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증거자(Testify to Love)

마태복음 10:26-31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의 본문 내용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면서 주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품에 안은 자식을 떠나 보내는 부모의 마음처럼 애뜻한 감정이 느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토록 제자들을 걱정하도록 만든 것이었을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활동하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여러가지로 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유대의 성전 세력에 의한 사회 전반적 통제와 로마의 식민지 지배라는 정치 상황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는 제자들의 사역에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당시 유대 사회는 힘의 논리가 장악하고 있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그와 정반대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당시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가치와 모순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며 비방과 모순의 표징이 될 것(눅 2:34) 이라고 말한 까닭도 결국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겁니다.

나아가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다른 이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려 했던 전도 행위는 일종의 해당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에게는 위험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마10:16)고 표현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의 논리에 굴복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야 말로 진리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이 감추고 숨기려 했던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말씀이었던 겁니다.

물론 몸은 피곤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장차 겪게 될 현실의 고통과 수고를 안타깝게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혼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과 진리의 선포를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 닭의 목을 비틀어 막으려 해도 새벽이 오듯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의 몸을 힘으로 막는다고 해도 영혼과 정신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의 영혼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지켜 주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온갖 시험을 당했던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롬8:31)”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세상에서의 자랑도 그에게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던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상 내 몸을 위협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육신의 위협을 받았던 초대 교회의 제자들보다 오늘 우리에게 더 적합한 가르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오늘 우리에게 오는 위협은 육신의 고통 보다는 정신적인 유혹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시대는 외부의 압력이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굳이 위협 때문에 신앙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스스로 믿음을 등져버리는 배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외부의 압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믿음을 거부하는 세대가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두려움의 대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력이 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영혼마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팔아버린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팔아 버린 가롯 유다의 모습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는 배신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 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와 같은 가짜를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영혼마저 팔아버린 시대가 안게 될 엄청난 비극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지난 주 우리가 속한 California-Nevada Annual Conference의 연회가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교세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연합감리교단, 특히 북가주 지역의 교회의 수가 감소되고 그와 함께 교세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우려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회라는 몸뚱이는 버티고 있는데 영혼이 자꾸 쇠약해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금년 연회의 주제는 “Testify to Love: Your Story Matters”, 곧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제는 금년도 연회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인 교단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동성애 문제로 촉발된 찬반양론이 이제는 골이 깊어져 결국은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지는 않을까를 걱정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서로 다르다는 사실 속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아닌 화해와 평화의 장으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이 바로 교회의 역할이라는 공감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금번 연회의 주제처럼 모두가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열쇠의 의미를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쇠를 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닫기 위한 자물쇠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와 다른 생각과 배경을 가진 이들과는 구별하기 위한 열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증거자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구별짓고 벽을 쌓아 갈등과 분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이들을 포용하기 위해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날 우리 교단을 비롯한 교회들이 행여 역풍을 만나 고생하면서도, 막상 주님을 보고서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를 염려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먼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역풍을 만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다가 가시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산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역풍은 그들에게 쉽지 않은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지금까지 평생 목회만 하던 주님의 종들이 교회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여러가지 현실의 거대한 바람 앞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제자들도 그렇지만 오늘 교회도 이 순간에 바로 주님의 인도와 역사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막상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왔을 때 보인 그들의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놀랐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좌초해가는 배처럼 가라앉고 있는 교회들 앞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주님이 직접 찾아와 주셨는데, 문제는 우리가 기뻐 환영한 것이 아니라 놀라 뒤로 넘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탄 배가 생명의 방주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능숙한 뱃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생명의 방주일 수 있는 것은 목사나 성도들이 일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럴듯한 행사를 잘 치뤄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믿음이면 족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생명의 방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들어 오실 수 있는 열쇠로 문을 여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증거자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교회가 생명의 방주가 아니라 유령선이 되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좌초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목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며칠 간이나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회의를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옆에 계신 주님을 몰라보고 마치 유령을 대하듯 두려움에 떨며 밀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정작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던가요? “두려워 하지 말아라” 주님의 음성에 다시 한 번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사랑의 증거자라는 열쇠가 쥐어져 있는 한 여러분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9:35-38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신학자 가운데 송천성(C.S.Song)이라는 대만 출신의 학자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버클리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그 분의 수업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제 지도교수님으로 가르침을 받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송천성 교수는 다수의 저명한 학술 서적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란 책입니다. 대자대비라는 말은 불교의 영향권 하에 있던 동양사회에서는 매우 익숙한 개념입니다. 말뜻 그대로 해석하자면 “큰 자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는 “mercy”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의 의미를 다 담아 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대개 mercy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이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이에게 베푸는 일종의 아량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에 대자대비는 “베품”이라는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보다 “함께함”이라는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대자대비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단순히 베푸는 행위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서로가 함께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세를 낮춤으로써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함께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자대비라는 말은 단순히 연민의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라기 보다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만큼 서로가 하나된 모습을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6에서 사도 바울도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하나된 모습이 되는 길이라면서 말이지요. 이 역시 대자대비라는 말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자대비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36절에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불쌍”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입니다. 우리 말에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짝이 없다는 말과 불쌍이라는 말을 함께 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쌍의 어원이 한자어로 짝이 없다는 “불쌍(不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쌍은 짝이 없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라는 겁니다. 물론 남녀가 서로 짝을 찾지 못한 모습을 두고 쓴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마음으로 함께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통할 수 있을 만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것처럼 불쌍한 일도 없다는 뜻이지요.

이는 원어인 헬라어 본문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원문에서는 “splagchnizomai (σπλαγχνίζομαι)”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 의하면 그 때도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무리들을 보시고 똑같은 마음을 품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오늘 본문과 똑 같았습니다. 바로 목자 잃은 양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근동지역에서 목자 없는 양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늘 생명의 위협을 안고 대책없이 사는 양에게 목자는 운명을 책임지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던 겁니다. 때문에 고대 근동지역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나의 쌍을 이룬 운명공동체로 보았다고 합니다. 목자 잃은 양을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까닭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의 어원도 흥미롭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우리말로 “창자 혹은 애간장”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창자와 같은 인체의 기관을 통해 연민이나 긍휼함과 같은 감정이 생겨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말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애간장이 끓는다”거나 “애간장이 탄다”는 식의 표현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일이야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애간장을 태울 만큼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자식의 아픔을 마치 자신이 겪는 것처럼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식의 감정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타인에 대해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상황을 보며 자신도 애간장이 타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의 심정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일치감을 갖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 질 수 있는 겁니다. 영어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번역을 compassio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송천성 교수가 하나님의 모습을 대자대비하다고 표현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와 같이 기독교 교리에 갇혀 지내시는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저 밖에서 지켜보시며 잘잘못을 심판하시기만 하는 무서운 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께서 부르신대로 “아빠 아버지”의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위에서 내려보시는 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대자대비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나타내 주신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목자 잃은 양처럼 살아가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그대로 공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한 몸을 이룬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는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해 주시기 까지 하였습니다. 우리와 하나의 쌍을 이루는 친밀한 관계를 맺어 주신 것입니다. 저 멀리에 계신 무서운 신의 모습이 아니라 친히 낮은 곳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마음을 함께 나누는 대자대비하신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말씀대로 함께 공감하며 사는 대자대비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본문 37절에서 예수님이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불쌍한 무리들의 진정한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짝이 되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과는 달리 현실의 우리는 점점 공감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서로의 진실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마음을 함께 나누어 주셨는데, 정작 우리들은 서로간에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추수할 것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그만큼 서로를 향해 진실한 짝을 찾지 못한 불쌍한 무리가 많은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함께 공감을 나누며 사랑해야 할 이웃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듯 많은 사람을 교회로 불러와서 성장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일할 일꾼들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단순히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도 누군가를 향한 진실된 마음, 함께 공감하며 서로를 향해 대자대비한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턱없이 부족한 것은 일꾼 자체가 아니라 공감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따라 그 공감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공감의 능력입니다. 대자대비한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자대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진실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청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들어 아이들이 커가면서 가끔씩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대학을 간 큰 아이가 엄마와는 자주 통화를 하면서도 아빠에게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을 때 더 그렇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전화를 가끔 합니다. 그런데 통화의 내용이 좀 다르지요. 주로 돈을 좀 보내달라거나, 무슨 일이 있으니 해결을 좀 해내라는 식입니다. 그렇다고 딸에게 뭐라고 할말이 없는 것이, 막상 아무 일 없이 전화를 하면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어서 엄마에게 곧장 전화를 바꾸어 주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이전에는 나름대로 가정적이고 자녀들에게 다정다감하며 아이들 표현대로 쿨(cool)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놓치며 지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과 자주 대화의 시간을 갖고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한마디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놓친 것이지요. 그래서 가끔씩 아이들에게 아빠랑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타박을 듣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나 해야할 설교를 집에서도 늘어놓고,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돌아보면 제 아이들처럼 그 맘 때 저도 아버지가 제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심지어는 크게 받은 것도 없다먀 불효막심한 투정을 아버지에게 서슴없이 부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아이들이 커가고, 또 목회의 소명을 받아 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는 누가 요즘 어떠시냐?”는 그 흔한 말조차 묻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요즘은 제게 만날 때마다 권사님 한 분이 늘 “평안하시냐?”고 물어 봐 주시는 분이 있어서 달라지기는 했지만, 한 때 저 스스로 참 힘들고 막막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민 오신 분들도 다 경험 하신 것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없이 유학와서 정말 무일푼으로 생활하며 목회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힘들 때는 잘 몰랐는데, 마치 고개를 숙이고 숨가쁘게 달려가다 어느 순간 허리를 펴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데 이상하리만큼 서운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게 미안해 지는 감정을 갖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되돌이키기도 힘들고 그냥 이대로 오던 길 마저 가자니 앞이 캄캄해 질 때 말입니다. 게다가 나름대로 노력은 기울인 것 같은데,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하거나 무관심 그 자체일 때가 있습니다. 꼭 알아주어야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혼자 이 어둔 터널을 지나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답답한 순간들을 아마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동료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힘들죠? 그래도 씩씩하게 잘 버티는 모습에 응원합니다.” 전화통 너머로 들리는 이 짧은 이야기에 저는 가슴에 담아 두었던 눈물이 한순간 쏟아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분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고생하는 후배 목사를 격려한다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저에게 체크 한 장을 써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제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전한 것이지요. 이 일로 인해 저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서운함과 억울한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안 저에게 목사로서 해야할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요구하고 책임을 물으면서도, 정작 그 젊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목사와 그 식솔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누구 하나 한 번도 묻지 않는 무심함에 서운해 했던 감정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얻은 누군가로부터의 공감이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저에게 생겨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목회를 하면서 더 이상 어떠한 개인적 사심으로 인한 시험에 걸려 넘어질 요인 하나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이 더욱 단단해져서,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와 무관심으로부터 상처를 쉽게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저에게는 하나의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전혀 공감대가 없다고 불평했던 그 아버지에게, 과연 나는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힘들지는 않으신가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추수할 일꾼들이라고 모인 성도들에게는 진심으로 묻고 있는가?

저는 오늘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면합니다. 추수할 일꾼을 찾는 그 시작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답으로 부터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닮아 서로를 향한 공감의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 가기 위해 먼저 서로간에 진실된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바라기는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우리들이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공감할 수 있는 신앙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창세기 2:1-7

마태복음 28: 16-20

 

팝 아트로 유명한 미국의 예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이런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이면 유명해 질 수 있다.” 이 말이 증명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그만큼 쉬워졌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유명해지거나 큰 물질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15분은 우리 인생에서 순식간에 지나칠 수도 있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15분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두커니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거리거나 멍하게 아무 생각하지 않고도 흘려 보낼 수 있을 만큼 짧은 찰나로 그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그 15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절명의 순간으로 남을 만큼 간절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운명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요.   

얼마 전 광주의 한 아파트 12층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스물 한 살짜리 딸을 어머니가 난간에서 팔을 잡고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 15분간의 사투를 버린 사건이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정신지체로 어려움을 겪던 딸이 순식간에 벌인 일이었는데, 어머니가 이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떨어지는 딸의 팔을 붙들고 15분간이나 버틴 것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하더라도 스무 살 된 여성의 몸무게를 팔 힘만 가지고 15분간을 버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모성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팔힘이 빠져서 간신히 매달린 딸의 손을 놓치기라도 했다면 생명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혼신의 힘을 다 쏟아내야 했던 겁니다. 노년의 여인으로서는 1초도 버티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 15분이라는 시간은 어머니에게 마치 수십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딸의 생사기로에서 어머니에게 15분은 너무나도 절박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그 간절했던 모성애는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15분의 힘겨운 사투는 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소중한 시간이 된 것이지요.

누군가 인생을 한시간에 비유하면서 15분은 인생의 나머지 45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 한바 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15분이 딸의 생명을 구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15분은 어쩌면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신앙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창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구약의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엿새’라는 기간 동안 인간을 비롯하여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엿새’라는 기간을 우리의 시간 개념 그대로 적용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하루의 과정에 이루어진 창조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가 ‘설교 준비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말할 때, 핵심은 하루라는 기간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들었던 정성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주만물의 창조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성과 사랑에 더 초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창조의 과정을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준비단계라고 보는 이기주의적 해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인간중심의 이기주의적 시선은 인간의 손길이 닿기 이전부터 우주만물이 존재했던 이유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위해 미리 창조된 것이라 간주합니다.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와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와 연관해서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엿새 동안 창조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일곱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을 가지셨다는 말씀을 단순히 창조의 끝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창조의 과정은 손을 댈 필요가 없는 완제품이라는 뜻이지요. 결과적으로 창조의 주인공인 인간은 그저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는 것 외에는 덧붙여 해야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누리는 자유는 가지면서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윤리적 진공상태’라는 엄청난 문제를 떠안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니 책임도 하나님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감사와 찬양 보다 원망과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대한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생명체 마다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정성껏 부여한 사랑의 실행 과정이었습니다. 오직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인간이 제 마음대로 다루기 위한 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땅의 피조물이 인간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땅을 갈아야 할 사명으로 주신 것이라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존재 이유가 되면서 동시에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제시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엿새의 시간으로 마무리 되어 모든 것이 다 완결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창조의 과정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신다는 계획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전히 창조의 15분, 곧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만 내 맡기고 손 놓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생명의 기운을 안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함께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낼 뿐인 것이지요. 스스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려 하거나, 아니면 자기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마다 불평만 늘어 놓는 경우가 꼭 그와 같습니다. 교회 와서도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토로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대개의 경우는 진짜 갈급하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무엇보다 은혜도 쟁취하여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데, 은혜는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하나님은 이 땅에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직접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 가시는 창조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창조는 만들어서 세상에 완제품으로 출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결코 내려놓지 않으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15분간 생사 기로에 있는 딸을 붙들고 지켜냈던 어머니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어가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박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엿새의 창조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외면하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의 증표를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했던 유대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성경 본문인 마태복음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끝까지 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자들에게 예수께서 직접 답변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의 존재는 불필요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창조의 역사는 이미 엿새의 일로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선택 받은 주인공으로써 마음껏 누리며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박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고 말입니다. 창조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권한을 위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가 시작하신 창조의 역사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은 그 대리자로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소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 창조의 소명을 안고 오신 그리스도처럼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 빠져서, 자기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만 안주하지 말고, 그곳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따라 소중한 생명들을 일깨우고 살리는 창조의 과정에 동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세상을 주님의 말씀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15분의 시간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 삶의 45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기업이, 우리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와 세상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몫으로만 남겨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그 시간에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신 것이라면, 성령강림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권능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활이 15분 이후에 올 나머지 45분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준 것이라면, 성령강림은 나머지 45분을 위해 지금 15분을 부단히 버틸 수 있는 권능을 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늘의 권한을 위임 받은 것입니다. 그 권능으로 창조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힘써 일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15분, 그 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땅 끝의 증인

사도행전 1:6-11

 

선교의 사명을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이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8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흔히 “미답지론(未踏地論)”이라 해서,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선교를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답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보다 세분화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미답지는 전형적인 해외선교의 방식처럼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거나, 교회의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곳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역량도 이처럼 교회의 미개척지에 쏟아 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방식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다보면 자기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많은 기독교 국가와 민족들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편의점보다 교회의 수가 더 많다고 알려진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을 이러한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답지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이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미답지를 세상의 시선 밖에서 아직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관심의 사각지대로 정의를 내리는 접근입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고지론(高地論)에 대한 반박 논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지론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고지를 점령하듯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도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고지를 차지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승리를 얻게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고지론이 현실 세상 속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달리, 미답지론은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으로 향해 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실제로 사회의 파워 엘리트 중에 상당 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그 자리에 올랐는지, 아니면 개인의 영욕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두 명의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 한국 기독교가 여전히 비판의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머물러야 한다는 미답지론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가야할 땅 끝의 선교지는 공간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머물러야 할 영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8절에 언급된 지명들은 특정한 지역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기 위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녀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와 땅 끝은 이방인과 믿음의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나라나 민족이 머무는 지역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삶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우리가 청교도 전통의 미국사회에서 교회에 등록된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다 해도,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이 아니라면 사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예루살렘의 성지가 아니라 땅 끝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 죄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곳이야 말로 이방숭배에 빠진 사마리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우리가 서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사실입니다. 8절의 핵심도 그런 점에서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명령대로 내 증인이 되라는 부분에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선교를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의 논쟁 보다 우선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증인이 되지 않는 한 그곳이 어디이던, 또 어디를 향해 가던 그것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증인된 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께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셔야 했던 당시의 배경 상황을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부활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사십 일 동안 그들과 함께 하시고 승천하기 바로 직전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순간 조차 제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언제인가를 물어 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제국의 지배로부터의 주권 회복이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회복이 곧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민족의 정치적인 주권 회복을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제자들의 시선이 여전히 고지론과 같이 현실 정치의 성공이나 번영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해 매우 세속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예수께서 생전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는 순간 조차 누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던 제자들의 속물 근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증인이 되기 보다 누가 더 큰 제자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이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이를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베드로와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마지막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의외의 대화로 끝을 맺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스승을 다시 만난 감격 속에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만일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을 몇 번이고 되 뇌였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찾아 주셨으니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확신이라는 차원에서 믿음을 이야기 한다면, 당시 베드로의 믿음은 자기 이름만큼이나 굳건한 반석 같지 않았을까요?

이를 아신 예수님도 베드로의 믿음을 확인하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는 제자로서의 소명을 주셨던 겁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목회의 소명을 주신 것이었지요. 당연히 베드로도 두말 하지 않고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던 또 다른 제자 요한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이 나옵니다. 소명을 받고 난 뒤에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바로 동료이자 강력한 라이벌 중의 하나인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 그리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본능적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호 했습니다. “그것이 너랑 무슨 상관이냐?” 지금 필요한 것은 너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제자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를 바라보며 남 탓하고 자기 신세타령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너 자신의 모습을 신앙의 거울로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남과 비교하며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에 마음을 두지 말고, 먼저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승천을 앞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신 말씀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선은 보이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자신들이 재확인할 수 있는 상태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증인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 알바가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대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어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기도 한 권능(δύναμις, dynamis)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폭발력을 가질 만큼 강력한 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능은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는 소유의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신 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폭발하는 힘은 갖기 위함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권능은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권능은 바로 변화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권능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지요.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바로 성령을 통해 우리가 받은 그 권능입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이 땅의 끝까지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 그리스도를 따라 오늘 우리도 땅끝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진 증인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