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창세기 17: 15-21, 마가복음 8: 31-34

 

오늘로 지난 2월 9일부터 시작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선수들이 15개 분야의 여러 세부 종목에 걸쳐서 자신의 이름과 국가를 대표하여 최선의 경쟁을 벌인 지구촌 축제의 장이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지요. 특별히 금번 올림픽은 우리 고국에서 주최된 까닭에 해외 동포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차가 있어 경기를 중계방송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저 역시 마음 속으로 함께 응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동계 올림픽이라 그런지 몇몇 종목을 빼놓고는 사실 저에게는 생소한 경기가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계올림픽에 참여하여 메달을 따는 국가는 모두가 지구의 북반구에 자리잡은 나라들입니다. 특히 유럽의 백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몇몇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경쟁하고 있는 정도이지요. 한마디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들 위주의 대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 올림픽의 정신은 경쟁이 아닌 상생과 평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국가는 참여하기도 어렵고, 참가한다 해도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아마추어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올림픽의 뒤에서는 국가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이권 쟁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림픽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것은 경쟁과 이권쟁탈의  논란 속에서도 상생과 평화의 정신을 굳건하게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 스피드 스케이트 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인 한국과 일본의 두 선수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은 퇴색되어가는 올림픽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워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오랜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깊이 패인 감정의 골때문에 국민적 정서는 좋을리 없지만, 이를 넘어서 상생과 평화라는 올림픽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두 선수의 우정은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배려와 상생의 길을 통해서 말이지요.

특별히 금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북이 단합을 모색하는 화해의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적 적대관계를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를 찾고자 대화와 교류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평화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선제타격과 같은 군사적 방식을 통해 무력으로라도 제압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가지고 올 엄청난 재앙과 생명 손실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듯한 주장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쟁은 차치하고, 이러한 호전적인 대응과 강경한 태도에 대해 저는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무력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고 말이지요.

올림픽의 정신처럼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구절이 오늘 신약의 본문인 마가복음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따라 사는 제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부인해야 할 자기는 다른 말로 사람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거워도 짊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성경본문인 창세기의 말씀은 이러한 구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전인 13년 전에, 그러니까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 훨씬 이전에도 똑같은 약속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하늘의 별처럼 그를 통해 온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민족은 고사하고 당장 자신의 유산을 물려 줄 자식 하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인 사라는 몸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갖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비록 정실의 자식은 아니더라도 분명 아브라함의 피가 섞인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얼마 안 가 분쟁의 불씨가 됩니다. 언약의 말씀대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되자, 이복 형제간의 불가피한 갈등이 시작된 겁니다.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말그대로 천덕꾸러기가 되고, 아들을 둘러싸고 가족들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4장 23절을 보면, 이스마엘을 육신의 자녀라고 하면서, 이삭은 언약의 자녀라고 구별하여 정의내린 구절이 있습니다. 대놓고 두 명의 아들을 차별한 것이지요.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억울할 만한 일입니다. 대대로 자신의 이름이 이삭과 대비되어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납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본처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제를 삼는다면 그 대상이 왜 이스마엘이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문제를 만든 장본인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이니,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바울도 이스마엘과 이삭을 각각 육신의 자녀와 언약의 자녀로 구별한 이유가 윤리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육신의 아들과 언약의 아들이라는 구분은 사람이 아니라, 아들을 얻게 된 방식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육신의 나이가 백세가 다 된 아브라함과 이미 아흔이 넘은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의 방식으로 아이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자기방식대로 해석해 버린 결과입니다. 일은 사람의 방식으로 처리해 놓고, 모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을 얻는 과정은 철저히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였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삭은 말 그대로 언약의 성취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오랜 기다림이라는 인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삭을 언약의 자녀로 부른 것은 그가 이스마엘과는 다른 인격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삭의 탄생 자체가 바로 사람의 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우리 맘대로 차별하여 보려는 시선 자체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과 아랍계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차별과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보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민족을 구별짓고 분쟁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삭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따르는 신앙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시고 이를 소중히 여기셔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일처럼 분쟁과 갈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복을 이삭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도 허락하신 하나님입니다. 특별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메달을 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선수들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의 진정한 의미는 경쟁에서 승리한 몇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상생과 평화를 나누는 축제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했어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열정과 경쟁이 끝난 뒤 서로의 노고를 함께 치하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그 마음이야 말로 올림픽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의 우위와 승리가 목표가 된 오늘의 현실은 어쩌면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다른 수많은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경쟁에서 뒤진 패배자와 낙오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희생자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스마엘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차별시켜도 좋을 대상. 때로는 공격을 통해 제압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만큼 증오의 대상. 차라리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믿는 쓸모 없는 존재로 말이지요.

지난 주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사고로 17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기 관련 사고로 인한 피해는 더 이상 미국사회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이 직접 총기규제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어른들의 결정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항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지난 주 학생 대표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주장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내놓은 해결책이  선생님들을 총으로 무장시키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총기를 손에 쥐게 해서 총기로 인한 사고를 막자는 이야기 입니다. 총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총기로 막아 보자는 생각. 혹 이것이야 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요? 상생과 배려의 가치 보다 적자생존의 경쟁가치가 우세하고,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평화와 화해의 방식 보다는 당장 눈 앞에서 해결해 보고 말자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과연 이 시대에 우리가 무겁고 힘들어도 짊어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 곧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눈물의 힘

창세기 9:8-17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홍수 사건의 결말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홍수를 통해 온 인류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다는 부분에 관한 신학적 질문은 물론이고, 과연 그것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사실여부의 논쟁도 그 논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창조과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는 사실이 믿음에 대한 확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확인시켜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고 싶다는 충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 자체가 믿음의 부족에서 오는 조급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하려 드는 우리들의 조급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풍부하면서도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벽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학적 상상력을 완전히 막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홍수 사건을 인류에 대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를 조금만 고민해 보면, 과연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혹은 정반대로 노아와 그 가족만이 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벌하시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하신 심판이라고 한다면 뭐라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을 아무 질문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다른 재앙이나 사건에도 적용시켜 버리면 금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연적 재앙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하나님의 당연한 심판의 결과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피해자가 된 무고한 생명들에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른 것이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 근거를 믿음에서 찾는다면, 과연 누가 그 믿음을 정당한 것이라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실제로 노아홍수 이야기와 관련된 창세기 6-9장의 말씀을 보면, 홍수로 인한 심판의 기록은 아주 간략하게만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창 7:21-24). 오히려 말씀의 대부분은 심판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방주의 제작과정과 홍수 이후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하는 핵심은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구원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체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체벌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사랑이 중요한 테마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종말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에 이루어질 심판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종말이나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언의 핵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언의 말씀을 통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믿음 안에서 변화된 이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생명의 언약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종말의 예언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소망 안에서 믿음의 중심을 세워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의 사건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 홍수 사건 이후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것도 어떠한 조건을  붙이지 아니하고 맺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어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비록 홍수로 인한 심판은 죄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조건을 달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삶의 여러가지 재난과 고통이 마치 대홍수로 인한 심판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알 수 없는 삶의 다양한 불행과 아픔을 당할 때마다 우리도 그 이유를 먼저 잘못된 세상의 불의나 자기 자신의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응징이나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방주를 만들어 예비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의 중심을 제대로 세워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맞이하도록 인도하고 계신 것이지요.

물론 우리 삶에 대홍수와 같이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재난이 불어 닥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홍수의 사건도 처벌과 심판의 재앙으로만 보이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시선을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굳은 약속을 다시 해 주셨습니다. 결코 홍수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이는 우리 삶에 전혀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다만 알 수 없이 불어닥친 삶의 고통을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듯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홍수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심판의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향해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 것이지요. 어릴 적 말을 듣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 보니 제가 독한 구석이 있어서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눈물 한방울 조차 흘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린 맘에도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잘못을 했어도 매를 맞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인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눈물을 흘린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매를 맞고 잠든 아들을 보니까, 그게 더 안쓰러우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도 말 안듣고 끝까지 버티는 아들에게 막상 회초리를 들었지만, 맞아서 상처가 난 다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는 겁니다. 아들의 다리만이 아니라 사실은 어머니의 마음에도 상처가 난 것이지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자는 줄 알았던 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때 비로소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용서를 구하며 울더라는 겁니다. 회초리는 맞으면서도 버티던 녀석이 어머니의 눈물에는 금방 손을 들고 만 것이지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서도 주인공의 심장에 박혀 얼음같이 차가와진 사람으로 만든 거울 파편을 녹여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눈물, 그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살리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의 힘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회초리 이전에, 사실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도 바로 그 홍수의 사건을 하나님의 눈물로 기억하는 우리의 믿음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은 점차 눈물이 마르고 있는 시대라고 합니다. 으레 눈물바다가 되던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쿨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니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밀가룩 범벅을 만들고 옷을 찢는 폭력적 행위가 더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헌데 눈물의 의미를 잊고 지내는 세대가 안게 될 역설적인 모순은 결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눈물은 피눈물과 같은 고통의 눈물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 곧 홍수의 의미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 곧 십자가의 보혈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눈물의 힘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었음을 재확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한 변화

마가복음 9:2-8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산상변모주일로 지킵니다. 오늘을 지나면 돌아오는 재의 수요일로부터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사순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지난 주까지는 주현절이라고 불렀는데, 교회력은 주현과 변모, 그리고 수난이라는 진행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의 전통은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도 우리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와 함께 우리 자신의 신앙 여정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먼저 주현(epiphany)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직접 자신을 보여주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역사적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변모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산에 오르신 뒤에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신 사건이 바로 변모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실제 변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뀐 것 뿐입니다. 결국 변모사건의 핵심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변화에 있다는 말입니다.

변모 사건 이후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여정은 사순절이 의미하듯 고난의 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매우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알고 시선이 변화되는 것은 어쩌면 이후의 영적 성화의 과정에 비하면 쉬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의 고백으로만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씨앗이면서 동시에 맺어야 할 열매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제자의 길은 참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변화의 과정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대략 세가지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살겠다는 결단의 의미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부활의 생명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영적인 변화는 날마다 새로와 지려는 믿음의 결단과 소망 그리고 이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거룩한 변화는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통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갑작스럽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생각같아서는 예수님처럼 짠하고 한 번에 거룩하게 변화되면 좋겠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과 내려놓음, 그리고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다가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랑할 것도 못되고, 마치 정복할 수 있는 목표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한 여 검사가 법무부 핵심 선배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를 하여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미투(Me Too)” 운동을 한국사회에 촉발시킨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을만큼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피해자인 여검사가 성추행을 당하고서도 8년 동안이나, 조직의 보복과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하여 숨겼던 일을 밖으로 폭로하는 데에는 하나의 비디오 영상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추행 검사의 간증 영상이었습니다. 문제의 성추행 검사는 작년 10월에 한국의 한 대형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며, 세례받은 이들 중에서 대표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50여 년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늦게라도 주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는 고백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내용은 그가 자신을 공직자로서 늘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 대목이었습니다. 이제 세례를 받고 주님이 이러한 억울함을 다 이겨낼 수 있는 위로와 힘을 주셨다는 간증을 한 것이지요.

결국 지난 8년 동안 성추행으로 인한 고통을 억누르며 참아오던 여 검사에게 이 장면은 견딜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는 마치 모든 죄과를 씻어 낸 사람처럼 말하고 있으니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여 검사가 침묵을 깨뜨리고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된 것이지요.

몇 해전 “밀양”이라는 한국 영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일이 있었습니다. 살인자가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세례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문제의 장면이 그것입니다. 피해자는 여전히 8년이라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마치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 씻김 받았다고 자평하는 가해자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혹 가해자인 그 검사도 세례와 함께 스스로 산상에서 변화하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화되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저도 비슷한 착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안수를 받을 때였는데, 저는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 제 주변에 아우라라도 생겨날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거룩해 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는 세례나 회개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나 회개는 변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두가지의 과정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례나 회개를 통해 나타나는 첫번째 변화는 자기 중심적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시선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삶의 전향을 고백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게 되는 이 순간에 우리는 거듭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고 배워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는 바로 그 다음에 나타납니다. 세례를 받고 회개를 하는 순간이 결코 구원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이라는 선물을 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사랑의 종착점이 아니라 이제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교인이 다 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인다와야 진짜 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증은 성화된 삶을 통하여 구원 받은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증을 통해 보여준 가해자 검사의 신앙고백은 아직 미완성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변화된 자로써 용서를 구하고 잘못에 대해 응당 책임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변화를 향해 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 거룩한 변화의 과정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신앙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이미 그 변화의 첫 발걸음을 뗀 분들입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온 믿음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예배는 제 설교나 찬양단과 성가대의 찬양을 듣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거룩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기 위해 모인 이 예배의 처소가 바로 우리의 변화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변화는 단지 이 예배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찬양, 섬김과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화를 우리 삶 속에서 함께 실현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생각과 태도, 말과 행동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겉사람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속사람까지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때로는 죽을 듯 힘든 길이지만, 그것만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서 희망의 내일을 맞이하는 거룩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와지는 믿음의 확신과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사람 낚는 요나

요나 3:1-5, 마가복음 1:14-20

 

새해를 맞이하여 목회 계획을 점검하면서, 개인적으로 요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사명이라는 것에 적극 동감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구원과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양육하는 개인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눈에 띠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조바심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만을 놓고 보더라도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가 먼저 해야할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되물어 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과연 한 영혼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행여 교회의 사역자가 담임목사의 목회에 일방적인 도구가 되어 버리고, 교인들도 교회의 행정적인 업무나 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반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 수입이 증가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되어버린 비정상적인 상황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도 변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되짚어 보기 위해서 입니다. 행여 교회를 생각한다며, 정작 교인 하나하나의 삶에 대해서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부족한 자신의 연약함과 무관심을 탓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대형교회의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가 “주의 종에 대적하면 하나님이 치워버리신다”는 말씀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이지만,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생각해 보면 거의 공갈 협박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에게 대들면 없던 병도 생기고 삶에 어려움이 닥친다는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목사가 더 기도하지 못하고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목사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도 교회의 역할을 온전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목사가 곧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교회를 사유화하거나 교인들을 도구화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전에 전도사님 중 한 분이 저에게 “교회가 나서서 좀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데, 저는 지금도 그 교회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속으로 생각하며 교회를 말한 것 아닌가 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교회론에 대해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헷갈릴 만큼, 우리는 실제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매우 불확실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교회란 정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란 결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예배당, 그리고 예배와 교회 사역에 필요한 도구를 제외하면, 교회는 단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적 의미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 어떠한 정의를 통해서만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문제의 소지가 있는 교회를 교회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교회에 대한 일정한 정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하튼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 개념적 정의’를 과연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신약의 복음서 말씀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던 예수께서 그물질 하던 어부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이를 하던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곧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소명에 관한 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도를 이야기할 때마다 “따른다”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말뜻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가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가 되는 목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사람 낚는 어부”는 고기 낚는 어부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까지 제자들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물질의 목적이 바로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반면에 사람을 낚는 어부는 그물질의 목적을 사람에 두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도 결국은 그 목적을 사람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세나 건물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나 일 중심의 교회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인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지키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명 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교회가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생명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나누기 위해 각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주셨을 때,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배에 남겨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여기서 그물을 버렸다는 말은 어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겨두고 떠난 배는 소유한 재산과 삶의 터전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며, 그곳에 아버지마저 남겨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사사로운 인간관계 마저도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두고 길을 떠났던 아브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결국 제자가 되는 길, 혹은 바꾸어 표현하자면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는 첫 출발은 바로 버리고 내려놓는 ‘포기’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바로 교회와 제자를 정의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선택은 그 외 다른 것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나서고자 하는 선택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여기던 것들을 포기해야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기독교 신앙을 “떠남”이나 “내려놓음”의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의 말씀처럼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예수께서 하신 첫 선포의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다른 말로 포기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래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어’는 옳은 선택을 위해 잘못된 부분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제자의 자세를 바로 포기에서 찾으신 것이지요. 복음을 따라서 구원을 갈망하며 모이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회개라는 포기의 행위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제자가 된다는 것 혹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춘다는 말의 의미는 더이상 물고기를 목적으로 삼는 삶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목적으로 하는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회개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바로 구약에 등장하는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적국의 심장부인 니느웨로 들어가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너무 겁이 나고 마음도 내키지도 않아서 가라는 곳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서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기 위해 물고기를 포기했는데, 요나는 오히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욕망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요나의 신세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해 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신세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고 그 끝은 결국 멸망 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지요. 이후 그는 물고기의 배에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위한 고기잡이, 물질 숭배와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이 지배하는 세상을 포기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이 자리도 요나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과 부르심으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제자로 부르신 겁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시대의 또다른 요나로 우리 모두를 부르신 것이지요. 사람 낚는 요나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