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크가 아닌 러브로

누가복음 14:25-33

히틀러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1934년 독일의 나치주의에 반대하여 본 회퍼와 칼 바르트 등의 신학자가 주축이된 고백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설립 다음 해인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고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국가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고백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신앙적 신념 속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당시 독일에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제국교회가 개신교회의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들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고백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본회퍼는 독재에 굴복한 당시 독일 제국교회가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어치 없는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꼴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살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던 겁니다.

종전을 얼마 앞두지 않고 결국 나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본회퍼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제자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고백교회의 저항 운동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불의와 부정한 현실은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암울한 시대와는 또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던 예수께서 문득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혈육은 물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길을 함께 따라나섰던 이들에게 이 말씀은 실로 엄청난 요구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씀이야 헌신의 맹세 정도로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혈육들마저 미워하라는 말씀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겁니다. 마치 모든 인간관계를 부정하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 대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과 사역에 헌신하기 위해 사람들과 떨어져 수도원 생활을 하던가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드문 오지에서 평생을 선교사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사람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살려고만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까요? 예수께서 원하시는 이 땅의 모습이 이처럼 극단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 요구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우리의 마음가짐과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두가지 상황을 예로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울 때의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할 때의 준비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망대를 세우는 공사를 위해서는 먼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미리 예측해야 한다는 점에 예수님은 주목하셨습니다. 철저한 계획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가는 기초만 쌓고 끝나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전쟁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전쟁에서의 실익을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 이길만한 군사력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절차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될 바에는 미리 평화 체결을 맺어 놓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이를 제자가 되기 위한 자세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결국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제자로서의 능력이나 그 길을 가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제자의 길을 가기 전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먼저 정리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오래전 입대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긴장되고 걱정된 마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군막사로 이동하자마자 엄격한 조교가 갓 입대한 신병들에게 했던 경고의 메시지가 기억이 났습니다. “이제 너희는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다. 그러니 사회에서 너희가 무엇을 했든, 어떻게 살았든, 누구의 아들이었든 상관없이 지금부터 너희는 대한민국의 사병일뿐이다. 이전 일은 다 잊어버려라.” 참 매몰차고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모든 소유물을 내려놓게 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걱정하지말라며, 모든 것은 국가가 다 지급해 주니 오직 너희가 구할 것은 국가의 안전과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삶은 다 잊고 이제부터 군인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면서도 왜 그렇게 몸서리치도록 무서운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앙도 이렇게 경고하는 메시지로 들린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할까요? 아니 과연 얼마나 그 길을 제대로 갈 수나 있을까요? 몇몇의 ‘독한’ 사람만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가 본회퍼의 신앙고백을 입술로 행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독재에 항거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중 상당수는 애당초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갈 수도 없다는 이야기인 걸까요?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조금은 숨쉴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앞의 모든 이야기를 함축한 말씀이기도 한데, 바로 자기의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을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길로 정의내리신 것이지요. 물론 소유를 버리는 일 역시 쉬운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건 그만큼 제자가 되는 길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소유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소유 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정말 제자되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만 한 걸까요?

최근 이어령 박사의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만 소년”이라는 일본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식용으로 출하하는 양을 기르다가 양에게 정이들어 그만 이름을 붙여준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년이 양에게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 양은 더이상 식용 가축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소년의 친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이 구분된다고 주장합니다.

양을 먹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은 라이크이지 러브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잡아먹으면 맛있고 배가 부르니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이 생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개도 식용으로 먹는데 그건 개를 좋아하는 특이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랑 “애(愛)”를 붙이면 순식간에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애완용’ 펫 pet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먹지 않고(소유) 아껴주며 생명의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사람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배경과 재산과 같이 소유를 보고 좋아한다면 그건 라이크의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마음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것을 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누구의 명령에 의해 강압적으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치 군대의 강압적인 규율과 원칙처럼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중압감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가까운 혈육 조차도 미워해야할 만큼 지독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가는 무미건조한 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사랑이 없이 오직 신념으로만 사로잡혀 가는 길이라면, 행여 그것은 히틀러나 많은 독재자들이 고집했던 국가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독재자가 지배하는 엄격한 훈육사회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예수께서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하신 요청은 우리에게 라이크의 감정이 아니라 러브의 감정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신을 위해 남의 것 조차 탐하며, 타인을 라이크의 대상과 도구로 삼는 모습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자가 되는 길, 그것은 결국 러브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을 싸구려 라이크로 만드는 시대는 아닐까를 우려하며 바라보곤 합니다. 예수의 사랑 조차도 외적 성장과 기복적 신앙이라는 라이크를 위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위해 타인을 욕망의 도구나 대상 정도로 여기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던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은 우리가 소유하기를 욕망하며 모든 것을 라이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러브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러브, 거기에 제자가 되는 길의 해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