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마가복음 2:23-3:6

자신의 신념과 주장으로 인해 가장 극단적인 평가를 받은 사상가를 뽑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년이 그의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출판계로부터 다시 주목을 끌고 있지만,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사상적 기초가 된 이론을 내놓은 철학자로 반공주의가 강한 사회에서는 기피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그의 사상이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정작 그의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척 보면 다 안다’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욕 먹어도 싼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나름대로 심오한 철학 사상을 단 한 마디로 평가하기에 그 사상의 깊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가 20대에 남겼다는 노트의 한 메모는 지금도 독일의 훔볼트 대학 건물 중앙에 새겨져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는 글귀입니다. 대학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가는 한 젊은이의 치기라고 하기에,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만 두고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야 할 소명을 “제자를 만들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웨슬리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노동의 가치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색안경만 끼지 않으면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마르크스가 반기독교주의자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을 관통하는 신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그에 대한 애정은 그의 사상 밑바탕에 깔린 기본 인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도 이를 잘 보여주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가 말한 노동의 가치도 사실은 안식일에 관한 이해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마르크스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아예 노동을 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이 주는 짐과 소외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노동을 통해 만족한 결과를 갖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혹은 노동을 마지 못해 할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생각이나 형편에 상관없이 억지로 노동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처럼 고역도 없을 겁니다.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빗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일의 의미와 같다는 것이 제 생각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형식적인 주장이 아니라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삶,곧 생명의 기쁨을 누리라는 의미가 우리에게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안식일에 관한 오늘 본문의 두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첫번째 이야기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행한 것에 대해 예수님께 따져 묻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 라는 동정의 시선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또 그런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의 융통성없는 고지식함이 곱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정말 밀 이삭을 잘라 먹으면 안될 만큼 제자들이 당장 죽을 지경이었다면 바리새인들도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도 부정적인 면만 강조되어서 그렇지, 실제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의 율법이 아주 꽉 막힌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율법도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안식일 규정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여유는 갖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질책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21장의 내용을 인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빵을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은 사건을 언급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우리가 잘 아는 그런 위인들도 똑같은 일을 범했는데 별문제가 없었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그래서인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바로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바꾸어 표현하면,결국 안식일에 관한 율법적 규정 보다 생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 자체가 절대적인 원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께서 율법의 원칙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율법이나 예언자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5:17). 율법이나 그것이 주장하는 원칙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되어서 율법 자체를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하는 모습을 경계한 말씀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발견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주일 성수’에 관한 주장도 그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앙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이 보다 더 명백하게  방법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주일 성수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이 때도 본문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한편으로는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 되겠는가?’라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피치 못할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입장의 대립입니다. 만일 이를 바리새인의 입장에 적용시켜보면, “정말 피치 못할 만한 사정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대답처럼 ‘주일성수’라는 원칙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로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그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많은 교인들이 주일성수와 헌금이나 십일조처럼 교인에게 주어진 신앙적 헌신과 의무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말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구절을 들어 율법적 원칙의 폐해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한쪽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편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이나 보다 의미를 중요시 여기는 입장 모두가 공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 제시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마치 의무적 조항으로 생각해서 마지못해 나간다면 주일성수의 의미는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형식화된 규정을 아무런 감정없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편의대로 주일성수의 의미를 해석하여,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학교 출석이 교육의 목적을 완전하게 수행하지 못한다 해서, 학교 출석 자체가 교육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은 둘 다 지나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 역시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제자들의 행동을 아무 제재없이 그대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결국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강조하고자 한 부분도 우선순위였던 겁니다.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그것은 필연적으로 안식일에 대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강조만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안식일의 사건은 이를 보다 분명하게 예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3장의 말씀을 보면,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장애를 가진 이를 예수님이 만나 그의 병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제자들을 비판했던 바리새인들과 유대 사람들은 회당에서도 예수님이 또 다른 규정 위반을 할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러한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지를 오히려 물었던 것이지요. 이는 그것이 어떠한 성격이든 안식일에는 행하지 말라는 규정을 따르던 유대인들의 이해와는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구별해서,선한 일은 해도 좋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선한 일이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과 관련된 일이라고 예수님은 규정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안식일의 규정에 어긋나더라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역시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연 장애가 있는 이의 손을 낫게 해주는 것을 생명을 살릴 만큼 위급한 문제로 볼 수 있는가의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당장 먹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인가를 묻는 앞 이야기의 사례와 똑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이러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디까지를 우리는 원칙을 넘어서는 부분으로 인정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준인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이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문5절의 말씀을 보면, 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노골적인 이유로 질문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시며 탄식하셨다는 대목입니다.놀랍게도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장애인을 고치는 일이 정말 죽고 사는 문제인지 아닌지, 그래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을 만한 것인지 여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겁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파서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고 밀이삭을 잘라 먹었는지를 항변할 생각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찾는 기준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안식일의 논쟁 자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찾으신 것이지요. 

실상 오그라든 것은 장애인의 손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도 똑같은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하고자 한 것은 오그라든 손만이 아니라, 사실은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정말 회복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 사람들의 마음이었다는 뜻입니다. 굳어서 유연함을 잃어버리고, 감동하지도 못해 열리지도 않는 아주 오그라든 그 마음을 예수께서는 회복시키고자 하신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의 본질적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오그라들어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펼쳐 활짝 여는 바로 회복에서 말이지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요한복음 3:1-8

성경말씀의 일부를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는다거나, 혹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만큼의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언급한 웨슬리의 경험도 그렇고, 종교개혁의 주역인 루터의 개인적 체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각자 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영향을 받은 말씀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도 삶의 변곡점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커다란 영향을 준 말씀이 있습니다.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여러 번 설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데, 오늘은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로부터 말씀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바로 니고데모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출신으로 유대의 최고 법정 기구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호의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데 반해, 오늘 본문에 기술된 니고데모의 태도는 그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십자가의 처형 이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여 장사를 지낸 인물로 다시 언급이 된 바 있습니다(요19:39-40). 요한복음 7장에서는 성전에서의 논쟁 이후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사람도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분명 당시로서는 오해를 받을 만한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기꺼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사건과 예수님의 장사를 지냈던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니고데모에게 있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처음 예수를 만난 것으로 기록된 오늘의 이야기가 적어도 그에게는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러한 추론이 그럴듯한 가설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흥미로운 질문을 갖게 합니다. 바로 사건의 시점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때가 바로 늦은 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성전청결'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분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매우 악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는 그의 질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1-2절의 말씀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행한 표징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한 바 있듯이, 유대인들에게 표징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의 신앙이 기적과 표징을 통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의 민족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출애굽 사건을 보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과 표징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나타나거나, 만나를 제공하는 모든 일들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보여지는 표징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고자 했는지는 마태복음 12장 38절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성전에 그토록 집착을 했던 것도 사실은 그것이 보여지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그만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눈에 보이거나 몸으로 증거할 수 있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지요.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기도를 통해 해결 되었다거나, 갑자기 자연환경의 변화 속에서 기적처럼 놀라운 체험을 함으로써 자기 신앙에 대한 확증을 갖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적 태도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러한 표징이 신앙의 전제조건이 되거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이는 마치 상대방이 나에게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보답이 있거나 원하는 것을 제시해 줄 때만 나도 다가갈 것이라는 조건적인 태도와 비슷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외교적 전략일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로는 문제가 없지만, 신앙의 태도로서는 부적절한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확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하나님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표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는 중생(born again)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길은 믿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상대방이 나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가 믿을만한 행동을 보여주거나, 먼저 말을 걸어오면 나도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이 표징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변화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변화되지 아니하면 실제로 보여주신다 해도 왜곡되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교회가 성장하여 교인 수도 늘고 그 결과 큰 예배당도 건축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결과론적으로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목적으로 혹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평가하려 든다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을 나타내는 척도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신앙의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볼품 없는 규모가 오히려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신 다시 사는 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니고데모도 그 방법이 궁금했던 것이고요. 오죽하면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묻겠습니까? 여전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혹 우리 자신도 신앙의 내적 변화 조차 무언가 또 다른 가시적 효과를 통해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뜨겁게 찬양을 하고 성경을 적어도 몇 번은 통독을 해야 다시 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그래서 마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일처럼 상대방으로부터 반응이 얼마만큼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거나,아니면 기꺼이 비싼 선물을 사줄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넉넉하다고 여겨져야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로 새로워진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성령에 의한 방법 보다는 좀 수월한 것 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의 예식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령입니다.물로 씻어서, 혹은 세례의 의식을 통해 사람이 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손쉬운 방법입니까?하지만 성령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결과도 쉽게 눈에 띠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증만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곤란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본문 7절과 8절 말씀을 통해 부연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정말 알듯 모를듯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유인지 모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령은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실제로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프뉴마’나 히브리어 ‘루아하’는 모두가 바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예수님 말씀대로 영이나 바람이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사람의 판단으로는 방향 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람과 영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바람과 같은 존재가 사람이 새로 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인 걸까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윤동주의 <서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도 2월이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인들조차 그가 옥사한 후쿠오카의 한 공원에서 이 시를 우리말로 낭송한다고 할만큼 유명한 시입니다.

시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한다고 표현한 부분은 영원하면서도 순결한 내세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똑같은 마음일 겁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한결같은 모습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잎새는 세상을 대표하는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인데, 거기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부는 바람처럼 똑같이 반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작은 잎새에 부는 바람인데도 마치 자신에게 부는 바람처럼 어떠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함께 느낀다는 말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불어 닥친 문제는 아닐지라도 이를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시인은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노래한 것이지요. 아마도 일본 땅에서 유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식민지 조국에서 고통 당하고 있을 동포들을 생각하며 아파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보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 말씀을 시인의 표현대로 바꾸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을 갖지 않을 사람이라 정의내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빗대어 설명하신 영이 임하여 거듭난 사람은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반응할 수도 있는 사람,그래서 모든 죽어가는 것조차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를 변호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려 했던 니고데모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진정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거듭난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회심

사도행전2: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영어로는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하는데, 그어원은50일을의미하는헬라어에서유래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부활하신후50일이되는것을기념하는주일이라는뜻입니다. 이날을‘오순절’이라고도부르는데, 시기상으로만따지면성령강림절과오순절이일치하게된것은매우우연적이라할수있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초실절 후 50일이 지난 날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표하는 유대의 축제 절기입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놀라운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유월절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 아닙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에도 그 날은 유대의 민족사를 뛰어넘는 전 인류의 구원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어린양처럼 대신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도 그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겁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바치던 초실절도 유월절이 시작하고 셋째 날이니까 그 의미가 놀랍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로부터 50일이 지난 뒤 오순절, 곧 성령강림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이 지난 바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이 땅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따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교회를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기록한 성령 강림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을 체험하고,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갈 제자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표현한 바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한 바람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원어의 의미도 숨결이나 호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온 숨결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지요.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하는데, 집안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부분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을 가득 채운 상황이라고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생기로 가득 찬 생명력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위에 사람을 만드실 때도 그랬던 것처럼,이 땅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시고 행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일이었습니다. 마른 뼈처럼 죽어가는 이 땅에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이지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이제 이 땅에 그의 손발이 되어 일할 교회를 그렇게 세우신 겁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생기로 가득찬 것처럼, 주님의 교회도 하나님의 생기로 충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4절에서는 이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을 통해 어떤 이들은 불과 같이 뜨거운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서 막 타오르는 듯이 뜨거운 신앙의 상태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뒤에 언급된 방언의 사건은 서로 알 수 없는 지방의 말을 여하튼 알아 들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바벨탑의 사건이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면, 성령강림절의 방언은 비록 다른 언어를 하지만 알아들었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불통에서 소통의 장이 열린 것이지요.한마디로 성령강림의 역사는 모두를 하나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나,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엑스타시(ecstasy, 무아지경)를 체험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의 회심 사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웨슬리 회심주일이기도 합니다. 웨슬리가 진정으로 성령의 체험을 갖고 변화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령이 갈라지는 혀처럼 불길이 내려왔다는 본문 말씀을 형상화시켜 연합감리교회의 로고가 만들어졌지만, 정작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회심 사건은 그렇게 뜨거운 성령체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 성공회의 매우 경건주의적인 신앙 전통 하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아주 엄격한 방식으로 양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녀들이 매를 두려워하고 부드럽게 울도록”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만큼 엄격하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생활규칙을 따르게 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성장해서도 이와 같은 경건훈련에 열심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매주 이틀 금식을 하고, 하루 세시간을 기도와 성경말씀 묵상에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열정을 다했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로부터 규칙주의자들(Methodist)이라는 비아냥을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신앙에 절대적인 도전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교를 위해 미국 땅 조지아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만난 큰 풍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마치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풍랑을 만난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라비안들을 보자 그는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모라비안의 지도자로부터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심각한 좌절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신학교육과 열정적인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속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 1738년5월24일 저녁 존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기도모임에서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순간을 웨슬리는 후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갑자기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strangely warmed)이라고 말이지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이 진정으로 감동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마음 가운데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회심의 체험을 한 것이지요. 이를 웨슬리는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체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회심의 뜻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하면, 회심(回心, conversion)은 마음이 돌아서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적용하자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 회개(悔改, repentance)가 의미하는 것처럼 삶의 방향을 바꾼 일회적인 상태와는 달리, 회심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해 버리듯 전기가 짜릿하게 오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여전히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모습에 견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감동을 내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항상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성령을 체험하고, 이를 삶 속에서 찬찬히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너무 안달복달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하지 못해 타인을 힘들게 하지도 않는.무엇보다 주님이 나를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신앙으로 말입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져버리는 인스턴트식 신앙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웨슬리의 회심처럼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하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회심의 감동이 여전히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말입니다. 

지켜주시기를

요한복음17: 6-19

통계자료에따르면, 어머니날을맞이하여미국에서이날하루소비되는액수가약2700억달러에이른다고합니다. 대부분의특정공휴일이그렇듯이모든것을상업화시킨결과가아닐수없습니다.물론그것조차남의일같아서더속상한어머니들도계시겠지만, 단순한감사의선물이상으로상업주의에물들어버린어머니날이본래의의미를잃어버린것은아닐까라는걱정을하지않을수없습니다.

사실어머니주일의의미는요즘우리가생각하는것과는조금다른차원에서시작하였습니다.아마어머니주일의유래가우리감리교회와연관이있다는것을아는사람은많지않을겁니다. 1908년5월에안나자비스(Anna Jarvis)에의해웨스트버지니아에있는한감리교회(Andrews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Grafton)에서처음으로공식적인어머니날이시작되었다고합니다. 흥미로운점은자비스는후에어머니날이상업화되는것을막기위해달력에서이날을빼기위한운동을벌였다고아니놀라울뿐입니다. 

본래자비스가어머니날을공식화하기위해노력한배경에는그의어머니인앤자비스처럼남북전쟁의참상을보면서평화를위해일한어머니들의헌신이있었습니다.한마디로여성들이평화를위해해야할일이무엇인가를바로이어머니주일을통해감사하며다시금다짐하고자한것이바로그기원이라는것입니다. 그래서어머니주일을맞이하여어머니들이자녀들을데리고교회에가서하나님의말씀속에서평화의의미를깨닫게하고, 이를실천하기위한신앙훈련을받는것이어머니주일에행하던본래의모습이라는것이지요.

어머니주일을맞이하여감사한마음으로어머니에게선물을주고가족들이함께모여식사를갖는것도참아름다운일입니다. 하지만그것만이전부가아니라는것을적어도그유래를아는그리스도인들이라면깨닫게되기를바랍니다. 외식하기위해식당에서가족들이다만나는것처럼, 먼저하나님을예배하는자리에서가족들이다함께만나평화의왕으로오신그리스도예수를찬양하며, 우리에게주신각자의소명을다시금되새기는귀한시간이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

그러고보면, 요즘어머니들은자녀들에게하나님의말씀을강조하기보다세상에서의처세술을먼저이야기하는경향이있습니다. 세상의평화를이야기하기보다세상의경쟁에서이기는법을먼저가르치려합니다. 그래서자식에게마지막남기는유언도, “잘살라”는말이많다는겁니다. 도대체어떻게살아야잘살라는것일까요?특별히오늘은졸업파송예배를겸해서드립니다. 학교를졸업하고새로운인생의출발을하는젊은이들을축복하고격려하는자리입니다. 그렇다면세상을향해나가야하는이들에게과연우리는어떤격려의말을해주며떠나보내는것이좋을까요? 

오늘본문말씀은십자가죽음을앞두고드리는예수님의마지막기도에관한것입니다.우리는이를통해마지막으로그의제자들에게전하고싶었던예수님의말씀이무엇이었는가를확인하고자합니다. 이와더불어예수님은세상에남겨진제자들에게잘사는길을어떻게말씀하고계신지에대해살펴보고자합니다.

예수님은제자들과마지막만찬을나누신뒤에겟세마네동산에가서기도하셨습니다. 이때는제사장들이보낸로마의군인들에게체포당하시기바로직전의상황이었습니다. 다른복음서와는달리요한은이부분을매우자세하게전하고있는데, 예수께서행한기도는대부분이제남겨질제자들을위한내용이라해도과언이아닐만큼중요하게다루어지고있습니다.특히이부분이기록된시기의초기기독교교회는유대교에서완전히떨어져나와엄청난시련을겪고있는상황이었습니다.새롭게부상한기독교교회에대해로마의극심한탄압과더불어유대인들도강하게배격하고있는상황이었던겁니다. 초대교회에서수많은순교를당한때도이시기였습니다.

그러니당시의많은교인들은마치버림받은존재가아닌가라는상실감속에서혼돈을겪을수밖에없었습니다. 예수님이떠나신뒤남겨진제자들에게세상은고통스러운곳이되어버린겁니다.결코세상에는속할곳이없는,한마디로이방인이되어버린꼴입니다.영적으로도그들은예수님이더이상그들과함께하지않는듯한극심한외로움을겪고있었습니다. 

이것이바로요한이예수님의기도를매우상세하게전하고자한이유인지도모릅니다. 그러니까기도를통해결코예수님은우리를향한마음을거두지않고계시다는것을재확인시켜주고자했던겁니다. 더불어아무리힘들고고통스러워도마지막예수님의기도를통해오늘을어떻게살아야하는지를다시금되돌아보자는뜻이담겨있습니다. 정말이땅에서잘사는길이무엇인지를주님의기도를통해확신을얻고자했던것입니다.

본문16절을보면,예수님은자신처럼남겨진제자들또한세상에속하지못할것을이미알고계셨던것으로보입니다.비록몸은세상을살아가지만, 결코그안에속할수없는것이바로기독교인의운명이라고보셨던겁니다.요한복음18장36절에서예수님은“내나라는이세상에속한것이아니라”고말씀하신바있습니다. 따라서남겨진하나님의자녀들에게속할곳은당연히하나님의나라가되어야한다는뜻입니다.

그렇다고세상에속하지않는다는말이실제로세상과완전히격리된삶을의미하는것은아닙니다. 때문에예수님이말씀하신거룩에대한의미도분명하게이해할필요가있습니다. 거룩은세상과구별된다는뜻이지, 세상을완전히거부하고무시해야한다는말이아니기때문입니다. 가끔씩어떤분들이여러목사님들의설교를평가하면서, “나는목사님이하나님말씀만가지고설교하셔서좋다”고하시는경우를듣습니다. 대개성경구절을반복적으로나열하거나, 예시의내용을성경의구절에서찾는설교를두고하는말입니다.그러면저는그런생각이듭니다. ‘그런방식만이옳다면, 구태여설교를들을필요가없이그냥성경을읽으면될것이아닌가’하고말입니다.

그래서설교중에세상이야기만나와도불경하다고생각하는경우가있습니다. 그것이거룩함을지키는길이라여기는것이지요.하지만지금예수께서세상에속하지않는다고하신말씀의의미는제자들에게스스로세상과격리되어자기들만의세상을만들라는뜻이아닙니다. 17절과19절에서두번이나반복해서기도하셨지만, 진리로거룩하게되라는말씀이었습니다. 세상과구별되는것은세상에대한관심을저버리거나포기해서가아니라바로진리안에거하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이것이바로남겨진제자들이이땅을사는길이라는겁니다. 한마디로속하지않은이땅에서하나님의자녀들이잘사는방식이라는것이지요. 진리안에거룩한존재가되는겁니다. 거룩이라는말의헬라어단어가하기오스(ἅγιος)인데, 그 뜻 자체가 바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세상의 빛’이라는 단어입니다(마5:14). 이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은 거룩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아주 잘 보여주지요. 빛은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빛은 어둠을 피해 양지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있을 때 그 빛은 더욱 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은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분명하게 구별이 됩니다. 다만 그 빛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촛불로 비유하자면 심지와 기름이 잘 유지되어 있어야 불이 붙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질적인 삶의 모습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결국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진리로 오셔서 함께 동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거하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늘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구별짓는 하나의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항상 주님께 묻고 들으며 행하는 모습입니다.무엇을 하든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묻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셔서, 내 것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따르게 하소서”라는 순종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이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신 것이지요. 그것도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셔서, 갑자기 안락과 평안이 이루어지고 궁핍이 아니라 풍요와 번영이 댓가로 주어질 것이라 말씀해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견뎌내야만 한다고 말씀해 주실 뿐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속상해 지는 말씀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남겨진 제자들을 향해 무작정 당하며 참고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는 말씀을 해주셨 습니다. 바로 ‘지켜 달라’는 간구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정글같은 세상에 남겨진 자녀들을 생각하며 드릴 수 있는 어머니의 가장 간절한 기도도 결국은 ‘지켜 달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래 전 학창 시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어머님이 해 주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일 시험 잘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는 격려의 말입니다. 어머니가 대신 시험을 치루는 것도 아닌데, 그 기도가 참 힘이 되는 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통화하면, 늘 똑같은 말씀을 해 주곤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들 목사님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늘 지켜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이지요. 어머니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참 용기가 됩니다. 어차피 내가 부딪혀야 할 현실인지 뻔히 아는데도,그말이 참 기운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적어도 그 말 안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무너질 것 같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도, 어머니만은 늘 내 곁에서 함께 해주실 것 같은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지금 당장 내 삶에 개입해서 바라는 기도 제목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당장 문제가 해소되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좌절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는 동안 그 마음을 저는 계속해서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새로운 인생의 꿈을 향해 떠나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나가서 부딪혀야 할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곳입니다.그렇다고 회피하거나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반대로 그 경쟁에서 승리하며 성공한다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생각하며 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세상은 여러분들이 발을 디딛고 살아야 할 운명과 같은 곳이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그래서 때론 힘들고 외로운 길이 될 지라도 결코 주저앉지 마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거하며 구별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이 말을 전하며 내가 확신하며 이야기 할 것은, 여러분을 떠나 보내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사실 뿐입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간구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의 매 순간마다 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젖먹이 자녀를 향한 애틋한 어머니의 지극정성처럼 하나님도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지켜 살펴보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