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신(God of Gaps)

누가복음 16:19-31

1.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저마다 사후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미지와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그려보는 상상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보통은 가장 이상적인 세계와 가장 고통스러운 세계로 대비하여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신앙인들에게 이 둘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에 대해서 묻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먼저 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고통과 소외의 연속이라 믿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모든 이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구별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천국과 지옥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자와 지옥에 가는 자를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갈 수 있는가를 두고 고민하고 어떻게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구별짓는 그 무언가가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 또한 결정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는 이를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경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기준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의 비유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던지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16장 전체에 걸쳐서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앞의 14-15절을 보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 비판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이 선택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일 뿐이었던 겁니다. 부자와 거지에 대한 비유도 어떤 의미에서 부유한 현실을 의로움의 보상이라 생각했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던지신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메시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번영과 복이 결국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얻은 보상이나 다름 없다고 여기던 율법주의의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믿고 있는 현실의 번영과 사후의 천국이 결코 그들이 믿고 싶은대로 될 수만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3.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비유 속 이야기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던 부자이고, 다른 한사람은 나사로라 불리던 거지입니다. 흥미롭게도 현실에서 그 둘 사이를 가르는 지점을 예수님은 바로 부자의 대문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대문 안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대문 밖에서 종기난 몸으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지는 들개나 다름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져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비유의 말씀에서 이름이 거명된 이는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비참한 거지였다는 점입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그의 이름이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요 피난처이시다”는 의미의 나사로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22절에서 이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자세한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그가 간 곳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반면 부자는 음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비유 이야기의 비중이 천국 간 거지 보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야기의 배경도 천국에 대한 묘사 보다는 지옥에 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지옥에 대한 묘사를 이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구렁텅이를 사이에 두고 천국과 마주하고 있다는 지옥의 묘사입니다. 어떤 점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구렁텅이를 사이에 두고 빤히 바라다 볼 수 있는 거리에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져 있다는 설명은 놀라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과 대비되면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영원히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 바로 이것 아닐까요? 저기 천국이 훤히 보이는대도 마음대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넘어갈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만일 이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면, 정말 지옥같은 삶을 산다고 절규하지 않을까요?

4.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대로 천국과 지옥의 경계인 구렁텅이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단절된 지점을 상징합니다.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언젠가 저 천국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막아버린 경계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구별짓는 장벽과도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후에 천국과 지옥을 나눈 구렁텅이처럼 현실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계를 예수께서는 이미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바로 부자의 집 대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구렁텅이와 살아 생전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나누었던 대문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대비시켜 말씀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서로를 갈라놓은 경계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은 구렁텅이는 다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만, 현실의 대문은 얼마든지 열어서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부자와 거지가 단절되어 있었지만, 만일 마음만 먹고 열어두었다면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바로 대문이라는 겁니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살아서 문을 열고 가난한 이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구렁텅이로 가로막힌 희망없는 세상을 보게 될 것이란 경고입니다.

5.

이제 우리는 한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비록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지는 않아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비유는 분명한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거지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행한 결과라고 비유는 말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이유라는 겁니다. 대문을 열어 그의 절박한 현실을 한 번이라도 내다 보려 하지 않은 무관심이 바로 이유라는 것이지요. 비유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서 자신의 대문 밖을 한번이라도 내다보고 그의 고통에 반응했더라면, 어쩌면 그가 맞이한 사후의 세계는 구렁텅이 건너편 천국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말씀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고통받는 세상 밖 사람들의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로운 삶은 당연히 누릴만한 하늘의 축복이라고 믿었던 바리새파인들과 당시의 유대지도층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었던 겁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바로 눈 앞에서 고통받던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럴만한 댓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라며 정죄를 일삼던 이들에게 비판의 칼을 겨누신 말씀이었습니다. 현실 속 대문에 갇힌 그들이야말로 사실은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셈이지요.

6.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2천년을 흘러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행여 우리도 오늘 절박한 고통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마음의 대문을 걸어잠그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성공과 풍요만을 꿈꾸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내 필요와 욕망에 맞추어 믿음도 재단하는 이기적 신앙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재점검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학 용어 가운데 “틈새의 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의 과학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말하자면 그 틈새를 통해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는 생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바꾸어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틈새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믿음이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 삶을 가르는 수많은 대문과 구렁텅이와 같은 틈새들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에 여전히 존재하는 빈부의 틈새, 인종의 틈새, 성별의 틈새, 이념의 틈새 사이에서 진정한 천국 소망을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