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스건

사무엘하11:1-15

그리스 신화에 보면 테티스라는 바다의 여신이 등장합니다. 테티스는 인간과 결혼해 아들을 낳습니다. 반신반인의 아들을 낳은 것이지요. 하지만 아들에 대해 한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티스는 신의 제왕인 제우스를 찾아가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아이를 스틱스라는 강물에 담그라고 말해줍니다. 테티스는 아이를 강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서 강물에 몸을 담급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그 어떠한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불사의 몸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강물에 자신을 담글 때 잡았던 발목만큼은 여느 인간과 다름 없는 약점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급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쯤 되면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눈치채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바로 아킬레스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급소가 된 발목 부분을 일컬어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특정한 몸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보다 이 말은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처받는 아킬레스건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강점이 되는 것이 자신에게는 감추고 싶은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 한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인으로 알려진 한 국회의원이 불법 자금 수수 의혹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늘 약자의 편에서 정의로운 이야기를 하고, 정치인으로 깨끗하고 청렴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스타 정치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한국의 정치 시스템은 미국처럼 합법적으로 정치인이 후원금을 걷을 수 있는 길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법이냐 아니냐를 가리기가 매우 힘든 구조라고 합니다.그러다 보니 크지 않은 불법 정치후원금을 수수하는 것은 정치권에서 하나의 관행처럼 이루어진 부분이었다고 합니다.평소 정치권에서 행해지는 부정부패와 불투명한 검은 돈에 대해 엄격한 입장이었던 사람이었기에, 그가 느끼게 된 양심의 가책은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가릴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되어서 결국 안타까운 죽음의 길에 이르게 만든 것이지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부분이 결국은 아킬레스건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유대 왕조의 가장 으뜸가는 왕이요, 신앙적으로도 큰 모범이 되는 인물로 알려진 다윗에게도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안긴 아킬레스건과 같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것처럼, 그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국가의 통수권자로서 필요한 많은 것을 얻은 상태였습니다.통일 왕국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법궤까지 무사히 가지고 와 종교적인 정당성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절대권력을 가진 왕으로 궁중에 수많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의 유혹과 탐욕으로 인해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비록 보여지는 외적인 상황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고 철저해 보였지만, 가려진 그의 탐욕은 아킬레스건이 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을 보내 그를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그리고 다윗은 밧세바로부터 얻은 아이를 잃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사무엘하12장16절 이하에는 아이를 잃기 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음식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통곡으로 기도하면서 구하였던 것이지요. 얼마나 그 모습이 애절했는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찾아온 신하들조차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보인 다윗의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 관한 비보를 듣고 나서, 바로 일어나 몸을 정결히 한 뒤에 주님을 경배하고,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아무 동요 없이 일상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던 겁니다. 놀랍게도 빠르게 다윗은 평상심을 되찾았습니다.그 이유를 묻는 신하들에게 다윗은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그것은 자신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도 아니고, 냉철함을 보이려 했던 그의 인격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윗은 이 모든 사건의 출발이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오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만 그것이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구했던 다윗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판단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치신 것에 대해서 곡해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아버지가 범한 죄의 결과로 아들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또 다른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한 것인데, 왜 애꿎은 아들 이스마엘이 모든 피해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성서의 중요한 핵심은 누구의 죄인가를 보는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우리의 신앙적 시선과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평상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회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찾게 된 자기 부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진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원인이었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일을 행하고자 결단한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는 이후 그가 걸었던 삶의 여정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을 노출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이를 잘 보여주는 일례가 열왕기상1장4절에 나옵니다. 노회한 다윗에게 신하들은 젊은 처녀를 데려다가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더이상 탐욕으로 인한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도 않을 만큼, 아킬레스건과 같던 죄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굳건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뛰어난 왕으로 다윗의 이름을 칭송하는 데에는 단지 그가 정치적으로 공적을 많이 쌓아서 만이 아니라, 이처럼 주님과 늘 함께 하며 신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변화했던 그의 과감한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과신하여 변화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극단적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도 그를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일에 대한 능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모범이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들어 줍니다.만일 그의 삶이 여전히 아킬레스건을 지닌 불안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보여졌다면, 아마도 오늘날 알고 있는 다윗에 대한 신뢰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신뢰는 다윗 자체가 아니라 그가 날마다 함께 하기를 소망하며 따르고자 했던 주님이 그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아킬레스에 관한 신화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킬레스가 몸을 담갔다는 ‘스틱스’ 강에 관한 전설입니다. 왜 그 강에 들어가면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얻는다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을까요? 물론 허구적인 신화의 내용이기는 하지만,그 강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강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비유되는 요단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고대 헬라 문명의 사람들은 인간을 가장 강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생과 사의 경계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 이를 때 강한 생명의 힘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죽을 힘을 다해 살라”는 역설적 표현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만큼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반면 무작정 죽음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순간, 인간은 끊임없이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서 연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인간은 가장 강해질 수도 있고, 반면에 아킬레스건처럼 가장 연약한 모습을 가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테티스가 아들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갖게 하려고 강에 담그면서도,혹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으로 꼭 잡았던 그 부분만이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가장 연약한 약점으로 남았다는 사실입니다.완전히 믿고 맡기지 못한 결과인 것이지요.

요단강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은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장소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세례의 행위는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통해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하는 의식입니다.곧 강물에 몸을 맡기며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무언가를 하려하면, 그때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의조차 하나님 앞에 맡기지 않으면 결국 뼈아픈 아킬레스건처럼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렴한 정치인조차 무너지게 만들만큼 말이지요.

반면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준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무엇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선택을 행하는 현명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삶의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과 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기적의 조건

 

마가복음6:52-56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사랑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우리에게 명하신 주님의 계명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사랑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이니 말입니다(롬13:8). 

그런데 오늘날 그 사랑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쏙 빼어 놓고,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자기 편한 대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 설교를 할 때마다, 이를 명확하게 지적해 주곤 합니다. 한마디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혼돈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다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감정이나 선호를 뜻하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 든다거나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사랑은 자신의 감정 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둘 간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 졌으면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지만,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받는 대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할 때 십리도 갈 수 있고,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대 줄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떠올려 보면,쉽게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 대가 없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말입니다. 

제가 오늘 이토록 사랑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이 사랑이야말로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한마디로 기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일의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언젠가 51대 49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일이 있습니다. 세상은 받는 대로 주는50대 50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덜 받고 하나 더 주거나,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곳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적은 양으로 많은 사람을 먹인 것이 핵심이 아니라, 51대 49의 세상을 실현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을 전한 일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정도가 아니라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바로 사랑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이 사랑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원동력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적의 또 다른 조건에 관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부분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동양의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까지는 밖에서 쪼아주는 어미의 노력과 함께 안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오려는 새끼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쌍방적인 소통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동양의 고사성어 중에, 음성상화(音聲相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音)은 내는 소리이고 성(聲)은 듣는 소리인데,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들을 수 있지요. 하나님이 아무리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듣는 귀, 다시 말해 열린 믿음이 없으면 떠도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사랑을 깨닫는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떠한 기적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기적도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게네사렛이라고 하는 갈릴리 호숫가 지역에 사는 이름 모를 사람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기적을 체험한 쪽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개네사렛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었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먼저 52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상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로 전 날 주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무뎌져 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호수를 건너며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기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무뎌져 있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마음이 굳어져 닫힌 상태였다는 겁니다.

마음이 무뎌져 닫힌 상태라는 것은 음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귀가 꼭 막혀서 어떠한 소리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누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주려 하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받지 않거나 받아도 전혀 그 성의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전 날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목자 잃은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의 헬라어 어원이 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뜻하는 단어에서 온 것이니,예수님의 애통한 마음을 곁에 있던 제자들도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다가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놀라서 마치 그 모습이 유령처럼 보였다고 하였습니다.오래 전 여름철 가족 휴가를 위해 동해의 해수욕장으로 놀러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파도가 높던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변가에서 파도 치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건장한 십대 소년 하나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수영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 웬만한 바다에서의 물놀이는 자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파도 하나가 치더니 수영하는 그 소년을 덮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수영에 아무리 자신있던 소년이라 할지라도 물 속에 잠겨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를 지켜 보던 해변가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좀 도와주라고 소리치며 발만 동동 구를 뿐, 누구도 감히 파도치는 바다에 뛰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옷을 그대로 걸친 채로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달려들어서 누구도 말릴 틈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그 소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적처럼 큰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 누구도 엄두도 못 낼 상황 속에서 결국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고 나왔습니다.이를 지켜 보던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안도의 함성을 지르던 그 순간이 여전히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제 기억 속에 더 분명하게 남은 모습은 바로 자식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급박한 순간에 달려 오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말 그대로 혼비백산하여, 마치 유령처럼 보이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혹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바다 위를 건너오시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유령인 줄 알았다고 한 그 말씀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스승의 간절한 모습을 그리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린 것일까요?어쩌면 매순간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런 제자들의 무뎌진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닐까요?

마가는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게네사렛의 이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그가 어디에 계시든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옷술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청합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손을 댄 모든 이의 병이 낳는 기적이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에게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믿음이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를 향한 값없는 사랑이 믿음을 통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일컬어 기적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합니다. 기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잊고 지낸 것은 아닌가요?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그 선물을 값없는 것으로 폄훼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무뎌져 하늘만 원망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기적의 조건은 위에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바로 세워서, 기적을 만드는 이 시대의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몸의중심

마가복음6:1-6

우리몸의중심은어디에있을까요? 여러분은자신의몸에서어느부분이중심이라고생각하십니까? 대개의사람들은배꼽이나허리부분을꼽는경우가많습니다. 요즘처럼균형잡힌몸매나건강을중요하게생각하는시대일수록몸의중심을신체의일부기관에서찾을가능성이높습니다. 그런데정말그럴까요? 가시에손가락을찔려본일이있을겁니다. 혹은다리를삐끗해서멍이들거나근육이상해서제대로걷지못한경험을가져보았을겁니다. 만일지금그와똑같이신체의일부중어느한부분이상처를입은상태에서과연몸의중심이어디냐고묻는다면어떤대답을내놓을까요?

이에대한해답을제시해주는시가하나있습니다. 정세훈이라는시인의<몸의중심>이라는시입니다. 시인은말합니다. 몸의중심은바로아픈곳이라고말이지요. 어루만져주지않으면안되는곳.그곳이바로몸의모든신경을움직이게만드는몸의중심이라는겁니다. 그러니까몸의중심은특별히어느한기관이나신체의어느특정한부분이아니라아파서우리의신경을온통집중시키는그곳이될수밖에없다는뜻입니다. 

그런의미에서지금여러분의중심이되는곳은어디인가요? 아마도각자의상태에따라여러곳이될수있을겁니다. 그런데우리의중심을바라보시는하나님의눈에비친우리의상처는단지눈에보이는곳이아니라는겁니다. 생명의근원이요, 삶의평강과은혜를주시는하나님과의관계를무너지도록만든범죄한우리의심령이야말로가장아픈몸의중심이라는것이지요. 이로인해하나님은우리의아픈상처를어루만져주시기위해커다란희생을치루셔야만했습니다. 

독생자그리스도예수를통해우리의죄를대신지게하신것입니다. 그래서어떤한신학자는우리몸에도중심이있는것처럼하나님이창조하신우주에도중심이있다고말한바있습니다. 그것은바로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는가장아픈곳으로남은상처와같은곳이기때문이라는겁니다. 따라서십자가는우리의상처를낫게만든구원의상징이면서동시에, 우리의죄를위해흘려야만했던하나님의가장깊은상처를보여주는고난의상징으로남게되었다는것이지요.

오늘본문말씀은왜하나님께서십자가의고난을안으셔야만했는지, 그리고우리인간들이가진가장큰상처가어디에있는지, 그몸의중심을적나라하게보여주는한사건을우리에게전하고있습니다. 그이야기는예수께서자신의고향인나사렛을방문했을때일어난사건을기록한말씀입니다. 복음서전체를통해유일하게기록된고향방문때의이야기입니다. 그배경은안식일에회당에서사람들에게말씀을전한이후에일어난사람들의반응을다루고있습니다. 

예수께서회당에들러아마그곳에모인사람들에게하나님의말씀에관한여러이야기들을가르친것으로보입니다. 그러자이를듣고있던사람들이놀랍니다. 그들이놀란이유에대해서마가는크게두가지를들었습니다. 하나는지혜에관한것이고, 다른하나는기적에관한것이었습니다. 당시유대인들에게지혜라고하는것은하나님의말씀, 곧율법그자체를말하거나아니면이를이해하는능력에관한것과관련이있는말이었습니다. 예수께서공생애를행하시며많은사람들에게하나님나라의복음을선포하셨는데, 이것이유대인들에게는지혜에관한질문과직접적으로연관이되는문제였던것입니다. 그리고유대인들에게이것은궁극적으로무엇이진리인가라는질문을하게만들었던것이지요. 정말예수가전하는지혜의말씀이사실인가라는의심을하게만들었다는겁니다.

유대인들이놀란다른하나의이유는바로기적에관한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이곳저곳을돌아다니시며여러기적의능력을베푸셨는데, 그것이어떻게가능했던가를묻는질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이해할수없는일이이루어진것에대해서의문을제기한것이라할수있습니다. 무엇보다이모든일이과연하나님의뜻가운데서이루어진것인가를그들은모두가의심하고있었던것으로보입니다. 말하자면이방신의농간이나특정한목적을가지고벌인거짓술수정도로폄훼시켜생각하고있었던겁니다.

3절에서이를한마디로잘요약한표현이등장합니다. 바로달갑지않게여겼다는말입니다. 당시예수님을바라보는유대인들의평가를매우노골적으로나타내주는표현이아닐수없습니다. 그런데유대인들이그토록예수님을달갑게여기지않았던까닭은무엇때문이었을까요? 참어이없게도, 그이유는다름아닌예수님의출생신분과연관이있었습니다. 요즘흔한말로가진것없는“흙수저출신”이라는사회적편견이만들어낸결과라는것입니다. 예수를마리아의아들이라고부르는데서사실상그를비꼬는듯한어감을느낄수있습니다. 유대사회는전형적인가부장적사회로누구의아들이라고할때는대개아버지의이름을사용하는데, 마리아의아들이라고칭하는것은그만큼그의출생신분을낮게보려는유대인들의심리가작용한것이라볼수있습니다.  

목수라칭한예수님의직업도당시경제사회적인피라미드의계층구조에서하층부에속하는비천한그의신분을의도적으로나타내려는것으로이해할수있는대목입니다. 결국예수의별볼일없는출신성분을들어, 그가특별한능력을지닌사람일리없다는불신을노골적으로나타낸것이지요. 이를두고예수님은'예언자가자기고향에서존경을받지못한다'는유대의속담을인용하셨습니다. 이말은단순히가까운사람들일수록뛰어난사람의진가를몰라본다거나남의떡이더커보인다는뜻으로하신말이상의의미를내포한것이라이해할수있습니다.

흥미로운사실은예수께서언급한자기고향, 자기친척, 자기집은창세기에기록된아브람의이야기속에서그가하나님의부르심을받고떠날때다두고온것들이라는점입니다. 하나님의자녀가되기위해포기한일종의자기소유의대상이었다는것이지요. 여기서중요한점은소유의대상이되는고향이나친척, 집을포기했다는것이아니라사실은그마음에관한것이라할수있습니다. 결국믿음이라고하는것은마음의중심을자신이소유하려는욕망의대상에서부터하나님이지시한것으로바꾸는행위라는것입니다. 다르게표현하자면, 자기중심적사고에서하나님중심으로마음의중심이이동하는것이바로믿음이라는것이지요.

그렇게본다면지금예수님을달갑게여기지않아서그가행한모든것에반발하고의심부터하려는이들이가진가장큰문제는여전히자기중심적사고에서벗어나지못하고, 모든것을자기맘대로평가하려는태도에머물러있다는점이라는것입니다. 믿음의눈으로주님을제대로바라보지못하고있는이유가사실은여기에있다는말씀이었던것이지요.

그러니예수께서전하시는지혜의말씀도제대로들릴리없고, 이땅에서우리를위해행하신기적조차인정하려들지않았던겁니다. 이미자기중심적인고정관념과편견으로가득차모든것을왜곡되게바라볼수밖에없었던것이지요. 6절에서이러한상태를믿지않는것이라표현한이유이기도합니다. 자기중심적태도에서하나님중심으로마음의중심이이동하는것을믿음이라고한다면, 그들의모습은전적으로믿음이없는것에지나지않았다는겁니다. 

결국그곳에서매우손길이필요한병자들을치유해준것말고는별다른기적을행하지않은이유이기도합니다. 그것은예수님이능력이없거나마음이내키지않았기때문이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불신이만든결과라는것이지요. 혈루병걸린여인에게"네믿음이너를구하였다"고한말씀을생각해보면, 기적도사실은일방적행위라기보다는우리와함께만들어가는상호적성격을띠는사건이라할수있습니다. 기적은위에서일방적으로내려주는시혜가아니라, 믿음으로함께만들어가는하나님의은혜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믿음이아니고서는기적을진정으로깨달을수도없기때문입니다.

이이야기를통해우리는우리가가진몸의중심이어디인가를다시한번확인하게됩니다. 그것은바로우리의심령을가장아프게만든자기중심적불신앙에서찾을수있습니다. 그것이예수님을달갑게여기지않게만들고, 하나님과의관계를가장멀게만든원인이되었으니까요. 그리고그결과가기적을만들지못하는불행한현실을갖게된것이라는사실을깨닫게됩니다. 우리의아픈상처를어루만져주시는하나님의능력을보지못하게만드는것역시우리자신의불신앙때문인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오늘우리가믿음의시선으로직시해야할우리몸의중심이어디인지분명하게깨닫게되기를소망합니다. 그리고이를통해우리의상처가회복되고그리스도안에서놀라운삶의기적들을체험할수있게되기를주님의이름으로간절히축원합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4:35-41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비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난 뒤 일어난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건너가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어부 생활의 노하우를 가지고 제자들은 나름대로 물을 퍼내거나 흔들리는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쏟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많은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풍랑은 그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다급해 했는지는 예수님을 향해 내뱉은 그들의 불평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제자들과는 달리 태평스럽게 잠만 자고 있는 스승을 보니 아마도 서운함을 넘어서 울화통이 터질 법도 한 상태였던 모양입니다. 

어떤 면에서 제자들이 잠을 자던 스승에게 툭 내뱉은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라는 푸념은 사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긴급한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곧 주님이 다시 오리라는 희망으로 온갖 고통과 압박을 이겨내고자 했던 이들에게, 아무 응답이 없는 상황은 그 자체로 견디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제자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하곤 했던 것이지요. “지금 이 긴급한 상황에,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혹 주무시고 계신 것은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불러도 아무 응답이 없는 주님을 생각하니 정말 답답한 마음이 가득 차 올라버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잘 믿고 말씀대로 살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왜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지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남보다 더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함 없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데, 어떤 영문인지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회의감이 생기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 받으러 교회에 갔다가 되레 화만 나고 안좋은 일만 생겨서 오히려 시험만 는 것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도 더러 보게 됩니다.그래서 예수님은 도대체 지금 뭐 하시길래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냐며 원망을 쏟아내기도 합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예수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다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급박한 요청과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시기 이전에 예수님은 원인이 되었던 풍랑을 먼저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타이르듯 질문하셨던 겁니다. “너희가 무서워하는 그 대상이 정말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너희를 무섭게 한 것이 풍랑이라면, 그건 아무 문제도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던 제자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질문은, 결국 바꾸어 말하면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희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가서 롤러코스터를 탄 일이 있었습니다.잔뜩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달래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그래서 놀이기구는 안전하니까 괜찮다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저를 보며 “사실은 아빠 때문에 더 무섭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안전바를 잡고 있어야 할 제 손이 어느새 아이들의 팔에 의지하여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운 건 롤러코스터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믿음이 영 가지 않는 아빠였던 셈이지요.  

만일 어떤 상황에 대해 안전이나 미래의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두려움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반문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은혜가 아닌 스트레스를 체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주님을 만나는 것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이 흔들린 결과입니다. 예수 믿고 세상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신앙이 흔들리고 시험을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보다 그로 인해 받고 싶은 보상에 더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심 예수 믿으면 받아야 할 상급과 보상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음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믿음도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결국 믿음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두려움의 대상도 사실은 받고자 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기 보다는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거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판단하려 드니까 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을 놓치는 이유입니다. 당연하지 않은 자신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착각하여, 하나하나가 불평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풍랑 속에서 잠을 청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일부러 얄밉도록 태평한 스승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를 통해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평안을 보여준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든 것을 집어삼킨 대홍수 속에서 노아의 방주 안에 있던 생명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상자에 담겨 강가에 떠내려 보내진 모세의 운명은 애굽의 공주나 어머니, 그리고 모세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잠을 청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풍랑이라는 거대한 외적 장벽에 흔들린 배는 사실 우리 내면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마음은 마치 주님을 모시고 한 배를 탄 상황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여러 어려움들로 흔들릴 때가 생깁니다.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지요.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바로 자기 안에 함께 계신 예수님의 존재입니다.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주님과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표현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필요와 만족이 우선되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더 먼저 신경쓰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주님을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그 결과 삶은 자신의 요구와 만족을 채울 수 없는 늘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어쩌면 진짜 풍랑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이기적 욕망과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요?

지난 수요일부터 어제까지 나흘간 모데스토에서 2018년도 연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일년에 한 번 열리는 연회는 우리가 소속한 지역 연회(행정구역에 비교하자면 주 개념)의 회기를 마감하며 교회와 소속 목회자들에 관한 일들을 확정하는 회의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이 회의를 통해 제기된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교단 내부의 분열 상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내년 2월에 열리는 특별총회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이 주제에 관한 교단 헌법 수정과 교회 구조의 방향성을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기구에 의해 제안된 안건의 수용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회의 결과에 따라서 교단의 분리라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총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별기구가 제안한 안건은 바로 “One Church Model”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연합감리교회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장정은 동성애 안수와 결혼 집례를 비성서적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제안된 안건은 이 부분을 삭제하고, 대신 개별 연회나 교회, 혹은 목회자가 자신의 신앙적 가치에 따라 동성애에 관한 사항을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재 동성애를 인권의 차원에서 지지하는 진보그룹과 성서적 권위를 우선시 하는 보수그룹의 양쪽 주장을 어느 정도 타협하여 수용하고자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단의 분리를 막고 어떻게든 한 지붕 아래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양 그룹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제안된 미봉책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특별총회를 앞두고, 우리 연회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하나님의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는 노력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머리만 맞대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작 우리가 맞대고 나누어야 할 것은 마음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모여서 이러다 교회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좌초하는 것은 아닌가를 염려하고,이를 막기 위해 우리의 전략과 전술을 다 동원하는 것도 분명 우리로서 취해야 할 일들인 것은 분명합니다.하지만 그 순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교회라는 배는 주님이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직접 인도하시는 생명의 방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자녀들인 우리 자신도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포도나무의 지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도 믿음이 없는 상태”는 아닌지 먼저 점검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교단의 분리라는 풍랑 속에서 허둥지둥 분주하기만 한 제자와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먼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교회가 가야 할 방향과 현실을 분명하게 세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 각자도 자신의 믿음을 날마다 재점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쳤다

마가복음 3:20-30

지난 주 우리 교회 전윤재 집사님이 사서로 일하고 있는 오클랜드 시립 도서관 아시안 지점의 관장님을 만나 앞으로 같이 하게 될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만나보니 관장님은 홍콩 출신 아시아계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방탄소년단(BTS)’이라는 한국의 아이돌 가수팀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일하는 스텝 중의 한명이 그 콘서트에 가려고 티켓을 샀는데,자그마치 500불을 지불했다는 말을 하면서 “미친 것 아니야?”라고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왠만한 아시아계 사람들이라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해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한 두 마디의 한국말은 쉽게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도 “미친 것 아니야?”는 말을 마치 한국 사람들이 하듯 툭 던지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외국인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저도 덩달아 정말 미친 것이 맞다는 확신마저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도 “미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제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신학 공부를 하러 간다는 사실을 듣고 제 주변 친구들로부터 들은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욕이나 해대는 친구들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니 아마 저라도 인생의 진로를 하루 아침에 바꾸고자 하는 친구에게 “미쳤다”고 타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럴만한 사정이야 당사자 말고는 그 누가도 알기 어려우니까, 그 입장에서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씩 당시의 어려웠던 제 선택과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 때 그런 당혹스러운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보고 말이지요. 동병상련이라고 하나요?그래서인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거나 극적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더 관심이 가는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으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도 바울처럼 제 자신이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입장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해 한 번 더 시선을 갖게 된다는 것이 조금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지 오늘 본문 말씀도 저에게는 더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3장의 앞 부분은 회당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이미 행하신 예수님의 치유 이적 사건에 대한 소문을 전하고 있습니다.그 중에는 병에서 고침을 받은 자들도 있었지만, 귀신들린 자가 치유되는 사건들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그러한 치유와 기적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상황이었습니다. 식사도 거를 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20절의 말씀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거나 귀신으로부터 벗어난 당사자들은 매우 기쁘고 감사한 일이겠지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예컨대,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유대의 율법학자들의 경우 예수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결과가 아니냐며 오히려 이적 사건을 사단의 농간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바알세불은 이방신인 바알의 이름을 유대인들이 “파리의 신, 일명 똥신”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부른 말입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이 행한 모든 이적은 바알에 의해 이루어진 이방신의 농간 정도로 폄훼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런 비판적 시선이 일부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파급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21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와 그를 만류하려 들만큼 주위의 비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겁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과 치유의 행위를 평가하면서, 그가 미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정상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던 것이지요. 가족들 조차 혹 예수님이 미친 것은 아닌가 의심을 가질 만큼 오해의 골은 꽤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은 비록 표현 방식이 조금 다르게 기술되기는 했지만,예수님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런 판단을 하는 까닭은 그 행동이나 태도가 당시의 일반적인 행태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질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요즘처럼 자격증이 공인되어 주어지는 시대에 관련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고 무면허로 의료 행위를 해서 사람을 고치려 들거나,또는 제도적인 교회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 치유의 집회를 갖는다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어떠한 행위라도 다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가족들마저 예수님을 만류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 범위를 벗어났다고 생각될만큼 예수님의 행적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1절에서 소문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ἐξίστημι, existēmi)고 하는 그 말 자체의 뜻은 “어떠한 입장이나 위치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영어 단어에 아웃라이어(outlier)라는 말이 있는데,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통계 용어로는 평균 수치를 한참 벗어난 것(이상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미친 것이나 아웃라이어나 이상하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뜻입니다.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범위나 수준을 벗어난 것이지요.

유대의 율법학자들을 비롯하여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의 행적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고, 또 이를 설명할 적절한 방법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니까 미쳤다고 하는 것처럼 손쉬운 표현도 없었던 것이지요. 나름대로 율법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이해관계에도 충돌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사단이나 이방신의 농간에 빠진 것으로 밖에는 자신들을 보호하면서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적 조차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자신들의 이해를 넘어선 이상한 미친 짓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예정된 대로라면 금주12일에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폴에서 성사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만남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더불어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정치적 다이나믹(dynamic)에도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손으로 글을 쓰다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기술혁명에 비길 만큼 커다란 국제정세에 대변혁의 흐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을 통해 반세기 이상 닫힌 문을 열어서, 서울에서 평양을 지나 대륙을 횡단할 수 있는 길이 가능해 지고,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물자를 동원하여 지금 보다 강성한 경제 대국을 만들어 주변 국가들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민족의 자긍심을 세우는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여러 난관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함께 평화와 공존의 길을 가려는 뚜렷한 목적과 의지가 있다면 넘지 못할 장벽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상황을 자기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방해하려 들거나 무조건 반대하려는 오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까지 북한과의 종전을 주장하고 평화나 통일운동을 이야기하면 어김없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수고하던 많은 이들이 참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쳤다”는 비난과 욕을 먹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처럼 알고 지내야 할 만큼 말입니다. 

요즘 저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물어볼 만큼 엄청난 변화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그러니 이 변화를 기대하지 않거나, 처음부터 탐탐하게 여기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신의 생각과 커다란 괴리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미쳐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일에 빨갱이 같은 사단이 농간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 율법학자들에게 어떠한 비방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로운 비판과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모독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하게 경고하신 것처럼, 성령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평화와 화해 그리고 정의로운 세상을 막아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믿음은 관성처럼 우리의 육신에 익숙한 본능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산을 옮길 수도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일반적인 세상의 눈에는 미친 것처럼 이상해 보일 수 있을 지 몰라도, 믿음은 놀라운 변화의 시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랜 시간 평화를 소망하는 이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피 땀을 흘려 이제 작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으로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기적 조차 거뜬히 이루어 내는 거룩한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