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같은인생

마가복음10:17-30

 

지난월요일저녁몬트레이에위치한가나안연합감리교회를오랫동안섬기다가은퇴하신고박선용목사님의장례예배가있었습니다. 이미두주전저를비롯해서같은연회에소속한여러목사님들과사모님들은병상에서마지막삶의여정을지나고계시던박목사님을찾아뵈었습니다. 함께찬양하고기도하며, 목사님에게마지막응원이될지도모를임종의준비를하였습니다. 많은목회자부부들이병상에누워서제대로눈도뜨지못하고계시던박목사님을위해찬양을부를때는저도그가운데있었지만, 마치천상의소리를듣는것만큼아름다웠습니다. 저의마지막가는길이라하더라도큰위로와소망을얻을수있을것이라는확신이들정도였습니다.

 

그때목사님이저희에게유언처럼한가지부탁을하셨습니다. 본인의장례예배때모두가함께“Oh Happy Day!”라는성가를같이부르면좋겠다는것이었습니다. 고인의부탁대로지난장례예배의마지막찬양은“오! 해피데이”였습니다. 모두가일어나서박수치며, 천국가는길을기쁜마음으로환송하며노래했습니다. 지금까지봐왔던그어떤장례예배보다은혜의감동으로벅찼던순간이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다른장례예배와확연히다른점은바로장례예배의조문객에게전하는감사의말을본인이직접촬영한동영상으로대신한부분이었습니다. 미리자신의장례예배를생각하며남기고싶은말을전한것이지요. 

 

“주하나님을만나러가는것이얼마나기쁜일인가! 그리고이세상에서주님의종으로불러주셔서마지막까지복음을선포할수있는삶이얼마나감사한일인가!” 라는마지막유언과함께모두가하나님의나라에가기전까지늘감사와기쁨으로살아가기를기원하는메시지를전하였습니다. 나중에집례목사님으로부터예배에사용된주보의순서와그안에들어갈내용들도박목사님이손수다준비해놓으신것이라는이야기를전해들었습니다. 생전에자주말씀을나눌기회가없어서잘몰랐는데, 목사님에대한깊은인상과삶과죽음에대한가르침을얻는귀한시간이었습니다. 

 

장례식을생각하며지금도이런질문을스스로해보게됩니다. “과연나는사나죽으나감사와기쁨으로오늘을행복한날이라고믿고있는것이맞는가?” 라는질문을말입니다. 여러분들은어떠신가요? 날마다주님의은혜속에서감사와기쁨으로행복한나날을누리며살고있다는믿음을갖고계신가요? 그래서주님이부르시는마지막그날에도주님을만나뵐수있다는기쁨으로‘오해피데이’ 라고말할수있는믿음이여러분에게있는것이맞나요?

 

세상을나름대로감사와기쁨으로살아가면서도아직구원에대한확신을갖지못한한부자청년이있습니다. 그에게오늘은아마행복한날인지는모르지만, 앞으로주님을만나는마지막순간까지행복할수있을것인가에대해서는스스로확답을갖지못한상태였던것으로보입니다. 그래서예수께묻습니다. “어떻게해야영원한생명을얻을수있을것인가?”라고말이지요. 결국구원의그날어떻게해야행복한날이라고말할수있는지를묻는것으로바꾸어이해할수있는대목이기도합니다.

 

그러자예수께서율법의몇가지조항을예로드시며, 그것을지키는삶인가를묻습니다. 청년은어릴때부터율법에서가르치는내용들을잘지켜행해왔다는이야기를합니다. 크게나무랄데없는모범적인삶을살았다는뜻입니다. 그런데예수께서드신율법의조항은십계명의두가지큰줄기안에서하나님과의관계를규정하는계명이아니라, 인간을비롯한피조물과의관계에관한조항들입니다. 십계명을예수께서는크게두가지의계명으로요약하신바있습니다. 하나는하나님을사랑하는것이고, 다른하나는이웃에대한사랑입니다. 다시말해율법의조항을하나님과의관계, 그리고피조물간의관계로축약시킨것입니다.

 

지금청년에게물어보신것도그렇고청년의대답도하나님과의관계라기보다는피조물간의관계에대한율법조항이라고볼수있습니다. 적어도이부분에있어서청년은크게문제삼을만한일을하지않았다고스스로자평한것이지요. 흔히믿음이없어도착하게사는사람들이많다는이야기를합니다. 오히려교회다니는사람들보다더모범이될만한행동을하는비그리스도인들을볼때도많습니다. 사실신앙을이야기할때, 하나님과의관계만큼세상속에서윤리적으로도모범이되는것은그리스도인에게중요한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을세상과구별되게만드는‘거룩’의참된의미는경건한교회예배에참석하는것만이아니라, 날마다매일의삶속에서도증거되어야한다는것이지요. 

 

입으로신앙은강조하면서정작현실에서의삶은가르침대로행하지않는다면누구도그의신앙을모범으로삼지않을겁니다. 많은교회와교인들이세상사람들로부터비판을받는주된이유도이것때문아닙니까?  그런의미에서적어도율법을어기지않고살고자한젊은청년의모습은오늘날욕먹는교회나교인보다는훨씬더신앙적모범이되는것처럼보이는것이사실입니다. 적어도윤리적으로문제가될만한일은하지않았으니말입니다. 

 

하지만예수님은그에게부족한것이하나있다고말씀하십니다. 바로계명의또다른한축이라할수있는하나님과의관계에대한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온전한신앙을하나님과의관계와모든피조물간의관계가균형을맞출수있을때가능하다고보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을사랑한다하면서형제를사랑하지않는것은거짓된신앙입니다(요1 4:20). 반대로하나님에대한믿음없이세상을사랑한다고말하는것은언제나불완전한모습일뿐입니다. 왜냐하면사람의감정이나행동은언제든변할수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하나님사랑과이웃사랑은언제나함께가야온전한것이될수있습니다.

 

세상에서의율법적행실에문제가없던청년에게부족한것하나가바로하나님에대한사랑이라고지적하신이유가여기에있습니다. 사실청년의마음이어디로향해있는가를묻고자하신것입니다. 하나님과맘몬을함께주인으로모실수없다는점을재확인시켜주고자하신것이지요. 그래서가지고있는모든것을나누어주라고하신겁니다. 빈손으로돌아가라는청렴정신을강조하신것이아니라, 청년이자기삶의궁극적인주인으로과연돈이아닌하나님을모시고있는것이맞는지를확인하고자질문하신것입니다.

 

오늘날교회가점점교세를잃어가고있습니다. 이미유럽의교회는거의명맥만유지할뿐그영향력은매우미비한수준입니다. 가끔씩방송을통해굵직한사회적이슈에관한교황의메시지가사람들에게전달되는정도입니다. 청교도의나라인미국도더이상교회가성장하는시대는지나쳤다는분석이타당성을얻고있습니다. 한때지속적인성장을보이던한국교회도정체기를지나벌써쇄락하고있는상황입니다. 서구사회에서는신앙이생활속에스며들면서긍정적효과를보여주기도했지만, 지금은주인없는껍데기만남은신세가되었습니다. 세상의이야기는곧잘하는데, 정작하나님에대한믿음은인정을받지못하는시대가되어버렸습니다. 그빈자리를물질주의가차지해버렸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그것은한국교회의상황도크게다르지않습니다.

 

얼마전세습문제로사회적지탄이되었던한국의한대형교회가800억이넘는비자금과2000억대의부동산을전국각곳에매입해놓은증거가언론을통해보도된바있습니다. 기자와의인터뷰에서재산을그토록많이가지고있는이유에대해교회관계자들은만일의사태를대비한것이라고대답하는것을들을수있었습니다. 도대체교회가무엇을예비하기에그토록많은돈과땅을축적해놓는다는것인가요? 오히려지금세상에필요한이들에게나누어주며살아야하는것아닌가요? 그것이바로예수님이가르쳐주신소금과빛과같은교회의본질적역할이아니던가요? 

 

이는마치가진재산을다팔아서가난한사람과나누라하신주님의말씀에도불구하고, 결국지금자신이가진 재산을놓지못하고주님을떠나가버린부자청년을연상시키게합니다. 예수님의이야기가더이상비유가아닌현실의실제상황이되어버린것이지요. 너나할것없이돈을숭상하는세속적가치가지배하는시대를목전에두게되었다는뜻입니다. 

 

이를보시며예수께서는재산을가진자가하나님의나라에들어가는것은낙타가바늘귀를통과하는것만큼이나어려운일이라고비유의말씀을전하셨습니다. 물론이말씀은잘새겨들어야합니다. 낙타가바늘귀를통과한다는말자체는불가능하다는점을부각시키기위한비유적표현입니다. 그와마찬가지로재산을가진자도사실은하나님이아닌재산을자기삶의주인으로삼은이를지칭하는표현에가깝습니다. 한마디로세상의모든부자로통칭할수있는특정계층을이야기한것이아니라하나님의말씀이아닌물질을주인으로믿고삶을살아가는사람들에대한이야기라는것이지요. 하나님이아닌맘몬을숭배하는이에게하나님의나라는주어지지않는다는사실을지적해주신말씀입니다.

 

또하나, 예수께서낙타라는특정한동물을비유로드신이유를생각해보게됩니다. 낙타는늘등에남의짐을지고가는동물로묘사됩니다. 사실바늘귀라는단어도당시성문의작은쪽문을가리키는말이었다고합니다. 낙타가그작은쪽문을통과하기어려웠던이유가운데하나가바로그짐때문이었습니다. 등에진짐을내려놓지않고서는그문을못지나가는것이지요. 그러고보면우리의삶이꼭낙타인생같아보이지않습니까? 무언가소유하기위해무거운짐을짊어지고살아가는모습처럼말입니다. 그것이마치삶의유일한낙이자목표인것처럼짐을막쌓아올리며살아간다는것이지요. 

 

이처럼낙타같은인생을살아가는우리에게예수께서이런말씀을하신바있습니다. “수고하고무거운짐진자들아, 다내게로오라. 내가너희를쉬게하리라(마11:28)” 그것이무거운짐인줄도모르고마치인생의유일한목표인것처럼생각하는이에게하나님의나라는지나가기어려운매우좁은문과같아보일겁니다. 그러나주님을믿고의지하는이들에게바늘귀와같은문은그저천국으로가는통행로에지나지않습니다. 무겁게진짐을내려놓고가는길이니늘기쁘고감사한길입니다. 무엇보다천국으로향해가는그순간에는정말“오해피데이”가절로나오지않을수없을겁니다.  

 

여러분은지금이순간행복하십니까? 영어의식당을가리키는단어restaurant은쉼을뜻하는rest에서유래한말이라고합니다. 오늘이자리는무거운짐을주님께맡기기위해나온쉼의자리입니다. 여러분이지금앉아계신교회는하나님의말씀을행복하게먹는‘영의식당’입니다. 오늘주님이주시는말씀을맛있게먹고, 삶의평안을회복하시기바랍니다. 그리고저문을나설때는낙타가바늘귀를통과하듯무겁게지나가는것이아니라, 날마다행복을느끼며감사와기쁨의찬양을드리는복된순간이될수있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합니다. 아멘.  

어린이와같이

마가복음10: 13-16

  

모든종교마다추구하는이상이있습니다. 구체적인모습은다를지몰라도그형식은거의대동소이합니다. 단순하게보면, 크게현세에서의안녕과내세에서의생명이라는말로요약할수있습니다. 이를한마디로복이라고부르기도하고구원이라는말로바꾸어이야기할수있을겁니다. 신앙도단순화시켜생각해보면, 결국은복과구원을구하는삶의모습이라고해도무방합니다. 다만각각의종교가복과구원에대한해석과함께, 그것을어떻게얻을수있는가에대한방식에서차이가난다는점만다른것이지요.

 

지금도많은그리스도인들이하나님의축복과영원한생명에대한소망을안고살아가고있습니다. 그중에서도장차맞이하게될하나님의나라에대한기대는그리스도인들을다른종교인들과구별하게만드는가장특별한모습이아닐수없습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의나라가현세와내세의구원을모두설명하는기독교만의개념이기때문입니다. 따라서어떻게하면하나님의나라에들어갈수있는가의문제는그리스도인들에게는가장중요한문제라고해도틀리지않습니다. 그것이곧우리의신앙생활전체를한마디로정의내려줄수있기때문입니다. 

 

그런의미에서오늘본문말씀은하나님의나라에들어갈수있는기준에대해  정확한해답을제공해준다고말할수있을겁니다. 예수님이하신말씀이기에이보다더분명한답을구하기도어렵습니다. 예수님은어린이와같이하나님나라를받아들이는자만이그곳에들어갈수있다고분명하게말씀해주셨습니다. 들어갈수있는자격만이아니라예수님은아예하나님의나라가어린이와같은자의것이라고단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나라가어린이와같은자에게속한것이라는말씀을하신것이지요. 

 

물론이것은단순히땅의소유권처럼하나님의나라가그들의소유라고하신말씀은아닙니다. 오히려하나님나라에속한이들이라고표현하는것이더정확한의미를보여주는것이라고이해할수있습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의나라는소유개념이라기보다는통치개념으로이해해야하기때문입니다. 말하자면하나님의나라가누구의것이되는게아니라, 하나님의나라는하나님의말씀대로통치되는것을의미하는개념입니다. 따라서하나님나라에속한다는것은결국하나님의말씀에의해온전히통치받고산다는뜻이라할수있습니다. 결국어린이와같은자의것이란말도바꾸어해석하면, 하나님의말씀을온전히따르며살아가는이들의모습이바로어린이와같은자와같다는뜻이지요.

 

그렇다면지금우리에게중요한것은‘과연누가어린이와같은자인가?’ 라는질문입니다. 단순하게만생각해보면, 어린이처럼순수한사람을지칭하는말로이해할수도있습니다. 물론동심의세계처럼순진한생각을하는사람이아무래도세상에물든사람보다는천국에더적합해보이는것도사실입니다. 그런데그자체가사실은순진한생각일수있습니다. 요즘아이들을잘몰라서하는이야기일지도모릅니다. 알고보면아이들도본능적으로꽤선하지만은않은모습을보일때가있습니다. 무엇보다함께살아가는공동체안에서늘애처럼사는이들과더불어산다는것자체가많은이들에게는엄청난재앙일수도있다는점을기억할필요가있습니다. 그럴때는동심이순수의세계로보여지기보다는오히려정제되지않은본능처럼느껴지는것이사실입니다. 

 

그래서한동안많은신학자들은어린이와같은모습을단순히순수함이라는말이아니라, ‘아이의수용력’이라는의미로이해하기도했습니다. 쉽게말해, 모든것을스폰지처럼잘받아들이는특성이바로어린이를가장잘표현해주는모습이라는겁니다. 신앙도그런차원에서어린이들일수록더쉽게받아들이는경향이있다는것이지요. 그것이믿음을더욱견고하게만드는힘이되어서하나님나라에들어가기적합한자격을만들어준다고생각했던겁니다. 하지만이러한수용력을맹종과혼동해서는안됩니다. 이성적판단능력을완전히잃어버리고무조건적으로받아들인다는것은올바른신앙의태도가아니라는것이지요. 

 

사실15절에서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다고할때, 받아들인다는말의원어인“데코마이(δέχομαι)”는‘온정성을다해영접한다’는의미에가까운단어입니다. 그러니까무조건적으로수용한다는말이라기보다는마음을다하여주님을모신다는뜻이라할수있습니다. 따라서이러한행동은사실어린이보다교육받고세상을좀아는어른에게서더쉽게찾을수있을지도모릅니다. 예수님의말씀이단순히철모르는(childish) 아이같은모습을지칭한것이아니라는사실을이것만보더라도알수있습니다. 

 

본문에서말씀하신예수님의의도를보다분명하게이해하려면, 이이야기가시작된도입부분을유심히살펴볼필요가있습니다. 사건의발단이바로어린이들이예수께오는것을제자들이막았던것에서부터시작하고있습니다. 이것은어린이들에대한당시사회적시선을여과없이보여주는부분입니다. 성경에서자주언급되고있는것처럼어린이는가난하고헐벗은자와과부처럼가장무력하고소외된계층으로묘사되고있습니다. 인격적인대우를받지못하는대상이었던겁니다. 오늘날과같이어린이를대하던때는인류의역사에정말얼마안되는순간일뿐이었습니다. 어린이가그자체로생명을지닌소중한인격체로인정받은것은지금도발달된사회에서나이루어지고있는극히제한적모습이라는겁니다. 언제나어린이라는한인격체가아니라어떤배경을지닌어린이인가가항상세상에서는더중요한문제였다는뜻입니다.

 

당시유대사회에서도어린이는스스로를지키지못하는연약하고, 누군가의도움을필요로하는의존적인존재로간주되었을뿐입니다. 오늘우리가읽은마가복음의문맥도이를배경으로예수님의말씀을의도적으로전하고있습니다. 이미두주동안살펴보았듯이마가복음의9-10장은하나님나라를이야기하면서누가더큰자인가라는공적을두고평가를하는내용들이지속적으로등장합니다. 그때마다예수님은꼴찌가되고낮아지는것이결국하나님나라를가는자의기준이될것이라고말씀해주셨습니다. 더욱이예수님은십자가의길에앞서제자들에게그이유를가르쳐주시고자했지만, 제자들은그저높아만지려는세상의길에서한발자국도물러서지못한모습을보여줍니다.

 

그런맥락에서어린이에대한예수님의언급은여전히사회적가치에만눈을두고있는사람들에게그와는반대로살아야할이유를보이고자드신또다른낮은자의사례라고할수있습니다. 따라서15절에서‘받아들인다’는말의또다른의미는어린이처럼세상의가치로바라보는것이아니라있는그대로존재자체를인정하라는의미로이해할수있습니다. 어떤사람인가를보는것이아니라, 그저그사람을있는그대로바라보는것이지요. 비록사회적으로는인정받지못하는어린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의나라는그존재자체를소중한대상으로받아들이는곳입니다. 따라서그곳에갈수있는자들도당연히있는그대로사람을바라볼수있는이들일수밖에없다는것이지요. 제자들처럼어린이들을가리고막아서는행위는세상의가치처럼사람을구별하는장벽과같은모습입니다. 반면예수님은어린이들을안으시고안수하며축복하여주심으로서하나님나라의축복은모두에게주어진은혜의선물이라는사실을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하나님의나라는어린이와같은자에게주어진복이라고분명하게말씀하셨습니다. 먼저어린이같은자는하나님의말씀을온전히받들기위해주님을자기삶의주인으로모시는사람입니다. 그런데그복은세상에서말하는잘먹고잘사는모습으로나타나는것이아닙니다. 어린이같아서하나님나라에속한자로산다고해서이땅의삶도편하고충족된모습이라는의미는아닙니다. 그러니현실의삶이편안하지못하고, 충족되지않은것같을뿐만아니라누군가의도움없이는일어설수도없을만큼절대의존적인형편이라하더라도좌절하지는마십시오. 오히려낮고작은자에게하나님나라의복이있습니다. 무엇보다그들을통해하나님의나라를만들어가십니다. 세상의가치관에눈을두기보다, 가장낮고작은자의소중함을볼줄아는어린이와같은자들을통해하나님은역사하십니다. 

 

오늘성만찬의공동식사에여러분이초대된이유도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세상에서누구보다높고훌륭한사람이어서가아니라, 작고보잘것없는것하나에도마음을주시는주님의한량없는은혜로부르신것입니다. 이성찬을어린이처럼기쁜마음으로온정성을다해받아들이시기바랍니다. 하나님의나라가바로여러분의것이될줄믿습니다. 우리주예수그리스도께서이자리에임재하시어우리를안으시고, 각심령을친히안수하며축복하시기를기도합니다. 

사랑해야한다면

마가복음9:38-41

원활한인간관계를유지하기위해서해서는안될이야기주제가두가지있다고합니다. 정치와종교에관한이야기입니다. 인간사에서빼놓을수없는매우중요한주제인데, 왜사람들사이에서기피의대상이되어버린걸까요? 그것은이야기를통해함께소통하기보다는자기의견해나주장을일방적으로남에게설득하려는경향때문에그렇다는겁니다. 사실이기고지는게임이아님에도불구하고, 정치나종교는자신의입장을어떻게든다른사람에게전하는정도가아니라그사람을이해시키고나아가자신의생각으로동의를얻으려는주제가될가능성이높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특히대화문화가보편화되어있지않은우리정서상, 이두가지주제는사람들사이를갈라놓기딱좋은문제가아닐수없습니다. 부모와자식, 부부그리고친구관계를명확하게가르는토론주제가될수있다는겁니다(예,추석에가족갈등원인). 결국남는건상처뿐이라는말이일리가있습니다. 대화를통해서로소통한다는것은남의생각과입장을배려하며이해한다는뜻입니다. 그런데자신의주장을설득시킨다는것은대화라기보다는일종의테스트가될가능성이높습니다. 왜냐하면상대방이나와같은생각을갖고있는가의여부를가지고일종의편가르기를하는셈이니말입니다. 

수천년동안정치와종교는인간의역사를분쟁의역사로만드는데커다란공헌을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기독교의역사도한때는암흑의시기라할만큼매우공격적이고배타적인성향을보여주기도했습니다. 당시는종교와정치가뗄래야뗄수도없이밀착되어있던시기이기도했습니다. 믿음을통해편을가르는일종의정치적성향이강하게나타났기때문입니다. 같은믿음이아니면다른것으로끝나는것이아니라, 무너뜨려야할적이되는상황이었으니말입니다.  지금도많은사람들이기독교를비판적으로바라보며, 성경의말씀이나실제교회의모습이너무배타적인것아니냐는이야기를합니다. 믿지않는다는이유로혹은유대의백성이아닌이방인이라는이유로수많은사람들을학살하는성경의이야기는믿지않는사람들은물론이고믿는이들조차혼란스럽게만드는부분이기도합니다.

물론성경을문자그대로이해하려한다면그럴수있을겁니다. 무조건맞다고말하는사람들도위험하지만, 마치기독교의가르침이실제그런것아니냐며말하는이들역시단순하기는마찬가지입니다. 문자그대로이해하면서, 사실많은이들이실제로그렇게살지도못하고있을뿐만아니라그렇게살수도없다는사실은인정하려들지않는모순을여기저기서볼수있습니다. 대개는자기편한대로, 혹은자기생각에끼워맞추어서괜찮으면따르고, 아니면무시해버리는경우가더많습니다. 이런교회의편향된생각이오늘날세상사람들에게오해를만든이유가되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저는이런시각을가진분들에게이런질문을던지곤합니다. 거꾸로생각해보면, “이치에도맞지않고, 앞뒤가모순인경우가많은논쟁이되는이야기들을굳이성경에그대로기록하고있을까?” 라고말이지요.

이에대한기독교의가르침을제대로파악하는방법은의외로아주단순할수있습니다. 그것은바로예수님의말씀입니다. 그분이곧하나님의말씀입니다. 우리가우로나좌로치우치지아니하고따라야할진리의말씀이바로그분의말씀입니다. 그러니예수님의말씀을통해서거꾸로성경의가르침을해석하고이해하면, 보다명쾌하고올바른해답을얻게될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오늘본문말씀의이야기를통해배타적인인간의속성에관한예수님의생각을함께살펴보려고합니다.

본문의마가복음말씀은요한을비롯한제자들이예수님을찾아와그들이한일에대한보고로부터시작합니다. 그것은예수를따르던제자의무리에속하지않은어떤한사람이예수님의이름으로귀신을내쫓는것에대해더는그와같은일을하지못하도록막은일이었습니다. 아마도제자들은아무나스승의이름을들어귀신을축출하는행위는온당치못하다는생각을한듯합니다. 그이유를요한은자신들을따르지않았기때문이라고말합니다. 여기서따른다는말은공동체에속하지않았다는뜻입니다. 한마디로우리사람이아니라는말이지요. 때문에그가'주의이름'으로귀신을내쫓는선한의도를보여주었다할지라도, 우리사람이아닌, 말그대로‘외부인’에게그러한권한을주기는곤란하다는것입니다. 

이는당시제자들이얼마나배타적인성향을갖고있었는가를보여주는모습이라할수있습니다. 그도그럴것이이때제자들은자기들사이에서도서열에따라논공행상을따지던상황이었다는것을바로앞의구절을통해서도볼수있습니다. 하물며소속도되어있지않은외부인이자신들과같은행세를한다는사실을받아들이기쉽지않았을겁니다. 이것만놓고보면, 제자들도큰착각을하고있었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마치사람들을고치는데예수의이름을사용하는것이특허권이라도되는것처럼그소유권을주장하고있으니말입니다. 

사도바울은누구든지주의이름을부름으로써구원을얻을수있다고말한바있습니다(롬10:13). 그런데제자들은그이름을아무나사용할수없다고경계를만든것입니다. 그것도자기들이외의사람들에게는권한을뺏어버렸습니다. 주의이름을부를수있는권한은오직자기들의조직안에있는소위“우리사람”에게만주어진것이라생각했던것이지요. 이것만놓고보면, 제자들의세계관이매우단순하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흑과백,우리들과외부인이라는이분법적인시각이라는겁니다.

모든것을우군과적군이라는이분법적인세계관으로보는사람에게인생은어쩌면바둑판같아보일지도모르겠습니다. 흰 돌과검은돌로이루어진게임의세계와같이말입니다. 설사그렇게본다해도한가지분명한사실이있습니다. 이게임과같은세상이존재하기위해필요한가장근본적인룰은바로검은돌과흰돌둘다있어야한다는점입니다. 비록바둑판처럼세상이서로를잡아먹고많은것을차지하기위한게임같다할지라도, 변하지않는한가지점은서로함께있어야만가능하다는것이지요. 어떠한경우에든서로를인정해야한다는겁니다.

오래전한인목회자들의모임에참석을한일이있었습니다. 그런데모임중간에어떤목사님한분이제게와서정중하게인사하며, 후배님아니시냐고묻는것이었습니다. 저는처음보는분이라제가어떻게후배가되는지를되물었습니다. 그러자그분은특정신학대학을지칭하면서, 제가그곳출신이라생각했다는겁니다. 조금은겸연쩍게저는한국의신학교출신이아니라는사실을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나서생각해보니, 이상하게그분과같이있던몇분들이그전부터제게매우호감을가지고친절하게대해주신이유를알것같았습니다. 그리고바로이런생각이불현듯스쳐지나갔습니다. “이제는그전처럼대하지는않으시겠구나”

미국에유학와이곳에서신학교를졸업한저에게붙어다니는한가지꼬리표가있습니다. 그것은“미신”이라는겁니다. 장신, 감신, 연신이라고줄여서한국의특정신학교출신들을지칭하듯이, 미국에서공부한사람이라고해서미신이라고부르는것이지요. 사실미국의신학교가몇배는더많은데, 하나로뭉뚱그려부른다는것도흥미롭습니다. 그래서그안에서도세분화시키는데, 그범주에따르면저는미신가운데서도“잡신” 출신이라는겁니다. 특히한국감리교신학대학출신이상대적으로많은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는나름대로출신성분을구분하는방법이있다고합니다. 신라시대의골품제에비유하여, 성골이라해서감리교목회자집안의아들, 진골은감리교신학대학부를나온목회자, 그리고육두품이라해서학부가아닌대학원을감리교신학대학에서나온사람들. 나머지는그냥어둠의자식들이라고부른다는우스개소리가있습니다.

언젠가는미국신학교에서조차종강모임을마치고출신별로소모임을다나누어갖는데, 저는갈곳이없어서교수님과한조가되는호사를누린일도있습니다. 또어느모임에가서는섬기는교회의규모별로나누어소모임을갖는데, 당시청년수는허수라고해서저는교인수를세지못해어정쩡하게밖에나가커피를혼자마신일도있었습니다. 모임의밖에서있는다는것.그건쓸쓸함보다더한씁쓸한고독감을주었습니다. 게다가다한쪽에몰려서서, 그경계밖에선몇안되는사람에게“좌파” 내지는“문제있는사람들”이라는이름을달아줄때는참쉽지않은자리라는생각이들기도합니다. 그때마다저는자연스럽게성찰의시간을갖곤했습니다. “내가뭘잘못했는가?”라는질문과함께말이지요.  

우리안에속하지않은외부인을경계하는제자들에게예수님은이렇게대답하셨습니다. “금하지말라. 내이름으로기적을행하는자가나를욕할이유가없다. 결국우리를반대하지않는사람이우리와함께하는자다.” 사실우리를반대하지않는사람이우리와함께하는사람이라는예수님의말씀은논리적으로적절한대답은아닙니다. 물론반대하지않는사람들중에는지지하는사람도있겠지만, 분명아닌사람들도있을수있기때문입니다. 예컨대정부여당의정책을반대하지않는다고해서꼭그들을지지한다고는볼수없는것과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예수님의의도는다른각도에서살펴볼필요가있습니다. 제자들과는달리예수님은‘우리’와‘남’이라는이분법적인시각에서말씀하신것이아니라는뜻입니다. 예수께서는오히려그경계를없애려하신것이지요. 우리와외부인을가르는경계를없앰으로써모두가‘우리’가될수도있다는사실을알려주신겁니다. 하나님의뜻안에서모두가하나가될수있는길을보여주신것이지요. 왜냐하면제자들은누가주님의이름으로귀신을좇는가에관심을두고있었지만, 예수님은누가행한것이아니라그일을통해구원을얻게될사람들에게초점을두고계셨기때문입니다. 목말라죽어가는사람들에게복음이라는생명수를전하는것이우선이지, 그일을누가맡아서할것인가는그다음의문제였다는것이지요. 

반면제자들은자신들이하는일과그것을할수있는특권에대해서만생각을하고있었습니다. 그러나예수님은처음부터도움을필요로하는사람들에게모든관심을쏟고계셨던겁니다.  어떤조건이충족되어서그무엇때문에사랑하신것이결코아니라는뜻입니다. 그냥사랑하신것이지요. 그래서41절말씀에서자기받을상을받는사람에대한정의도되새겨볼필요가있습니다. 누구든지그리스도의사람이라고해서물한잔주는사람은무엇을지칭하는걸까요? 이말씀은제자들이라는것을알아보며, 그들에게베푸는사람을지칭하는것이아닙니다. 마치목사를잘대접하는사람에게만상이있을것이란뜻이아닙니다. 교회에속한우리교인만잘챙기면된다는무한이기적발상으로하신말씀이아니라는것입니다.

오히려예수님은그경계를무너뜨린분입니다. 우리와외부인의경계를허물고, 그리스도안에서모두가하나되는모습을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어떻게가능하냐? 그리고그것이어떤모습인가? 예수님의말씀은물한그릇줄수있는것이라고가르쳐줍니다. 누구라도이제그리스도안에서하나가된것을믿고, 구별하지않고그에게아무조건없이물한그릇을내줄수있는사람. 그사람에게제자들이그토록바라던상이있을것이라는뜻입니다. 그것이바로진짜사랑이기때문입니다.

영국의빅토리아시대여류시인가운데하나인엘리자베스배릿(Elizabeth Barett)은15세때낙마사고로인해척추를다친이후, 시한부인생을살았습니다. 그런데연인을만나주위의반대를무릅쓰고결혼을합니다. 그리고사랑에대해이런시를썼습니다.

“당신이날사랑해야한다면오로지/ 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주세요/ ‘난저여자를사랑해/ 미소때문에예쁘기때문에/ 부드러운말씨때문에/ 나와꼭어울리기때문에/ 어느날즐거움을주었기때문에‘ 라고/ 말하지마세요/ 그러한것은그자체가변하거나/ 당신으로하여금변하게할테니까요/ 그처럼맺어진사랑은그처럼풀려버릴거에요…오로지사랑을위해날사랑해주세요/ 그래서언제까지나/ 당신이사랑할수있게”

사랑은무엇때문에하는것이아니라는시인의말은감성에호소한말이라기보다는논리적이라고하는편이옳습니다. 왜냐하면그조건과그조건을바라보는사람의판단은언제나변할수있기때문입니다. 무엇보다오직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달라는시인의말은오늘예수님의말씀을연상시키기에충분합니다. 사랑은무엇때문에주는조건적인것이아니라고예수님은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도저히사랑할수없는원수까지사랑하라고가르치셨던겁니다. 할수있어서, 하고싶어서하는것은사랑이아닐수도있습니다. 할수없을것같은그순간에, 그리고하고싶지않은바로그때에행하는사랑이야말로진정한사랑이라할수있습니다. 그러니사랑해야한다면, 무엇때문이아니라그저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주시기바랍니다. 그것이다받을여러분의상이니말입니다.

 

 

 

천진난만(天眞爛漫)

시편1

마가복음9:33-37

 

오늘우리가읽은시편과복음서의말씀은인생을살아가는데있어전혀다른삶의목표에대한이야기를가르쳐주고있습니다.하나는복있는사람이되기위한삶의목표에대해전하고있는반면,다른하나는경쟁에서남보다우위에서고자하는승리가마치목표인것처럼묘사되어있기때문입니다.너무나뻔한이야기인것같지만,과연그리스도의사람들인오늘우리에게무엇이삶의참된목표가되어야하는지를이두본문을통해함께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먼저예수님의제자들이서로누가더큰사람인가를두고다투었다는복음서의말씀으로부터이야기를시작해보도록하지요.아마도길을오가며제자들사이에여러논쟁이있었던모양입니다.다음장인마가복음10장에서는세배대의두아들인제자요한과야고보가예수께서영광을받으실그때에서로그양옆에앉게해달라고주장하는매우구체적인사건까지언급되어있습니다.그만큼제자들안에서도서열과공적에대한보상을두고이야기가있었던것으로보입니다.특히이사건들이예수님의예루살렘입성바로직전에일어난사건들이라는것을생각해보면,당시그들의속내를미루어짐작할수있는모습이기도합니다.

 예수님의예루살렘입성,그것은제자들뿐만아니라예수님을메시야라고믿었던많은유대인들에게는세상의변혁이시작되는신호탄처럼생각되었습니다.호산나를외치며그리스도를맞이했다는복음서의보도대로,그자리에동참했던모든사람들은한결같이세상의완전한변화를꿈꾸었을겁니다.지긋지긋한외세의압제로부터민족이해방되고,다윗왕의찬란한역사처럼왕국이다시서서부흥했던옛영광이실현될것이라생각했던것이지요.그리고왕이신예수의길에함께했던이들가운데는마치공신이되어더많은분깃이라도얻고자하는개인적이해타산이더이상숨길수없을만큼분출되기시작했던겁니다.

 예수님이무엇을가지고논쟁을벌였는지를물으셨을때,제자들의대답은이러한상황을그대로증명해줍니다.그들은누가더큰사람인가를가지고논쟁을벌인것에대해이야기합니다.좋게보면,제자들이제자로서의자격에대한기준을논하였을지도모른다는생각을해봅니다. ‘무엇이이상적인제자의자격인가?’라고말이지요.신학생들이나아직뜨겁고도순수한목회의열정을가진목회자들이모여서이런이야기들을나눌때가있습니다. ‘우리시대의이상적인목회자는어떤모습인가?’라고말입니다.그런데이런이야기가계속되다보면,이상적인모습에대한정의에서주제가점점현실에대한비판이나부정으로흘러가는경우를많이보게됩니다.이상적인목회자를찾다가결국은그렇지못한목회자에게비난의화살이가는것이지요.

 대개의경우,이름있는목회자가거론이되고그가왜이상적인목회자가아닌가라는것을이야기하는것에초점을두게됩니다.그리고이야기는안타까운현실에대한비판과한탄으로이어지기도합니다.하지만여기서놓치지말아야할부분이한가지더있습니다.그것은바로그모습속에서자기자신을발견해내는일입니다.언제든나도그대상이될수도있다는두려움속에서스스로를성찰하고반성하는과정이반드시있어야한다는것이지요.그렇지않으면누구에게서도우리는이상적인목회자상을찾을수있을것이란희망을가질수없기때문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사람들은다른사람의이야기를통해자기자신을돌아보기보다는,말그대로그냥남의이야기자체로재미를삼는경향이있습니다.스포츠경기나경마와같은것을보며열광하는것도비슷한심리적현상이라고볼수있습니다.선거에서도이기고지는과정그자체를즐기는사람들이꽤많습니다.그저자기동일시를통해대리만족을하거나,반대로화풀이를위해희생양을삼는사람들의묘한심리를여러곳에서확인할수도있습니다.그러나거기에는한가지가빠져있습니다.바로자기자신입니다.자기가직접피말리는경쟁에들어가야하는것은원하지않습니다.그래서남이하는것은다쉬워보이기도하고별로아픈것같지도않아보입니다.그런데막상자기가경험해보면힘들고괴롭고,결코겪고싶지않은일이라는것을깨닫게되지요.

 이것이바로경쟁에대한사람들의이상한심리적상태입니다.막상자기가하려면탐탁지않고힘든것인데,남들이하는것을보며즐기는매우괴상한성질의본능입니다.끊임없는분쟁과갈등,그리고경쟁의구도로점철된인류의역사가이를증명해줍니다.지금도이것을위해그렇게치열하게살아가는것아닙니까?생존의유일한방식이자사실은마치삶의유일한오락거리가되었으니까말이지요.

 인간의이이상한성격을잘보여주는한사건이있습니다. 18세기유럽에서있었던일입니다.당시커피가등장하여인기를끌기시작할때였습니다.그런데한편에서는차와비교하며커피의유해성에대해문제를제기합니다.마치이상적인제자의기준이무엇인가를논하는것처럼말입니다.그래서스웨덴국왕인구스타프3세는실험을명령합니다.한살인범에게죽을때까지날마다커피를마시도록하고,다른살인범은차를마시도록한것입니다.그래서누가먼저죽는가를보고커피가차보다좋은지아니면나쁜지를증명하자는것이었습니다.일종의커피파와차파간의경쟁이었던셈입니다.하지만조사방법론의관점에서보면완전엉터리비교방식이지요.

 여하튼이를감독하기위해왕은두명의의사를임명하여,이를지켜보며감독하도록하였습니다.그런데아이러니하게도이긴실험기간동안가장먼저죽은사람은두의사였습니다.그리고그다음은바로이실험을명령한왕이었습니다.살인범들은그후로도수년을더살았다고하니,정말커피가유해한가를알고싶었던왕은결국결론을내지못하고세상을떠나버린꼴이되고말았습니다.물론커피인가차인가라는경쟁도의미없는결과만남기게되었고요.사실처음부터이경쟁의레이스가얼마나우습고의미없는일인가라는것은듣는여러분들도잘아실겁니다.

 물론경쟁가운데는선한목적과의도를가지고행하는긍정적인부분도있을겁니다.하지만그역시과열되거나경쟁에서의승리자체가목적이되는순간문제는일어나기마련입니다.예를들어화목한가정을만들고사는것이가정생활의중요한목적이라믿는가족이있다고합시다.선의로다른어떤가정보다더화목하기위해노력하는것은궁극적으로자기가족을위한일입니다.그렇다고다른가족과의경쟁에서이기기위한것을목적으로삼지는않습니다.왜냐하면화목한가정을이루는것이목적이지다른가족보다더화목하고자하는경쟁에서의우위가중요한것은아니기때문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가사는현실속에서경쟁이삶의목표를결정하는중요한기준이되었다는사실은누구도부인할수없는상황입니다.역으로이러한현실은그만큼우리가변함없는궁극적인삶의목표나기준을갖지못하고살고있다는반증이기도합니다.그래서이세대의풍조를본받지말라는사도바울의경고가지금이시대에더적절한말씀이라는생각을하지않을수없습니다.한송이장미꽃을받고도기쁨을느끼지못하는시대를우리가살고있는것아닐까라는안타까운생각을종종하게됩니다.꽃만보고그안에담긴마음을읽지못하는시대를살고있기때문입니다.세상도그렇게만들고자신도거기에동조하며살아가고있지요.더풍성한꽃다발과비교하여초라함을느끼거나,더값나가는화려한선물같지않아서감동하지못하는철저히세대의풍조에젖어버린속물로살고있는것은아닐까라는생각을지울수가없습니다.

 바울은하나님의선하시고완전하신뜻을분별하라고가르쳐주었습니다.언젠가높은상공에서착륙하기이전에비행기창문밖광경을내려다본일이있습니다.지역마다보이는모습은저마다조금씩다르긴했지만똑같은것이하나있었습니다.그것은사람들입니다.세상을살아가면서는어디를가든지다거기서거기라고할만큼주변모습은비슷해도사람들은다다르다고생각했던때가있었습니다.그런데막상높은곳에서내려다보니사람들이야말로다똑같아보이는것입니다.하나의점처럼작은존재를통해서는추하고아름답거나부하고가난한어떤차이도찾을수없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앞에우리는다똑같은존재입니다.비교할것이없지요.그분의사랑도가리지않고모두에게똑같이주신것아닙니까?오히려그앞에서누가더큰존재인가를따지는것자체가참어리석고보기딱한모습이아닐까요?

 그래서인지는모르지만하나님께서그리스도예수를통해우리에게주신가르침도우리의생각을완전히뒤바꾸는것이었습니다.세상을거꾸로보는시선을가르쳐주신겁니다.꼴찌가처음이될수도있는세상,가난해도행복한세상,경쟁에서살아남기위해기를쓰는것이아니라오히려죽어야진짜생명을누릴수있는세상,오르기위해사는것만이아니라내려가는길에서도삶을느낄수있는참된세상을우리에게가르쳐주신것이지요(비교: Elevator vs 승강기).그래서예수님도스스로“섬김을받는것이아니라섬기기위해오셨다(마20:28)”고말씀하시지않으셨습니까?내가높아지기위해누군가를누르고낮추는삶이아니라자신을낮춤으로써세상을높이려하는삶이야말로진정세상을아름답게만드는길이라는사실을몸소보여주신겁니다.

 이것이바로예수께서보이신가장큰사람의모습입니다.제자들이나세상의  관점에서가장큰자의모습과는전혀다른각도에서가르쳐주신것이지요.오늘시편의말씀을통해서가장큰자에대한또다른표현을얻게됩니다.시편의기자는인생의목표로삼을만한사람의모습을‘복있는사람’이라고말합니다.그리고복있는사람의모습을이렇게기술합니다. ‘악인의꾀를따르지아니하며,죄인의길에서지아니하며,오만한자의자리에앉지아니하며,오로지주님의율법을즐거워하며,밤낮으로율법을묵상하는사람’이라고말입니다.한마디로복있는사람,그래서누군가에게는가장큰자라고보일수있는사람은세상의욕망을좇아살아가는이들이아니라,하나님의말씀을밤낮으로묵상하는사람이라고말합니다.

 여기서‘묵상’이라는말의헬라어“하가(hagah)”는단순히눈감고앉아서하는그런묵상을지칭하는것이아니라,지속적으로삶을통해반복하며적용하는것을뜻하는말입니다.다시말해,복있는사람은하나님의말씀을늘자신의삶에반복하여적용하며살아가는사람이라는뜻입니다.물론억지로마음을억누르며수행을행하는것도복있는사람이되기위한한방법이될수있을겁니다.아니, 어쩌면세상에물든우리가할수있는유일한길일수도있습니다.

 그런데예수님은우리에게하나의길을제시해주셨습니다.그것은바로어린아이와같은마음을회복하는것입니다.마태복음18장4절을통해아이와같은자가하늘에서는가장큰자요,하늘의복을누리는사람이라고직접말씀해주셨습니다.동심의중요성을알려주신것이지요. 흔히어린아이들을표현할때,천진난만(天眞爛漫)하다는말을사용합니다.말뜻그대로하면하늘의진리로가득차있다는의미입니다.세상의인위적인것이없는아주자연스러운상태를일컫는말입니다.세상의풍조를따르지않고오직하나님의완전하신뜻으로가득찬상태이기때문입니다.물리적으로다시동심으로돌아간다는것은어렵지만,역설적으로하나님의뜻을내마음속에가득담아놓으면가능하다는것입니다.결국하나님의말씀을날마다묵상하는것이우리를진정으로천진난만한세계로향하게하는유일한길이라는말씀입니다.

 그저높아만가기를추구하는소위어른들의삶의방식과는전혀다른천진난만한동심의세계로돌아가고싶지않으십니까?지친어깨를다독이며지금주님께서여러분을부르고계십니다.가장큰자가된다는것.그복은저높은곳이아니라어쩌면지금우리가서있는이낮은곳어딘가에가까이에있는지도모릅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마가복음 8: 27-30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라는 지역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매우 난감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시 그의 행적과 말씀에 대해 들어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그들에게 한가지 도전이 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보이는 모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하신 부분은 그들이 보는 시선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선의 기준이 다른 것이지요.내가 보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눈을 빌어서 보는 것인지의 차이라는 겁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 이라고 대답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요. 당시의 유대 사회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쁜 평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는 칭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시선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지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한마디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뛰어난 영적 스승의 지위로만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고백한 겁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주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지요.비슷한 고백을 사도 바울도 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얻은 뒤 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무엇이 변화되었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살기를 띠고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해 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환한 빛에 잠시 눈을 잃었다가,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의 안수를 받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시력을 회복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주님을 만난 뒤,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를 바로 시선의 변화에서 찾은 것이지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 새로운 시선의 변화. 그것을 바울은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물으시는 질문, 곧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대답하시려고 합니까?지금은 그 때와는 세상이 사뭇 달라졌으니, 다른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비교하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랫동안 교회 생활 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으니, 근사한 다른 표현들을 찾으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러분의 시선입니다.여러분이 보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결국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의외로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한국 장년층들은 이런 주관식 질문에 익숙하지 않아서,자기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기준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한 책을 읽다가 거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오래 전 우리나라의 의학박사 한 분이 세계 최초로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상용화시키는 데에는 미국과 프랑스 다음으로 밀렸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백신을 다 만들어놓고도 우리나라 주무부서인 보건사회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허가를 줄 인증 기준이 우리나라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정말 한국 관료사회는 못말린다고 늦은 대처에 실망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외부에서 기준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상황에서, 우리만의 기준을 만든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회의 많은 부분들에서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학문의 영역에서도 외국에 나가 훌륭한 이론이나 연구들을 배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에는 익숙해 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적용은 하는데, 우리의 고유한 이론적 기준을 만드는 것은 왠지 주저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 가운데 하나가 똑같은 옷 차림새입니다. 저는 지금 20년 가까이 이 지역에서만 살고 있는데, 여태 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도 그렇겠지만, 누구를 따라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패션에 대한 기준이 다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보면 특정한 브랜드의 제품이 하나 유행했다 하면 온 국민의 유니폼이 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단결도 잘한다고 이런 성향들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기만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그만큼 큰 사회적 손실도 없을 겁니다. 이런 풍토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고전인 <장자> “천도편”에 보면 윤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과 제나라 왕인 환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어느날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던 윤편이 환공에게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며 질문합니다. 그러자 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다시 윤편이 묻습니다. “그 성인이 지금도 살아있습니까?” 환공이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대답을 하자, 바로 윤편이 대답하지요.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찌꺼기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윤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규격이나 치수가 정확하지 않던 시기라 수레바퀴를 만들 때 축에 깎아서 끼우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느슨해도 안되고 너무 빡빡해도 안되니, 더도 덜도 말고 적당히 깍아서 맞추어야만 했습니다.그러니 믿을 것은 자신의 손 감각 말고는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로는 전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왕이 읽고 있던 성인의 말이라는 것. 그건 분명 인생에 참 중요한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 내게도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그래서 찌꺼기라고 불렀던 겁니다. 사실 찌꺼기는 한자어로 “조백(糟魄)”이라고 해서 술 찌꺼기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그러니까 먹으면 술맛이 나긴 해도 진짜 술은 아닌 것을 일컫는 말인 셈입니다. 결국 윤편이 왕에게 성인의 글이 찌꺼기라고 한 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읽으며 마치 자기가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현대 사회에 커다란 반향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가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도전을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혹여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또 신앙생활하면서 여러가지 듣고 한 것을 통해 마치 진짜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겁니다. 어쩌면 시선의 변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찌꺼기를 진짜처럼 착각하고 따르던 신앙은 아니었는지요?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진짜 제자라도 된 것 같아서, 자신은 고고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던 모습은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어 보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기준은 세상이 가르쳐 준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말한 그대로 따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시선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찌꺼기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물으시는 진짜 질문의 의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내 삶의 기준이 진정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고백을 행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선의 변화를 통해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