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혹은 역설

5:1-12

 

흔히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을 때 “모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자를 보면 창 모(矛) 와 방패 순(盾)자를 쓰는데,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라고 주장한 무기 상인의 논리적 오류를 담은 중국고사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합니다. 서구 문화에서도 어원을 보면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게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어원을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 딜레마(dilemma)는di(둘)+lemma(주장)라고 하여 서로의 주장이 양립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모순의 또 다른 영어 단어인 contradiction도 contra(반대)+diction(말)이라 해서 말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서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비방을 받는다는 말의 원문은 헬라어ντιλέγω (antilego)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의 의미도 anti(반대) + lego(말)의 합성어 입니다. 다시 말해 앞뒤의 말이 서로 어긋나 있는 모순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이 땅에 모순되는 대표자로서 소개한 셈이 되어 버린 겁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이 땅에서는 모순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그리고 정말 예수님은 모순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 맞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모순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와있습니다. 흔히 산상수훈의 팔복이라고 잘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시며, 이를 위해 제자들이 가야할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여덟가지의 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여지는 천국을 이야기한 것과 달리,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의 통치 원리를 통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 이유는 복에 대한 정의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말에서 뜻하는 복의 전통적 개념은 많은 것을 얻는 풍요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우 현세적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건강 그리고 자손의 번영과 같은 것이 복을 의미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신년맞이 세배행사를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 후에 가질 예정입니다. 이 때 세배하면서 덕담으로 나누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의 전통적 의미도 사실은 이러한 현세적 복 개념을 염두해 두고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물론 한국의 복 개념만 그렇게 현세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언급된 복도 상당히 현세적 의미가 강합니다. 흔히 신명기적 율법의 핵심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얻고 불순종하면 상응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신 복은 한마디로 땅의 번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번영신앙의 뿌리가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생명의 장수와 자손의 부흥 그리고 소유 재산의 증대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배하면서 사실은 “돈 많이 버세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애 잘 낳고 모든 것이 잘되기 바래요”라는 덕담을 나눈다 해서 문제 될 것은 한가지도 없는 셈입니다. 어쨌든 서로의 번영을 기원한다는 점에서 좋은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복의 히브리어 “바라크”의 의미도 좋은 것을 뜻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팔복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이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현세적 복을 기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이야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로 이점이 예수님의 말씀을 모순이라 말하는 근거가 된 것이기도 하지요. 먼저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오히려 복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적 관점에서 보면 모순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든 아니면 마음이 가난하든 어떻게 이런 사람을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당신이야말로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의 기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실의 복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완전히 모순으로만 이해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은 어떻게든 부유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록 현실적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줄 복은 이 땅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이야말로 이들이 누릴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영원한 생명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린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현실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지 않는 삶을 어떻게 좋은 방향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머지 복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이에게 임할 복은 하늘에서의 위로입니다. 잠시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위로가 진정 복된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쯤되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바로 뒤의 말씀들을 통해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냐 하면 온유한 사람이 땅을 얻을 수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오히려 배부른 곳이라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완전히 모순된 말씀인 것이, 온유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힘이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앞에 잘 나서지도 않아서 남의 땅을 빼앗거나 하는 정복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입니다. 오히려 자기 것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남과 함께 하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유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내가 얻고자 힘을 과시하는 사람보다 나누고 베풀며 남을 위해 손해를 감수해도 만족할 이런 사람들에게 땅을 주신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부동산 가치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자녀가 된다는 뜻 아닐까요? 

무엇보다 먹은 것 마신 것 없는데 배부른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저는 옛 어른들이 하시던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을 통해 이 말씀을 그려보곤 합니다. 사랑하면 남의 입에 들어가는 것 보더라도 내가 배부른 느낌이 납니다. 영으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오늘 현실의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팔복의 대부분이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비하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 나아가 이러한 의로운 삶을 위하여 현실에서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말씀은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한마디로 현실 속에서 모순과 같은 길을 가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가져야만 복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에서는 그 자체로 모순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안고 이 세상을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팔복의 말씀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모순이라기 보다는 역설에 가까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단어로 역설은  paradox, 곧 넘어선다는 para와 의견을 뜻하는 dox의 합성어를 사용합니다. 모순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과는 달리, 역설은 앞뒤의 말 자체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숨은 의도 속에 진리를 담아내는 일종의 언어표현 방법입니다. 예컨대 ‘작은 거인’은 모순된 말이지만, 이를 통해 몸집은 작아도 훌륭한 사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의 의미입니다. 겉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중요한 진리가 숨겨져 있을 때 바로 역설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알려주신 예수님의 팔복의 숨은 의미를 깨닫는 다면, 이 말씀이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온통 앞뒤가 안맞는 모순처럼 느껴질 지 모르지만,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진 역설로 다가 올 뿐입니다. 

이러한 역설의 의미를 잘 알려주는 하나의 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복종하는 것이 자유보다 더 행복하다는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인 만해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입니다. 시의 대상은 다르지만 저는 이 시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복종이 그 어떠한 자유보다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모순이 아니라 역설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주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