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줄과 인다라망(因陀羅網)

아모스7:7-9

누가복음10:29-37

 

 예언자아모스에게하나님은북이스라엘의멸망에관한환상을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와가뭄으로이스라엘을징벌하시리라는환상후에, 아모스는다림줄의환상을보게됩니다. 다림줄은주로건축을할때사용하는도구입니다. 건축물이기울지않고지반으로부터똑바로올라갈수있도록수직과수평을유지하기위해일종의기준선과같은역할을하는도구입니다. 다림줄에서한치라도어긋남이생긴다면건축물은제대로균형을잡고서기가어려울것입니다. 따라서다림줄은기초를세우고성벽을쌓아가는과정에서반드시지켜야할기준이라고볼수있습니다.

 

아모스에게다림줄의환상을보게한것은이스라엘백성에게도똑같은기준이있다는사실을알려주시기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곧하나님의말씀이었습니다. 주의성소를지을때다림줄을벗어나건축하지않는것처럼, 하나님의집이되어야할사람들도하나님의말씀이라는기준을벗어나살아서는안되기때문입니다. 그런데당시북이스라엘의상황은하나님의공의와사회정의가무너진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이살만한아름다운세상이결코아니었습니다. 사회적불공평과불의그리고부패한지도자들로인한폭력과약탈로인해백성들의고통은극에달한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말씀보다부와권력에대한욕망이더큰영향력을미치는시대였던것이지요. 한마디로다림줄을무시하고지은바람에금방이라도무너져버릴것같은부실건물같은운명이었던겁니다. 

 

신약의본문인누가복음의말씀에우리신앙의기준이되어야할다림줄의모습을매우구체적으로기술하고있습니다. 위로는아버지하나님과의수직적관계와아래로는이웃과의수평적관계입니다. 우리의마음과힘, 그리고뜻을다해하나님을사랑하고(신6:5), 또우리의이웃을우리몸같이사랑해야한다는것입니다(레19:18). 하나님의말씀이라는다림줄의기준입니다. 그런데이다림줄의핵심은수직과수평이상호불가분의관계에있다는사실입니다. 그러니까수직적인하나님과의관계와수평적인이웃과의관계가서로긴밀하게연결되어있다는뜻입니다. 어느한편으로만기울어질수도없고그래서도안되는이유입니다. 둘은함께지켜져야만하는기준이라는것이지요.

 

불교의화엄사상을통해전해지고있는이야기중에도이와비슷한것이하나있습니다. 인다라망, 곧인다라의그물에관한비유입니다. 인다라의궁전에그물이있는데, 씨줄과날줄로엮인그물의각코마다구슬이달려있다는겁니다. 그래서구슬하나를잡아당겼다놓으면모든구슬이함께움직이며소리를낸다는것이지요. 여기서그유명한화엄사상의테제인“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즉‘하나가전체이고전체가곧하나이다’라는말을이해할수있게됩니다. 이말은“우리가남이가?’라는뉘앙스에서풍기듯자기편의대로‘나와다른타인’을배제한하나가아니라, 포도나무의비유처럼모두가한몸을이룬상태를떠올리는편이적절한표현이라할수있습니다. 그래서우리는배제와대립이아닌조화와포용이라는의미를깨닫게되는것이지요.

 

이를우리신앙의다림줄인하나님의말씀에적용하면더정확한의미를이해할수있습니다. 하나님을사랑하는것과이웃을사랑하는것이결국은하나라는사실을말이지요. 그래서내몸처럼타인을존중할수있는마음을갖는것은물론이고, 하나님을사랑한다고말하면서이웃을사랑하지않는모순에서도벗어날수있게된다는겁니다. 이를통해내가원하지않는것을남에게요구하지않는도덕의황금률을뛰어넘어타인에게서하나님의형상을볼수있을만큼진정한사랑으로대하는것이가능해진다는말씀입니다. 우리를지극히사랑하신주님처럼우리도서로에게작은예수가되어주는것이지요.

 

사마리아인의비유로알려진본문의말씀은이를실천할수있는한가지중요한교훈을가르쳐주고있습니다. 비유의이야기는‘영생을얻기위해무엇을해야하는가?’라고묻는율법교사의질문으로부터시작합니다. 사실율법에정통한그가그질문에대한답을모를리없었습니다. 당시엄격하게율법을그대로지키고살았던유대인들은양손목에“필락테리스”라는작은가죽주머니를차고다녔습니다. 그안에는중요한율법의구절이적혀있었는데, 그중에서도‘네하나님여호와를사랑하라’는신명기6장5절의말씀과‘네이웃을네몸같이사랑하라’는레위기19장18절의말씀이대표적인말씀이었다고합니다. 그러니까율법교사는이미다림줄과같은하나님의말씀을늘품에지니고있었을뿐만아니라잘알고있었다는뜻이지요. 

 

문제는도구가아니라사용법입니다. 이론이아니라실천이문제인것이지요. 믿음도아는것에서그치는것이아니라행함으로완성되는것처럼말입니다. 믿음을다른말로‘청종’이라고하는데, 그것은단순히듣는것이아니라듣고따르는것까지를의미하는말입니다. 듣기만하는것은진짜듣는것이아니라그저들린것뿐이지요. 그래서예수님이늘“들을귀가있는자는들으라”고하신겁니다. 들은것을몸으로실천하라는말씀입니다. 비유의이야기는두부류의사람들을비교하면서이러한가르침을잘설명하고있습니다. 

 

먼저제사장과레위인에대해언급합니다. 제사장과레위인은여리고로가는길에강도만나쓰러진사람을보고서도황급히지나쳐버립니다. 나름대로이유는분명합니다. 율법에따라제사를지내야하는업무를담당해야하는그들에게죽었을지도모를사람을만진다는건위험부담이큰일이었습니다. 정결법에어긋나고, 따라서제사를수행해야하는자신의역할을감당하기어려울수도있기때문입니다. 여하튼자신들에게주어진하나님과의수직적관계에대해서분명하게믿음의사명을다할것이라생각할수있는대목입니다. 아마도율법교사의모습도이와똑같다고예수님은보신것같습니다. 

 

그런데그들의편협한생각은다음에등장하는사마리아인의태도를통해완전히부정됩니다. 흔히선한사마리아인이라고부를정도로선행을행하는모습을보게됩니다. 하지만여기서예수님이강조하시고자한부분은그의선행이아닙니다. 그의행위를통해보여준믿음에관한것이었습니다. 율법교사가질문한대로영생을얻는것, 곧구원은믿음을통해서만얻을수있다는것을말씀해주시고자했다는뜻입니다. 그렇다면제사장과레위인으로비유된율법교사와사마리아사람의차이는무엇이었을까요? 다시말해어떻게믿는것이구원의길인가를알려주는핵심이여기에있다는겁니다.

 

첫째, 율법교사는인다라의그물에달린구슬처럼하나님사랑과이웃사랑이결국하나라는사실을깨닫지못했다는점입니다. 율법의규정에따라제사지내는것은잘지키면서도, 주변의어려운이들을돌보는것에는소홀했던이유입니다. 당시유대의종교엘리트들이사회를율법으로이끌어가면서도, 가난하고억압받는백성들을제대로보살피지못한상황을꼬집은것이지요. 둘째, 이러한그들의어긋난다림줄은결국이웃에대한잘못된고정관념을만들어냈다는사실입니다. 율법교사의질문은‘누가내이웃인가?’ 였습니다. 이것은이웃에대한정의를묻는것같지만, 사실은사랑해야할대상을구별하려는의도가내포된질문인것이지요. 말하자면이웃이될만한사람들에게만사랑의실천을적용하리라는편협한태도가그안에숨어있다는뜻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은사마리아인의비유를통해‘누가좋은이웃이되어주었는가’를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내이웃인가를묻지말고누군가에게좋은이웃이되어주라고권면하신것이지요. 그것이다림줄과같은하나님의말씀을지키고, 인다라망처럼모두가그리스도안에서하나라는사실을깨닫는길이라우리에게알려주신것입니다. 

 

저는오늘여러분에게이러한질문을함께나누려고합니다. “우리는과연누군가에게좋은이웃이되어주었는가?”라고말입니다. 여전히자기중심적인편견과고정관념에서벗어나지못하고, 자기편의대로이웃을정의하는것은아니었나요? 신앙생활을나름대로잘지키고있으니이만하면된것아니냐고독선적인신앙에빠져있는것은아니었나요? 말로는하나님말씀운운하고찬송가는흥얼거리면서, 맘에안든다고타인에게독설과비난을서슴지않는무모한신앙은아니었던가요?

 

박노해라는시인의“인다라의구슬”이라는시말미에보니까, 참좋은구절이있어서이것으로말씀을마무리하고자합니다. 이시구절을생각하며진정한믿음의다림줄과인다라망같은사랑을실천해보시기바랍니다.

 

“새벽찬물로얼굴씻고서툰붓글씨로내마음에씁니다.

오늘부터내가먼저!

내가먼저인사하기/ 내가먼저달라지기/ 내가먼저정직하기/ 내가먼저실행하기

내가먼저벽허물기/ 내가먼저돕고살기/ 내가먼저손내밀기/ 내가먼저연대하기

무조건내가먼저/ 속아도내가먼저/ 말없이/ 내가먼저/ 끝까지내가먼저

 

시인의말대로좋은이웃이되기위한길은내가먼저하나님의사랑을실천하는것입니다. 십자가와같은그사랑을내가먼저실행하는것이지요. 부디바라기는말씀을먹고사는우리시대의신앙인들이이대로실천하여서로가함께더불어아름답게살아갈수있기를기도해봅니다.

좋은친구

누가복음9:57-62

 

친구에관한시한편으로말씀을시작하려합니다.시인허형만의“한둘”이란제목의글입니다.

“이만큼살다보니/함께나이든친구한둘/뭐하냐밥먹자/전화해주는게고맙다

이만큼살다보니/보이지않던산빛도한둘/들리지않던풍경소리도한둘

/ 맑은생각속에자리잡아가고

아꼈던제자한둘/선생님이계셔행복합니다/말건네주는게고맙다

 

시인이말한‘이만큼’이얼마나나이를먹어야할수있는말인지는모르겠지만,친구에관한여러시를읽다가가장마음에와닿았던작품입니다.친구를소재로한여러시가있었는데,그어떤아름답고수려한시어들로표현하는것보다저에게친구란그냥이렇게편한존재라는점이좋았습니다.무엇으로굳이설명하지않아도좋은그런존재.그게바로친구이니까말이지요.늘소녀감성인것같은이해인수녀의시중에‘벗에게’라는글이있는데,거기에서도마음에닿는한구절이있습니다. “별이쏟아지는밤거리를걸어도걸어도싫증내지않을너의친구이고싶다”라는부분입니다.

 

친구가아닌이들은아마뭐가좋아서별이쏟아지는밤거리를돌아다니는가의아해할지모릅니다.그런데친구는별이좋아서가아니라친구가좋아서함께걷지요.어쩌면별한번바라보지않아도같이걸을수있는게,바로친구아닐까요?별이아니라떠다니는구름을따라서라도,바람이부는대로함께걸어갈수있는것이친구의마음아닐까요? 예전에는같이나이를먹어가며함께웃고떠들던동년배들만이친구라생각했던적이있었습니다.그런데어느새되돌아보니주변에남은친구가없다는사실을깨닫게되었습니다.다제갈길을가며흩어진것이지요.살다보면다그런줄알면서도,가끔씩은옆에있어줄친구가없어서꽤나보고싶기도하고,지나간옛추억에깊이잠겨보기도합니다. 그래서인지밥이나같이먹자고전화해주는이,무작정같이걸어줄것만같은이만보아도그사람의나이와언어에상관없이기대가생깁니다.친구가될수있을것만같은풋풋한떨림처럼말이지요.

 

오늘우리가읽은누가복음9장의본문말씀은사실제자도에관한이야기인데,제자도를한마디로길을함께가는것으로표현하고있습니다.말하자면, 좋은친구처럼함께길을걸어가는것으로제자의삶을묘사한것이지요.예수님의일행이길을가고있는상황에한사람이자신도그길을같이가겠다고나섭니다.친구가되어제자의삶을살겠다는결단을보여준겁니다.그러자예수님이그에게이렇게말씀하십니다. “인자는머리둘곳이없다”.이말은얼핏푸념처럼들리기도합니다.마치지금껏같이길을가자고선뜻나서는이가없을만큼외로운길이라고알려주시는것같은말씀입니다.그누가알아주는이가없다해도함께기꺼이가겠는지되물은것이지요.부활하신뒤갈릴리바닷가로제자들을찾아오신예수께서베드로에게“나를사랑하느냐?”고했던질문을연상시키는말씀이기도합니다.외롭고힘든길을가야할제자로서의삶에대한진정성을재차확인하신겁니다.왜냐하면예수님의좋은친구로살아야하는그길이결코쉬운여정이아니었기때문입니다.

 

물론제자들이라면이질문을받고한결같이다그럴수있을것이라고단언했는지모릅니다.베드로가늘그러했던것처럼,자신만만했을가능성이높습니다.그도그럴것이삶의모든것을내려놓고따른이삶의여정속에서,누가당신의결정을후회하지않느냐고물어본다면당연히그렇지않다고말하지않을사람이얼마나되겠습니까?그만큼열정도있고,그것을향한애정도강하게불타오를때는더더욱그럴가능성이높습니다.비록그것으로인해조금손해도보고,마음이상하는일이다소생길지라도그정도는감수할각오가되어있다고다짐할수있을겁니다.이러한각오도없이제자의길을가겠다고선뜻나서기도어렵기때문입니다.

 

하지만예수의좋은친구가되는것은사랑의고백이나각오를다지는것만으로는아직충분하지않습니다.이와관련한한가지사례가바로뒤에나옵니다.예수님은그의길을함께하고자한또다른사람에게‘따라오라’고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그는길을나서기전에먼저아버지의장례식을치르고가겠다고합니다. 아들의입장에서는너무나당연한요청입니다.만일그냥길을떠난다면,이를두고누구도자식으로서의도리를다했다고보기어려울만큼정당한부탁입니다.하지만예수님의대답은“죽은사람을장사하는일은죽은사람들에게맡겨두고,너는가서하나님나라를전파하라”는것이었습니다.매우비정하게들리는말씀이아닐수없습니다.부자간의인연을끊고오직제자로서의삶에만집중하라는말씀은오늘날세상을어지럽게만들고있는여러사이비교단의강압적인행태를떠올리게만들기까지합니다.

 

그런의미에서예수께서하신말씀은좀더세밀하게접근할필요가있습니다.사실오해가될만한이말씀의핵심은죽은사람의일과하나님의일을구별하려는예수님의의도에서부터찾을필요가있습니다.있는그대로말씀을받아들이면,예수께서장사지내는일은죽은사람들에게맡기라는말자체가논리적으로어긋나는이야기입니다.죽은자가어떻게장사를치를수있겠습니까?그러니까여기서언급된죽은자는육신의수명이다한자를언급하는것이아니라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예수님은하나님나라를전파하는일과죽은자를장사치르는일을대비시켜말씀하시고자했습니다.하늘에속한일과이땅에속한일을구별하신것이지요.

 

예수님은이땅에속한일을유한하여언젠가는사라져버릴허망한것,그래서죽음이라는단어로표현하신겁니다.육신의삶을위해무엇을먹을까,마실까, 입을까를염려하며사는것이궁극적인목적이될수없다는사실을에둘러가르쳐주신것이지요(마6:25). 왜냐하면생존의수단이목숨자체보다소중한것은아니기때문입니다.먹고마시고입는의식주의문제는생존에필요불가결한것은맞지만그것은어디까지나살기위해필요한수단이지,그자체가생명은아니라는말씀입니다.생명자체를목적으로삼는것과생명의수단을목적으로삼는것은구별되어야합니다.이를예수님은하나님의일이바로생명을목적으로삼는것인데비해땅의일은생명의수단을목표로하는삶이라고나누어설명하신것이지요.결국예수를따르는제자가되는길은비록몸은이땅에살면서필요한것을구하지만,삶의궁극적인목적은하늘의일을구하는삶을살겠다는다짐입니다.매정하게들릴지모르지만,아버지의장례보다하나님나라를전파하는것이중요하다고말씀하신이유가여기에있습니다.

 

실제로마태복음5장24절을보면예수님은제사를드리는것보다먼저형제와의화해가선행되어야한다는말씀을하신바있습니다.단순히신앙과관련된일이세상적인일보다우선되어야한다는말씀이핵심일수없다는증거입니다.그렇게드러나는행위를이야기한것이아니라,그행위의궁극적인목적이어디에있는가를단지가르쳐주고자했다는뜻입니다.제자처럼보이기위해예배와신앙생활에열심을다할수있을지모릅니다.하지만진정한제자의길은그일을행하는궁극적인목적에서나타나는것이라고보신겁니다.달리표현하자면,예수님의좋은친구가되기위해그럴듯해보일수있는지는모르지만,진정한친구는겉모습이아니라그내면에서다르다는뜻입니다.왜, 진정한친구는위기의상황에나타난다고하지않습니까?정말필요할때,그순간손을잡아주는친구가진짜입니다.사랑도그렇지요.보통사랑은좋은감정으로생각하지만,진짜사랑은위기속에서나타나는겁니다.정말좋아하기어려운순간에,정말그의손을잡아주고싶지않을때,오히려내게는손해가되는것같은그순간에,손을내밀수있는것.그게진짜사랑입니다.예수님은바로그사랑을함께나눌수있는친구를찾고계신것이었지요.

 

예수님은이와관련하여재미있는비유를하셨습니다. “누구든지손에쟁기를잡고뒤를돌아보는사람은하나님나라에합당하지않다”는말씀이그것입니다.이역시말뜻그대로받아들이면,지독히도냉정한이야기로들립니다.제자의길을가려고하는사람에게는정말시험이될만한말씀입니다.그런데이말씀의의도를조금자세히들여다보면그뜻을이해할수있습니다.쟁기를들고뒤를돌아보는행위를예수님은자신의제자가되어함께길을가기에는적합하지않은모습이라고보셨습니다.이는당시농경생활에서얻은교훈이기도한데,실제로땅을일구기위해쟁기질을제대로하려면시선의집중이필요합니다.잠시한눈이라도팔면엉뚱하게땅이패이거나넘어질수도있으니말입니다.가축을이용해쟁기질을할때도마찬가지입니다.앞에서가축이이끄는대로보조를맞추기위해서는,쟁기를쥔사람은언제나가축의움직임에시선을집중할수밖에없습니다.

 

예수님은이비유를통해중요한사실을강조하신것처럼보입니다.바로하나님나라의전파에대한긴급함을강조하고계셨던겁니다.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일을아주긴급하게지금바로이루어져야할것이라고가르치신것이지요.좋은친구인지아닌지는바로이긴급한상황에서구별된다는사실을재차설명하려고하신것입니다.이러한긴급한상황에대한대처를가지고믿음을이야기한하나의사건이있지요.선한사마리아인의비유입니다.그이야기의핵심가운데하나가,바로지금눈앞에서도둑을만나피를흘리고있는사람에대한긴급함의인식입니다.그에따라제사장이나레위인,그리고사마리아인이가진신앙의중심이고스란히드러난다는것이지요.진짜친구가누구인지,그긴급한상황에처한사람을대하는태도에따라알수있다는겁니다.

 

누가그위기에처한사람의좋은친구인지는다들아시리라믿습니다.평상시의관계에서진정한친구가누구인지를아는것은매우추상적수준에그칠가능성이높습니다.좋을때는다친구처럼보이지요.그런데실제긴급한상황에처하면그때진정한친구의모습이분명하게드러난다는것이지요.제자의길도마찬가지입니다.본문에등장하는사람들처럼처음에는그리스도의제자로서살것을맹세하면서아무문제없이그길을갈것처럼말하지만,막상위기의상황에부딪히면쉽게무너지는경우를종종보게됩니다.하나님의말씀을운운하다가도정작중요한상황에가면자신의생각과뜻,감정을먼저내세우는신앙인들이얼마나많습니까?친구같아보였지만,결국은자기좋을때만친구역을서로할뿐이었던것이지요.

 

예수께서그의사랑하는제자,베드로에게“나를사랑하느냐?”고세번이나질문했던이유를이제좀아시겠습니까?물불가리지않고주님을따르겠노라다짐했던베드로는위기의상황속에서세번이나친구를부인했던사람입니다.어쩌면오늘우리의모습이그러한지도모릅니다.내게조금이라도위협이되거나손해가되는순간이올때,그누구도자신을위한결정을하지않는다고말할수있는사람은많지않을겁니다.우리의신앙도마찬가지이지요.그래서한없이십자가앞에서작아지는자신을발견하게됩니다.겸손히자신을낮추고낮출수밖에없는이유입니다.그런데놀랍게도이렇게작아지는순간,우리는점점더주님앞에더욱가까이다가갈수있다는사실입니다.좋은친구가될수있는길이바로여기에서부터시작합니다.겸손한마음으로그저내생각과판단을잠시보류하는것이지요.그래서그저별빛을따라밤거리를걸어도좋은그런친구가되는것입니다.

 

두려워 마세요

누가복음8:26-39

 

여름이되면가장많이나오는영화장르가운데하나가호러무비(horror movie)입니다. 저는잘이해가가지않지만, 가슴을오싹하게만드는공포영화를보면서피서를나름대로즐길수있다고사람들이생각하는경향이있습니다. 그중에서도공포영화에가장많이등장하는소재가바로귀신입니다. 요즘엔그런이야기를많이하지않는편이기는한데, 오래전어른들이정신적으로문제가있는사람들에게‘귀신들린사람’이라는말을자주사용했던기억이납니다. 전쟁과가난그리고사회의급속한변화를겪는과정속에서정신적으로크게상처를입고이상한행동을보이던이들을귀신들려서그렇다고말하는것이외에설명할방법이없었던겁니다. 하지만국가의정신보건정책이보다확고해지면서속된말로‘미친사람’을예전처럼길거리에서보기가어렵게되자, 귀신에대한이야기도줄어든게사실입니다. 첨단과학기술과합리적이성이지배하는요즘시대에어울리지않는말이되어버린것이지요.  

 

오늘본문말씀에도귀신들린사람과관련한이야기가등장합니다. 거라사라는지역에정신병증세를앓고있던한사람에관한이야기입니다. 그는정신이나가면옷을벗고공동묘지에서지내다가, 사람들이쇠고랑으로채워서감시할만큼커다란정신적문제에시달리고있는사람이었습니다. 흥미로운점은예수께서그의이름을묻자, ‘군대’라고대답했다는대목입니다. 원문에는헬라어로‘레기온’이라는단어를사용하였는데, 이는여단규모의군대를뜻하는말입니다. 이에대해일부신학자들은이사람이로마제국의군대로부터악몽과같은고통을경험한뒤로정신이이상하게되었을것이라고추측합니다. 그것이어떤사건이었는지는알수없지만, 충격적인일로인해정신적문제를앓게되었을지도모른다는것이지요. 

 

그런데사람들은그가겪은고통의원인을다르게표현합니다. 귀신이그에게들어갔기때문이라는겁니다. 그것도여단규모의많은귀신에의한농간이라는것이지요. 당시의의학수준을고려해볼때, 충분히가능한생각입니다. 예수께서도그사람으로부터귀신을쫓아내려고명령하신것을보면, 사람들의생각을뒷받침해주는것같습니다. 그사람의정신이온전하지않은것은귀신이그를지배하고있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사실귀신이그사람안에있다는확신을가질수밖에없는것이예수님을보자마자그가누구인지를한눈에알아본다는사실을통해서도알수있습니다. 예수님이신적권능을가지고있다는사실을귀신들은알고있었던것이지요. 그래서지옥으로는보내지말라고사정하기까지합니다. 

 

차라리지옥이아니라돼지떼에게들어갈수있도록예수께선처를구한것이지요. 이에예수님은귀신들이그사람에게서나와서돼지떼에게옮겨가는것을허용해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는이로인해그사람이가진정신적문제는해결이된셈이지요. 그런데어찌된영문인지귀신들이돼지떼에게들어가자마자비탈길로내달려호수에빠져몰사하게됩니다. 사실이장면은유대인들의독특한사고와연관이있습니다. 돼지는유대인들이가장혐오하는동물가운데하나입니다. 그러니까돼지나돼지안에투사된귀신이함께호수에빠져죽게되었다는이야기는유대인들에게일종의카타르시스를줄수있는매우극적인장면이라는것이지요. 한마디로삶의극단적인고통을안겨주었던문제가통쾌하게해결되는모습이라는겁니다. 예수님의축귀사건에대한독특한표현방식정도로이해할수있는부분입니다. 

 

그런데  돼지를치던사람들이이광경을보고놀라도망을칩니다. 가서자신들이목격한바를동네사람들에게알리지요. 이를듣고일군의사람들이사건현장으로달려갑니다. 정말귀신들렸던사람이멀쩡해졌는지확인하고싶었을겁니다. 게다가돼지의떼죽음도눈으로보고싶었을겁니다. 그런데놀랍게도귀신들린줄알았던그사람이이전과는달리옷을제대로차려입은채로예수님발앞에앉아있는것을보게됩니다. 이것이얼마나충격적인모습인지본문은사람들의상태를두려워했다는말로기록할정도입니다. 당시귀신들린사람은통제가불가능한존재로여겨졌습니다. 자신들의힘으로는해결할방법이없었을테니그럴법도합니다. 그래서쇠사슬과고랑으로묶어두고, 사회로부터격리시키는방법외에는생각을못했던것이고요. 자신들의안전을위해최선의방법이라생각했던겁니다. 

 

지금도여전히방식은다르지만, 우리가해결할수없는낯선이들, 그리고통상적으로우리와다른사람에대해거리를유지할수있도록유무형의제재를가하고있는것이사실입니다. 경계를긋기위해그것이법이든아니면일상적인차별의방식을통해격리와소외를시키려는것도거라사사람들의태도와사실은크게다르지않은것이라할수있습니다. 그것은다른사람에대한태도에서만나타나는것이아닙니다. 자기에게익숙하지않은낯선상황이나일에대해서도마찬가지이지요. 불편하고불확실한일들은언제나꺼리기마련입니다. 쉽게다가서기가어려우니까, 에둘러피하거나거부하고싶은생각이먼저드는것이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는모르겠지만, 귀신들린사람이정신을바로차린현장을목격한거라사사람들도오히려예수께자신들로부터떠나달라는부탁을합니다. 감사는커녕오히려예수님을불편하게여기고있었던겁니다. 자신의방식과다르게이루어지는모든것들이좀처럼용납되기어려웠던것으로보입니다. 차라리멀리떨어뜨려놓는것이편했는데, 갑작스럽게변화된상황에적응하기가불편했던것이지요. 때로는적으로만드는것이내편으로안아서모든것을감내해야하는것보다어려운법이니까말입니다. 그래서사랑은언제나말처럼쉽지않습니다. 심지어말안듣는자식은멀리두고보는것이가까이에서날마다부대끼며사는것보다편하다고할정도이지않습니까? 

 

게다가사람들의심리적본능중에는매우공격적인성향이숨어있습니다. ‘집단따돌림’ 이라는현상이이를증명해줍니다. 남들과다르거나아니면그안에서도만만해보이는소수의사람을다수가집단적으로공격하는현상이그렇습니다. 그로인해발생하는피해자들의고통은이루표현하기어려울만큼큽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무렇지않게이를즐기는듯한사람들이있지요. 집단적사이코패스현상이일어나는겁니다. 공감의능력을잃어가고있다는사실자체가공포를가져다주기에충분합니다. 그런데본문의말씀은두려움에빠져크게떨고있었던사람들은오히려거라사의동네사람들이라고밝히고있습니다. 무엇이그들을두렵게만들었을까요? 그해답은귀신들린사람이해방되었다는사실자체보다그동안해오던자신들의행위가더이상정당화되기어렵다는사실에주목한그들의민낯에서찾을수있을겁니다.

 

어쩌면그들이두려워한것은변화였는지도모릅니다. 기존의상태나질서와전혀다른상황을맞이한다는사실이그들을두렵게만들었다는뜻입니다. 귀신들려서미쳤다고생각한사람을격리시키던기존질서가예수님의놀라운축귀의기적으로변화되었다는사실이좀처럼받아들이기힘들었던것이지요. 이로인해예수님을따라나선사람은결국기적을목격하고도거부한동네사람들이아니라그동안미친사람취급을받던바로그귀신들린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이이야기의중요한포인트가되는부분입니다. 신앙의핵심이기때문입니다.  

 

예수를따른다는것은악령에서벗어나는신비로운체험그자체를의미하는것이아닙니다. 말하자면죄의굴레에서벗어나는순간을경험하는것만으로불완전하다는뜻입니다. 오늘본문의말씀에등장하는그귀신들렸다벗어난사람의경우처럼, 자기의삶속에서묵묵히하나님의일을증거하며살아야한다는겁니다. 하나님의일이란결국예수께서우리에게행하신기적을의미합니다. 그기적은곧생명을위해삶의새로운변화를일으키는것이라할수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생명의변화를두려워하면결코그를따를수없습니다. 주님을따른다는것은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피조물로의변화만이아니라, 새로운시선으로의변화도의미하기때문입니다.

 

지난한주간저는우리교회가속한California-Nevada Annual Conference에참가하고돌아왔습니다. 금번연회의주제는“With Jesus in the boat(배안에서주님과함께)”였습니다. 제자들이풍랑을만나위기의상황에처해있지만, 그곳에주님이함께계시다는사실을기억하라는것이메시지의핵심이었습니다. 주님이함께하시니두려워말라는것이지요. 교단내부에서일어나고있는갈등, 그리고보다근본적으로는오늘날교회의지속적인쇠퇴로인해많은제자들이두려움에떨고있습니다. 어디로향해갈지, 아니이풍랑에교회라는배가과연얼마나더버틸수있을지모두가염려하고있는상황입니다. 그런데우리가잊지말아야할중요한사실하나가있습니다. 교회는머리되신주님이함께하는거룩한믿음의공동체라는사실입니다. 그주님이우리에게말씀하고계십니다. 두려워말라고말이지요. 그분만계시면충분합니다. 그러니어떤변화가올지라도두려워마십시오.  어쩌면우리를두렵게하는것은악령의장난인지도모릅니다. 하지만그리스도의능력은우리를귀신의흉계에서자유롭게하실것입니다. 두려워마시기바랍니다. 앞으로우리가가야할변화의바람속에서도그리스도예수가우리안에함께하시는한, 우리는반드시약속의그땅으로무사히건너가게될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요한복음14:8-18

 

지난주USA Today에복권당첨과관련해서재미있는사례가한가지소개되었습니다.그것은노스캐롤라이나주에사는한60대남성이손녀가준포춘(fortune)쿠키에서나온번호를그대로써넣어서 3억4천460만달러(약4천59억원)가넘는엄청난금액에당첨되었다는사연이었습니다.저도중국식당에갈때마다포춘쿠키를받으면,늘그안에적힌격언이나덕담을읽는버릇이있습니다.읽고나면꽤기분이좋아지곤하는데,아주적은수의경우를제외하면언제나그글은긍정적인면만기록되어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인지읽으면서이것은내게주시는하나님의말씀일것이라고스스로되뇌는경우도많았습니다.아마도이이야기를들으면서,앞으로는  포춘쿠키의번호를잘점검해야겠다고생각하는분이계실지도모르겠습니다.그런데그저웃어넘길수없는분명한사실가운데하나는많은사람들이포춘쿠키에적힌행운의숫자나짧은글이자기삶에진짜복을가져다주면좋겠다는바램을대부분가지고있다는점입니다.믿거나말거나상관없이말이지요.

 

흔히“기복신앙”이라불리는신앙생활의행태가많은사람들에게영향을미칠수있는것도비슷한이유에서찾을수있습니다.사람들의내면에욕망의충족이나소원성취와같은매우극적이고현실적인성과를바라는심리상태가강하게작용하고있기때문입니다.사실메시아를기다리던유대인들의상황도세속적이고현실적인기대에서크게벗어난것이아니었다는점에서기복적신앙관과다르지않았습니다.주님의부활후승천하기바로직전의상황을기록하고있는사도행전1장6절을보면,성령의세례를통해하나님나라를말씀하시던예수께제자들은이스라엘민족에게나라를언제다시되찾아줄것인가를묻는대목이나옵니다.물론매우중요한문제인것은틀림없지만,부활을체험한이후에도이들에게하나님의나라에대한예수님의궁극적인가르침이아직완전하게자리잡지못하고있었다는사실을보여주는것이라할수있습니다.

 

하나님의나라는공간적인개념이아니라통치의개념입니다.그래서하나님의나라를물을때는어디에존재하는것이아니라어떻게행하여야하는가에관한질문이되어야한다는것이지요.예수님은이를숨은보화에비유하시면서보아야할것으로비유하시기도했습니다.엄밀한의미에서하나님나라는없는것을만드는것이아니라,이미존재하는것을가능하도록나타나게만드는것이라는뜻입니다.그래서영의눈을떠야한다고거듭강조하셨던것입니다.

 

성령의세례를받고새롭게영의눈을떠야하는데,여전히그들의시선은물세례를받고제자들이라칭함받는수준에서벗어나지못했다는증거입니다.성령의권능을받아서,땅끝에까지이르러복음의증인이되라고부름받았지만,여전히제자들의마음은어디가땅의시작이고끝인지를분간하지못할만큼신앙의중심이서지않은상황이었던겁니다.비록부활하신예수께서그들을직접찾아와주셨다해도,어디까지나이들은눈에보이는주님의임재를통해확신을얻는것이외에는확고한믿음을지켜내지못하고있었던것으로보이는까닭입니다.  

  

사실예수님이계시지않은상황에서그를따르던제자들과초기교회의신도들은영적으로고아나다름없는신세였습니다.영적, 심리적으로공황상태를겪고있었던것이지요.십자가의죽음이부활에대한소망이아니라,오히려생명에대한위협과공포로다가왔기때문입니다.그러다보니불안한현실과불확실한미래에대한두려움은많은신도들을신앙공동체에서떠나게만들거나,상실감에빠져현실을부정하고희망을잃어버린채자포자기하는이들도나타나게되었습니다.게다가부활이후에그들을다시찾아오신예수께서끝까지함께하시는줄알았는데,하늘로돌아가신다는이야기는또한번그들의마음을흔들리게만들었던것이지요.

 

한마디로철저히현실적인시각을벗어나지못한제자들과초기신앙공동체의신도들에게상실감을가져다준상황이었던것입니다.그저할수있는것이라고는골방에삼삼오오모여기약없는예수님의재림만을고대할뿐인신세가되어버린겁니다.오늘본문말씀은이런상황속에빠져있는제자들을위해미리예비하신예수님의말씀이라해도무방합니다.흔히예수님의고별설교로알려진내용인데,로마군인들에게체포당하시기직전에예수님이주신말씀입니다.그말씀의시작이“너희는마음에근심하지말라.”(요14:1)는것에서볼수있듯이,앞으로예수님의부재가운데상심을겪게될제자들을향한위로의말씀이라는것을알수있습니다.

 

그런데그때,제자가운데하나인빌립이예수께한가지요청을하지요.그것은바로아버지하나님을보여달라는부탁이었습니다.만일그럴수만있다면예수님이자신들을떠나신다해도안심할수있을것같다는생각이었던겁니다.그러자예수께서“나를본자는아버지를보았거늘어찌하여아버지를보이라하느냐(요14:9)”고대답하셨습니다.이미주님은아버지하나님과한몸을이루고있다는사실을여러번이야기해주셨습니다.그러니믿고기다리라는뜻이었지요.무엇보다예수께서행하신일들을통해아버지하나님이함께하고계시다는사실을증거했으니말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제자들은그믿음을확신할수있는표징을원했던것으로보입니다.대부분의신앙인들이바라는것처럼말이지요.눈에보이거나손에잡히는것혹은수긍이갈만한어떤현상을통해서라도믿음에대한확증을얻고싶은마음이었던겁니다.기복신앙이나번영신학과같이확실한믿음의근거가필요했던것이지요.사실오늘날처럼시각적인비주얼(visual)이강조되는사회에서보지않고도믿는신앙의깊이를이야기하는것은어려운일이되었습니다.그러다보니많은사람들에게복음을전하는것자체가힘든시대가되어버렸습니다.교회를다니는사람들조차보이는겉모습에더관심을갖고판단하는경우가많습니다.물질의축복과성공,그리고출세라는세속적가치가십자가의고난에서피어난생명의가치보다더중요한신앙생활의목표가되어버린것이지요.

 

그래서인지보여달라는요구를하던제자들에게전하신예수님의대답은오히려제자들을향한질문에가까운것이었습니다.제자들에게되물은것이지요.베드로에게마지막으로물었던그질문과같은것이었습니다. “바로나를사랑하느냐?”는질문이었습니다.물론그에대한대답은계명을준수하는지그여부만보아도알수있다는것이예수님의생각이었던것으로보입니다.행함속에서진실한믿음의근거를확인할수있다는뜻이지요.이건마치세속적인가치에물든오늘이시대의교회를향해던지는질문처럼들립니다.정말주님을사랑하는교회가맞는지다시한번돌아보라는겁니다.오늘우리교회가주님을사랑해서주님의말씀대로사는교회가맞는지를먼저확인해보라는것이지요.교회안에하나님이계신지를주님께보여달라고구할것이아니라,우리스스로하나님이계신교회인것을증명해보이라는말씀입니다.

 

저는이말씀을묵상하며이런비유가떠올랐습니다.갈급한시대를살아가는사람들이사랑에목말라합니다.그래서사랑을구합니다.누군가로부터사랑을받고싶어하는것이지요.그래서그사랑을확인하고싶어합니다.그런데진정한사랑은그렇게볼수있는것이아닙니다.또보여지는것이전부일수도없는일이고요.오히려사랑은보는것이아니라행하는것입니다.누군가해주기를바라는것이아니라누군가를위해적극적으로행하는것.그게사랑입니다. 이런사랑이없으면결국누구도확인할수없는법이니무엇이먼저가되어야할지는자명한일입니다.

 

하나님을보는것도마찬가지의상황입니다.그꿈같은일은이루어지기도힘들지만,보여준다해도볼수없는것이유한한우리의한계입니다.그러니까보려하지말고,하나님과함께동행하라고성경은말씀합니다.다시말해하나님의말씀을따라살아가라는것이지요.믿음은볼수없는것을보아서확인하는것이아니라,보이지않는것에대한신념을가지고사는신앙의힘에서나오는것입니다.마치받은것없이도줄수있는사랑처럼말이지요.그것이바로하나님의일을행하는것입니다.그때비로소하나님이나와함께하고있다는확증을얻을수있는것아닐까요?하나님을보여달라는제자들의요청에대한예수님의대답은바로이것이었습니다.

 

물론우리에게만모든것을맡기신것은아닙니다.네가알아서하라는식의방임이라기보다는이미길을예비해놓았으니그길을따라오라는인도하심에가까운말씀이었습니다.그래서구하라고말씀하신것이지요.그러면다들어주신다고말입니다.원하는것아무거나다들어주신다는막무가내식응답이아니라,하나님의말씀을따라가며보이지않을때마다그길을구하면인도해주신다는약속입니다.보혜사성령을통해끊임없이인도해주시리라는약속인것이지요.

 

오늘은성령강림주일입니다.우리를향한주님의약속이이루어진날입니다.성령은하나님을보기위해무작정기다리는것이아니라하나님의일을행함으로자기안에계신증거를나타내고자하는이들에게주신선물입니다.주님을사랑하는마음으로오늘도믿음대로사는이들에게주신은혜입니다.때로힘에부치고잠시머뭇거리며주저앉고싶은우리들을향해끝까지함께하신다는약속을주신것입니다.우리가운데성령을보내어주셔서가야할길을미리예비하시고인도해주시는주님의은혜가크고놀라울뿐입니다.이는하나님의일을끝까지감당하며거룩한책임을지고자한걸음더나아가는우리교회에주시는말씀이기도합니다.다소불확실하고불안한상황이오는순간이있을지라도,하나님의일을믿음으로행하는교회는언제나주님이우리의간구에응답하시며,성령을통해인도하여주시리라는믿음을잊지마시기바랍니다.성령이오늘우리와함께하시며인도해주실것을믿는거룩한주님의교회와성도들이될수있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합니다.아멘.  

 

영광의 십자가

요한복음17:20-26

 

오늘본문의말씀은예수님이체포당하기직전에드린기도중의일부분에해당합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예수께서겟세마네에서드린기도에대해짧게전하고있지만, 요한이전하는내용과는그성격이조금다릅니다. 공관복음은십자가의죽음을앞에두고예수께서겪어야만했던인간적고뇌와아버지하나님을향한전적인신뢰, 그리고소명의결단을보여줍니다. 반면요한복음에기록된기도의내용은이제남겨진제자들과교회를향한걱정이주를이루고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하나님을향한믿음과그리스도의재림을기다리며하나된모습으로굳건하게유지될수있기를간절히구하는기도라고할수있지요. 아마도이러한차이는요한복음이기록된시기의초대교회가처했던상황과밀접한연관이있는것으로보입니다. 

 

사실초대교회의중요한질문가운데하나는예수께서언제다시오실것인가에관한것이었습니다. 물론지금도여전히모든교회의기대와소망이지만, 당시그들에게예수님의재림은매우긴박한것으로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의나라를미리예비하시고, 다시돌아올것이라는예수님의약속이동시대에이루어질것이라는기대가그만큼컸기때문입니다. 오랜시간이지난지금보다초기기독교공동체는자신들의생전에예수님의재림을경험하게될것이라믿는사람들이많았던까닭입니다. 사도행전의기록만보더라도당시일부의신자들이자기재산을포기하고공동체생활을하며예수님의재림을기다렸다는사실이이를잘보여줍니다.

 

하지만기대했던예수님의재림은일어나지않았습니다. 이러한결과는지금당장이루어질것이라믿었던당시신자들과교회에적지않은영향을미쳤습니다. 여전히예수님에대한기억을지금보다생생하게가지고있었던이들이었기에그후유증도만만치않았던것이지요. 그래서요한이전하는예수님의기도에는하나된교회의필요성이유난히강조되는듯한인상을줍니다. 비록예수님의재림이지금일어나지않았지만, 이미주님이세우신교회안에하나님과그리스도예수, 그리고성도들이하나가되어있으니재림의지연을전혀걱정하지말라는뜻이지요. 주님과하나된교회안에있기만하면, 전혀염려할필요가없다는확신을주고자했던것입니다. 마치먼길떠나는연인이언제나네안에함께있을것이라며확신을주는약속과같다고나할까요. 

 

예수님의기도를통해우리는이렇게아버지하나님과그리스도예수, 그리고성도가하나된모습을나타내는하나의단어를발견하게됩니다. 바로“영광”이라는말입니다. 22절을보면, 예수께서아버지하나님과자신이서로안에있음으로인하여하나가되었다고말씀하신직후에, 이것은내게영광을주신것이라는표현을사용하고있습니다. 그리고나서그영광을자신과하나된우리들에게도주었다고말씀하시지요. 이는예수님과우리가서로간에있는, 하나된모습을전제한것입니다. 이제예수그리스도와우리가, 아버지하나님과예수님이하나가된것처럼우리도하나가되었기때문에영광을받을수있었다는뜻이지요. 그렇다면서로가하나된상태에서전해진영광이란것은무엇을두고하신말씀일까요?

 

영광은헬라어‘독사(doxa)’를번역한것으로, 하나님의임재혹은나타나심을가리키는표현이라할수있습니다. 구약에서는히브리어로“카보드(kabod)’라는단어를사용하였는데, 이역시하나님의현현을나타내는표현입니다. 예컨대호렙산에서모세가하나님으로부터부르심을받을때에도, 그의영광가운데지나가셨다는구절이나옵니다. 그러나볼수가없었지요. 누구도그영광을직접볼자는없다고성경은말합니다. 그럴수밖에없는것이당연합니다. 유한한우리가무한한절대자하나님의영광을직접볼수있다는사실은불가능한일입니다. 저도최근에물리학박사인우리교회소집사님으로부터배운사실인데, 우리가저녁하늘에바라보는별의모습은수만년전의모습이지현재의것이아니라고합니다. 몇광년떨어져있는거리를생각해보면, 시간상그런결론을얻을수밖에없다는것이지요. 그러니절대자하나님을우리의유한한능력안에서보고안다는것은불가능한일이아닐수없습니다.

 

그런데이러한우리의한계에도불구하고, 예수님은하나님의영광을우리가보게해달라고기도하셨다는사실이놀랍습니다. 본문24절에서예수님은“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나를사랑하셔서내게주신내영광을, 그들도보게하여주시기를빕니다” 라고기도하셨습니다. 한마디로볼수없는것을보는, 능력밖의일이가능하게해달라고요청하신것이지요. 그런데이것은막무가내로불가능한것을가능케해달라는간구가아니었습니다. 이는바로앞에나온23절을통해확인할수있습니다.  “내가그들안에있고, 아버지께서내안에계신것은, 그들이완전히하나가되게하려는것입니다. 그것은또아버지께서나를보내셨다는것과, 아버지께서나를사랑하신것과같이그들도사랑하셨다는것을, 세상이알게하려는것입니다.” 

 

이는우리에게아주중요한사실을알려주지요. 예수님은하나님의영광을보는것과아는것을같은의미로사용하고계시다는점입니다. 알아야할영광도하나님의현현이라는추상적인표현으로사용하지않았습니다. 바로아버지께서보내신이유, 그사랑의확증을영광이라고말씀하신것이지요. 다시말해, 예수께서간절한기도를통해우리가알기를바라던영광은바로‘십자가’였다는사실입니다. 우리가바라보아야할영광은다름아닌그리스도의십자가였던것이지요. 십자가사건이후예수님의부재와기약없는재림의기다림에지쳐가던초대교회와오늘우리에게주시는예수님의당부는바로“십자가의그사랑”을잊지말라는것이었습니다. 십자가안에주님의영광이있다는것이지요. 그러므로우리도십자가위에죽고, 다시부활의기쁨을얻을때하나님의영광이우리가운데나타나게될수있다는뜻입니다.

 

예수님의말씀대로우리가알아야할하나님의영광은바로십자가의정신, 곧사랑입니다. 이를통해우리는아버지하나님과그리스도예수와하나가될수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십자가의정신을통해한몸을이룬신앙공동체라는뜻입니다. 어떠한변화가오더라도교회가흔들림없이버틸수있는힘도바로여기에있습니다. 십자가를통해끝까지그리스도의몸된교회를하나되게만들어나가야하는이유입니다. 주님의간절한기도대로우리는십자가의그정신을결코잊지말아야합니다. 우리를위해흘리셨던그리스도의보혈을생각하며, 우리도자기십자가를져야합니다. 조금은불편하고힘들더라도, 조금은귀찮고마음에들지않더라도주님의영광을위해함께십자가를짊어지는하나된교회가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

 

이제성찬의식탁에나와서여러분이받게될빵과포도주는우리를위해죽으신주님의몸과보혈을우리가운데모심으로그분과하나되는은혜의자리입니다. 완전히주님과하나가되어, 십자가의영광이우리삶을통해나타날수있도록다짐하며결단하는이시간이되기를소망합니다. 그리고이를통해하나님의영광을아는기쁨을고백하시기바랍니다. 더불어성찬의예식을통해십자가의영광을함께증거하는이시대의진정으로하나된교회의성도들이될수있기를주님의이름으로간절히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