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올 때까지

마태복음 24:36-44

지난 한 주간 시카고에서 열린 2030 청년집회에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집회는시카고를 중심으로 하는 중북부지역의 교회들이 추수감사절 연휴를 사용해 청년들을 위한 학생선교대회로 지난 15년 동안 지속해 온 큰 행사였습니다. 처음에는 Illinois와 Ohio지역의 학생들로 한정되었던 집회가 이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지역에서 참여하는 청년 집회로 활성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매년 한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에 맞는 주제강의와 세미나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참가자들에게 제공해 왔는데, 금년에는 “하나님나라”가 전체적인 핵심 주제였습니다. 특별히 한국과 미국의 불안정한 현실의 조건 속에서 이 주제는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기독교적 사회정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제가 던진 화두였습니다. 이에 대한 제안으로 저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오늘 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뭇 진지한 그들의 반응을 보며, 여전히 우리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터널의 막막함 속에서 작은 촛불을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신선하고 희망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강의와 별도로 금번 집회에서 제게 주어진 또다른 세미나의 주제는 “연애” 였습니다. 실제 강연의 제목은 “연애학 개론: 연애는 미친짓이다” 였는데, 역시나 청년들의 관심이 높은 주제였습니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는 매우 진지해서 그런지 잘 느끼지 못하였는데,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청년들의 눈이 거의 타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강의가 끝난 후 저를 찾아와 자기 개인 연애상담 좀 해주실 수 없느냐는 매우 난처한 요청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처럼 이론에 밝은 사람이 현실에는 “쑥맥”이라는 점을 청년들은 몰랐던 것이지요. 

제가 전한 기독교적 사회정의와 연애라는 주제는 다소 연관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결론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감성적인 마음의 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흔히 무관심을 사랑의 반대라고 말합니다. 이 둘을 가르는 차이는 바로 반응하는가의 여부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 곧 반응하려는 의지(Response+Ability)가 바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제 주제의 공통된 결론이었습니다. 사랑은 반응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명력있게 요동치며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향한 정의이든 이성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책임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한 사회를 향해 반응하는 것, 이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이자, 그리스도의 자녀된 성도로 당연히 반응해야 할 책임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와 요청에 반응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신음에 반응하셔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소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 삶의 여러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반응하는 것이지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이에 대한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심판할 때가 온다는 일종의 묵시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던 현실은 더 이상 자신의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매우 절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암흑과 같은 이 현실을 밝혀주시기 위해 메시아가 임하는 길 뿐이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던 “그 날”은 바로 전권을 지고 세상을 심판할 인자가 오시는 구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인자에 의해 비로소 낡은 세상은 가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 그래서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성취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풀리지 않는 한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날이 언제 올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역시 이러한 질문을 수없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한 시점을 제공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저 아무도 모른다는 매우 뻔한 말씀이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당연한 대답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한 핵심은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던 어떤 특정한 시점을 제시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이전의 사건을 사례로 들어 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도 사람들은 몰랐다는 겁니다. 그날, 곧 심판의 날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며 시집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 싹이 자라날 때까지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그날”도 밭일하고 맷돌을 가는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언제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닌 ‘어떻게 그날을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대책을 사람들에게 주문하셨습니다. ‘깨어 있어라’ 그리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언제’ 보다 ‘어떻게’, 다시 말해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천적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누워서 떨어질 감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신앙의 자세는 감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시카고 집회 세미나가 끝난 후 한 여학생이 저를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언제 연애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그날이 오기는 할까요?” 저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안된 마음에 뭐라고 용기라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학생을 바라보는데, 눈밑으로 마치 너구리 다크서클 같이 크게 번져있는 검은 자욱이 눈에 띠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빡빡한 일정 때문인지 피곤해서 졸다가 눈을 비벼 번진 화장자국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자매님, 그날이 언제올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나, 우리도 늘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가요? 사는 모습은온통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 있으면서 그저 얻고자 하는 것만 바라는 무책임한 모습은 아니었나요?  물론 그날이 언제 오는 것을 아는 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날은 깨어서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날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의미있는 지금과 오늘이 없이는 결코 의미있는 내일과 그날을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시간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가 닥쳤을 때 준비되어 반응할 수 있는 책임있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셨던 겁니다. 똑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어떤 시점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깨어서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 삶에 매우 일관된 신앙의 태도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반응하며 사는 것, 다시 말해 책임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 것이지요.

이제 추수감사절을 지나며 한 해의 마지막을 채 한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성탄절이 오기까지 모든 교회는 대림절의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대림절, 말뜻 그대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언제 오시나요? 다행히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성탄절에 오시지요. 그런데 성탄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이 기간 동안 주님을 향한 준비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확의 기쁨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지금 씨앗을 뿌리는 수고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그날이 언제 오는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올때까지 무엇을 하며 기다릴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깨어서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책임있는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