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세상 만들기

마태복음 3:13-17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홍콩과학기술대의 사회심리학 관련 연구발표에 따르면 욕을 잘할수록 정직할 가능성이 크다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욕설이 여과되지 않은 진실한 감정 표현 방식이라는 점에서 사회 규칙에 구애를 받아 오히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연구의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억압과 왜곡이 만연한 세상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정도 삐딱한 모습은 도움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직해 지기 위해 욕설을 권장한다면, 일에 선뜻 동의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논문 전체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직하다는 정의도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한다는 정도의 국한된 표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간에 상관없이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표현한다는 것을 정직이라고 정의내린 것이지요.

아마도 자기 감정을 아무 여과 작용도 거치지 않고 표출해 내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자신은 정신적으로 건강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욕을 들어야 하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결코 긍정적인 효과만을 갖는 것은 아니라 말할 있습니다. 흔히자신은 뒤끝이 없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할말 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하고 끝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아닐까요? 사실 정직이라는 말은 개인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뜻에 어울린다기 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두가 옳고 의로운 일이라 동의하는 일을 어떤 상황에서든 지킬 있을 사용하는 말이라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직설적으로 욕할 있을 만큼의 배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향한 의로운 마음이 아닐까요?

 저는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을 통해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향한 의로운 마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당시 요단강가에서 물세례를 행하던 요한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도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을 찾아 가셨다는 점입니다. 세례에 대한 의미를 알고 계신 분들에게 부분은 조금 의아하게 여겨질 있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인데, 죄사함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예식인 세례를 받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던 요한 조차 세례를 구하는 예수님의 요청에 손사래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말씀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의를 이룬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 5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한몸을 가진 나무에 비유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지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병이 들어 버린 겁니다. 가지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양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나무인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받으시려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손가락 하나만 병이 들어도 결국 사람은 병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지인 우리가 죄로 병들었으니, 되신 주님이 아픈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아파할 , 주님도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신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손가락은 스스로를 고칠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손가락의 주인이자 몸의 주체인 내가 병원을 찾아 고침을 받아야만 하지요. 병든 가지와 같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가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죄의 유혹에 금새 빠져 버릴 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제자가 잘못을 범할 스승이 벌을 대신 받았다는 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이유는 잘못 가르친 스승을 처벌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제자가 보고 깨우쳐서 다시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대신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악용해서 제자가 지속적으로 잘못된 일을 행한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몸을 씻었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부터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씻김 받은 자신을 더욱 살펴 조심해야 옳은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내면의 변화를 실천하는 참된 제자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이 아무리 제자의 잘못을 대신하여 벌을 받아 무마가 된다해도, 제자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재차 악행을 범하면 결국 책임은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 해도, 그것을 향한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주님을 배반하며 깨닫지 못한 우리들을 위해 끝내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지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제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갈 것을 당부하신 아닙니까?

신학자인 틸리히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 있습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용납하는 것이다.” 쉽게 풀어보면, 믿음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행위라 있습니다. 스승이 자신을 위해 벌을 대신 받을 , 의미를 깨닫고 변화되는 제자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로 씻김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은혜를 믿음으로 깨닫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는 뿐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로운 제자의 모습이라 있습니다.

결국 제자의 길이란 이와 같은 의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바라시던 땅의 모습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운데 실현하는 모습이라 보셨던 것이지요. 나아가 예수께서는 이처럼 모든 의를 이룰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진 새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도 비둘기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새가 독수리입니다. 특히 독수리는 로마의 제국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독수리는 평화의 비둘기를 잡아 먹어야 있습니다. 반면 비둘기의 입장에서는 자기 희생을 통해 평화를 지키고, 생명도 살리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독수리로 상징되는 세상의 논리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힘의 법칙이라면, 비둘기로 대표되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남을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생명의 법칙이라 있습니다.

힘으로 자기 혼자만 살고자 하는 세상은 마이너스의 세상입니다. 이기와 억압의 땅에서 열매는 자라나지 않습니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하려 드는 세상은 부족과 결핍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열매를 맺을 있듯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보다 남을 우선하는 세상에서 생명이 자라납니다. 서로 나누어 주려는 것에서 기쁨과 삶의 목적을 얻는 세상이야말로 날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로운 세상도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지난 주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은 국정농단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전 청와대 민정수석입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사법시험을 통과한 뛰어난 인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학창시절 수석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수재였던 그의 학생기록부를 보면, 장래희망이 늘 검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정의로운 법조인으로 살고 싶다는 포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각고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이 꿈꾸던 검사의 자리에는 올랐지만, 결국 검사가 되고자 했던 원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검사가 되어 청산시키고자 했던 부정부패의 당사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성공한 삶인지 몰라도,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는 부정직한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반면 35년에 걸쳐 9조원이라는 재산을 익명으로 기부한 85세의 사업가인 찰스 피니의 이야기는 그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전 재산을 다 기부하고,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임대 아파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소유를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기 보다 자신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공평한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개발국가의 미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해서도 많은 기부를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유산으로 남겨줄 재산이 더이상 없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그의 기부를 통해 자라나는 미래의 꿈과 열매들을 생각하며 그는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느끼며 만족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가 진정 생명의 열매를 맺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누가 우리 시대를 의롭게 하고 정직한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요?

시편 33: 4절은 여호와의 말씀을 정직하다고 찬양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깨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향한 시선과 내면의 깊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어 성숙해진 사람입니다. 생명을 살리며 열매 맺는 길을 가는 비둘기 같은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정직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의를 이루는 길이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