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는 선택

누가복음 17:11-19

 

요즘은 인터넷 쇼핑이 이미 널리 대중화가 되어서 물품 구입을 컴퓨터의 화면만 보고 고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막상 구입한 물건을 받아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후회하는 일도 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선택한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갖는 부정적 심리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결정 후 후회’(Postdecision Regret)라고 합니다. 사소하게는 물건 구입과 같은 선택에서도 나타나기도 하지만 애인이나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학교와 직업선택과 같은 중요한 선택에서도 그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를 경우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후회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것, 혹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후회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그때 그럴걸’ 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일에 대해서만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택하기도 전에 미리 후회를 예상하여 결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 ‘예상 후회’(Anticipated Regret)라고 하는데, 예컨대 요즘 결혼 적령기를 훌쩍 지난 사람들에게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도 혼자 잘 지냈는데, 이 사람을 선택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만일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점점 선택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별 걱정 다한다”는 무한 긍정론자들이나 “살아보면 다 그 놈이 그 놈이야”라는 비관론적 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적어도 최악의 선택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의 입장에 있든, 분명한 사실은 자신에게 그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한, 그 결과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누구도 어느 선택이 분명하게 옳았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말은 결과적으로 후회할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후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집에 더 이상 입지도 않는 옷이나 살림살이들을 쌓아두고, 읽지도 않는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것도 혹시 나중에 필요할 때 후회하지 않을까를 염려해서 쌓아두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늘 마음에 흡족해 하지않으면서도 같은 미용실, 같은 식당, 같은 커피숍에, 그것도 꼭 같은 자리에 앉으려는 심리가 생기는 것도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겁니다.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부르는 이 심리적 상태 때문에, 굳이 위험을 감수한 선택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했던 것을 반복적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라는 체념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 조차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다” 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럴 수 있다 해도 과연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후회없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에서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본문의 사례를 통해 찾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서로 다른 선택을 행한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어떤 마을을 지나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습니다.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다 쉽게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들은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긍휼로 치유해 주실 것을 간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의 몸을 먼저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3장에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의 확증은 제사장의 고유한 권한이었습니다. 때문에 나병환자가 완치를 판결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몸상태를 제사장에게 보여 깨끗해 졌다는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의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복잡한 ‘정화예식’을 거친 뒤에 비로소 병자들은 더이상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율법이 허용해 주는 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먼저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이러한 율법의 절차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께서 너희의 병이 다 나았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열명 모두 군소리없이 제사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몸이 완쾌된 것을 보고 떠난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도중 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낫고자 하는 갈망이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천형이라 일컬어지던 나병에서 벗어나 육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이러한 갈망이 그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길을 떠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의 말만 듣고 확인도 하지 않은채 길을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다 해서, 그 외면적 행위가 다 그들의 내면적 믿음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것이 사마리아인과 다른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차이이기도 했습니다. 낫고자 하는 심정으로 길을 떠난 것은 열사람이 다 같았는데, 그들을 움직이게한 목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아홉 사람은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갔고, 한 사람만이 되돌아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명확한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난 것은 다 똑같고, 그 이유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들의 행위 속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 관심을 끄는 대목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자신들의 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라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낫고자 하는 갈망은 같았으나 실제로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보이는 그들의 태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먼저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하고도 제사장에게 달려간 유대인들에게 관심은 오직 자신의 몸이 치유되는 것 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병으로부터 치유된다는 것은 율법적으로 단지 몸이 낫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허용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쉬지않고 제사장에게 달려간 것은 하루 빨리 율법의 확증을 받아 세상 속에 들어가고픈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적어도 보이는 현실에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예수를 향한 믿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신의 현실적 문제만 해결시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시선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은 선택의 기준도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택에 대한 후회를 늘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거나 후회가 되는 부분을 아예 잊고 살아가는 길을 가지 않는 한 말이지요. 이것이야 말로 유한한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선택도 다시 리콜하고 싶은 후회를 늘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정결함을 확증받으려는 아홉 명의 유대인들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알고 되돌아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돌아온 자는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라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바로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치유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께서 더 깊이 주목하고 계신 것은 진정한 구원에 대한 부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또 우리의 영혼이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열사람 모두를 정결케 하시려는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정결은 단지 율법의 인정이나 육체적으로 질병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게 하시는 구원의 증표였던 겁니다. 주님이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주님의 구원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 선택을 행한 유대인들과 달리 그는 자기를 버리고 그 중심을 주님께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구원은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후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적어도 자신을 치유하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의 선택에 후회가 생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흔들리는 후회의 두려움을 안고 선택을 행하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서 일어나 가시기 바랍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 인도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자리를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선택이 바로 여러분 모두를 후회없는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