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 오너라

마태복음 4:18-22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한 첫번째 사역이 제자를 만드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회개를 통해 변화될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 있을 것이라 이해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의 내용이 실현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부분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회개의 대상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뜻을 함께 이루어갈 동역자로 제자를 먼저 찾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을 부르신 본문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을 있는 부분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이지요. 요한 웨슬리도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라고 있습니다. 영적 세례를 통해 변화된 제자를 길러내고,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손과 발이 교회를 직접 세우셨던 겁니다 발걸음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대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소명의 순간이라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그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부르심”, 소명을 통해 제자를 만드는 가장 단계를 시작하신 것이었습니다. 부르심의 내용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따르라 명령 속에는 두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뒤에 있으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따른다 말의 가운데는 뒤에 선다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주님의 뒤에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의 뒤에 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의미로 이해할 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 의미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말의 이면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나를 해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앞을 주님께서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다윗의 고백은 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어릴 어디를 가든지 어머니의 뒷자락을 잡고 뒤에 달라붙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수줍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고 불안할 , 어머니의 등뒤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공간이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머리 위로 한뼘 이상이나 형의 등뒤에 있을 만큼 마음 편한 곳도 없었습니다. 동네에서 쓴다는 형들의 험악한 인상을 피하기에 그처럼 안전한 곳이 없었다는 기억이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뒤에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느낌을 있을까요? 죽음의 권세도 이기신 능력의 주님. 작은 신음에도 반응하시는 위로의 주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주님.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은혜로운 주님. 어떤 말로도 형언할 없는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받고 있는 아닐까요? 이러한 주님의 뒤에 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마냥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축복된 자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없습니다. 소명은 십자가의 짐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16:24) 고난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향해 가는 축복된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짊어져야 십자가를 짐처럼 여기며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때가 있습니다. 해야 섬김과 봉사가 귀찮고 버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고 내려놓고 싶다는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믿고 시험 들었다는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복된 것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최근 젊은 부부들 가운데 아기 육아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많습니다. 예전과 달리 생활도 빠듯하고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할 만큼 주변 여건이 원인 제공을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은 아이 교육과 육아 방식에 대한 정보도 너무나 많아 오히려 혼선을 빚을 때가 있습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남보다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신념도 육아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 저것 고민하고 해야 일이 많은 상태에서 아기 육아가 힘들고 고된 노동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부모들조차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하던 세대였기 때문에, 비록 대상이 아이나 자신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아닌 다른 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받아들여질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보면서도 하늘의 선물이 아닌 마치 삶에 갑자기 떨어진 무거운 짐처럼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모로서의 책임과 사랑 이전에, 부모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자체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하는 것은 모든 조건을 내려놓고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만 바라보고 있으면 금새 있는 일입니다

청춘의 시점을 지나고 있는 젊은 세대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젊음이 개인에게 가져다 있는 특권은 젊다 사실 바로 자체 뿐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거쳐야 과정은 매우 무거운 짐처럼, 때로는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같이 경쟁을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처럼 마주해야 세대가 거쳐 가야만 하는 진통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없습니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 시대의 아픔도 고스란히 그들의 짐으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음이라는 축복도 때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나이 드신 분들께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그래도 젊음을 택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자체로 인생에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완성되지 않고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있는 겁니다. 마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오래도록 기억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청년들은 그것이 말처럼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걱정 안하고 산다 해서 지금보다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보다 뭔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해야만 인생이 그럴 듯해 보인다는 생각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생존의 문제는 저급하니 문제는 잊고 오직 높고 고상한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정말 고민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시대의 젊은이들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있는 금수저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생존문제와 같이 작고 보잘 없어 보이는 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다 차원에서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자체로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는 이유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먹기 위해 사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가요?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을 위해 필요한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일이지요.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맥락도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수단을 포기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단을 목적처럼 생각하여 진정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세상 속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해 방황하는 청춘이지만,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셨습니다. 오늘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과 시대의 거대한 풍랑 속에서 마치 가장 낮고 보잘 없는 존재처럼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그래서 삶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버린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분명한 시선을 제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적 의미 보다 수단이 지배하는 왜곡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제자로 부르시며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 아닐 없습니다

저는 오늘 개강주일을 맞이하여 자리에 함께 청년 세대에게 권면의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진 일이라는 소명과 확신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젊음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짐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왜곡된 세상을 하나님의 의로 변화시켜 나가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일꾼들이 되십시오.

따르라 어원에 담긴 다른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따르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따르라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 제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의 반응이 조금 생각 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회개를 선포하면서, 이유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있습니다

사실 말씀의 의미는 정확한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몇월 몇일과 같이 특정한 시점에 주님이 오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바로 이루어져야 사건입니다. 그것도 어느 시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야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이 회개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시점에만 이루어져야 일이 아니라 항상 지금 이루어지고 있어야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한순간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역사인 것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실 때도 조금만 생각해 보고 결정할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행하되 언제나 주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청년 세대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세상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먼저 변화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길이 이상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막고 있는 왜곡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청년 세대에게 주신 주님의 소명이라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두를 주님은 부르고 계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말이지요. 바로 지금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갈 있는 우리 모두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