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밥

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언급할 만큼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상호들 중에도 ‘오병이어’라는 이름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자기편한대로 해석하여 기적처럼 장사도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마도 번영과 확장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생선으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은 오늘 말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매우 경제적 효과가 탁월한 대박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날 과학 기술은 끊임없이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콩알만한 알약만 먹고도 배가 부를 수 있는 세상 아닌가요? 현대 문명이 추구하는 과학기술의 핵심도 결국은 적은 비용 혹은 작은 양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과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기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지요. 적어도 눈에 보이는 효과만 본다면 말입니다.

만일 눈에 보이는 현상만 두고 기적을 찾는 것이라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이면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해 다니시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무언가에 갈급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이겠지요. 특히 그들 중에는 앓고 있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앓는 사람들은 물론 육체적 병을 앓고 있는 병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기를 잃어 버린 이들도 포함된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어느새 “밥때”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밥 먹을 때가 되었다는 생리적 신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헌데 당장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모인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가진 것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었던 겁니다. 요즘처럼 배달을 시켜도 돈이 있어야 하는데, 모인 사람들을 다 먹이려 한다면 적어도 200 데나리온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미국 화폐로 환산해 보면 약 만불 가량은 있어야 이들을 다 먹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 일단 모인 무리를 해산시키자는 제자들의 의견은 결코 성의없는 결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보내지 말고 너희가 가진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앞 뒤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는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말하는 목사님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서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안타까운 사정을 미리 헤아리고, 교인들이 나서서 돕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채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받는 사람이야 기대하지 못한 일이니 마치 하나님이 주신 기적처럼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저 호의를 베푼 일일 뿐일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다만 주목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주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의 감동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턱없이 부족한 분량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인 것에만 주목하면 결코 찾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애초에 이 사건의 시작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야기의 발단은 바로 수많은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육으로나 영으로 그들은 아파서 신음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결코 져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도 빈 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말씀을 듣고 찬양과 경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면서 한 주간 동안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자 이곳에 지금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참회를 통해 죄가 씻겨서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 한주간 주님의 인도 하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자녀된 모습으로 살고자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닌가요? 그런데 생명수를 길어 가고자 들고 온 영혼의 항아리를 빈 채로 다시 들고 간다면 어떤 심정이 드십니까? 갈급한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시간으로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예배 후 나누어 먹을 친교 음식이 부족하다 해서 예배도 드리지 않고 돌아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제한된 조건 때문에 목적 그 자체를 이루지 못하는 결과를 맞이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영원토록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밥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겁니다. 그 생명의 밥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저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아니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받게 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오병이어의 진정한 기적은 이 놀라운 선물을 받아서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본문의 핵심이 결코 빵과 물고기의 수가 늘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줍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진정한 선물, 바로 예수님이 우리 영혼의 허기와 갈급함을 채워 줄 생명의 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가득 채워진 기적의 사건인 것이지요. 자기의 몸을 찢어 그 살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보다 더한 기적이 있습니까? 죽을수밖에 없는 생명을 살려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만큼 소중한 기적이 또 어디 있을까요? 비록 소유한 것 별로 없는 가난하고 유한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충만해지는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말이지요.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처럼 여전히 세상은 부와 가난의 구별이 명확한 세상입니다. 한편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주체하지 못하며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는 동안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정말 먹을 것이 없어 하루를 연명하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린 모습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황폐한 그 곳에 가서 아무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한들 과연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가진 것이 있어서 먹을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선뜻 내놓는 사람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정말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변화되지 않는 한 그 기적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일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의 핵심은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그를 생명의 밥으로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기적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처럼 성만찬의 식탁에 초대되었습니다. 생명의 밥으로 자신을 직접 떼어 내어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가는 기적을 모두가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귀한 선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생명의 밥이신 그리스도를 취하여 이 놀라운 기적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님의 거룩한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도대체(都大體)

요 1:36-39, 고전 13:8, 마 7:7

 

지난 주 저와 6명의 단기 선교팀은 멕시코 티후와나 파시피꼬 교회의 여름성경학교(VBS) 사역을 위해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파시피꼬 교회는 지난 5년동안 우리 교회가 섬기던 멕시코 현지 교회로, 도시 빈민 가정과 아이들을 위해 사역을 해오고 있는 조그만 교회입니다. 이미 교회 식구들과 아이들은 우리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선교팀 역시 1년만에 만나는 멕시코 현지인들을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안고 출발했습니다.

 

1.     와서 보아라

 

교회 미니밴에 짐을 빼곡히 쌓고 오전 7시경에 출발한 우리가 샌디에이고를 향해 가던 오후 무렵 현지 한인 협력 선교사이신 조영훈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멕시코 국경을 넘기 이전에 긴급히 상의할 내용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갈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급한 일이기에 국경을 넘어서까지 와 이야기할 내용인가 우려와 함께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경 근처에 도착해서 이미 미국 국경을 건너와 기다리고 있던 조 선교사님을 만나 현지 상황을 듣고는 우리 모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용인즉슨, 파시피꼬 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카를로스 선교사가 교회에 다닐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조그마한 주택에서 살고 있던 7세 여아를 성추행했다는 경악할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부모는 물론 교인들과 주변 동네 사람들도 다 알게 되어, 교회와 우리 선교팀이 건축해서 거처로 삼던 사택의 열쇠도 그대로 남겨둔 채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날인 지난 주일 오후에 사건이 벌어져서 경찰의 조사가 우리 단기선교팀이 이미 출발한 바로 다음 날 이루어 졌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한국 선교사인 조 목사님 조차 우리가 출발한 당일인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저희에게 알리기 위해 국경까지 건너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저와 우리 선교팀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미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여러가지 선물과 성경학교 재료들을 잔뜩 싸 가지고 왔고, 무엇보다 그들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우리들이었습니다. 결국 논의 끝에 일단 국경을 넘어가기로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준비해 온 것들 때문이 아니라, 상처받은 교인들을 그대로 두고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저녁 늦게 우리는 본래 예정지인 파시피꼬 교회가 아닌 조영훈 선교사님이 섬기고 계신 “높은뜻 멕시코 선교”교회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선교사님은 곧바로 사건이 발생한 파시피꼬 교회로 향했습니다.

이미 시간은 저녁 10시 30분이나 되었지만, 피해 아동의 부모를 비롯한 교회 식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피해 아동의 부모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그들의 상처 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함께 기도해 주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부부는 이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저희에게 전하였습니다. 함께 했던 동네 이웃과 교인들도 그들의 말에 다 동감한다는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되돌아 본 파시피꼬 교회의 모습이 화려한 도시 속에 그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빈민가의 삭막함과 황폐함 처럼이나 더 우울하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돌아와 우리는 첫날 저녁의 경건 예배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때까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단기 선교팀의 어린 자매들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일정의 변경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고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곧 우리를 위해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하지요.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디에 머물고 계시느냐?”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

우리는 이날 저녁 함께 모여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입니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실현시켜 보고자 우리는 멕시코까지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불미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눈 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질문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고 하신 것일까?”라고 말이지요. 복음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무턱대고 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이 아주 낮설기까지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질문도 제자들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도대체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와서 보아라” 그날 저녁 우리는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이렇게 접근해 보기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와서 보”는 일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비전과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지 세밀하게 듣고 증거하는 선교의 여정을 보내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2.     Love Never Ends

 

둘째 날 우리는 다시 파시피꼬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교사님과 교인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과 상의하여 행사를 계획대로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받은 아이와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앞으로도 교회의 존속을 바라는 교인들과 매년 우리를 기다리던 아이들의 바램을 생각하며, 간단히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인사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비록 일정은 어긋나 버렸지만,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뛰놀며 우리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와서 본”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처음 단기선교를 떠난 조주현, 권혜윤, 이현민 자매들은 이 때까지도 긴 여행에 지친 데다가 변경된 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멕시코의 현지 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열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 하다가 이내 가까워져서 언어와 국경의 벽을 넘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의 유대를 재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일체감을 느끼는 귀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록 상처를 받은 가족들도 그 가운데 있었지만,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살아야 할 교회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뛰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피해 아동도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노는 모습이 더욱 안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를 보며 부모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뛰노는 아이들과 함께 기뻐하면서도, 속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책임자로 간 저로서는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향후의 일정과 계획, 그리고 전반적인 우리 교회의 선교 사역에 대한 방향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를 생각하니 더욱 머리 속이 복잡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파시피꼬 교회의 한 여성 교인이 제 손을 붙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몇 년 동안 우리의 사역과 함께 했던 할머니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제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부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비록 1년에 한 번 뿐이지만, 이 지역을 찾아오는 우리를 통해 아이들이 큰 기쁨을 얻는다고 합니다. 더불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교회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마음 속으로 형제 자매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던 우리 마저 자신들을 홀로 내버려 두고 떠나 버리면 어떻게 할지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아쉬운 파시피꼬 교인들과의 짧은 일정을 뒤로 하고 돌아와, 그날 우리는 두번째 본문의 말씀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어 번역에는 ‘Love never ends’ ‘Love never fails’ ‘Love never leaves alone’ 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랑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사랑은 홀로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변하고 쉽게 떨어져 버리고, 또 쉽게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군가를 홀로 버려 두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여전히 “도대체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신 것일까?”를 고민하던 우리에게는 참 단비와도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사역의 여정을 온전히 주님의 뜻에 맡기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3.     구하고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파시피꼬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우리는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이 있는지를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매년 단기 선교팀이 방문하여 여름성경학교를 열어주던 현지 교회에 금년에는 방문이 어려워 재정과 인력 문제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이름은 Vida Nueva 새 생명교회로 티후와나에서 약 2시간 30분 정도 더 남쪽 방향에 위치한 앤세나다Encenada 라는 지역의 작은 현지인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앤세나다 지역을 선교하시던 한국인 선교사 부부에 의해 세워진 멕시코 교회입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하여 짐을 푼 곳도 바로 한국인 선교사님이 섬기는 사랑 선교회 Amor Mission라는 센터였습니다. 4년 전에 암으로 선교사님은 이미 소천하시었고, 이제 일흔을 앞두고 계신 사모님 홀로 남아 유업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너무나도 따뜻한 환대를 해주셨습니다. 근 20년 동안 앤세나다 지역에서 선교를 통해 교회를 세우고 지역 주민을 돕는 사역을 훌륭히 해오셨다는 이야기를 조 선교사님으로 이미 들었지만, 방문해서 본 센터의 사역은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을 변화시켜서 갱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교회에 거처를 마련하고 양육하는 사역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방문한 날이 수요일이라 그날 저녁 우리는 현지 교인들과 재활 갱생 프로그램 입소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예배에는 우리 이외에도 미국 백인 교회의 집짓기 선교 단체 일행도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세개의 언어, 민족, 그리고 배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센터의 이름대로 사랑이라는 끈이 우리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센터에서 머무는 이틀간 우리는 이 사랑의 끈을 통해 Vida Nueva 교회의 어린아이들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새생명 교회인 이 현지인 교회는 서 선교사님의 제자인 오스카라는 멕시코 목사님이 담임을 하고 계십니다. 이 지역은 파시피꼬와는 달리 전형적인 농촌 지역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낮에는 아이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된 여름성경학교는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예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함께 뛰노는 놀이터였던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작하려면 아직 3시간이나 남아있는 이른 시각에 이미 아이들은 교회 예배당 안에 들어와 성경학교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들뜬 아이들 틈 바구니에서 아주 특별한 한 아이가 우리 선교팀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멜리나Melina’라는 6살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멜리나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손에는 4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다른 한 손에는 그 작은 어깨에 매달린 2살짜리 남동생을 안고 있었습니다. 동생들은 낯선 이들과 친구들 앞에서 한 순간도 멜리나의 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멜리나의 발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맨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마도 거의 신발을 신어 보지 않은 굳은 살이 배긴 발이었습니다. 여섯 살 난 맨발의 아이가 동생들을 끌어안고 여름성경학교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잠시 할말을 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님에게 들어보니, 멜리나의 식구들은 멕시코인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에 속한 원주민 인디오들로 농장의 일을 구하기 위해 좀 더 큰 지역인 앤세나다로 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도 스페인어가 아닌 인디오 말을 써서 사실 타언어권에서 온 우리 만큼이나 낯선 상황이었던 겁니다. 유난스럽게도 주의를 경계하고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자매들은 특별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며 보살펴 주었고, 혜윤이는 어느새 자기가 신고 온 신발을 벗어 아이에게 벗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그 슬리퍼를 멜리나는 다음 날도 신고 왔습니다.

함께 마음을 열어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율동과 찬양으로 경계는 어느새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언어라는 장벽을 뛰어 넘어 우리는 그렇게 한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함께 뛰놀며 자연스럽게 생긴 정을 떼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교회를 떠나기 전, 교회의 담임 목사인 오스카 목사님은 눈물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놀랍고 오묘합니다. 우리의 기대와 계획을 넘어서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를 뜻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알 수 없는 인도하심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역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도대체 왜?”라고 물었던 우리의 질문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하나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위하여 우리를 이곳까지 부르셨구나’ 라고 말이지요.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을 함께 나누며 일정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는 주님의 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처음 우리가 던졌던 바로 그 질문 “도대체”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자 지금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해 신앙적으로 헤매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도대체 어디에 계신지 조차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와서 보라는 말씀을 듣고도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늘 구하고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신앙의 “도대체”에 대한 응답을 위해 구하고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신앙의 열정과 진정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교를 다녀 오면서 우리는 와서 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본 것을 여러 성도님들과 앞으로 계속해서 증거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의 힘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저 한 번의 일회성을 그치는 한 여름밤의 꿈 같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에 여러분 스스로가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구하고 찾으십시오. 그리고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한 것을 얻고 찾으며, 문이 열리는 역사가 여러분의 삶과 여정 속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앞으로의 선교 열정을 위해서도 이 질문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금번 선교를 위해 함께한 일행들과 이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며 동역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간절한 열망을 통해 멕시코의 어린 아이들과 교회에 희망의 빛이 조금씩 더 선명하게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던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확증할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창세기 25: 24-34, 마태복음 13: 3-9

 

최근 바티칸 교황청에서 각 교회의 성찬 예식에 사용되는 빵과 와인에 대한 전통적 규정을 재차 확인하는 판결을 내놓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글루텐 프리(gluten-free) 빵과 자연산 포도주가 아닌 제품은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로 판결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글루텐이 함유된 빵이나 음식을 피하려 하고, 와인도 다양한 제품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엄격한 규제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는데, 결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해서, 성찬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이 성찬예식에서 받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주님을 기념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변화되는 세상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신념을 고수해야 한다는 카톨릭 교회의 원칙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사회의 변화와 흐름에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신교의 입장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만도 없습니다. 맞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쉽게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연약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상징적 의미와 내용만을 강조하다 보니 점차 성찬식 자체를 경시 여기는 듯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형식에 대한 경시가 때로는 내용에 대한 의미도 점차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보아왔습니다.

먹는 것과 관련해서 지난 주 한국에서도 관심을 끄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학교 급식노동자들을 가리켜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고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은 아마도 천직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 못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급식 노동자들을 직업적으로 하대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더불어 누구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밥을 먹이기 위해 노동하는 이 땅의 아줌마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판단해 버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혹자는 밥을 먹기 위해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 할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밥입니다. 하물며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그들이 먹어야 할 밥짓는 수고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밥 문제를 마음대로 저울질 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밥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변화된 현실 조건과는 상관없이 성찬에 대한 교회의 원칙을 고수하는 문제나 밥 먹는 일에도 분명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을 접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됩니다. 바로 ‘먹는 것에도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기준이 있어야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유대의 율법처럼 먹는 것에도 철저한 규정이 존재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일정한 범위라도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셈입니다. 도대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옳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는 단순히 생존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삶의 목적과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무엇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두 개의 서로 다른 본문 이야기를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할 때마다, 비유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곤 했습니다. 그 이유를 마태복음 13장13절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영적으로 무감각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숨은 보화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바로 믿음의 태만에서 찾으셨습니다. 두드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조차 얻고자 하는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은혜를 주어도 은혜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불행한 모습과 같은 것이지요. 사람들이 그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만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한가’ 라는 한탄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정말 먹고 마셔야 할 생명의 양식은 구하지 않고, 당장 눈 앞의 문제에만 급급한 현실의 상황을 예수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겁니다.

생명의 양식의 중요성에 대해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조차 육신의 삶이란 분명 유한하고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알면서도 깨닫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모순도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교인은 될 수 있어도 아직 제자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되고 싶은데,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똑같은 논리입니다. 구원은 좋은데 희생과 헌신의 신앙생활은 불편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아들이 누리는 특권은 갖고 싶어도 이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과 책임은 지기 싫은 것이지요. 눈 앞의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버릴 만큼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 에서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사실 맏아들(어원: 비코르 בְּכוֹר)은 어원의 의미처럼 첫 열매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첫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것이니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결국 맏아들의 권리는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은혜와 더불어 마땅히 하나님께 속한 자녀 답게 자신을 살아있는 영적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결단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맏아들의 권리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향해 던지는 문제제기가 이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을까?” 라는 질문에 관해 교회가 세상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것 조차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세상처럼 성장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현실적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결코 거룩한 신앙공동체로서의 변별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빵과 와인을 두고 벌이는 논쟁 조차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여전히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삶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산 오가닉 빵과 와인에 대한 집착은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더 멀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리에 대한 위배나 신성 모독이라는 말이 생존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딴 세상의 소리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배고프고 갈급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러한 논쟁은 그다지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무엇을 먹고 마실까의 신학적 논쟁 이전에 지금도 여전히 밥의 문제로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먼저 염려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참 생명과 진리로 우리의 영을 채우고자 했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 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성찬에 대한 논쟁과 달리 많은 개신 교회는 요즘 예배의 형식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고 근사한 예배의 모습이라 해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우리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과연 이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도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익숙한 농사의 기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농경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여러 작물을 수확하기 위한 윤작을 하지 않아서, 하나의 작물을 거둔 뒤에 밭을 완전히 일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결과 원래의 밭 안에 길바닥도 나있고 돌밭과 가시덤불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이 꼭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흡사하다고 보셨던 겁니다. 밭 사이를 거닐다가 우연히 생겨난 길바닥이나 잘 돌보지 않아 일어난 돌밭과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게 변화무쌍하다는 것이지요.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평탄할 수만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여러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요? 그러다 보니 씨앗이 자라나기에 좋은 토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단단한 부분도 늘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가꾸는 노력이 없이 있는 그대로 두게 되면 때로는 씨 뿌리는 결실을 맺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주어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나서 회피해 버리거나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뿌리는 자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이를 받아야 할 개인들에게 자신의 마음 밭을 가꾸라고 하신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다양하게 생겨날 수 있는 현실의 조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 뿌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믿음이라는 토양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좋은 토양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달리 표현하면, 바로 맏아들의 권리를 얻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격을 갖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축복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에 걸맞는 자녀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배가 고파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을 보는 시선도 변화됩니다. 세상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내 밥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밥그릇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에서 우리의 영을 살찌우는 변화가 일어난 결과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나 혼자만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는 모습을 벗어나, 더불어 함께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며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좋은 토양을 가꾸어 갈 수 있기를 소방합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맏아들의 권리를 다 행사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태복음 11: 16-20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인 요한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 이후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당시 세대를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의 모습을 장터에서 이루어지던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이들의 놀이 중에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편에서 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장례 때의 곡을 하면 슬픈 연기를 하며 노는 게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시장바닥에서 편 갈라 노는 아이들처럼 당시의 세태가 예수님의 눈에는 편이 나뉘어진 갈등 상황으로 비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와 ‘너희’로 갈라져서 서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을 일삼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일침을 놓고자 한 것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3장5-6절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등장과 수많은 기적의 역사는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유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좋게 바라볼 리 만무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이야기와는 모순된 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와 “너희”라는 구별과 대립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갈등 관계였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 세대’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특정한 유대의 종교 세력을 염두해 두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두를 뭉뚱그려 비판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며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마23:2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라며 강한 질책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부정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신 첫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예비하며 길을 준비 했던 세례 요한도 늘 그 날이 멀지 않았으니 회개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시대의 아픔에도 전혀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을 “미친 사람” 처럼 취급했습니다. 그가 암울한 세대를 통곡하며 절규하는데, 자신과는 다른 행색과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적하며 그의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낮고 낮은 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을 향해서는 격이 떨어진다며 비난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했던 것이지요.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하고자 했던 예수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다는 것일까요?

결국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자기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외부자일 뿐만 아니라 공공의 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마치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군과 적군의 구별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이 그렇게 서로 편이 갈라져 갈등의 대치 상황 속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까닭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또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던지신 화두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뜻과 방식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에는 Pax Romana라고 해서 평화의 시대라고 믿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Pax Americana 라고 하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Pax의 번역을 “평화”라고 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은 “평정”이 더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방식과 생각 속에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일 때를 마치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온 것처럼 착각한 것이지요. 차라리 이럴 때 “우리”와 “너희”의 구분이 없는 “가(pseudo)평화”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바꾸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참된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어려서 부모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는 커다란 문제가 없는데, 막상 자식이 성장하면서 자기 생각이 뚜렷해 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갈등이 생겨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생면 부지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견해가 맞부딪히거나 이해 갈등이 발생할 때는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 사이에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여,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갖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신앙생활도 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이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 (롬 8:28)’는 말을 한 것은 모두가 동일한 생각과 방식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보편적이면서도 거룩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에 더 가까운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입니다. 좌우와 고저의 구별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다’ 안에 포함된다는 ‘무작위’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의 본래 의미대로 세상과는 구별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별없이 사람들을 포용하되, 세상과는 차별화되는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교회는 그 한 일로 입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교회는 다른 이들을 구별짓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때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곳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서부지역 목회자 수양회로 아리조나에 있는 나바호 인디언(Native American Indian)보호구역을 다녀왔습니다. 그 지역에서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님을 통해 인디언들의 열악한 현실과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구별없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1년간의 선교를 통해 나바호 인디언들과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간증을 들을 때에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사역하는 교회에서 이제 한국 이름이 아니라  “Yá'át'ééh Shiyáázh (사랑하는 내 아들아)” 라는 인디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떠난 인디언 선교사에서 이제는 그들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지요. 다른 나바호 부족들도 선교사님을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 말로 친구란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어 준 진실된 친구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개별화된 세상을 걱정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삭막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너희’가 뚜렷이 구별되고, 그 골도 깊어져서 함께 어우러져 산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도 “사랑하는 내 아들아”이라고 불러 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좋은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세대는 훗날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이 세대를 과연 무엇에 견주셨을까요? 바라기는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하는 내 아들”로 부름 받은 거룩한 성회가 되어 슬퍼하는 세상과 함께 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