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일지라도

하박국 2:1-4, 누가복음 19:1-10

요즘 말도 안되는 이야기 전개와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막장이라는 말은 “갈 때까지 간 상황”처럼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때에 사용하는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그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막장은 탄광의 맨 끝부분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산업이 사향화 되면서 거의 없어졌지만 7,80년대만 해도 석탄산업은 국가 기간산업 중 하나였습니다. 국가의 경제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수많은 광부들이 지하 수십미터를 오직 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드나들던 탄광의 마지막 장소가 바로 막장입니다. 탄광 갱도의 맨 끝은 생각만 해도 아찔할 만큼 불완전한 구역입니다. 채굴 도중 무너질 위험이 높아서 마치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만큼 위험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의 끝일 것만 같은 아찔함이 마치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을 연상케 했는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막장의 답답함도 이를 더 부정적으로 느끼게 만든 요인인지도 모르지요. 지난 한 주 만큼 한국의 언론이 이 말을 자주 사용한 때도 흔치 않았을 겁니다. 한 주간 대통령과 비선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로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흔히 “조중동”이라고 일컫는 보수언론매체에서 조차 이 상황을 “희대의 막장 사건”이라고 부를만큼 파문이 큰 상황입니다. 일국의 국정이 일개 사이비 종교인과 사리사욕으로 가득찬 비리세력에 의해 농락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가 사실이라면 많은 국민들을 참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보수언론인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는 이 사건을 재정 러시아 말기에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락펴락하여 결국 왕실의 몰락을 가져온 라스푸틴과 비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보수언론매체조차 막장이라고 부르는 이 상황을 그리스도의 교회인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비단 한국의 정치상황 만이 아니라 역대 최악의 막장 선거라 부르는 미국의 대선 투표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이 땅의 교회와 시민으로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며 앞으로를 준비해 나가야 할까요?

세상의 시끄러운 논쟁에 교회가 함께 끼어드는 것을 정치적인 것이라 비판한다면, 불의에 침묵하는 것 역시 정치적 선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앞에 서서 세상을 이끌어 나가야하는 정치행위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강경한 입장도 옳은 선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답답하게 들릴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교회는 묵묵하게 세상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점검하며 남겨진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품어안는 목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찰을 통해 내일의 희망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흔히 말하는 리더쉽보다 더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 성찰과 책임의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소금과 빛의 역할입니다. 물론 성찰과 책임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서의 삭개오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 보는 성찰의 기회로 삼아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예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상황을 그려 보십시오.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세리장이 삭개오가 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막상 나오긴 했는데, 키가 작아 도저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아이들처럼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무 위에서 그토록 애타게 바라보길 원하던 예수님을 만나뵙고,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이 전하는 삭개오의 이야기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관심을 두고 이야기할 대목은 삭개오가 어렵사리 만난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었던 많은 동네 사람들과 삭개오, 이 두 부류의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를 에워싸고 직접 대면했던 여리고의 동네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학수고대하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들 이외에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지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시선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무슨 악의를 갖고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도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삭개오와 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히게 됩니다. 예컨대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안쓰럽게 서 있는 노인이 있어서 내 앞의 자리를 양보해 준다고 합시다. 분명 선한 동기에서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윤리적 판단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될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 긴 줄 뒷부분에 그 한사람의 양보로 인해 너무 억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비록 선한 동기로 행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로 인한 모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눈 앞의 일을 따지기 이전에 전체적인 책임과 성찰이 우선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뜻없이 길을 막아서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방해하고 있다는 책임을 제기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부분까지 우리가 책임을 물을만큼 판단을 내리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았을 것이니, 그것을 문제로 삼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상황이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칭찬하며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네 집에 머물러야 겠다”는 말씀을 하고 난 뒤에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이 되어, 자신들과는 달리 주님을 집에 영접하게 된 삭개오에 대한 질시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춰 볼 때 죄인의 집에 머무는 자는 그 죄인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습니다. 좀 전까지만해도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목을 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삭개오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급기야는 그 집에 초대받은 예수님 조차 죄인 취급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성찰과 책임의 문제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삭개오와 동네 사람들의 차이는 다만 입장의 차이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목적은 똑같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그들을 갈라놓게 만든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듯,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잘잘못을 이야기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누구든 내가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관심밖 대상이었던 삭개오에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들과 다른 입장에 있던 삭개오에 대한 질시가 고개를 들면서 죄인이라는 낙인을 내리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는 급기야 예수님 마저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자신들이 왜 거기에 나와 있었는지 그 목적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린 겁니다. 이 때부터가 바로 본격적인 막장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도 부정하고 자신의 이웃도 부정하였으니 결국 계명에도 어긋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중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말그대로 막장 신앙을 보여준 겁니다.

국정농단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이 때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검해야 할 부분도 바로 이러한 성찰과 책임의식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현실의 상황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이 시대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당당히 지키고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 권력과 세상이 주는 이익에 이제껏 침묵하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늦은 관심을 보이고 돌팔매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우리 개인들의 삶도 사실은 누구를 탓할 수 없을만큼 자기 중심적 신앙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요? 지금까지 눈 앞의 내 이익과 내 관심 밖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있기는 한가요? 그러다가도 나와 다른 생각과 입장에 있는 이들을 보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려 들지는 않았나요? 심지어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을 규명하고 이를 위해 뽕나무를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않던 이들을 죄인처럼 낙인찍고, 그들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난의 칼을 켜누었던 오늘 우리 시대는 아니었는가 되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믿는 자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까? 이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으로 사십시오. 의로운 시선을 갖고 사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 하박국은 말합니다. 끝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기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말이지요.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성찰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 언론인의 모습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비전을 품고 3년전 자신이 맡고 있던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한 종편사의 보도부문 사장으로 이직을 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종편행을 두고 우려를 넘어 변심했다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언론의 정도를 지켜 나갔습니다. 그가 생각한 언론의 정도는 다름 아닌 진실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의 힘은 힘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힘있는 사람들이 두려워 할 수 있는 뉴스를 만드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정치권의 유혹에 휩쓸려 변심했던 이들과는 달리 진실의 힘을 향한 신념 하나로 자기 자리를 지켜 온 그를 통해 오늘 우리 사회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비단 저 하나만의 생각은 아니라 믿습니다. 만일 이 언론인처럼 모두가 자기의 자리를 제대로만 지켰다면 과연 이런 희대의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하박국의 선포처럼 모든 것의 끝은 오기 마련입니다. 갱도의 끝에서 막장을 마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막장은 속절없는 마지막인지 모르지만, 사실 막장은 또다른 시작의 처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막장 어디에선가 국가의 경제를 위하여, 그리고 소중한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막장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 찬 내일의 출발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 볼 것인가? 사실 그 해답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막장에서 희망의 꿈을 열어가듯, 믿음의 의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 자리를 지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성찰하는 의식과 책임있는 행동으로 그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