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길, 제자의 길

요한복음 1:35-42

 

외부의 시기와 지나친 압력에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순간, 스승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제처럼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서서 날 필요로 하는 환자들 계속 기다릴 거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저항은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거야.” 이 단호하고도 묵직한 메시지는 자신의 위치에서 오직 환자만을 생각하겠다는 한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일자리를 뺏겨버릴 지도 모른다는 매우 현실적인 불안감 앞에서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스승을 이처럼 드라마에서만 찾을 수 있다면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를 어떤 이는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 줄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한 명문사학의 학사 부정사건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가치를 지키고 학생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주어야 할 교수들이 오히려 부정한 일에 연루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이 파헤쳐진 이후에도 진실을 추구해야 할 스승들이 오히려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반면교사의 역할을 했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역시 스승의 위치에 계셨던 여러 분들에게서 “저렇게 하면 안되겠다”는 방식으로 교훈을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불만으로 가득차 부모를 보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삐딱하게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지요. 그런데 이제 그 맘 때 저만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이 되니까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지만, 이제 목회를 하며 젊은이들을 대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행여 나 역시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의 대상이 된 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제자의 길” 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듣는 이야기는 대개가 제자가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어떤 스승이 되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많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참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논의의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삶으로 보면, 우리는 분명 참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기도 하지만, 우리 서로에게는 스승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궁극적인 가르침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통해 얻지만 그것을 얻는 구체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 서로를 통해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에게 교회출석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통해 살아있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제자가 되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바람직한 ‘스승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참된 스승과 제자의 길에 대한 예시를 동시에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적절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서른 한 살의 성인이 된 우리 교회가 이 말씀을 통해 참된 제자의 길을 가며 동시에 세상에는 모범이 되는 스승으로서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우리 시대 참된 스승의 모범을 제시해 준 세례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함께 있던 자신의 두 제자에게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말은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말을 듣자마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따르던 스승을 뒤로하고 새로운 스승을 따라 그의 제자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물론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스승-제자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제자 관계, 곧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는 내용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안다해도 인간적으로 자신의 제자를 다른 이에게 떠나보내는 심정이나 결정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제자로 키워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제자로 만들기 위해 공들인 노력과 수고는 물론이고 함께 한 세월의 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꼭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제자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의 위신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기에 매우 불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 실제로 일종의 배신이라 해서 제자의 앞길을 막아 서는 스승도 적지 않습니다.

만일 세례요한도 이같은 생각에 머물렀다면, 하루아침에 자신을 등지고 떠난 제자들이 불쾌하고 괘씸하게 보였을 것은 당연합니다. 헌데 세례요한은 결코 그들을 붙잡거나 헐뜯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 분을 고백하며 오히려 그의 종이 되는 것을 독려해 주었습니다. 더 큰 길을 향해 가는 제자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오히려 축복으로 보내 주었던 것이지요.

우리 교회가 올 해로 창립 31주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우리 교회는 매주일마다 들고 나는 성도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던 교회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는 졸업이나 직장문제로 이동이 매우 잦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등록 교인에 비해 매년 순수 방문이나 일정기간만 출석하는 교인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전출과 전입이 너무 빈번해서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겪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교인의 수가 생각처럼 산술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들어오는 성도들을 억지로 붙잡아 두기만 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종종 주장하지만 교회는 “종착역”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정거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이 잠시 머물며 쉼을 얻는 곳이지요. 교회에서 힘을 얻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젊은이들도 주님의 제자로 잘 양육시켜 언젠가는 세상 속에 나아가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파송하는 역할을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늘 흐르는 물처럼 생명의 활력이 넘치고 막힌 구석이 없이 열린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요즈음은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모여서 큰 무리를 이루는 대형교회는 되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의 사다리 최정점에 서지는 않더라도,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큰 아름드리 나무로 쉼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묵묵하게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면서, 이곳을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가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하고 영육의 안식을 제공해 주는 교회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축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길이 아닐까요? 제자를 예수께 보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예비자로서의 길을 다시금 되뇌었을 요한에게서 이와 같은 참된 스승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큰 스승을 따르던 제자의 모습도 참된 스승의 길을 훌륭히 수행하는 참 제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스승인 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향했던 두 제자 중 한 사람을 안드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는 제일 먼저 자기 형제인 시몬을 찾아 그가 만난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안드레가 보여준 제자로서의 모범은 매우 명료한 것입니다.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을 가진 것이 그 시작입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는 주님이 계신 곳을 보고 함께 하기를 결정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명한 곳으로 가라고 하셨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삶의 가치를 제시해 주는 방향인 것이지요. 안드레는 주님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고, 그 뜻에 반해 그와 함께 살기를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안드레처럼 주님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고 모인 제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구원을 얻으려는 개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나아가 안드레처럼 형제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 기쁨과 사명을 동시에 안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신앙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복음을 함께 나누는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도 힘써 일하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죄악된 삶을 정화시키기 위해 영적 수련을 행하는 것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죄악에도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기독교적 정의의 실천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과 같은 참된 스승, 그리고 그 아래서 성장하여 참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었던 제자 안드레를 통해 결국 시몬 베드로와 같은 결실이 맺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게바라고 부르셨습니다. 게바는 히브리어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후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리라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시작이자 뿌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큰 제자가 된 베드로 한 개인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를 만든 시작이자 뿌리가 된 반석과 같은 믿음을 두고 하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반석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바로 요한과 같은 스승과 안드레와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서른 한 살이 된 우리 교회가 닮아가야 할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한편으로는 묵묵히 제자를 길러내는 스승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참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 갈 때, 분명 주님이 우리에게 반석과 같은 믿음과 더불어 결코 변함이 없이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