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를 극복하라!

누가복음 12:13-21

섭식장애라는 말을 들어보신 일이 있나요? 흔히 “다이어트 장애”라고도 하는데, 크게 거식증과 폭식증의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거식증은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증세이고, 폭식증은 음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증으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주로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발생하는 식사 행동상의 장애입니다. 그래서 마른 체형과 특정한 유형의 외모를 강조하는 현대사회가 촉발시킨 일종의 부작용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습니다.

마른 몸매를 만들기 위해 아예 음식을 입에도 되지 않는 거식증에 걸리거나 음식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아 폭식을 하면서도 그로 인한 체중증가를 막기위해 구토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폭식증 현상은 의학적으로는 신경성 장애로 규정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통제’라는 심리적 메커니즘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거식증(anorexia)의 경우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신 스스로가 음식을 섭취하는 섭식을 과도하게 통제해서 발생한 경우입니다. 한마디로 먹는 것을 거부하고 굶는 자기통제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반면에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해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자기통제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복적으로 구토를 하는 증세가 바로 폭식증(bulimia)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단순히 많이 먹는 충동장애와는 성격이 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식증과 폭식증처럼 섭식장애가 현대사회의 특이한 현상으로 지적되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던 시대와는 달리 풍요로운 삶의 조건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생존을 걱정하던 시대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배부른 시대의 특이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가 먹는 것을 스스로 통제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한 때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해 본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현상은 의아함과 함께 커다란 상실감을 가져다 줄 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굶주림 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지구촌 곳곳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비판의 시선을 내려놓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며 섭식장애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된 이 증세가 자기통제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 것에 있어서도 자기통제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영적으로 나타나는 섭식장애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영적 섭식장애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거부하거나 혹은 마구 받아들이지만 토해내듯 실제로는 밖으로 내뱉어 버리는 현상으로 정의 내리고자 합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을 아예 거부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흔히 신앙적으로 시험이 들었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자주 놓치고 있는 부분이 선택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는 경우입니다. 힘들거나 아쉬울 때는 누가 붙잡지 않아도 말씀에 매달리다가도,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돌아서는 신앙의 모습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씀을 섭취하는데 일종의 장애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특히 이 섭식장애 현상에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자기통제를 일으키는 외적인 요인에 관한것입니다. 실제로 일반적인 섭식장애의 경우, 미용이라는 외적 요인이 자기통제의 근거로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먹지 않거나 구토를 반복적으로 하면서까지 자기통제를 하는 것은 살을 빼서 마른 몸매를 유지하려는 욕구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때 발생하는 영적 장애는 어떠한 외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부자가 어느 해에 농사를 지어 큰 소출을 올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얼마나 소출이 늘어났는지 현재의 곳간으로는 다 채울 수 없을만큼의 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자 농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에게는 별 걱정 다한다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대박이 난 것도 부자에게는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정말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쓸데없는 걱정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 많은 수확물을 다 어디에 저장할 것인가의 문제로 걱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결국 부자는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그곳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자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만족감을 표시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가지고 부자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트집을 잡을만큼 잘못한 일을 찾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큰 소출을 얻기 위해 그가 쏟아 부었을 수고들을 생각하면 칭찬받아 마땅할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가 예수님이 행하신 대개의 비유에서처럼 유대인이라 가정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도 했을 겁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농사 잘지어 성공하고 큰 돈도 벌었으니 얼마나 축복할 이야기입니까? 무언가 비판할 여지를 찾는 사람에게 아마 모든 재산을 혼자만 누리려 한 것이 문제가 아닐까 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는 자선사업까지 행했다면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작정 그를 문제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을 돕는 일까지 행하는 사람을 칭찬할 수는 있어도, 개인적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남을 돕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도한 간섭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비판적인 어조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옳고 그름의 윤리 도덕적인 잣대로 그를 평가하기 보다는 ‘어리석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처럼, 그의 생각이나 행위가 보여준 방식에 대해서 평가를 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보여준 모습이 현명한 방식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현명한 방식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구절인 21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곡간을 더 크게 짓겠다는 생각이 결국 하나님 앞에 부요한 모습이 될 수 없다는 대목입니다.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기준을 하나님 앞에 부요한 모습에서 찾은 것이지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부요한 모습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행위를 대비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쌓는 부가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모습이 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어리석다는 표현은 어떠한 목적에 합당한 수단이나 방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할 때 사용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라고 평가하신 이유는 그가 궁극적인 목적에 알맞는 방식대로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생각해 보면,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비난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성공한 듯 편안한 삶을 살게될 부자를 생각하며 부럽고 또 좇아가야 할 모범적인 삶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현실이라는 전제 안에서 이와 반대로 살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금욕적이고 세속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오늘 현대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삶의 목적과는 달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를 하게 되신 배경이기도 한데, 유산상속에 대한 상담을 청하는 사람에게 자신은 세속의 이해타산을 해결해 주는 재판관이 아니라 더 궁극적인 것을 심판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심판자이시지 소유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 더 중요한 삶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먹을 음식이나 입는 옷보다 우리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점을 재확인 시켜 주신 겁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치 이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 자체 보다 어느새 소유를 더 중요한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본말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세상이 점차 혼돈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리석은 일조차 오히려 부러울만큼 근사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영적인 섭식장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 눈치채셨습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통제에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생명 보다 소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실의 외적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유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극단적인 장애 현상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소유하지 못하면 금새 영적으로 시험이 들거나,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영적인 폭식을 행하면서 끝내 좌절하고 낙망하며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영적 섭식장애 환자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 앞에서 부요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소유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영적 섭식장애에 걸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할 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