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의미

마태복음 22:34-40

 

제가 지금도 매일 아침마다 사용하는 빗이 하나 있습니다. 초록색에 손잡이 부분에는 원래 인어공주의 그림이 새겨 있던 장난감처럼 생긴 빗입니다. 거울이랑 한 세트로 만화영화의 주인공인 인어공주 브랜드 제품입니다. 딸아이가 어릴 때 선물로 사준 것인데, 놀다가 흥미를 잃고 내버려둔 것을 우연치 않게 발견한 뒤로 그 때부터 제가 머리 빗는 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인형의 머리를 빗겨주거나 인어공주를 상상하며 자기 머리를 손질하는 여자아이들 장난감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제 머리빗을 보면 한없이 우스운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몇 년을 그걸로 빗다보니 지금도 어딜 갈 때는 어김없이 그 빗을 챙겨서 다닐만큼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는 그 빗이 너무 손에 익어서 다른 것으로 머리를 빗는 게 어색해질 정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그 빗이 아니면 머리가 잘 정돈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용하게 된 것이었는데, 결국은 또다른 형태의 고정관념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다른 제품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익숙해진 빗과 비교하면서 틀린 점을 자꾸만 부각시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정관념과 이를 통해 생겨나는 편견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주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진 유대사회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본문과 같은 장에 언급된 바로 앞 사건들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던진 의도적인 질문들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가려는 모략이었던 셈입니다. 앞의 난감한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하시던 예수님에게 이번에는 율법교사 중 하나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수많은 율법의 계명 중 어느 것이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인가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율법교사가 그렇게 질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실제로 당시 율법을 맹신했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거의 무력화시키는 듯한 언행을 일삼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먹은 일이나 손에 장애를 앓고 있는 병자를 직접 고치신 모습은 율법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안식일의 규정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여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을 맹신하던 유대인들에게 편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비뚤어진 시선은 그의 출신배경에 대한 유대의 고정관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우리는 당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존경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처음 예수님을 소개받은 뒤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며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역과 직업, 그리고 출신배경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유대 율법의 전통 하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이단아’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통신앙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느냐며 사실상 도전을 해 온 것이지요. 내심 “네가 율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지” 라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뭣도 모르는 게 설친다’는 편견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심중을 이미 꿰뚫고 계신 예수께서 유대의 율법주의가 그토록 강조하는 율법을 매우 단순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오직 한 분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너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과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율법의 조항은 이 두 계명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의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계명이요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헌법적 가치가 모든 법령의 효력을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진정 율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으뜸 계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계명과 규칙에 능통한 율법 교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선과 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율법의 계명을 가르치면서 사랑을 율법이라는 씨앗으로부터 나온 새싹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싹을 세상 속에 틔우기 위해서는 씨앗인 율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이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자신들과 다르게 접근하는 예수님에 대해 율법학자들이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원칙적으로 예수님도 율법에 대해 틀리다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부정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씨앗이라는 율법의 성격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더 강조하신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씨앗도 중요하지만, 결국 씨앗은 열매를 맺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 보셨던 겁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버려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열매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셨던 겁니다. 사랑이라는 실천이 없다면 율법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어버릴 씨앗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는 당연히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입장을 달리 표현하여, 당시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치 500년전 중세 카톨릭 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의 역사처럼 말이지요.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 수긍이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개혁이라는 우리말은  한자로 고칠 개(改), 가죽 혁(革)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고치거나 바로 잡아서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개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자권 문화에서는 고쳐나가야 할 대상을 굳이 가죽이라는 말에서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革’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고서에 따르면 ‘革’이라는 말은 짐승의 가죽에서 그 털을 다듬어 없애는 과정을 뜻합니다. 털을 없애는 것은 그 본래의 쓰임새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을 적용해 보면 결국 개혁은 단순히 고치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어떠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원래의 형태나 성질 혹은 기능에서 벗어난 부분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당시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개혁이라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그것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완성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회복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래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 원리를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주일이기도 합니다. 500년전 교회가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부정부패에 빠져 있을 때,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생명의 삶이 무엇인가를 되찾기 위해 개혁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5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또다른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삶이 아닌, 자기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오히려 목소리가 커져 가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으뜸 계명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장 우선해야 할 개혁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이 주신 제일 으뜸 계명의 핵심을 깨닫고 개혁의 순례에 모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릎꿇기

마태복음 22:15-22

 

최근 미국프로풋볼협회(NFL)는 경기에 앞서 진행되는 국민의례에서 선수들의 기립을 강제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발표하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이러한 행위는 위대한 조국에 대한 완전한 무례(total disrespect)"라는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중적 스포츠에서의 행위가 정치적 논란이 된 것은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49ers 팀의 쿼터백이던 콜린 캐퍼닉이라는 선수가 경찰의 흑인 과잉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경기 전 국가가 울려퍼질 때 기립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캐퍼닉은 흑인을 비롯해 소수 인종을 억압하는 국가는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기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논란의 불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는 한 연설에서 국민의례 때 기립하지 않는 선수는 퇴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무릎 꿇기'가 반(反) 트럼프 시위로 확산되며 수백 명의 선수들이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논란이 가중되자 트럼프는 강력한 제재안을 축구협회에 내놓습니다. 비영리단체인 협회에 세금을 부가하겠다는 일종의 으름장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지난 11일 협회는 대통령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선수들이 국민의례 때 기립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지만 선수들은 무릎 꿇기를 금지할 경우 또 다른 방법을 찾아 계속 항의할 것이라며 반발했습니다. 여론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재에 앞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근본적 원인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선수들의 행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주 수요일인 18일 협회는 일주일 만에 결정을 번복하며 선수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발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뉴스보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하며, 처음 이 사건의 발단이 된 당사자인 캐퍼닉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무릎 꿇어야 할 대상은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국가가 아니라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단지 국가(Nation)를 상징하는 국가(National Anthem)나 국기(National Flag)에 대한 예의를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지요.  국가는 곧 국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상징은 노래나 깃발이 아니라 바로 사람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애국이란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당과 십자가라는 상징물이 교회를 나타내는 근본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 유럽의 교회는 아름다운 십자가로 수놓은 번듯한 예배당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문이 굳게 닫힌 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극장과 술집으로 운영되는 곳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예배당에서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하나되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곳은 더이상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유대의 회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회당은 죽은 무덤과 다름 없었습니다. 성전 건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사를 위한 희생제물이나 예배 도구가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나 제사장들도 버젓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무릎꿇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유대의 회당을 향해 더이상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장사의 소굴로 변해버렸다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그를 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라도 예수님을 로마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 제거해 버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통해 계략을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과 관련한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세금 자체로만 보면 크게 문제를 삼을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세금은 공동체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재정수입입니다. 특히 국가가 공적인 일을 수행하거나, 국민들의 공익을 위한 사업에 사용되는 중요한 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이 다루지 못하는 복지와 같은 사업에 사용함으로써 소득재분배의 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금의 쓰임새입니다. 세금의 의무가 아무리 강조가 되어도 자신들이 납부한 세금이 잘못 사용된다면 누가 세금을 내려 하겠습니까? 조세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지요.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도 세금의 의무가 부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납부한 자신들의 세금이 거의 모두 로마 황제에게로 가고, 일부만 유대사회를 위해 쓰인다는 것은 유대의 백성들에게는 세금납부를 꺼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싫어 했는지는 세금을 관리하는 세리를 죄인들과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미묘한 이슈가 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던 겁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은 것인가?”라는 다소 애매한 질문이었습니다.

대답을 해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실 난처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도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사상은 진보적인가 아니면 보수적인가를 대답해 보라든지, 목회자로서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밝혀보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아니오”로 흑백을 가리는 아주 단순한 질문들의 대부분은 실제 그 내용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입장을 통해 내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고 싶어서 질문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선택을 강요 받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컨대 다짜고짜 아이한테 너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것 자체가 결코 좋은 질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바리새인의 질문도 어느 한 편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대답을 의도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원하는 답을 주어 자기 편이 되든, 아니면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다른 편이 되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세금을 내라 하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대다수 백성들의 원성을 들을 것이고,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마라 하면 로마의 정책에 반대하는 소위 “운동권”으로 확실하게 낙인을 찍을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마치 이들의 의도를 꿰뚫고 계셨다는 듯이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답변을 하셨습니다. 동전에 누구의 얼굴이 있는가를 물으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예수께서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도록 이 말씀은 교회의 권력과 정치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실은 현실이고 이상은 그저 이상일 뿐이다 라는 매우 그럴듯한 궤변으로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수많은 백성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삶을 유린해 가면서 부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여도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정당성을 제공해 준 것처럼 둔갑해 버린 겁니다.

교회에서도 세금은 국가에 내고, 헌금은 교회에 내야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해석을 해서 실소를 낳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인적인 세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헌금도 낼 만큼 내야 천국 갈 수 있다며 면죄부를 판매하여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던 것이 바로 교회 역사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왜곡된 적용이야말로 바리새인들이 애초에 계획한 의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모습이 아닐까요? 결국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인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를 비롯해 오늘날 교회가 자신들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드는 계략에 마치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황제의 것이라 말씀하신 동전은 말 그대로 로마의 세금제도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공정한 세금 제도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 세금으로 내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동전의 이면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동전은 주조된 화폐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전을 주고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입니다. 돈의 가치도 인정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돈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 칭한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금은 필요한 정책이자 공동체를 움직이는 수단이니 인정되어야 합니다. 황제의 것이라 인정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세금 제도의 핵심은 돈 자체가 아니라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불공정한 세금이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유린하고 억압하는 제도는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할 대상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의례에 대한 맹종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위해 무릎 꿇을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듯이, 신앙도 교회의 겉 껍데기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위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종교개혁 500주년을 일주일 남긴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무릎 꿇어야 할 대상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버린 돌

마태복음 21:33-46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떨어져 느끼게 되는 외로움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프랑스 시인인 오르탕스 블루(Hortense Vlou)의 <사막>이라는 시를 보면, 이러한 외로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 너무 외로워 /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너무 외로워서 자기 발자국을 보았다는 시인의 표현은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발자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는 말은 결국 가장 큰 외로움은 자기 자신 조차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누군가 옆에 없다는 소외감 보다 더 큰 외로움은 바로 자기의 존재조차 느낄 수 없는 “실존의식의 부재” 혹은 “존재감의 상실”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존재감을 잃어버릴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까요? 한 조사에 따르면 사람이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함께 하는 공동체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때라고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에게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나 이웃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자신이 마음을 주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생각하는 경우에 당하는 상실감은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 이야기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집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어 맡기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당시 부유층들 가운데 많았던 일종의 “부재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주들이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수확기에 소작료를 받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관계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소출을 통해 자신의 몫을 받기 위해 종들을 대신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농부들은 주인의 몫을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거나 죽여 버립니다. 그러자 주인은 더 많은 수의 종들을 보내지요. 하지만 두 번째로 간 종 역시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주인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내보내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아들이라면 농부들도 어쩔 수 없이 원래대로 갚아야 할 몫을 순순히 건네줄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되묻는 내용입니다. 결국 너희가 그 주인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에 대응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바로 악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믿을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맡긴다는 것이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비유의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주님의 선지자들이며, 아들은 곧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 받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큰 핍박과 고통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불의를 향해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을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온갖 핍박과 박해를 가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 마저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간 것 아닙니까?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였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을 예루살렘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몬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농부들은 누구를 지칭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궁극적으로 맺게 될 다른 농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다 구체적인 상황은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마태가 복음을 기록하던 시점을 고려해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과 결부시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 초토화된 사건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서 독립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도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로 인해 유대사회와 유대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성전을 기점으로 유대 사회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지키던 제사장 중심의 종교권력이 힘을 잃어버리고, 대신 바리새파 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이전의 유대교에서 핵심이 되었던 성전과 제사장 중심의 위계 구조와는 달리 율법에 대한 강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모세 오경과 할례 및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준수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유대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다시 행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방인 교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의 그리스도인과는 달리 이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구태여 유대민족의 율법 전통에 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는 물론 유대의 교회와 이방 교회 간에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됩니다. 실상 그 때까지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지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이익이 될만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유대교의 요구에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따르기로 하였지만, 이방 교회는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만 충실하기로 결정합니다. 주어진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역사가 증명하는 결과는 그 이상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명맥을 유지하여 오늘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의 전통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얽매인 유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방 교회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아픔과 이로 인해 얻게 되는 핍박과 불이익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지만, 이방교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뿐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교회의 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비유의 내용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누가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인 농부이며,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인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곧 불충한 농부들은 바로 유대교와 율법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며, 새로 포도원을 맡아 일할 농부들은 세상의 풍조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43절에서도 기록하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될 백성은 결국 유대교와 결별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지킨 이방인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비유의 인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가의 문제를 넘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이라는 뜻이지요.

예수께서 시편 118:22절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을 적용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차라리 버린 돌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며 만들어가는 힘있는 이들의 눈에는 한낱 쓸모 없는 돌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주춧돌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배세력은 예수님을 버린 돌 취급했습니다. 성전의 번영만을 강조하던 대제사장이나 율법을 기계적으로 맹신하던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걸림 돌 같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던져 버리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을 생명의 방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될 기초를 세우신 분이었던 겁니다. 

그를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한 요한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요14:6).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머릿돌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분을 주춧돌 삼아 지은 생명의 방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길 위에 기초를 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비록 버린 돌 취급을 받아 외롭고 불편한 길이 될 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홀로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 주님이 동행하시는 복된 길이라는 것이지요.

지난 주 라스베거스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 희생자를 낸 총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던 콘서트장으로 건너편 호텔에 투숙한 60대의 한 남성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범행 동기에 대해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총기 사고의 사례들처럼 만일 이번 사건도 스스로를 세상에서 소외된 버린 돌처럼 생각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 맞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타인을 향해 표출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생각하듯 더이상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유린한 악한 농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버림받았다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위로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생명에 반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선한 의도가 있을 때에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버린 돌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더 이상 버림 받은 돌이 존재해서는 안되겠지만, 불의한 세상에서라면 차라리 버린 돌이 되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리하여 이 땅에 더이상 버린 돌과 같은 외로운 존재들이 고통받고 소외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밥상

고린도전서 11:23-26

우리말에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함께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옛부터 한솥밥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이웃사촌이 멀리 사는 혈육간 보다 더 가깝다고 여길만큼 우리의 통념상 식구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영어로도 함께(com) 빵(pany)을 나누는 사이를 뜻하는 comp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동료란 한 화덕에서 구워낸 빵을 함께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겁니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함께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혈육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식사하는 것을 매우 즐기신 것처럼 보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만 봐도 그렇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 기억하는 것은 오천명이 함께 먹었던 빵이었지, 결코 그날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도 아예 자신을 “생명의 빵”(요6:48)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빵을 떼어 주며 이를 먹고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우리와 함께 밥상을 나누고자 하신 궁극적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밥상은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場)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거룩한 밥상을 통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맞이할 성찬의 자리는 주님을 기억하며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거룩한 생명의 밥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생명의 밥상을 대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떼어 주시며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밥상을 허락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함께 그 밥상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다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을 국한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도 포함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밥상에서 함께 나누게 될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 위에 올라갈 먹거리가 잘못되면 그 역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무너져서, 우리가 나눌 생명의 밥상 자체도 준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위해 창조하신 자연의 생태계가 무분별한 인간의 소비와 탐욕적인 이윤 추구로 인해 고통 당하며 희생되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자연 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상적인 기후 변화와 자연 현상 뒤에는 바로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욕심과 무지로 자행한 또 다른 폭력 앞에 자연 생태계도 몸을 흔들며 절규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생명의 밥상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다시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세계성찬주일을 맞이하여 현존하는 교회의 일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환경 속에서 모두가 하나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만찬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며 기억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도를 다음의 세가지 관점에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도 이 땅에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연의 세계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작품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그 자연의 일부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다’고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무엇보다 그 속에 성육신인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만찬의 밥상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작품인 대자연 속에 그 일부가 되어 찾아오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준 자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만찬을 뜻하는 말 중에는, Eucharist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Eucharist라는 말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 라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성만찬은 감사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밥상에 재료를 제공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이를 가능케한 대자연에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빵과 포도주는 이 땅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선물을 준 대자연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이를 지키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셋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인 대자연을 지키는 일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거룩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만찬의 밥상에서 나누어지는 빵과 포도주는 결국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밀과 포도라는 자연의 열매도 결국 사람의 노력을 통해 먹을 수 있는 빵과 포도주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도 우리의 노력이 없다면 생명의 도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밥상의 근원이신 주님을 사랑하듯, 먹거리를 제공하는 대자연을 사랑하고, 더불어 이를 함께 나눌 거룩한 식구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의 밥상인 이 거룩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대자연과 생태계의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며 주님의 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온전히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