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생명

누가복음 18:1-8

1.

한하운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나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이를 구슬픈 시어로 표현했던 비운의 작가였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문둥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야 했던 천대와 소외의 설움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벌레 보듯 대하는 문둥이로 보일지 몰라도, 시인 자신은 문둥이 이전에 남들처럼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어엿한 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절규하듯 이야기한 것이지요. 길에 버려진 강아지는 쓰다듬어 줄 수는 있지만, 누구도 선뜻 문둥이의 손을 잡아주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문둥이나 걸인을 보고 돌을 던지던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시대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아감벤이란 사람은 이렇듯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불렀습니다. 죽일 수는 있어도 희생제물로 사용할 수 없을만큼 비천한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컨대, 소나 양은 죽여서 희생제물로 사용이라도 하지만, 지렁이나 바퀴벌레는 죽여도 희생제물로 사용할 수 없는 생명체이지요. 아감벤은 인간들 중에도 돌에 맞아 죽는다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보호받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야 말로 벌거벗은 생명체로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쓸쓸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2.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나병환자만큼 철저히 외면당하고 소외된 호모 사케르, 곧 벌거벗은 생명들이 있습니다. 길거리의 노숙자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과 폭력의 희생이 되고 있는 왕따들,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들, 전쟁의 잔인함 속에 상처입은 위안부 여성들, 그리고 삶의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철저히 눌려 살아가는 수많은 벌거벗은 생명들. 아마도 이들 역시 “나는 벌거벗은 생명이 아닙니다”는 항변을 지금도 어딘가에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배제되고 무시된 소리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노력들이 분명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비유 말씀은 세상의 벌거벗은 영혼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사실 벌거벗은 생명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 여전히 벌거벗은 생명 취급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

메시지가 매우 분명하다는 사실은 1절의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신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의 말씀은 과부와 재판관에 얽힌 이야기였습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귀찮을만큼 찾아가 자신의 권리를 요청하는 과부 앞에서는 결국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재판관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권리를 요청하는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까닭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의도를 다르게 접근하면 아주 미세한 차이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 비유를 강력한 요구에 초점을 두어, 밤낮으로 열심히 구하며 기도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0절의 말씀처럼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자녀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것처럼 열심히 구하면 하나님도 그의 백성들의 요청을 결국 받아 주실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물론 그 뜻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전히 곡해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예수님 역시 초두에 비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곧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주지시켜 주신 겁니다.

4.

메시지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비유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상황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종 발생하고 있었던 실화같은 사건이라는 겁니다. 2절에 보면 재판관을 기술하면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이방인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당시 재판관은 로마를 통해 고용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개가 공공법정으로 가기보다는 연륜있는 마을의 장로들을 찾는 것이 일반적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말을 거의 일상적 명칭으로 사용할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반면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를 대표하는 계층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리고 숨죽이며 사는 가장 낮은 자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연약한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벌거벗은 생명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는 무언가 특별난 점이 있습니다. 밟아도 반응이 없는 ‘호모사케르’ 같은 존재가 아니라 밟으면 꿈틀대는 억척스러움을 가진 여인이었던 겁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쓰는 여인의 억척스러움 같은 것이지요. 불의한 이방인 재판관조차 안도와주면 못견딜 정도로 끈질기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투쟁심 강한 여인이었던 겁니다.

이 과부의 억척스러움을 보면서 여러분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저렇게 죽자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일 과부의 행위를 얻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쟁취해 내고자 하는 억척스러움에서 찾으신다면 이 비유 역시 끈질긴 기도의 정신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초두에도 밝힌 것처럼 이 비유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오히려 기도해야 할 이유와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과 함께 제자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상실감을 생각하며 주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비유의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5.

역사적으로 보면,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초기 교회공동체가 겪었던 우려와 근심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메시아가 언제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곧 돌아오시리라는 약속을 남기셨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급박한 질문이었던 겁니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언제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삶의 고통,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벌거벗은 생명처럼 소외되고 배제된 현실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날이 과연 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과부의 질문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과부의 억척스러움, 그것은 억지로원하는 것을 받아내고야 마는 생존방식이 아니라 사실은 당연한 권리를 되찾는 정당한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게 자기의 권리를 빼앗겨 버린 현실, 진실이 왜곡되고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도 힘없이 사는 것을 원망해야 하는 비정한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 사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겁니다. 지금 부정한 현실에 낙심하기 보다는 과부처럼 당당하게 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도하여야 할 이유이자 바로 기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6.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분들께 늘 오늘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오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말이죠, 정말 오늘만 있다면 어떨까요? 내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갑자기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오늘이 내게는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최고의 날인 오늘을 사는 것에 충분히 감사와 기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오늘이 최고면 내일은 결국 그보다 못한 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정말 오늘을 최고의 날로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내일을 준비하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저 현실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진정한 감사와 만족은 바로 내일도 오늘처럼 기도로 준비할 수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부도 그런 점에서 비록 오늘을 만족하며 지날 수 있었을 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낙심하지 않고 내일을 준비했던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오늘을 살았던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바라보고 계셨던 겁니다. 바로 이것에 주님은 관심을 두셨던 것이지요. 낙심하지 않고 오늘을 치열하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들이 과부로부터 배워야 할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기쁨의 그 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의 기쁨은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바로 과부처럼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무소의 뿔처럼 쉬지않고 기도하며 나아가십시오! 오늘이란 길이 끝나도 그건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참된 시작이요,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 날의 희망을 오늘 우리 함께 꿈꾸어 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