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해 주겠니?

누가복음 14:7-14

지난 10여년간 학교와 교회에서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주 접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꿈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현실 속에서 꿈이라 믿었던 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 오는 실망과 두려움,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한마디로 꿈을 꾸는 것과 꿈을 이루는 것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삶의 주체인 자기 자신 조차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섣불리 이것이라 결정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을 꿀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나아가 무엇을 위해 꿈을 꾸어야 할 지에 대한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하여 신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마치 양희은의 노랫 가사말처럼 엄마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적어도 나보다 나은 엄마’가 되라는 희망의 말이었던 것처럼, 저역시 여러분에게 지금 기성 세대 보다 나은 꿈을 꾸어 보라는 격려와 소망의 말 이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목회자로서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잘 믿어라”라고 하면 너무 교과서 같은 말이라 “우리도 그게 중요한 거 다 알아요”라고 하지 않을까? “성실한 신앙인이 되라”고 하면 “우리도 애쓰고 있으니 당신이나 잘하세요” 하지는 않을까? “사랑해라”고 하기에는 때로 나조차도 너무 버겁고 힘든 것이어서 젊은이들이 상처는 받지 않을까 차마 쉽게 꺼내기가 두려워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전할 이야기를 대신해 보고자 합니다.

비유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태도와 함께 초대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초대받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스스로를 낮출수록 높아질 것이지만 반대로 스스로를 높이려하면 결국은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시기를 혼인잔치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자기 스스로를 최고로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만의 기준일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인이 와서 더 귀한 사람을 위에 앉혀서 수모를 당할 바에는 오히려 맨끝에 앉았다가 남들에 의해 위로 올라가는게 보기 좋다고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의 핵심은 스스로를 낮추려는 겸손이나 겸양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겉으로는 겸손한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건 진정한 자기 내려놓음의 모습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더 궁극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마음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비유의 말씀에서 이를 잘 나타내 주는 상황이 바로 자리를 정해주는 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결국은 초대한 주인의 몫이라는 부분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혼인잔치로 비유된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결국 구원의 사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에서 최종 결정권을 손님이 아닌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심판은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구원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젊은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진정한 행복을 꿈꾸면서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도 이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에서 행복을 찾고, 또 그것을 최종의 꿈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젊은이들이 더 나은 위치를 점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자기 삶의 상당부분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남부럽지 않은 재력과 권력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감을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만족도와 생활수준이 늘 비례하는 법도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주어진 조건으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들과 피터팬을 꿈꾸며 사는 말그대로 동화같은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동화같은 꿈은 끝내 꿈으로만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이처럼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행복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만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판단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은혜인 것처럼 행복의 기준도 사실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두가지의 숨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유한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을 때 비로소 진정한 만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제품의 사용법인 메뉴얼(manual)을 따를 때 만족스러운 사용이 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 때 비로소 행복한 삶이 가능해 질 수 있는 법입니다.

더불어 행복의 기준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은 소위 우리에게 “배꼽의 평등성”이라는 선물을 덤으로 가져다 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똑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아무 노력없는 열매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과 실제로 일을 하여 결실을 맺는 것과는 다른 말인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처럼 아예 그 평등성이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현실의 불공평과 불공정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비판할 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면 주어진 조건에 대한 불만이 나를 자포자기 하게 만드는 정당화의 원인과 비난의 화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젊은이들이 시대의 변화를 꿈꾸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분노의 폭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명으로서 변화를 꿈꾸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꿈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나만 홀로 채워지는 만족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채울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혼인잔치에서의 비유는 초대한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을 통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첫번째 초대받은 사람에게 주신 말씀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권면의 대상을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영접한 이들,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로 고백한 믿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향해 주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믿음의 자녀들이 어떠한 자세를 취할 것인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는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구별해서 초대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별도 결국은 자기가 기준이 되는 꼴 아닙니까? 구원으로 초대받을 만한 사람을 구별해서 인도하라는 것이라기 보다 이 말씀은 되갚을 것(댓가)을 바라지 말고 조건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요즘처럼 연줄이 좋아서 사람 잘만나 출세하고 성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 봐가며 사귀고, 구별해서 차등적인 인간관을 가지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지요. 말그대로 그것도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그건 탐욕의 다른 이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받아야 할 상급을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쳐주신 겁니다.

언젠가 이러한 말씀을 접할 때마다 실망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젊음의 열정으로 가득찬 때에 이 말씀은 속된 말로 김새는 말처럼 느껴지기 일수였습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구하라는 말씀이 지금은 ‘뭐 별 볼일 없다’는 식으로 다가오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고, 또 남들 다 잘먹고 잘사는 데 나만 뒤쳐져 있는 것 같아도 그냥 눈감고 넘겨버리라는 뜻인가?’ 라는 불만이 폭주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곰곰히 되씹으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저에게 전하라고 하신 뜻은 그저 “예수 잘 믿어라”, “성실하게 신앙생활해라”, 그리고 “무조건 사랑해라”는 권면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과 현실의 차이를 설명하시면서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요? 딸이 커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권면하는 부모의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발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 역시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바라는 꿈을 꾸고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께서 원하신 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예수님이 원하는 그것을 위해 꿈을 꾸려고 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기 전에 그저 사랑하는 이들을 조건 없이 기다려 주시며 사랑하신 것 아니었을까요? 이미 청년의 과정을 지난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것도 이제 미래의 세대를 위해 판단하고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기다리며 섬길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미래의 일꾼인 젊은이들에게는 ‘우리 세대보다 조금 나은 모습으로 꿈을 꾸어 보라는’ 그 권면에 대한 약속을 청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함께 그리스도의 꿈을 함께 나누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시대를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울 수 있는 우리 서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