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하나

마태복음 5:38-48

 

흔히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온 것처럼 “원수 사랑”이라는 정의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아 사랑을 실천했다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사 숭고한 의미와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그렇게 개인적으로 행한다 해도 사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마냥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범죄자들에게 조차 “원수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은 처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쌓이면 결국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현가능성도 그다지 높지 않고, 또 실천한다고 해도 세상에 크게 유익이 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당시 유대사회의 전통은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현실적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해석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 해주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은 악한 원수를 멀리하는 것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 가르쳤습니다. 원수 마귀라는 표현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원수 마귀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믿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멀리할수록 신앙에 도움이 되는 세력조차 사랑하라는 말씀은 당시 유대의 문화에 익숙했던 제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요구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세상의 작동방식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 역시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강화된 인권 개념의 시선으로 보면 잔인한 처벌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받은 것 보다 배로 되갚아주려는 보복이 더 우세한 세상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 큰 문제로 악화되는 것을 막는 일종의 안전장치에 가까운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현실적 방식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분명하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한 사례로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양손잡이가 아닌 이상 때린 손으로 다른 반대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매우 모멸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은 가장 모멸적인 대접도 달게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이지요. 현실의 방식과 다른 길을 가야하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직면하게 될 모습을 예시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는 말씀이었던 겁니다.

말씀을 따라 옳은 일하면서 남들도 섬기고 사랑하다가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속옷을 달라는 이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는 것은 해볼만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는 건 그래도 마음에 남는 어떤 심리적 보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며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마라’는 말씀도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세상 때가 덜 묻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을 상처 나게 만드는 일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옳다고 믿는 신념 마저도 부정해 버리면 그 누구라도 쉽게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온갖 면박을 들어도 가족들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 가장들에게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자신이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가족으로부터 소외를 당할 때라고 하지 않습니까? 41절에서 언급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비유는 그 상황에 딱 맞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구절은 매우 군사적인 의도로 사용되던 말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대가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물건을 나를 때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리를 파악하거나 사람들을 탐문할 때 이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 친일파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부역에 적극 참여했던 이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 수 있는 일조차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매우 난처한 주문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옳다고 믿는 신념 마저도 굽혀야 한다는 엄청난 요구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현실 불가능해 보이면서 심지어는 불필요해 보이는 일까지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일까요? 차라리 현실적인 세상의 원리에 잘 적응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지켜 나가는 시민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 아니었을까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대하는 것을 합리적인 방식이라 생각하는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예수님은 4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말입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똑같은 햇빛과 비를 누리며 산다는 것조차 불쾌하게 느껴질 만큼 얄미운 사람들도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구별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편향적으로 주신 선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과는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원리는 어떤가요?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포장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주고 받는 것을 명확하게 계산하여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평하다는 것도 결국은 주고 받는 관계가 일정해서 불만이 생기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 외에 조금 더 주어서 내가 손해를 봐도 좋을 대상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한다 싶더라도 불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대상을 미리 구별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 허용 범위에서 벗어나 내게 손해를 끼치는 원수 같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어쨌든 우리는 주어진 기준 안에서 이웃과 원수를 구별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을 궁극의 가르침으로 알고 따르는 교회 조차도 어떤 모습인가요? 은연중에 교회 밖에 있는 비신자들 혹은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구별하여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필요할 때는 섬김과 전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가, 마음에 맞지 않거나 불필요할 때는 멀리해야 할 원수처럼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상황인데 세상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때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패거리 정서를 보여주는 고질적인 사회 병리현상입니다. 사실의 판단도 내편과 네편을 갈라서 편향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게 불리하면 우리와 다르다는 편가르기를 앞세워 사실 파악 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 아닌가요?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국 사회도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인종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과 부의 불평등한 재분배, 그리고 세대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미국사회를 뒤흔들 주요 현안들입니다. 장벽을 쌓아서 이민자들을 분리시키려는 현정부의 정책은 단순히 불법 이민자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소수인종과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다 있겠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이웃과 원수를 편협하게 구별하려는 세상의 원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편가르고 구별하는 것에 익숙한 세상을 향해 던지신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온전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온전한 일인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제자의 길을 가야한다고 권면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 ‘온전’이라는 말이 참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온전은 영어로 Perfect, 곧 완전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를 ‘텔레오스τέλει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텔로스telos’가 어원인데, 이 말은 목적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결국 목적을 잘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온전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도 그것이 곧 우리를 온전케 하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완수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창조의 목적이 결국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별하여 편을 가르거나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도 편향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두가 그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만큼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땅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 이 길은 현실적으로 넘어서야 할 장벽이 너무나 많은 어려운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갈등과 비난의 상처도 감내해야 합니다. 차라리 온전한 것보다 마음에 맞는 우리끼리 잘사는 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적 문제로 고민하고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저는 김남주의 시 제목을 들어 오늘 우리에게 전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돌멩이 하나”라는 시입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중략…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어릴 때 부모님이 잘 해주시지 않은 하나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이 하나 잘 하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기쁨이 넘쳐나는 경험을 합니다. 작은 하나 때문에 미워지고 다른 사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하나를 보면서도 사랑의 마음이 깊어집니다. 작은 돌멩이 하나로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세상은 비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돌멩이 하나가 세상을 온전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그 돌멩이 하나면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 돌멩이 하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함께 분열되고 갈라진 세상을 평화와 사랑으로 온전하게 만드는 돌멩이 하나가 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