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인가?

시편 14, 누가복음 15:1-7

일부의 신학자 중에는 성경의 구약에 “나”라는 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의 백성으로 혹은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개체인 왕 만이 나타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사회가 공동체를 강조하는 전통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의 상황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창1:26)'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의 전통에서 한 분을 나타내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복수로 칭했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거나 다신론의 역사적 증거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과도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 유대사회를 비롯한 동방의 정서 자체가 왕이나 절대권력자를 일컬을 때 ‘나’라는 말 보다는 ‘우리’라는 복수를 쓰는 것은 흔한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로서 왕도 ‘우리’라고 표현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우리’라는 용어로 기록한 성경의 표현도 전혀 놀라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나’를 혼용해서 쓰다보니, 듣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주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하자 원주민이 다 돌아가 버렸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우리’라는 말을 자기들은 물론 원주민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가리키며 한 말인데,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그 말을 선교사들에게만 적용시켜 들었던 겁니다. 선교사들이 와서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니,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죄인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에 대한 개념을 달리 해석하기는 오늘 신약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그 날도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 사이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율법의 조항을 거론하며 예수를 비난하던 이들을 흔히 통칭하여 ‘정통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반면에 정통파들은 자신과 달리 율법에 어긋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땅의 사람”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곤 했습니다. 정통파의 눈에 땅의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죄인이자 자신의 경계 밖에 있는 다른 사람, 곧 타자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정통파들이 강조하던 율법의 규례 조항도, 땅의 사람들과는 거래는 물론이고 함께 있는 것조차 금하는 규정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정통파의 입장에서 땅의 사람들과 가급적 거리를 유지하고 사는 것은 자신들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땅의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교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부정한 일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죄인은 결코 그들과 같은 ‘우리’가 될 수 없는 경계 밖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통파의 이러한 생각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편협한 마음을 열어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목자에게 잃은 양 한마리를 찾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찾았을 때 얻는 그 기쁨은 무엇보다 크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분명 비유에서 나오는 잃은 양 한마리는 죄인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7절을 보면,  다시 되찾은 양을 두고 회개하는 죄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행하실 일이 바로 길잃은 양을 찾아서 본래 있어야 할 그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정통파들의 눈에 땅의 사람들은 그저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리면 좋을, 쓸데없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말 소멸되어 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라져 버려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길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경계 밖으로 폐기 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시 품 안으로 되돌아오게 해야 할 회개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이들을 경계밖으로 내몰려한 소위 정통파들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오늘 구약의 본문인 시편의 말씀을 정통파들에게 자세히 읽어보라고 충고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하며 땅의 사람들에게 정죄를 일삼았던 정통파들도 결국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하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통파의 기준으로 의인과 죄인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구별이 되는 것이지요. 땅의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달린 일이지 정통파의 자기 기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든지 정통파도 땅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역시도 잃어버린 양 한마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신 우리의 경계는 곧 하나님의 뜻이지 정통파의 판단이 아닙니다. 진정 땅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통파들은 마치 하늘에 속한 사람들, 곧 우리라는 경계를 땅의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처럼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를 바로잡아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의 경계는 ‘우리’와 다른 이를 정죄하고 폐기처분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집을 나가 길을 잃은 죄인이라 하더라도 다시 되찾고자 하는 사랑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땅의 기준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를 두고 구별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하늘의 기준은 ‘우리’와 다른 이들 조차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구별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아흔아홉마리의 양처럼 한마리의 생명도 소중하게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집단이 아니라 한마리 양이라는 개별적 대상에게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라는 말 속에 모두를 포함시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까지도 그 경계를 허물고 이 땅에 보내신 것 아닙니까? 모두를 사랑하시어 땅의 사람들이라 손가락질 받던 죄인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신 것 아닐까요?

정말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하늘에 속한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오늘 끊임없이 나와 다른 ‘땅의 사람’들을 우리라는 경계 밖으로 내모는 무관심과 증오가 아니라 나와 다른 잃어버린 생명 하나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소명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의 경계를 없애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늘의 경계만 존재할 뿐 땅의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랑만이 우리를 진정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