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게 뭐야?

출애굽기 16: 1-5, 마태복음 20:1-16

 

포도원의 품꾼에 관한 비유는 오늘날 시장경제의 논리에 매우 익숙한 현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표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를 따라서 말씀을 전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설교한 것도 벌써 세 번 이상이나 됩니다. 때문에 많은 성도들 중에는 제가 이 본문 말씀을 어떤 입장에서 전할 지 이미 꿰뚫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듯 전혀 옛 기억을 갖지 않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현실세계와는 조금 다른 하늘 나라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은 다들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게다가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던 경험들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겁니다.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이야기에 나오는 노동과 그에 대한 임금 지불의 방식이 현실의 일반적인 임금체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아마 다 눈치 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불공정한 지불 조건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똑 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포도원에서 하는 일용직 단순 노동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노동 시간 이외에는 품삯의 차이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같은 일을 더 오래한 노동자들이 시간에 따라 품삯을 차등 지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항의하는 장면은 크게 놀랄만한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똑같은 임금을 받는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다음부터는 먼저 가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겠지요.

요즘처럼 똑같이 일하고도 누구는 인맥과 배경이 좋아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현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러한 말씀은 신앙생활은 물론 정신건강에도 이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비유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상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께서는 제일 먼저 비유의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좀 더 정확하게 풀어 설명하자면, 하늘 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설명해 주고자 비유를 들어 말씀을 전하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도 나름대로 세상의 논리라는 것이 있어서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이 제각기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논리에 익숙해져서 별다른 반발없이 잘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이나 체험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사회화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응하며 생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행동방식은 세상의 논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꾼들의 품삯을 모두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것부터가 세상의 논리와는 차별이 되는 부분입니다. 애초부터 포도원 주인은 시간이나 노동의 강도에 상관없이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는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일하러 온 사람들도 이 사실을 들어오면서 다 합의했다고 하니, 계약상으로도 문제를 삼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다만 나중에 상황을 알고 나서는 불공정한 거래였다고 불만을 직접 밝힐 수는 있겠지만 말이지요.

시장의 경제 논리로 보자면, 포도원 주인이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임금으로 책정해 놓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유를 든 것은 바로 하늘 나라의 셈법은 세상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물질적 처우를 그만큼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고 받는 것에 대한 방식도 매우 계산적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받는 만큼 일하고 주는 것만큼 되돌려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생각됩니다. 흔히 세상의 불의는 바로 이러한 이치가 잘 지켜지지 않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서로 주고 받는 것만이라도 정확하게 하는 세상이면 족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만큼이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목자와 대비해서 삯꾼 목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 현실을 보면, 차라리 삯꾼 목자라도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받은 삯만큼이라도 열심히 하자라는 것이지요. 성도들도 한량없는 은혜에 대한 것은 고사하고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혜만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가 세상의 이치를 지키며 공정하게 살기만 해도 사회적 정의를 나름대로 유지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술하신 하늘 나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받는 것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서 돌려주라는 겁니다. 받은 상처를 되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빚진 것은 이자를 더해서 돌려주라는 겁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사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정말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할 일 다하고 순종하는 종이라 생각했던 율법학자와 유대의 지도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라는 신앙의 자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결과입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해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 왜 열매가 없고 오히려 내게 더 시험만 주시느냐고 묻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오히려 힘만 더 든다는 푸념을 하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마 이런 말이 절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런 게 하나님 나라인가?” 라는 하소연 말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불만에 가득 차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 먹을 것을 비처럼 내려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단 그날 먹을 만큼의 분량만 가져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저녁 메추라기가 그들이 진 친 곳까지 날아오고, 아침이면 ‘만나’를 통해 끊임없이 양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메추라기 떼가 몰려오고,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오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먹을 것 없는 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아무 공로없이 내려오는 생명의 양식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조금이라도 신앙적 양심이 있다면 생각에 변화라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기껏 종살이 하던 민족을 구해 주었더니, 먹을 것이 좀 없다고 “도대체 이게 뭐냐?”며 불평과 비난을 서슴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양식을 받고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요?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만나”라는 양식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이게 뭐냐?”라는 말이 “만후”입니다. "후"라는 단어는 "이것이"라는 뜻이고, "만"은 "무엇이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무엇이냐는 뜻의 "만"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만나"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만나’라는 말은 사실 히브리어 "만"의 헬라어 번역인 셈입니다. 이름의 뜻처럼 만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지요.

아침마다 만나를 보며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뭐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정말 아무 값없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만나를 보면, “도대체 이게 웬 떡이냐”는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하루에 각 사람에게 똑같이 주신 분량에 욕심이 생겨서 남과 비교하는 순간 “도대체 이것밖에 안돼?”라는 불만이 생겨납니다. 보는대로 보인다고 하는 말처럼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요. 여전히 포도원의 비유를 똑같은 품삯에만 초점을 두어 물질적 가치를 따지려 든다면, 결코 하늘 나라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나를 보면서 똑같이 하나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욕심을 갖는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은 품삯을 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만나를 받으면서도 “도대체 요게 뭐야?”는 얄팍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눈에 중요한 것은 돈의 가치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하늘 나라의 관심이었던 겁니다.

하늘 나라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모든 것의 중심인 세상입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이 땅의 현실세계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라면, 하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위해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한량없는 은혜를 주시는가”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