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의미

마태복음 22:34-40

 

제가 지금도 매일 아침마다 사용하는 빗이 하나 있습니다. 초록색에 손잡이 부분에는 원래 인어공주의 그림이 새겨 있던 장난감처럼 생긴 빗입니다. 거울이랑 한 세트로 만화영화의 주인공인 인어공주 브랜드 제품입니다. 딸아이가 어릴 때 선물로 사준 것인데, 놀다가 흥미를 잃고 내버려둔 것을 우연치 않게 발견한 뒤로 그 때부터 제가 머리 빗는 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인형의 머리를 빗겨주거나 인어공주를 상상하며 자기 머리를 손질하는 여자아이들 장난감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제 머리빗을 보면 한없이 우스운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몇 년을 그걸로 빗다보니 지금도 어딜 갈 때는 어김없이 그 빗을 챙겨서 다닐만큼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는 그 빗이 너무 손에 익어서 다른 것으로 머리를 빗는 게 어색해질 정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그 빗이 아니면 머리가 잘 정돈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용하게 된 것이었는데, 결국은 또다른 형태의 고정관념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다른 제품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익숙해진 빗과 비교하면서 틀린 점을 자꾸만 부각시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정관념과 이를 통해 생겨나는 편견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주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진 유대사회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본문과 같은 장에 언급된 바로 앞 사건들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던진 의도적인 질문들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가려는 모략이었던 셈입니다. 앞의 난감한 질문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하시던 예수님에게 이번에는 율법교사 중 하나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수많은 율법의 계명 중 어느 것이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인가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율법교사가 그렇게 질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실제로 당시 율법을 맹신했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을 거의 무력화시키는 듯한 언행을 일삼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먹은 일이나 손에 장애를 앓고 있는 병자를 직접 고치신 모습은 율법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안식일의 규정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여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을 맹신하던 유대인들에게 편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비뚤어진 시선은 그의 출신배경에 대한 유대의 고정관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우리는 당시 예수의 고향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존경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처음 예수님을 소개받은 뒤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며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역과 직업, 그리고 출신배경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유대 율법의 전통 하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적어도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이단아’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통신앙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느냐며 사실상 도전을 해 온 것이지요. 내심 “네가 율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지” 라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뭣도 모르는 게 설친다’는 편견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심중을 이미 꿰뚫고 계신 예수께서 유대의 율법주의가 그토록 강조하는 율법을 매우 단순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오직 한 분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너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과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율법의 조항은 이 두 계명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의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계명이요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헌법적 가치가 모든 법령의 효력을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진정 율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으뜸 계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계명과 규칙에 능통한 율법 교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선과 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율법의 계명을 가르치면서 사랑을 율법이라는 씨앗으로부터 나온 새싹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싹을 세상 속에 틔우기 위해서는 씨앗인 율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이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자신들과 다르게 접근하는 예수님에 대해 율법학자들이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원칙적으로 예수님도 율법에 대해 틀리다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부정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씨앗이라는 율법의 성격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더 강조하신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씨앗도 중요하지만, 결국 씨앗은 열매를 맺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 보셨던 겁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버려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열매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셨던 겁니다. 사랑이라는 실천이 없다면 율법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어버릴 씨앗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을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는 당연히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입장을 달리 표현하여, 당시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치 500년전 중세 카톨릭 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의 역사처럼 말이지요.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 수긍이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개혁이라는 우리말은  한자로 고칠 개(改), 가죽 혁(革)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고치거나 바로 잡아서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개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자권 문화에서는 고쳐나가야 할 대상을 굳이 가죽이라는 말에서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革’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고서에 따르면 ‘革’이라는 말은 짐승의 가죽에서 그 털을 다듬어 없애는 과정을 뜻합니다. 털을 없애는 것은 그 본래의 쓰임새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을 적용해 보면 결국 개혁은 단순히 고치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어떠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원래의 형태나 성질 혹은 기능에서 벗어난 부분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당시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개혁이라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그것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완성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회복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래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 원리를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주일이기도 합니다. 500년전 교회가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부정부패에 빠져 있을 때,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생명의 삶이 무엇인가를 되찾기 위해 개혁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5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또다른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삶이 아닌, 자기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오히려 목소리가 커져 가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으뜸 계명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장 우선해야 할 개혁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이 주신 제일 으뜸 계명의 핵심을 깨닫고 개혁의 순례에 모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