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가 되는 법

마태복음 1:18-25

동심(童心)의 세계로 돌아가 세상을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얼마 전에 아이들의 다소 엉뚱한 대답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우연히 본 일이 있었습니다. 몇가지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을 알아보는 심리테스트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질문을 들으시며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이라는 질문입니다. 아이의 대답은 “죽었다” 였습니다. 둘째는 “옆집 아주머니가 사과를 하나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요?”가 문제였습니다. 그에 대한 아이의 기가 막힌 대답은 “뭐 이런 걸 다” 였다고 합니다. 제 마음을 놀라게 한 건 세번째 질문이었는데, 그것은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봄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생각의 틀을 정하고 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아이의 대답은 오답이거나 아직 어느 수준의 상식에 도달하지 못해 생각없이 내뱉은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라는 고정된 틀 밖에 나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어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묵직한 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때묻은 세상이 아니라 아직 모두를 살아 있는 똑같은 생명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무심코 내던지는 말 하나도 마음에 담아두는 아이들에게서 그들의 오답을 지적하기 이전에 겉치레와 언행불일치를 늘상 보이며 사는 어른들의 세상을 먼저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보다 알 수 없는 인생을 마치 정해진 답이 있는 것 마냥 규정해 버리고, 끼워 맞추며 살기를 강요하면서 행여 그에 맞지 않는 길을 가는 이들에게는 낙오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던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고정된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을 잘 산다고 이야기하는 우리 현실에 그 틀 밖으로 나가서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아이들의 동심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 인생을 쳇바퀴 돌아가듯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도 우리가 일정한 틀에 스스로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득 성탄이 가까와 오면 마음을 간지럽히고 달콤 쌉싸름하게 만들던 그 수많았던 감정들이 어느새 뭉툭해져서 무뎌져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고대하며 기다리던 우리의 그 뜨거웠던 사랑도 그처럼 차갑게 식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핑계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잊고 지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 보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서도 틀 안에 갇혀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의 복음서가 마리아에 주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는 요셉의 상황에 보다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라는 비중에 맞지 않게 성경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이후 교회의 전통 속에서도 어머니 마리아에 비해 세간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름의 뜻이 “더하신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이 중요한 이야기에 더하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지극히 평범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 요셉의 입장에서는 억울해 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조력 없이 과연 이 놀라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인 오늘 말씀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당시의 유대 관습에 따르면 이미 마리아와 정혼한 실질적인 부부 관계에 있었습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둘은 이미 부부 사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던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정혼한 아내 마리아가 동거 생활에 들어가기도 전에 임신을 해 버린 것이지요.

요즘이야 혼수품 중의 하나라는 말이 나올만큼 사회적 시선이 변화되었지만, 엄격한 율법의 통제 하에 있었던 당대의 유대사회에서 이는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중죄에 해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않았어도, 요셉이 받았을 충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불쾌하고 견디기 힘든 심적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도대체 이런 일이 내게 왜 일어났는가를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이며, 마리아를 의심하고 분노의 눈으로 보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평범한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천사가 와서 이 아이는 성령이 아버지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약혼녀가 무릎꿇고 제발 살려달라며 용서를 구하는 편을 택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처증에 빠져들기 쉬운 여느 남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를 의로운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이유를 정혼한 자신의 여인을 위해 조용히 일을 수습하여 율법의 무거운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푼 모습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 좋은 사람이란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순전히 요즘 시대의 말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한글자 더 붙여서 정말 “마음만 좋은 사람” 소리 듣기 딱 좋을 겁니다. 순박하다 못해 바보같은 사람인 것이지요. 19절에 기록된 대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새롭게 번역하면 요셉은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런 여자를 가만 두냐며 분통부터 터뜨리는 감정적인 사람에 비하면 분명 생명을 아끼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뜻으로만 두고 요셉에 대해 기술한다면 요셉의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성경에서 기록하고자 한 요셉의 진정성을 폄하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틀로 보면 다소 무게감 없는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매우 비중한 역사의 한 인물로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의롭다는 말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로움의 기준은 율법에 달려 있는 일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율법에 합당한 행위나 생각을 가질 때,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경우는 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참 마음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엄밀하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사람입니다. 간통에 대한 율법의 처벌은 남편이 괜찮다고 해서 그냥 물릴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기대어 응징하는 길이 아니라 온정을 베푼 요셉을 의롭다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의로움의 원어인 헬라어 “δίκαιος dikaios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의로움(디카이오스)’은 당연히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순종을 뜻하는 말입니다. 법으로 말하자면 법을 잘 준수하는 것이니, 율법의 전통하에 있던 유대 사회에 적용하면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 바로 의로움의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율법을 따르지 않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디카이오스가 가진 또 다른 숨은 뜻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뿌리가 되는 어원(δεικνύω, deiknyo)은 숨어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증거나 표시로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이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 보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말한 이유가 조금 더 수긍이 갑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이 바로 숨어있는 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약혼한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저 일을 조용히 덮어서 죽음만 면하게 해준다는 너그럽지만 여전히 의혹을 풀지 않은 배려 때문이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난 이후 요셉은 진정으로 용기있는 태도를 취합니다. 세상의 시선과 잣대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지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처럼 함께 문제에 직접 맞설 수 있는 용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요셉의 용기있는 행동은 숨은 보화 같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내 주는 용기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이를 모멸적인 시선과 비난의 대상으로만 삼으려 했지만, 요셉은 이를 세상 속으로 드러내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겁니다. 때로는 진실을 감추며 사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는 비굴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진정 의로운 것은 진실을 오히려 가리기 위해 악용되는 세상의 법에 얽매이는 일 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세상의 틀에 가두어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진정 의로운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어릴 때 자주 보던 동화 중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안데르센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너무나 잘 아는 어른들은 서슬퍼런 권력의 위엄에 진실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또 조용히 입다물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일부의 사람들은 왕에게 잘보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아이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아이였습니다. 동화 속의 의로운 사람은 바로 진실을 폭로한 그 아이 뿐이었던 겁니다.

틀 안에 갇힌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른들과는 다른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만 진실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요? 행여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참된 진실을 이야기 하지 못하며, 그저 주어진 틀 안에 갇혀 쳇바퀴 돌아가듯 도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탄의 기쁜 소식을 앞둔 우리 모두가 지금 찾아야 할 모습은 어쩌면 잃어버린 동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록 육신의 나이는 되돌릴 수 없다해도 우리의 영과 마음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동심으로 가득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성탄의 기쁨을 진정으로 누리는 의로운 어른이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