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의 축복

누가복음 23:32-43

추수감사주일에 오늘 본문을 선택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매우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일과를 따라 말씀을 전하다 보니, 십자가 사건이라는 다소 내용이 무거워 보이는 본문을 다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조건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를 분명하게 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누가가 전하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군인, 그리고 죄수 중 하나가 보인 모독과 비난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말 그리스도가 맞다면 스스로 구원해 보라는 조롱섞인 비판을 쏟아냅니다. 십자가의 구원이 의미하는 바를 이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이미 이와 비슷한 조롱을 광야에서 경험하신 바 있습니다. 돌을 빵이 되게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사단의 시험이었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주님에게 이러한 시험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기적은 아무 문제도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구들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광야에서의 사건을 사단의 시험이라고 이름붙인 것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기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결국은 세상적인 가치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신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뜻이지요. 당장 주린 배를 채우고 요행과 같은 기적을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는 신앙의 자세는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주시기 때문에 드리는 대가성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이라 믿는 신앙의 확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여 자신이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믿음이 무너져내리는 것도 사실은 잘못된 신앙의 자세에서부터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산앙 자세는 자연적으로 감사 보다는 불만과 불평을 늘어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지요.

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목전에 앞둔 또 다른 사형수의 모습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섞인 비난과 비판을 행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십자가 위의 두 죄수는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죄인들 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향해서는 상반된 선택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극명하게 달리 바라보는 두 시선이 이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불만과 비난의 시선으로 조롱했던 이들과 다른 사형수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죄를 먼저 뉘우치려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본 자세이기도 합니다. 나를 먼저 보는 것이지요. 세상은 결국 내 눈에 비치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눈을 먼저 깨끗이 하지 않고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법입니다. 사수가 사격을 위해서 총기를 손질하지 목표물을 직접 가서 닦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죄인에게서 떠나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바로 알고 보니 예수님의 죄없음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두 강도들이 달린 십자가는 사실 우리 모두가 지고 살아가는 자기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십자가의 의미가 달리 이해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지만, 반대로 어떤 이에게는 무거운 짐으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에 달려 있어도 주님과 낙원에 갈 수 있는 이는 한 사람 뿐이었던 이유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요? 주님이 차별을 두어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구원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으로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간에 커다란 편차가 생기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선물을 주는 것은 이미 주는 사람의 마음인데, 받고 안받고는 받는 이에게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받는 이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믿는 자만이 그 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찬 이는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후 1:18). 같은 것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여러가지로 미련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잘되면 잘된다고 감사, 잘 안되면 또 안되는대로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한 삶의 가치를 추구할 줄 알고, 자신에게 더 큰 아픔이 되더라도 타인의 아픔에 먼저 배려와 양보를 행할 수 있는 사람들. 정상적인 세상이라면 모두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들이 오히려 미련한 일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 아닌가요?  성 프란시스코의 감사의 기도를 통해 미련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를 고백한 바 있습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 했는데 /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 내 마음 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 프란시스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 미련한 사람 아닐까요? 하나를 구하면 둘을 얻어야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현실에서 오히려 하나를 잃고도 감사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사람이 미련해서 감사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미련이라는 우리말이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한자로는 미련(未練)이라고 해서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덜된” 혹은 “되다가 만”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미련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아직 덜된 자신을 깨닫는 순간 그 부족한 구석구석을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련해서 오히려 세상은 보지 못하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미련한 자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도 제 자신의 미련함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미련해서 아직 채워야 할 일이 많아 긴장을 풀지 않고 더욱 매진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미련한 것이 있어 하나님께 더 간구할 수 있도록 간절함과 기도제목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미련해서 아직 끝을 알 수 없기에 매사가 다 희망의 대상이 되니 감사할 뿐입니다. 나아가 세상에 아직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미련한 자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함께 세상을 희망의 나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미련한 자에게 주시는 이 하나님의 축복이 모두에게 새로운 날을 열어가는 힘이 되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미련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모두가 기대하고, 또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