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조건

마태복음 18:21-35

 

지난 주 우리는 사랑의 빚 이외에는 지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함께 나눈 바 있습니다.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떠한 사랑을 할 것인가의 문제까지도 하나의 정해진 답이 있어서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컨대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품어주는 편이 사랑의 표현일 수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하게 체벌을 가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랑의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꼭 집어서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어떠한 방식을 취하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행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의 힘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면, 부모에게 남은 것은 기껏해야 사랑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다는 무한정한 믿음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주어지는 것이니, 마치 운명처럼 맡기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겁니다. 빚처럼 반드시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하려 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도 확신이 들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더더욱 막연해 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사랑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용서” 입니다. 용서는 사랑이 가진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사랑을 선택이 아닌 의무 사항으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은 용서를 반드시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실천 사항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유대의 율법에서 가르치는 세 번의 용서 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숫자를 이야기한 것인데, 예수님은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수량에 민감한 율법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490번이나 용서하라는 것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까닭은 특정한 수만큼을 참아주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7이라는 완전 수가 갖는 의미를 고려할 때, 예수님은 무제한적 용서를 주장하고 계셨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용서도 끝까지 해야한다는 말씀은 실천하기가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할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차라리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용서라는 것은 결국 내게 잘못한 사람을 조건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다름없으니,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무엇보다 마음 속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을 겉으로 감추며 한다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이나 용서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이제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도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는데, 여전히 일본 정부를 비롯해 일부의 사람들은 “그만하면 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라는 겁니다. 과거는 그만 덮어두고 이제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덧붙일 때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 피해자에게 용서를 종용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만일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면, 아직도 과거문제에 사로잡혀 넉넉하지 못한 ‘속 좁은 사람’ 취급을 받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반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해자에게는 그토록 넉넉한 아량을 베풀면서, 왜 정작 피해자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며 속좁게 용서를 강요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도 용서를 기계적으로 적용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가정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부인에게 남편을 끝까지 용서해 주라는 대책 없는 상담을 해 주는 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바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에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 언급된 비유는 이를 뒷받침 해주는 예화로 종종 언급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유는 왕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가 역으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에게는 매몰차게 대하며 용서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 달란트는 노동자들의 일년치 임금의 만 배 가량 되는 액수이고, 백 데나리온은 하루치 임금의 백 배 되는 금액입니다. 비유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그 보다 적은 빚을 진 친구에게는 정작 인색한 모습을 빗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이 비유의 전체 말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얻은 인간들이 서로를 향해서는 용서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종의 경고가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똑같이 우리에게 행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나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모든 이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같은 것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정진 해야겠다는 일종의 신앙 결단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된다는 겁니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상황에서 용서가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무엇보다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피에미φίημι’ 인데 번역하면 “흘려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놓아 보내주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말뜻 그대로 생각해보면, 결국은 마음 속에 잡아 두지 않는 무상무념의 상태로 있으라는 말입니다. 거의 도인 수준이 되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감정이 없는 진공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갈 2:20)”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대전환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앙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실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날마다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율법적 훈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이끄시도록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 뿐입니다. 결국 용서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놓아 보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 자신을 마음 속에서 내어 보내지 않는 한 용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용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는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자주 들어 아시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비워서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내 허락도 없이 잔잔한 내 마음에 갑자기 제 3자가 무작정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정리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용서에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가와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재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이 뭐라 하든 자기 혼자만 괜찮다고 하면 모든 것이 무마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누구라도 ‘무조건 참아라’, ‘용서하라’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상처만 덧나게 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가지고 참고 버틴다는 것은 홧병만 더욱 키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용서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사랑은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까지 획일적으로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도 분명 베풀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무인 것은 맞지만, 용서의 방식마저 천편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가져다 주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채무자의 자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용서를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비유에서 채무자가 행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애원”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프라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 가운데 하나가 ‘부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가 상대방 앞에 완전히 엎드려 사죄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예배할 때도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왕 앞에 애원한 종의 모습도 사실은 이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 종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이러한 애원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빚을 진 종의 동료 역시 엎드려 간청을 합니다. 하지만 종은 이를 무시하지요. 자신이 구하고 받은 용서를, 자신의 동료에게는 그대로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애원에 대한 반응이 왕과 종의 용서를 구분짓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무조건 다 용서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용서해 달라는 간청이 무조건적인 용서의 전제 조건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예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은 용서를 주시는 분의 결정과 상관없이 우리가 당연히 보여야 할 자세라는 겁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녀라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과연 용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부분입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과 사과 없이 진정한 용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은 용서를 해주어야 할 사람만이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누구든지 입장이 바뀌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용서를 해주는 것도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지만,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 또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음으로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극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의 이야기는 나도 이 만큼이나 손해 보면서 너희를 용서해 주었는데 너희는 그깟 작은 손해 때문에 용서하지 못했는가의 관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도 마음을 다해 그 앞에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빚을 생각하며 우리 서로에게도 용서를 진심으로 구하며 용서해주는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지요.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는 빚이라고는 사랑 밖에 없는 상태를 우리 서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가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