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1-13

오늘 본문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설명은 물론이고 이를 해석해 놓은 부분까지 우리의 상식이나 논리적 판단과는 너무나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의 말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부터 8절까지의 상반부는 비유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고 이후 8절 후반부부터 12절까지는 비유의 해석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전체적인 비유의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는 부분은 마지막 13절에 가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전체적인 목적에 해당하는 13절의 말씀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주종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누군가를 주인으로 삼고 자신은 종이 되는 관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주인으로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떻든 주인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인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삶의 궁극적인 우선순위도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앞부분은 바로 이를 염두해 두고 이해할 때,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첫번째 단락은 이 비유의 제목처럼 어떻게 청지기가 불의한 자가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한 부자의 집에서 그의 소유재산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부자는 흔히 “부재지주”라 해서 모든 것을 청지기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가끔씩 자신의 토지에 들러 확인만 하는 사람인듯 보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당장 이 비유의 주인공인 청지기가 지주의 부재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한 불의한 자라는 속단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러한 단정을 잠시 보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8절을 보면 주인이 오히려 청지기를 칭찬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태도가 불신에서 청지기에 대한 신뢰로 바뀐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원문을 살펴보면, 이를 수긍할 수 있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인이 청지기를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된 계기가 바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비유의 이야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는다’로 번역해 놓은 헬라어 ‘디아볼로(διαβάλλω)’는 ‘부당하거나 악의적으로 속인다’라는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로 부터 듣게 된 청지기에 관한 소문은 악의적으로 꾸민 거짓말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잘못된 정보를 듣고 주인은 자신의 청지기를 해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청지기는 악의적 소문과는 달리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후에 그가 벌인 일을 보면 결코 소문이 악의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에게는 다소 억울할 수 있는 소문 때문에 결국 청지기는 주인으로 부터 쫓겨나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일자리를 잃게된 것에 대해 분개했을 겁니다. 해고 당한 실직자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극심한 상황이었을테니 말입니다. 3절은 그의 심적 상황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실직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는 “땅을 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땅을 파는 일은 당시 광산에서의 일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요즘과는 달리 그것은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매우 극단적인 선택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빌어먹을” 상황까지 생각하게 되지요. 생계를 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가 불의했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생존을 해야 하는 청지기에게 그 순간은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당장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4절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그가 벌인 보복의 과정 내지는 장래를 위한 준비 상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주인에게 해고를 당하고 난 뒤 그가 먼저 행한 일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부채의 탕감은 자신에게는 경제적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주인을 골탕먹이는 일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하지만 청지기의 입장에서 이는 임의대로 빚을 일정 부분 탕감해 줌으로써 빚진 자들에게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의 이자는 고리대금으로 유명할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해고한 결정적인 이유가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는데, “낭비한다 ’διασκορπίζω(diaskorpizo)”의 헬라어 원뜻이 “걸러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지기는 살인적 이자로 차익을 남기던 당시의 불의한 상황에서 오히 부정한 이윤을 걸러내는 일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불의한 세상에 대응하여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활약했던 의적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을 정도로 말이지요. 9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불의한 맘몬을 가지고 호의를 얻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불의한 맘몬의 장난을 걸러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를 두고 주인이 자신의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라면 정말 현명한 사람이자 멋진 주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기는 했어도 세상의 불의한 상황을 바로잡은 자신의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하여 용기를 주는 행위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한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비유의 제목은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 의로운 주인과 청지기라고 바꾸어야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두번째 단락인 8절 하반부부터는 예수께서 하신 이 비유의 이야기가 결국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비유에 빗대어 예수께서는 적어도 거래에 있어서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보다는 슬기롭게 행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도 세상 경제활동에 눈을 뜨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종의 비유적 표현인 셈입니다. 받은 것을 되갚아 주는 것이나 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취하는 세상의 방식은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재산을 늘리기 위해 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얼마나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합니까? 또 그 방법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치밀합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믿음의 사람들, 곧 빛의 자녀들에게 권면을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도 세상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애쓰는 만큼 자신의 영혼과 관련한 일에 관심을 갖고 슬기롭게 대처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맘몬을 섬기는 세상의 원리와 방식은 매우 세련될 만큼 정교합니다. 이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정과 의지도 뜨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들의 모습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갈구하는 이들조차 보이지 않는 영적 생활에 건실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정말 너희가 믿는 삶의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 맞는가? 과연 너희가 세상의 맘몬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라고 말이지요.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고 오늘날의 경제관념이나 합리적 사고와는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비유 속의 청지기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행위는 이러한 의미에서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지금 시장의 교환방식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애초 목적이기도 한 누가 삶의 궁극적인 주인인가만이 관심의 주제입니다. 크고 작은 정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가만이 중요한 관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가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말입니다.

비유를 이제 예수님의 관심사이기도한 하나님 나라의 상황으로 바꾸어 이해해 볼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맘몬이 아닌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의 진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나라를 위해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청지기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의로운 청지기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재화인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와 같은 것을 잘 활용해서 더 큰 열매를 맺는 모습 아닐까요? 이를 위해 어떻게든 열정을 가지고 고민하며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반면 불의한 청지기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여 나누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맘몬에 마음을 빼앗겨 나누기 보다는 소유하고, 그것도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하는 욕망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주 단순한 이치입니다. 돈을 가지려고만 하면 맘몬의 유혹이지만, 돈을 나누려고 하면 하나님 나라의 재화가 됩니다.

오늘날 시장경쟁으로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던지시는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불의한 청지기 입니까? 아니면 칭찬받는 의로운 청지기 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