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그럴 때인가?

지금이 그럴 때인가?

열왕기하 5:1-14, 20-27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엘리사와 당시 이스라엘과 경계를 맞대고 있던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아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앗시리아와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천형이라 불리는 불치병인 나병에 걸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가 걸린 병이 나병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심각한 피부병이 아닌가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가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만 개인과 그의 가정만이 아니라 국가로 볼 때도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어린 소녀 하나가 나아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일러줍니다. 자기 조국인 이스라엘에 가면 하나님의 예언자를 통해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나아만에게 이 말은 그저 흘려버릴 만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스라엘에 다녀 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시리아의 왕 역시 자신과 나라에 없어서는 안될 나아만이 나을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돕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승낙을 합니다. 이에 나아만은 자신의 병을 고쳐줄 선지자에게 줄 선물과 사례비를 준비해서 이스라엘 땅으로 향해 갑니다. 아마도 한 국가의 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움직이는 행렬이니 그 규모가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왕은 걱정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나병을 고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이것은 나병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수작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왕에게 걱정하지 말고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세운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겠다는 이유도 함께 전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땅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외부의 세력에게 이것은 함부로 넘보지 마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욱 순종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재확인시켜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셈입니다.

결국 양국의 승인 하에 나아만이 이끄는 행렬은 국경을 넘어 엘리사의 집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일행이 집 앞에 도달한 시점에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어 “요단 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합니다. 보통 한 나라의 고위층이 방문을 할 경우 외교적 의전에 따라 극진히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나가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하니 나아만이 화를 내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처사였던 겁니다.

게다가 앞뒤 설명도 없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요단강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수질이나 규모로만 본다면 시리아에는 요단강 보다 훨씬 좋은 강들이 많은데, 왜 여기까지 오게 해서 씻으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고쳐줄 것만 같으면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에 더욱 불을 지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아만은 너무 괘씸하고 분해서 발걸음을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그 때 부하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한번 요단강에 들어가 씻어볼 것을 권유합니다. 그 말에 설득된 나아만은 결국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었고, 거짓말처럼 몸이 완전하게 치유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이왕 기적을 행하실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신 것일까?’ 라는 질문은 나아만 뿐만 아니라 대개 많은 이들이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굳이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와서 꼭 요단강에 들어가 씻어야만 낫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궁금증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왕 주시기로 결정하시고, 또 그렇게 선택하시면 기분좋게 받는 것이 아니라 왜 이토록 힘들여 얻게 만드시는지 당췌 모르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요단강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나오는 요단강은 대개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전통적 민담에도 사람이 죽으면 강을 건너간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인의 정서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는 것이 결코 기쁜 일처럼만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죽어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간다는 생각보다 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정서가 더 강하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단강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장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요단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주로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건너 저편은 동경과 희망의 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현실과는 다른 희망의 세계가 저너머에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삶의 피로와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단강은 희망을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요단강에서 몸을 씻는 행위는 단순히 육신에 묻은 때를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가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가능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말씀도 똑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전의 나를 버려서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단강은 생수의 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 위한 생명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땅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말씀의 생수라는 것이지요. 그것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씻김을 당할 때, 비로소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정작 나음을 받은 나아만의 나병은 단순히 육신의 병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후반부에 나오는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와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병이 치유된 뒤, 나아만은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사례를 엘리사에게 제의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를 거절합니다. 엘리사는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능력이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몫으로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아만과 일행은 사례를 거부하는 엘리사를 뒤로 하고 시리아 땅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자신의 주인 몰래 나아만 일행을 뒤좇아 갑니다. 그리고는 마치 엘리사의 뜻인 것처럼 속이고 그들에게 이전에 거절했던 사례비를 달라고 합니다. 나아만도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것도 게하시가 요구한 것에 더하여 많은 사례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만큼 감사의 마음이 넘쳐났던 겁니다. 이마저도 게하시는 아무 죄의식없이 자기 것으로 취해 버립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두둑히 한몫 챙긴 게하시가 집에 돌아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감추고 있었을 때, 이를 눈치챈 엘리사가 그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차 닫혀버린 게하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잡아뗀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를 만나려고 수레에서 내릴 때에,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거기에 가지 않은 줄 모르느냐?”고 말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진실까지 덮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게하시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평생 이방신에 의해 눈이 닫혀 지내던 나아만은 오히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밑에서 살아왔던 게하시는 오히려 마음이 굳게 닫히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진정 불치병에 걸린 이는 과연 누구인가?” 라고 말입니다. 한 사람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망으로 먼길을 지나와 요단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안고 사실은 잘 이해하기 힘든 여정을 지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궁극적으로는 변화된 삶을 결단하고 돌아갔습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이 복잡한 인생의 과정이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니,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마음에 두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탐욕이었습니다. 급기야 눈이 어두워져서 감각조차 둔해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나병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얻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분명해 지는 대목입니다.

마음이 닫혀서 무감각해진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이런 책망을 합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고 옷을 받고 올리브 기름과 포도나무의 양과 소와 남녀 종을 취할 때냐?”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우리의 마음이 정작 탐욕과 교만으로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모르는새 영적 나병을 앓고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기 위해 먼저 엘리사가 던지는 이 질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과연 그럴 때인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들, 과연 그것을 위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 때인가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맞나요? 지금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순간일 수 있는가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과연 요단강인지, 그래서 우리 마음의 죄를 씻고 있는 것이 맞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요단강 같은 생명수로 우리를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이 예배의 공간에도 함께 하셔서 우리 모두를 영적 나병에서 완전히 치유케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