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돌

마태복음 21:33-46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떨어져 느끼게 되는 외로움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프랑스 시인인 오르탕스 블루(Hortense Vlou)의 <사막>이라는 시를 보면, 이러한 외로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 너무 외로워 /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너무 외로워서 자기 발자국을 보았다는 시인의 표현은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발자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는 말은 결국 가장 큰 외로움은 자기 자신 조차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누군가 옆에 없다는 소외감 보다 더 큰 외로움은 바로 자기의 존재조차 느낄 수 없는 “실존의식의 부재” 혹은 “존재감의 상실”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존재감을 잃어버릴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까요? 한 조사에 따르면 사람이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함께 하는 공동체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때라고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에게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나 이웃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자신이 마음을 주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생각하는 경우에 당하는 상실감은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 이야기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집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어 맡기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당시 부유층들 가운데 많았던 일종의 “부재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주들이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수확기에 소작료를 받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관계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소출을 통해 자신의 몫을 받기 위해 종들을 대신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농부들은 주인의 몫을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거나 죽여 버립니다. 그러자 주인은 더 많은 수의 종들을 보내지요. 하지만 두 번째로 간 종 역시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주인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내보내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아들이라면 농부들도 어쩔 수 없이 원래대로 갚아야 할 몫을 순순히 건네줄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되묻는 내용입니다. 결국 너희가 그 주인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에 대응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바로 악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믿을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맡긴다는 것이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비유의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주님의 선지자들이며, 아들은 곧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 받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큰 핍박과 고통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불의를 향해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을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온갖 핍박과 박해를 가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 마저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간 것 아닙니까?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였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을 예루살렘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몬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농부들은 누구를 지칭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궁극적으로 맺게 될 다른 농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보다 구체적인 상황은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마태가 복음을 기록하던 시점을 고려해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과 결부시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 초토화된 사건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서 독립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도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로 인해 유대사회와 유대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성전을 기점으로 유대 사회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지키던 제사장 중심의 종교권력이 힘을 잃어버리고, 대신 바리새파 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이전의 유대교에서 핵심이 되었던 성전과 제사장 중심의 위계 구조와는 달리 율법에 대한 강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모세 오경과 할례 및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준수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유대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다시 행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방인 교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의 그리스도인과는 달리 이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구태여 유대민족의 율법 전통에 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는 물론 유대의 교회와 이방 교회 간에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됩니다. 실상 그 때까지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지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이익이 될만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유대교의 요구에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따르기로 하였지만, 이방 교회는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만 충실하기로 결정합니다. 주어진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역사가 증명하는 결과는 그 이상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명맥을 유지하여 오늘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의 전통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얽매인 유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방 교회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아픔과 이로 인해 얻게 되는 핍박과 불이익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지만, 이방교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뿐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교회의 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비유의 내용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누가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인 농부이며,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인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곧 불충한 농부들은 바로 유대교와 율법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며, 새로 포도원을 맡아 일할 농부들은 세상의 풍조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43절에서도 기록하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될 백성은 결국 유대교와 결별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지킨 이방인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비유의 인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가의 문제를 넘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이라는 뜻이지요.

예수께서 시편 118:22절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을 적용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차라리 버린 돌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며 만들어가는 힘있는 이들의 눈에는 한낱 쓸모 없는 돌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주춧돌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배세력은 예수님을 버린 돌 취급했습니다. 성전의 번영만을 강조하던 대제사장이나 율법을 기계적으로 맹신하던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걸림 돌 같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던져 버리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을 생명의 방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될 기초를 세우신 분이었던 겁니다. 

그를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한 요한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요14:6).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머릿돌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분을 주춧돌 삼아 지은 생명의 방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길 위에 기초를 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비록 버린 돌 취급을 받아 외롭고 불편한 길이 될 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홀로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 주님이 동행하시는 복된 길이라는 것이지요.

지난 주 라스베거스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 희생자를 낸 총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던 콘서트장으로 건너편 호텔에 투숙한 60대의 한 남성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범행 동기에 대해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총기 사고의 사례들처럼 만일 이번 사건도 스스로를 세상에서 소외된 버린 돌처럼 생각하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 맞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타인을 향해 표출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생각하듯 더이상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유린한 악한 농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버림받았다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위로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생명에 반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선한 의도가 있을 때에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버린 돌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더 이상 버림 받은 돌이 존재해서는 안되겠지만, 불의한 세상에서라면 차라리 버린 돌이 되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리하여 이 땅에 더이상 버린 돌과 같은 외로운 존재들이 고통받고 소외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