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아모스 7:7-9 누가복음 10:29-37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관계의 소중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아니면 전혀 인식하지 못할만큼 간접적이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맺고 있는 인연은 결국 필연적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이미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홀로 사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농부의 집에 숨어 살던 쥐가 벽 틈을 통하여 농부와 그의 부인이 시장에서 쥐덫을 사온 것을 보았습니다. 놀란 쥐는 가축들이 모여 있는 마당으로 와서 모두에게 경고를 합니다. 쥐덫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닭은 “닭 역사에서 아직까지 쥐덫에 걸려 죽은 닭은 보지 못했다”며 경고를 무시해 버립니다. 돼지는 쥐덫은 자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지만 걱정하는 쥐를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며 돌아섰습니다. 쥐는 옆에 있던 소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소 역시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전혀 주의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쥐덫에 무언가 잡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농부의 아내가 확인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걸린 것은 독사의 꼬리였는데,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농부의 아내는 그만 독사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독으로 인해 열이 많이 난 아내를 위해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닭죽을 끓여 먹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말을 듣고 농부는 닭을 잡아 따뜻한 스푸를 끓여 아내를 먹입니다. 하지만 병이 호전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그녀를 돌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부는 고마운 이웃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돼지를 잡았습니다. 결국 독이 온몸에 퍼진 농부의 아내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농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농부는 마당에 나왔습니다. 그의 눈에 띤 것은 잔뜩 겁을 먹은 소였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조차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기술한 창세기의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좋다’는 말은 보이는 모양을 두고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흐트러짐이나 부족함 혹은 악함이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의 모든 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은 평화와 정의,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찬 곳이어야 합니다. 아모스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가게 해야 한다(암5:24)”고 말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세상은 정의와 평화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은 딱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 하나이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서로간에 평화와 정의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인 아모스의 다림줄 환상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과 관련해서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다림줄의 환상이었습니다.

다림줄은 주로 건축을 할 때 사용되어지는 도구였습니다. 당시 건축물이 땅으로부터 수직으로 흐트러짐 없이 제대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기준선의 역할을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다림줄에서 한치라도 어긋남이 생기게되면 건축물이 비뚫어지게 세워지거나 건축이 된다해도 오래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다림줄의 환상을 보여주신 까닭은 나라의 기틀이 무너지고 세상이 어려워진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주시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성소를 지을 때 다림줄을 벗어나 건축하지 않는 것처럼, 주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벗어나 살면 안된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다림줄로 수평과 수직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위로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아래로는 우리 서로 간의 수평적 관계를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말씀이었던 겁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계명을 주신 바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또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레 19:18). 신앙의 다림줄을 주신 셈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의 원인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다림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림줄이 균형을 잃어버려서 신앙의 기준도 흔들리는 상황을 자주 보게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를 잘 나타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이 비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율법 교사에게 그 대답으로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미 엄격한 율법의 전통을 잘 알고 있었던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 문제인가를 새삼 지적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볼 때가 많습니다. 건축을 예로 들면, 각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방법을 몰라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준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부실 건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도 유사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엄격한 율법의 전통 아래 살았던 유대인들은 양 손목에 “필락테리스”라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몇 가지 성경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미 신앙의 다림줄을 늘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 속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예수께 직접 질문을 던졌던 율법교사는 한가지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과의 차이점이라 지적하셨습니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가장 크게 차이나는 모습은 바로 34절의 말씀에 나타납니다. “가까이 가서”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입니다. 가까이 가서 자신의 측은한 마음을 실행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가까이 간다라는 말은 직접 그를 향해 다가갔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어 주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김춘수의 시, “꽃”을 보면,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때 그에게로 간다는 것은 다가 선다는 의미에 앞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느새 여러분 마음에 들어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가까이 와서, 아니 여러분이 그에게로 가까이 가서 서로의 꽃이, 서로의 사랑이 되어 버린 겁니다.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반대로 그들의 마음 속에 강도 만난 사람이 들어 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김춘수의 시적 표현을 따르면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내게 아무 의미도 남지 않았기에 감정 조차 느낄 수 없는 낯선 관계로 무심코 지나쳐 버린 겁니다. 무감각과 무관심, 그리고 무책임을 사랑에 대한 가장 반대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랑의 반대말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지요.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고 질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을 알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정말 실천하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지요. 사랑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행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고 보신 겁니다. 길 바닥에 쓰러진 이름 모를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 마음을 측은하게 만들어 나로 하여금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 서게 만든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를 우리 서로에게 묻고 계셨던 겁니다.

헤밍웨이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는 소설의 제목은 사실 영국의 17세기 시인 존 단(John Donne)이 쓴 기도문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도문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사람은 섬처럼 떨어져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하나의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로 비유하신바 있습니다. 한 몸을 이룬 운명공동체로 보신 겁니다. 그러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국 동어반복인 셈입니다. 너와 내가 한몸을 이루고 있는 하나이니,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울리는 종소리는 사실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의 소리입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결국 그만의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강도 만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고통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돌고 돌아 나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일까? 이 질문은 오늘 서로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고, 다림줄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