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을 견디는 능력

요한복음 14:15-21

지난 2011년 4월 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난 후, 일본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진 이후 결혼하는 커플의 급증 현상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혼만이 아니라 이혼 건수도 평상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결혼과 이혼이 열풍처럼 일본열도를 덮친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 이유에 대해 제이미 홈스라는 미국의 한 연구원이 관심을 갖고 분석을 시도하여 <난센스>라는 책을 발표 하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인간이 갖는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복잡하고 모호한 상황을 가능한한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하는 “종결 욕구”에서 찾았습니다. 인간들은 좀처럼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감정을 크게 느낄수록 평소 신뢰하는 대상에게는 더 큰 신뢰를 주어 확실하게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반대로 평소 불신하던 것에 대해서는 더 강한 불신을 가짐으로써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삶의 여러가지 모호함에 대해 점차적으로 정리해 나가다가 급기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지진으로 삶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사람들이 결혼과 이혼이라는 양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도 결국 인간의 종결 욕구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극단적인 양 끝의 결론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모호성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기업들은 이러한 모호함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기업의 조직이나 문화의 시스템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미국중앙정보국CIA는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반대의견만을 제시하는 일명 레드팀을 두었다고 합니다. 찬성과 반대의 적극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스스로 길러나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을 이렇게 조언 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결정을 지금 해야 하는 순간에 놓여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내일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것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보다는 가능한 한 결정을 미루어 보라고 말입니다. 모호한 상황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창조적일 수 있는 길을 찾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을 한층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확신함을 지닌 추진력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을 견뎌낼 수 있는 자제력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모호함이라는 순간을 경험하기는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셨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두려움이자 불안함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의문은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있거나 적어도 볼 수만 있다해도 그들의 믿음은 확고하게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 온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새긴 증거판을 주시기 위해 그의 종 모세를 시내산 위에 혼자 올라오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출 24장). 모세가 그곳에서 40일을 머무는 동안,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는 우를 범합니다. 잠시 동안의 불안과 모호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호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금송아지라도 보고 있는 편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증거를 원했던 도마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20:29)”는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 조차 그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24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거짓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징과 기적을 보여서 믿는 자들조차 유혹한다고도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대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호함이라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교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의 기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의심없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초능력과 같은 은사를 체험하고 싶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과 보는 것을 동일시한 결과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체험을 해보았습니다. 오순절 교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방언의 은사도 경험해 보았고, 극심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영적으로 체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는 저희 어머니가 하시던 치유와 축귀의 기적 이야기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능력과 같은 신비적 현상 만을 좇는다면, 엉뚱한 길로 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반드시 기독교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의 골목길에 무당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무당도 제법 신기를 보여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비싼 돈 내가며 굿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한동안은 신내림이 있어서 신통한 것 같더니,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나 봅니다. 얼마 지난 뒤부터는 기적적인 현상을 나타내 주지 못하니까 결국 무당집도 문을 닫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옆에서 지켜 보니까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영빨”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만은 아닌 듯 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사는 것에 치이다 보니 교회 생활도 그렇고 신앙의 열정이 점차 식어 가면서 어느새 신비한 은사도 사라진 것 같다는 겁니다.

무분별한 은사의 강조가 위험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말그대로 은사는 성령의 표징입니다. 길로 비유하자면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인 셈입니다. 막막하고 모든 것이 모호해 보이는 구원의 길에서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처럼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길은 끝없는 여정인데, 만일 표지판만 보고 그곳에 멈추어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눈에 보이는 표지판만 보고 서 있으면 결국 누구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뒷부분인 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성령을 오직 제자들만 알아 볼 수 있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을 보내 주어도,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6절 말씀을 통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모든 것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이전의 말씀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까닭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순간의 모호함으로 인해 종결 욕구가 생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도 않습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 대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보여 주어야 안심하고 믿겠다는 얄팍한 신비주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내로써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어서, 그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호함을 견디는 자제력,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주어지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나를 믿어라

요한복음 14: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사로 알려진 말씀 가운데 일부를 선택한 것입니다. 공생애의 마지막을 얼마 남겨 두지 아니하고 제자들과의 이별에 앞서 주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육신의 몸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나아가 고난과 근심 속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핵심을 예수님은 초두에서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치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힘들어 하던 사람들에게 매우 명확한 어조로 해답을 제시해 주신 겁니다.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만 믿어”

세상에 이처럼 용기가 되는 말이 또 있을까요? 누가 저에게 이런 말 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 한번쯤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졸업을 하고 새로운 인생의 발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누군가 “걱정마, 나만 믿어, 다 잘 될거야”라는 말처럼 힘이 나는 말이 어디 있을까요? 생계에 대한 고민으로 걱정하는 이들에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또는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는 더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만큼 인생의 가장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사람에게 이 말은 그 무엇보다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잘 믿기지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근심에 쌓인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조언은 너무나 당연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걸 몰라서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걱정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것 아닙니까? 그저 생각처럼 잘 안되니까 힘이 드는 겁니다.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람 마음이란 게 참 희한합니다. 분명 내 것이긴 한데, 자기 마음도 내 마음먹은대로 안되니까 말입니다.

한국 사람이 참 먹는 것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마음까지 먹는 걸 보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문화에서는 전혀 먹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것도 먹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시간도 먹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이도 먹고, 급기야는 시간 잘 가라고 시계에 밥까지 주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도 그렇지만 흘러가는 세월도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삼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먹는다는 말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니, 마음도 먹으면 내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먹는다고 해도 마음은 자기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마음의 독특한 성질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음을 마치 저울과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행을 유지하고 있는 저울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저울이 그 무게로 인해 기울면서 움직입니다. 마음도 저울과 같이 그 위에 어떠한 감정이 올려지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를 보통은 감동한다고 표현을 합니다. 예컨대,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잠잠하던 마음의 저울이 움직이면서 기쁨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기분 나쁜 일을 당하면 마음의 저울추가 기울면서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표현이 됩니다. 어떻게든 우리의 마음 안에 조그만 감정이라도 생기는 순간 마음이라는 저울은 흔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감각이 너무 둔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으면 감동이 생기지 않으니까 마음의 변화를 전혀 경험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을 때는 마음이라는 저울이 흔들거리는 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이 들 때는 흔들리지 않고 멈추어 있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음이란 저울에 전혀 변화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흔히 말해 평상심이라고 하는 단어는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평상심이란 아무 변화나 감동 없이 그대로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저울은 위에 올려있는 물건을 내려놓기만 하면 그 상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감정을 내려 놓고 싶어도 내려 놓아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고 있어도, 그 무게를 생각처럼 내려 놓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걱정하지말고 나만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도 아마 똑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제자들의 답답한 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마치 눈 앞에 지도를 펼쳐 놓은 것처럼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단 내가 먼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다 예비하고 다시 돌아올 게.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마치 채근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곤조곤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는 어머니처럼,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도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다는 것일까?’라고 오히려 되물은 이유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갈 곳은 아버지 집이며 그곳에 너희도 머물게 될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완전히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치 잠시 자신의 곁을 떠나며 곧 다시 오겠다는 엄마의 말에 안심하지 못하고 근심이 가득한 아이처럼 말이지요. 한마디로 제자들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인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것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원했던 것이지요. 사실 아버지의 집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가르쳐주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이 가셔서 자신들의 위해 예비하신다는 아버지의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잘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제자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관해서 이미 제자들에게 다 알려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며 함께 동역하던 이들입니다. 공생애를 통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직접 본 증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미 제자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구원의 길을 이미 목격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 길을 어떻게 지나 오셨는지 잘 안다는 겁니다. 늘 아버지 하나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뜻대로 사신 모습을 통해서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진리와 생명으로 향한 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본문은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가 주인이 되는 곳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길이 결국은 자기 마음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맡기고 사신 모습 아닙니까? 먼저 아버지의 집에 머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려거든 너희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역시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따라 제자들도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도 자기 뜻을 따르기 보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집을 짓고 살라는 권면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는 길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의 저울에 올려놓은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이 곧 신앙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름아니라 너희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걱정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염려나 근심도 결국 내가 마음의 저울 위에 올려놓은 감정 아닙니까? 그 조차도 내가 저울질 하듯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맡기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없습니다. 피리의 구멍을 다 막아놓으면 소리가 날리 없고, 잔에 빈 공간이 없으면 더 이상 물을 채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만일 자기 소리로 가득차 있으면 마음 속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열매가 다 자기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라는 저울이 평상심을 잃고 흔들리면,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신앙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 바로 진정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걱정말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다 해 줄테니 신경 쓸 필요없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오늘 우리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시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머니주일을 겸해 졸업파송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졸업을 한다는 것은 한자의 의미처럼 일을 마친다는 의미도 분명 있지만, 영어의 ‘Commencement’라는 단어가 뜻하듯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영어 단어인 Graduation 은 'gradual'이란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졸업은 단순히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많은 젊은이들의 앞에 놓인 현실의 길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생존을 위한 경쟁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대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꿈과 비전을 갖고 생동감있는 시절을 보내야 할 젊은이들의 눈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걱정말고 소신있게 살라는 말을 하기가 두려울 정도입니다. 감히 마음놓고 편히 살라고 권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간 그 길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역시 평탄한 꽃길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 턱 놓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 굳게 먹고 가야할 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서 생겨나는 게 중요합니다. 나로서는 먹고 싶지 않지만 바로 주님의 뜻이라 먹는 것이지요. 그 부분이 다르다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생명과 진리로 향해 가는 그 길은 매우 좁고 고단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내 편한대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이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고난의 가시밭길로 무작정 내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가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길을 밟아야만 갈 수 있습니다. 생명과 진리의 길,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먼저 앞세우는 만만치 않은 여정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밟고 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끝까지 흔들림없이 그 길을 가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계십니다.

저는 요즘도 가끔 힘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예외없이 똑같이 갖는 공통점이 바로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가장 처음 느끼는 소외감의 대상이 어머니인 것처럼, 연대감을 느낀 첫번째 존재도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은 영원한 안식처와 같이 포근하고, 어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세상의 풍파를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비록 이제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나를 응원해 주고 계시리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힘들어 하는 자식을 볼 때마다 “걱정 마라. 너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말아라”는 용기를 지금도 해주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적인 어머니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걱정말고, 나를 믿어라” 세상이 우리를 몰라준다 해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그 고단한 길을 동행하여 주실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 믿음으로 오늘도 한걸음씩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의 길에 발걸음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씀이 용기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는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뜻대로 마음을 먹을 때, 분명 마음먹은대로 열매를 맺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상칠언 Seven Words of Jesus Christ on the Cross

성금요예배 설교 모음


  • 첫째 말씀: 성경봉독 : 눅 23 : 32~34장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놓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울음과 비웃음이 섞여 아수라장이 된 골고다 언덕.

십자가위에는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예수가 초라하게 달려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숨 붙이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도대체 그는 누구를 위한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인가?

십자가 밑에 로마 병사들이 보인다. 십자가형이라는 극악무도한 사형의 현장이 마치 자신들의 놀이터라도 되는 듯이, 사형을 즐기는 로마병사들이 보인다. 그렇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상부의 명령만 따랐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충실히. 예수는 생명의 가치보다 사회구조적 권력을 더 중요시 여기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저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인다. 예수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지도자란, 정식 교육을 받고, 가르칠 수 있는 학위가 있는 엘리트여야 했다. 외딴 시골 베들레헴 출신따위가 대세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한채 우월감에 심취하여 권위의식에만 몰두하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저 먼 발치에서 예수를 지켜보는 빌라도가 보인다. 그는 알았다. 예수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두려웠다. 예수가 무죄임을 선포하게 되면 일어나게 될 민란이 두려웠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잃을것을 걱정했다. 예수는 자신의 옳바른 소신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한 그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보인다. 예수를 앎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라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늘 예수를 부인하고, 인간적 쾌락과 탐욕, 욕심을 쫒아 살아가는 우리가 여기 있다. 그리고 십자가 밑으로 돌아와 ‘몰랐기 때문’이라며, 면죄부를 들이미는 우리에게, 예수는 이야기 한다. “너희들이 한 선택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너희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구나. 하나님, 이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by 정다혜 전도사]

  • 둘째 말씀: 성경봉독 눅 23: 39~43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하고 대답하셨다.

  • 셋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 25~27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가족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라는 곳에서 의사로서 또 성직자로서 봉사했던 이태석 신부님 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제목입니다. 그곳에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젊은 이들을 교육하고, 음악을 가르치 고, 무엇보다 신앙과 꿈을 심어주었던 그가 갑자기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톤즈 사람 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비록 인종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그들이 신부님의 죽 음을 애도하며 슬퍼했던 이유는 그가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외면하고, 아무도 가려하지 않은 그곳, 전쟁과 기근, 가난과 질병이 가득한 곳에 가서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이 세상을 떠난 뒤, 톤즈의 젊은이들은 한국에 있는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비록 그의 임종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묻힌 곳에서 이제는 그들이 신부님의 친구가 되어주 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 바로 그곳에 예수님의 친구들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난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호언장담했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 로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맞이했던 군중들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 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 그리고 다른 두 여자들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가족도 아닌데, 이 사람은 왜 거기 있었을까요? 예수님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인데,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갔는데, 그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요? 창과 방 패로 무장한 로마 군인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가, 거기 서 있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는 도대체 왜 거기 서 있었던 걸까요? 그건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그의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 다.” “이렇게 못 박히고, 모욕 당하고, 찟겨진 사람이 바로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서 있던 그 사람,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어머니라.” 아들의 죽음으로 혼자 남게될 어머니에게 예 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 어 주려 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관계, 가족이 되라고 말씀 하십니다. “너와 나”, “당신과 내”가 더 이상 “남”이 아닌 “우리”가 되는 것, “친구 사이”를 뛰어넘어 “가족”이 되 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이 아닐까요? “저기 울고 있는 저 분이 당신의 어머니다”고, “저기 슬퍼하고 있는 저 분이 당신의 아버지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오늘 이밤,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족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by 박현호 전도사]

  • 네째 말씀: 성경봉독 막 15: 33~34   

낮 열두 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상하신 하나님"

지난주 설교 말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은후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 동네 사람들,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일찍 오시지 않으신 예수님과 이미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마음에 깊이 상처가 나있었습니다. 나중에 오셨던 예수님, 그들의 애통함과 죽을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보시며 함께 상한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저는 아직 그렇게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린 경험을 하지 못하여서 그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수는 없지만 슬픔을 경험 할 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변함없이 마음 깊은 곳을 여미는 고통을 느낄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을때, 이별을 경험할때, 혹은 외면을 당할때, 존재의 이유를 거부 당할때 입니다. 그렇게 상한 마음은 배고픔보다, 목마름 보다, 육신이 아플때 보다, 가난보다, 더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아가시며 이 모든 것을, 어쩌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 더 이상으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조차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때 곁에 남아 있지 않았고, 부인하기 까지 하며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처절히 홀로 지고 가신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말씀의 예언적 성취보다, 육체적으로 느끼셨던 극심한 고통가운데 원망이나 좌절하는 말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험한 형벌과 버림 받으심으로 상한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상하신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마지막 절규는 이 세상에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부정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린 사람들, 또한 버리고 외면하고 폭력과 모든 악을 행하는 사람들까지도, 죄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 있는 모든 상한 영혼들을 위한 마지막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신 그 신비의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두려운 떨림과 간절한 소망과 절실한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 상한 사람의 표본이 되셔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바꾸신 상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상처받은 하나님, 오늘도 내일도 그 십자가의 상처를 지니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 될 때,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 갈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갈 때, 세상의 불의한 방법으로 나의 필요와 인권이 빼앗길 때, 부정한 힘에 억눌리고 폭력이 행하여 질때, 상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고백하며 이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가슴에 끌어 않을 수 있는, 애통해 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by 권조셉 전도사]

  • 다섯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28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 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긍휼을 향한 목마름"

저는 목이 마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평화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긍휼에 목이 마릅니다...

 

인생의 목마름 가운데 유일한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셨습니다.

지금도 목말라 하시고 계시는 줄 모릅니다.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신 주님께서

채찍질에 모든 살이 갈기 갈기 찢겨 나가고

거치른 가시나무에 머리가 상하고

인생의 무개 보더 더 무거운 나무기둥를 지다가 수없이 넘어져 무릎과 팔이 상하고

뼈속 깊은 곳에 파고 들어오는 못이 모든 신경이 마비시켜 숨을 쉴 수가 없고

십자가 위에 오랜시간 피를 흘리며 구멍난 머리와 손과 발, 찢겨져 나간 상처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고통을 인한 극심한 갈증 가운데도 끝까지 견디시며

온세상의 죄를 몸으로 견디신 주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이루신것을 아시고 당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신의 고난을 표현하셨습니다

“목 마르다"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저는 목이 마릅니다.

끝없이 달리는것 같아도 결승점에 도달 하지 못하여 목이 마르고

한없이 참고 기다려도 나의 뜻대로 응답하시지 않으시기에 목이 마르고

고통가운데 내려놓음을 반복하여도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 없기에

목이 마릅니다.

 

저는 목이 마릅니다.

끊임없는 비교의식을 통한 자아 비판에 목이 마르고

삶의 희망이라고 예수를 말하지만 거친 폭풍처럼 매일 거세게 몰아치는

의심과 알수 없는 내일의 두려움에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십자가에서 “목 마르다” 하신 예수님 때문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두려움과 의심이 가득찬 나의 목마름 가운데

생명수를 찾을수 있는 유일한 나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의 마음을 이기신 그분을 향한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유일한 나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영혼의 목마름으로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긍휼에 합당한 자리에까지 나아갈 때 까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권조셉 전도사]

  • 여섯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29~30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드렸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 일곱째 말씀: 성경봉독: 눅 23:44~45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Ecce Homo "Behold the Man"

Ecce Homo, 1871, Antonio Ciseri

Ecce Homo, 1871, Antonio Ciseri

안토니오 시서리의 Ecce Homo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재판의 장면의 주제 -Ecce Homo는 15세기 성서그림의 주제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로 예수 혹은 빌라도의 극도의 감정에  관점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관점은 회중이 예수의 재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재판의 자리에서 회중을 향하는 관점으로 바꾸었다. 유일하게 본디오 빌라도 부인의 표정만 볼수 있게 하였다. 

19세기 낭만주의를 크게 이끌었던 화가 Caspar David Friedrich의 무의식세계를 반영한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관점을 전통적인 Christian Iconography 에 인용한 것으로 전통적인 Ecce Homo의 틀을 깨었지만 라파엘기풍을 따라 오히려 19세기 화가들의 경향을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고집한 것은 그가 유명해지지 못한 이유라고도 할수 있겠다. 

이 그림을 볼 때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나로 하여금 그 재판의 자리에 서게 하기 때문이다. 회중에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던 함성에서 조금 벗어나 재판의 자리에 서 있는 모두의 뒷모습을 보게한다. 빌라도를 회유 했던 부인만 제외하고. 정치/군사/종교적 책임을 회피하는 빌라도의 교묘한 뒷모습, 채찍을 들고 있는 군사의 의기 양양한 뒷모습, 빌라도 부인의 외투를 꼭 쥐고 있는 하녀의 절박한 뒷모습,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의 한복판에서 강직하게 서있는 예수의 덤덤한 뒷모습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리만큼 예수는 몸에 상처나 피흘림의 흔적이 없다. 그리고 그의 몸매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그저 벗겨진 외투만 그의 피흘림을 예고 할 뿐이다.

극심한 고난의 흔적을 봄으로써 예수의 숭고한 희생과 구원의 은총을 묵상할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예수의 뒷모습은 그 이상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뒷모습. 뒷모습은 진실을 이야기 한다. 지난주 목사님 말씀처럼. 아마 안토이오 시세리는 십자가의 고난 한 가운데 서 있는 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The Truth 가 되는 예수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by 권조셉 전도사]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요한복음 20:19-29

 

부활의 주일 아침 “주님을 보았습니다”라는 마리아의 고백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신앙의 고백을 나눈 바 있습니다. 물론 나는 그런 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실제로 부활을 증거하기는커녕 여전히 세상에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도마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직접 그를 목격한 마리아 이외에도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도마처럼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아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보지도 않고 믿으라는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해 안다는 말이기도 한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믿으라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본다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깨닫는다고 생각해 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이라고 하는 다소 추상적인 말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꼭 눈으로 보아야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는 사랑은 오히려 사랑을 설명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보여지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활의 참뜻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이 하나의 말장난과 같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각 개인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열매인 것처럼, 부활도 오늘 우리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신앙고백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체험을 우리 각자가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보았다는 것은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각자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체험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부활의 사건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사는 회심의 역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지금도 부활을 각자의 삶을 통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열매는 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통해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부활의 증거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은 과연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모습이 맞나요? 혹 보이는 것이 없다고 먼저 의심부터 하는 것은 아니었던가요? 정말 부활의 열매를 보려한다면 마치 감이 떨어지듯 하늘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활의 증거를 찾기 위해 잘못된 부분을 찾아서 과감히 부인해 버리고 다시 새롭게 변화되어 부활의 열매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이 아닐까요?

부활 이후 제자들을 직접 다시 찾아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부활의 의미를 세상 속에 알려 주신 것처럼, 이제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뜻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 서로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좀 부활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시나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여전히 의심과 무지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제자들을 위해 직접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시 제자들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십자가의 사건 이후에 그들이 처한 위기는 그들을 두려움과 공포라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몰아갔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해 자기방어의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조차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먼저 걱정해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가치보다 개인의 유익과 안정이 더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자기 자신 외에는 어디서도 찾지 못해 궁극적인 방향을 잃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개인들의 삶에 구심점이 되어주던 공동체가 그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자 그 누구도 마음 놓고 편하게 믿고 의지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국가를 비롯한 어떠한 조직도 개인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약해져 버린 까닭입니다. 한마디로 명확하게 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트셀러로 한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가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불치의 암 선고를 받고 죽기 전까지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폴 칼라티니라는 신경외과 의사였습니다. 저자인 폴은 인도계 2세로 스탠포드대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이후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로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 명문대학의 교수자리를 제안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폐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의사로서 무수한 암환자를 대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그림자는 그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불안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질문하게 됩니다. 그가 암수술을 받기 위해 최고의 폐암 전문의를 찾았을 때도, 그는 의사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 이러한 시선으로 그는 한때 극심한 업무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져 환자를 대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짐하지요. “모든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 조차 환자처럼 대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을 보이는 숫자로, 생명의 소중함 보다 보여지는 외적인 효용성이나 척도로 값을 매기며 사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가처럼 삶을 정리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운 좋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자도 숨결이 바람이 되기 전, 숨이 끊기기 전에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구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꼭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공포에 떨며 앞으로 가야할 삶의 방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숨을 불어 넣어주신 까닭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22절의 숨을 불어넣다는 동사 ‘emphusao’는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45 절을 통해 "첫 사람은 숨을 불어 넣어주셔서 산 영이 되었지만 마지막 사람, 곧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고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숨결이 우리의 코끝을 지나가 버리면 하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결의 히브리어 ‘hebel’이 동사형이 되면 ‘헛되다(habal)’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이 바람 같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큼 헛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숨 쉬고 있어도 마치 죽은 영처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욕과 의미를 잃어버린 제자들이 꼭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숨결을 불어 넣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처럼 모든 희망이 어디론가 흩어져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이들에게, 헛바람만 일으키며 세상의 허무한 욕망에 눈이 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래바람을 일으키듯 온갖 의심과 의혹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며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세속적 물질만능주의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 불어 넣어주고 계십니다. 금새 그치고 말 미풍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와 생명의 숨결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숨결이 바람되는 그 순간에도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