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I am, therefore I love

누가복음 13:10-17

오늘 본문은 십팔년 동안 귀신에 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떠한 병에 걸려 고생했는지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여인이 고생한 이유를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은 본문에는 ‘귀신에 들려 앓았다’고 되어 있고, 우리말 개역개정에는 ‘병마’라고 번역된 헬라어 “ἀσθένεια (atheneia)”라는 말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육신의 아픔이나 연약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심적인 상태와 관련된 특정한 상황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첫째로 판단과 이해가 부족한 상황, 둘째로는 큰 일을 행하지 못하는 상황, 셋째는 부정한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과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본문의 치유이야기를 예수께서 단순히 여인의 육신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고치신 사건이 아니라 심적인 상태를 변화시킨 것으로 읽는다면 보다 풍성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여인의 허리를 펴게 하신 치유의 사건은 우리가 지닌 여러가지 영적인 병을 고치시고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했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허리를 펴는 행위는 위에서 나열한 네가지 영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모습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판단과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하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새로운 시선을 갖고 변화된 것은 결국 허리를 펴게된 결정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큰 일을 행하지 못하는 영적 상태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치유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의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치유는 부족한 욕구를 이겨낼 인내를 주실 뿐만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소망을 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허리를 펴게 하신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를 완전히 새롭게 하신 기적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허리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정상인지는 모르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허리가 제대로 굽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위선에 사로잡힌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준수에 대한 형식적 율법에 얽매여서 정작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조차 정죄하려는 그들이야 말로 허리가 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소와 나귀를 풀어내 물을 먹이는 일은 허용하면서도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일에는 소홀하고 있었습니다. 소와 나귀를 풀어내 주는 행위는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먹고 마시는 경제생활’에 대한 것은 허용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그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정작 둔감해 있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강조한 율법의 전통과 해석이 문자적인 형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은 결국 유대의 율법을 바라보는 궁극적인 시선이었던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믿음도 이를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조항이 의미가 없다는 폐기 선언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의 힘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께서 허리를 펴게 하신 치유의 행위는 다른 말로 우리의 영과 시선을 가두고 있던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의 매임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신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성서와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이라는 주제로 강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정작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 부분”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강좌를 기약하며 적당히 마무리가 되어 저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일부의 분들은 “성경에 동성애와 같은 인간의 성문제를 죄로 규정했는가?”의 여부만을 이야기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근해 가는 방식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에 근거한 정죄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인가 아닌가의 시선으로 문제를 접근해 간다면, 결국 우리는 정죄하는 것에 집중하여 급기야는 혐오와 낙인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아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매임을 풀고 허리를 펴는 일이지,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혼돈의 시기에 묶인 매임을 풀고 허리를 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주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기독교적 인도주의 사상가로 알려지기도 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글과 그의 저작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반체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되어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생활을 한 바 있습니다. 그 경험은 그의 저작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10여녀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그는 죄수들이 어떠한 배려나, 양심의 성찰 없이 오직 본능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심연에는 오직 증오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유배지에서 죄수들과 엉켜 살아가면서 도스토예프스키 마저도 자신의 마음속에 그들을 향한 혐오가 자라나 결국 증오심으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유배생활 뒤에 처음 발표한 작품 제목이 “Notes from a Dead House”일 만큼 죽음의 집은 그 자체로 지옥이며, 지옥은 죽어서 만이 아니라 살아서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 그는 주장하였습니다. 이후로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악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하나의 일화를 통해 잘 전달되고있습니다. 양파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농촌에 선행이라고는 전혀 행한 바 없는 아주 사악한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가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호천사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가 생전에 한가지라도 선행을 행한 것이 있는가를 찾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그 노파가 언젠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양파 하나를 뽑아서 준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노파에게 양파 한 뿌리를 하나 주고 그것을 붙들고 지옥불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라고 심판을 합니다. 그러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파가 부서지거나 그 뿌리가 끊어지면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양파 한 뿌리를 노파의 손에 붙들게 하고 지옥불의 늪에서 꺼내려고 합니다. 그 때 지옥불 늪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이를 보고 노파를 붙들려 하지요. 양파를 붙들고 올라가려는 노파의 다리를 잡아 당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자 사악한 노파는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양파는 내 것이지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파의 뿌리가 끊어지고, 결국 노파는 다시 지옥불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천사는 슬피 울며 떠나가게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이 이야기 속의 양파는 사실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대상입니다. 단 한번도 선행을 행하지 않은 여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기회로 제공된 선물이지요. 남은 것은 노파의 선택입니다.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다른 죄인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때, 노파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며 그들을 발로 차버립니다. 양파를 자기가 가진 소유로 생각하고 그것이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대가로 받은 것이라 착각한 결과이지요. 잘못된 믿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을 막고 있었던 것. 이것을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만의 것이라 생각해서 발로 다른 이들을 걷어 차버린 바로 단절의 행위. 그것이야 말로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양파가 끊어진 것. 상징적인 표현이지요. 이러한 단절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만들고, 그 증오는 결국 우리를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죄악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절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만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소설을 통해 두 가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공상적 사랑(Love in Dreams)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공상적 사랑의 대표적 예로 인류사랑을 듭니다. 방대하고 추상적인 인류사랑이라는 말은 사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자기 중심적 사랑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반면 실천적 사랑은 바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며, 그것도 평생을 책임과 의무를 다해 행하는 사랑이 바로 실천적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잘 표현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유일한 계명이기도 했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지상 명령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실천적 사랑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하며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곰곰히 되새겨 볼 수 있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행여 우리도 모르는새 단절과 증오를 위해 그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무엇이 정말 죄인가를 가지고 서로 단절해 가는 오늘의 시대가 놓치고 있던 가장 큰 죄악은 사실 서로를 향한 단절과 증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여전히 명쾌하게 무엇이 답이다 제시하지 않는 저를 두고 답답해 하실지 모르지만,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이전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의 입장이 맞으면 하겠다는 조건적이면서 결국은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하는 한 행해야 할 삶의 이유이자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의 굽어진 허리를 펴게 할 말씀입니다. 먼저 매인 마음을 풀고 이 거룩한 책임을 짊어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