꾸는 것도 결국은 잘 살고 싶은 욕망 아닌가요? 아마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저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겁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돈으로 정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2장 15절 말씀을 통해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인생역전을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미 안드레와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신 예수께서는 그들과 같은 동향 사람인 빌립에게도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곧바로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안드레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 베드로를 찾았던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인 빌립도 먼저 친구를 찾아 나선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와는 달리 나다나엘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지금까지 배워오고 아는 범위 안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권면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사실은 일단 한 번 와서 보라는 것 아닐까요? 보고 나서 이야기해 보자는 뜻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신을 갖게 만드는 쉬운 방법도 없습니다. 실제로 헬라어로 본다는 뜻의 단어 에이도(εἴδω)는 안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영어로도 “I See” 라고 하면 보는 것만이 아니라 안다는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의 용법입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해서 진실을 알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을 세상살이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다 아실 겁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만큼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샬 맥루한이라는 언론학자가 눈으로 봐야하는 TV가 쿨 미디어(Cool Media)인 반면 들어야 하는 라디오를 핫 미디어(Hot Media)라고 구분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보는 것은 주어진 정보만을 그대로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볼 수 있어서 그만큼 왜곡되기도 쉽다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차라리 들으면 상상이라도 하니 좀 더 핫(hot)한 매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들으라고 하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게 아니라 들으라고 말이지요.

따라서 와서 보라는 이 말은 단순히 눈으로 확인하라는 뜻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한 것은 눈으로 그분의 존재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니 와서 보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서 눈으로 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문을 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보라는 것이죠. 실제로 오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도 “따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라는 권면이었던 셈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도 단지 공간적으로 어느 지점에 있던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의 전통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뜻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영원한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가 오실 것을 고대하며 말씀을 묵상하곤 했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보았다고 말씀하신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반신반의하던 나다나엘의 심중을 훤히 꿰뚫고 계셨던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서의 기록 속에서 마음과 관련한 요한의 표현입니다. 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문도 사실은 마음의 문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밖에 계셔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표현을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음성을 듣고 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공간이 사실은 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자기 자신 말고 또 다른 존재, 바로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만 함께 계신 주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보라고도 하지만 들어야 한다고 표현했던 것이지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모습도 실은 주님을 영접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마음 속에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한다는 말을 믿느냐?’ 반신반의하며 문을 반쯤 열어놓고 확인한 뒤에야 믿는 신앙에 대해 꼬집으신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무화과나무는 바로 교회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것이 성도들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바라고 소망할 때는 자기 문을 열면서, 정작 주님의 말씀에는 문을 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는 찾고 싶으면서도 의무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받을 복은 구하면서 복을 얻기 위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은 거부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자기 중심적인 욕망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앞으로는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바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을 한자어로는 천지개벽이라고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인생역전을 꿈꾸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가는 진짜 인생역전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서 천지분간도 못하고 살아가는 흙수저같은 인생들에게 진정한 삶의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알려주신 것이지요. 파멸과 죽음의 길인지도 모르고 값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생명을 얻는 인생 대역전의 기회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아름다움, 그 무엇도 우리를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우리를 참된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의 기적

창세기 1:1-5, 마가복음 1:4-11

 

최근 한 생물학자의 강연을 듣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아주 재미있는 연구 결과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쥐의 암수 선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수컷 쥐는 암컷의 외모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반면, 암컷은 수컷이 얼마나 먹을 것을 가져올 수 있는가와 함께 냄새를 통해 상대 수컷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암컷이 냄새로 수컷을 선택한다는 부분입니다. 본능적으로 암컷은 수컷의 냄새를 통해 유전적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전적 차이를 가지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수컷을 선택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전학적인 다름을 통해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생존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서로가 다른 유전적 요소를 통해 다음 세대의 생존에 필요한 더 나은 조건을 본능적으로 구한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생물학자는 이것이 바로 생명이 가진 놀라운 능력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바코드나 0과 1의 이진법으로 구성된 컴퓨터의 언어체계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서로 다른 바의 모양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도 0과 1의 서로 다른 조합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의미의 대상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도 4개의 유전자 정보를 무한적으로 조합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성질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생명은 똑같아 보이는 물질의 서로 다른 구성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은 인간이 저마다 다 다른 모습과 성격을 갖게 되는 이유인 것이지요.

다르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서로를 구별해주는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해 주면서 동시에, 이를 통해 생명의 생존능력이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생명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도대체 그렇게 다양하고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갈등과 분쟁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세상의 평화가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한 인간의 몸속만 해도 60조개나 되는 세포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것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제멋대로 자기 몸의 세포들이 움직이면 생존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원하는대로만 살려 한다면 그 공동체는 더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제가 들은 강연에서 그 생물학자는 이 혼란한 상태를 막고 하나의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만들어 나가는 힘을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 생명 그 자체가 바로 기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역사도 결국은 기적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만드시고, 그 생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질서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만드는 힘, 곧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조화로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순종하며 사는 것도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평화와 사랑, 그리고 참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능해 지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이루는 기적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는 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전통적 교회력에 따르면 주님의 세례일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도 이 사건을 모두 기록하고 있을 만큼 예수님의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죄를 씻기 위한 상징적 의미로 행해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본래 요단강가에서 요한이 행한 물세례의 방식은 사람을 물 안에 넣었다가 다시 물밖으로 빼내는 침례의식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의미를 재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죄를 물로 씻어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를 예수께 행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어 고난의 여정을 밟게 하신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세례의식은 물론이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고난의 여정을 왜 짊어지고 가게 하셨을까?”라는 의문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기록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기이한 현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하늘로부터 그가 곧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부분은 오늘 또다른 본문인 창세기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과정과 일면 비슷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세상의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혼돈된 상태의 것에서 구별을 지음으로써 생명의 조화를 이루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진 것도 실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보여주는 묘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현절의 사건은 바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놀라운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가 바로 나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다는 비유입니다.

일반적으로 ‘비둘기’ 하면 평화의 상징을 떠올리는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상상할 때 비둘기가 나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노아의 홍수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로 나뭇가지를 물고 온 비둘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에게 비둘기는 세상을 사랑하여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한결같다는 증거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할 때도 그렇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그렇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던 것처럼,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땅에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노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던 겁니다. 혼돈 상태였던 천지만물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실 만큼 말씀을 통해 질서정연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죄의 구렁텅이에서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살아가는 이유와 방향, 그리고 목적이 분명하게 주어진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2018년의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생명의 기적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새하늘 새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기적이라 할만큼 우리 모두의 삶에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어둡고 방황했던 지난날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얻어 꿈과 소망의 빛이 가득한 새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을 지나가며 되돌아 볼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 스스로도 보기에 아름답다 말할 만큼 의미있는 한해를 보낼 수 있기를 주님의 사랑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의 기적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멘.   

파사현정(破邪顯正)

누가복음 2:22-35

 

이제 2017년을 단 하루 남겨 둔 이 시점에 여러분과 한 편의 시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시인 도종환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이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한 해 여러분이 걸었던 길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시인의 말대로 인생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을 가는 여정이라면 여러분은 그 길을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순간순간 다가오는 길을 준비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금년 한해를 되돌아 보며, 앞으로 가야할 새로운 한 해의 길을 다짐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년 교수신문을 통해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금년에는 ‘破邪顯正’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합니다. ‘파사현정’은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한국의 지성인들은 올 한해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면서, 한국사회에 요구되는 정신 가운데 하나로 적폐청산을 꼽았다고 합니다. 잘못된 주장과 정책, 그리고 부정부패의 고리가 된 다양한 사회적 적폐 현상들을 뿌리 뽑아서 보다 정의롭고, 다양한 사람들의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는 정직한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파사현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교회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시킨다 해도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일컬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부패한 세상을 막는 소금이라고 비유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파사현정은 교회의 기본적 책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길입니다. 물론 교회가 파사현정의 역할을 잘 수행하려면 먼저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자신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양 고전인 <대학>의 8조목도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세상의 평화와 나라의 정치도 개인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세상, 혹은 성도와 교회가 함께 변화해 갈 때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운 모습도 실현가능하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파사현정”하는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뿌리 뽑아야 할 사악한 것과 반대로 삶 속에서 실현시켜야 할 옳은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면 분명하게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결예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안고 온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한 시므온의 말을 통해서 말이지요. 본문은 시므온을 의롭고 정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부패한 사회 환경 속에서 그는 구별된 자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그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 라는 말은 식민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민족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받게 될 위로는 한 민족에게만 국한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완성되는 완전한 구원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결국은 각 사람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성령이 임하여 함께 하고 계신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민족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개별 신앙인의 변화와 함께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처럼 성령의 임재를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의롭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세상의 공의도 기대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그 의와 거룩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안고 온 아이가 바로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넘어져야 할 것은 적폐의 대상을 뜻하는 반면 일어서야 할 대상은 바로 의롭고 거룩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곧 파사현정을 위해 사악한 것과 정의로운 것을 구별하시어 악을 멸하고 정의를 세우실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증거한 겁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아이가 장차 비방받는 표징이 된다는 시므온의 고백입니다. 그로 인해 부모의 마음이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경고합니다. 물론 이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그는 증거합니다. 앞으로 장차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핍박과 고난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어두운 세상이 온갖 모욕과 멸시로 비방할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사악한 것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신다는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비극적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파사현정을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구원자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2017년의 마지막 주일이자 단 하루를 남겨 둔 이 시점에 우리도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보며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과연 의롭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는가? 이 질문이 아직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칼처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찌른 적이 있었는가? 만일 찔림이 없었다면, 혹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할 만큼 굳어진 것은 아니었는가? 바라기는 이제 다가 올 새로운 한 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면서 파사현정을 실현하며,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각자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