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17:1-8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동시에 산상 변모주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번 주 ‘재의 수요일’로부터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사순절 기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교회의 예배전통이 주현절로 시작해서 변모주일을 거쳐 사순절로 진행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과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교회의 전통 만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과정입니다.

주현(epiphany)은 말뜻 그대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건을 교회 전통은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떠난 동방박사의 이야기에서부터 찾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것이 맞지만, 우리의 입장으로 보자면 구원자이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 찾아 나선 사건이기도 합니다. 반면 교회력에 따라 이 주현절의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 주심으로써,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부분 역시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화된 것으로 묘사되기는 했어도, 결국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바뀐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변화된 사건이란 뜻이지요.

변모 사건 이후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는 수난의 여정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야만 했던 십자가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력을 통해서 이러한 진행과정을 따르는 이유는 결국 이것이 우리가 거쳐가야 할 신앙의 기본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 신앙의 성숙 과정입니다. 무엇보다 거룩한 예수님의 존재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스스로가 변화된 삶을 사는 성화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변화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초대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산상 변모 사건이 우리의 신앙 여정과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변모 사건이 갖는 의미는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중요한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산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언급되기도 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곳 역시 산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장소나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깨닫게 되는 곳이 꼭 산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굳이 그 이유를 찾는다면 저는 올라가야만 하는 산의 특성을 들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변모 사건도 사실은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올라가신 뒤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높은 산을 올랐던 모세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 위해 가야만 했던 길 역시 높은 산을 오르는 과정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대로 교회력의 진행과정이 결국은 우리의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힘들여서 오르는 산행은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모습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커다란 힘을 기울이지 않고 반사적으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때로는 참고 견디며 힘을 내야하는 오르막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탄하여 쉽게 걸어가는 세상의 풍조와는 구별되는 거룩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걸어 올라가는 우리 자신이나 산 자체가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올라가는 그 과정이 편한 것 따라 가는 세상의 풍조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분을 그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산신령처럼 그곳에 사시는 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 자신이 구별되는 시선과 마음을 갖게 되었기에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내용을 본문 2절의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원어로 변화되었다는 말은  μεταμορφόω (metamorphoo)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형태(form)나 모습(figure)이 바뀐, 다시 말해 변형 혹은 변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핵심이 예수님의 변화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변형이나 변모가 아니라 우리들의 시선과 관련되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결국 제자들이 영적인 변형과 변모를 체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제자들이 듣고 본 것을 증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 사건은 제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3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제자들에게는 그저 눈에 보여진 모습일 뿐입니다. 보려고 해서 보여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그렇게 비추어진 모습입니다. 여전히 예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로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도 모세나 엘리야처럼 유대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주현) 우리를 만나 주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심중에는 현실적인 영웅이나 위대한 지도자의 위상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름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뒤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8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예수님만 보이더라는 말씀입니다. 본다는 말 “ὀπτάνομαι (optanomai)”도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본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시선을 두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진정으로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오직 그분 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변화된 것은 누구인가요? 제자들의 시선이 변화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사람이 변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숨은 뜻은 외모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의 변화나 그로 인해 나타난 태도의 변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앞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변화는 결국 예수님을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와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제자들의 시선이 변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예수님과는 구별되는 제자들의 시선이 완성되었다는 뜻이지요.

이를 통해 저는 오늘 말씀이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분명한 영적 변화를 강조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현절의 마지막과 앞으로 거쳐야 할 수난의 여정 사이에 변모 주일을 놓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아닐까요? 산을 오르는 힘겨운 노력과 인내 속에서 우리의 신앙도 성숙하게 구별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생각하는 “값싼 싸구려 은혜”에 매몰되어서,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믿는 신앙인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도 달게 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받을 선물과 복만 누리는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받은 복을 헤아리며 그에 걸맞는 구별된 신앙의 길을 가는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자녀로 변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과연 거룩한 주님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요?

지난 주 프란시스코 교황이 한 아침 미사를 통해 “이중적인 삶을 영위하며, 위선적인 삶을 사는 교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그만큼 신실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반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카톨릭의 교리에서 중죄로 여기는 '악한 표양(scandal)'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스캔들을 교황은 한마디로 언행이 불일치하는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그 예로 '사기를 장려하는 비지니스 리더들', '학생들을 교란시키는 교사들', '사람들을 속여 도덕적 가치로부터 멀리하게 하는 사람들' 등이 있다고 교황은 직접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황의 언급과 관련된 기사를 보며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한국의 한 기독교 대학에서 교단의 신학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를 파면한 스캔들입니다. 제가 왜 스캔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하면, 이 결정 자체가 다소 위선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개신교인에 의해 벌어진 법당 훼손 사건이었습니다. 우상타파를 이유로 법당은 물론이고 성당의 집기와 건물을 파손한 것이 알려지자, 문제가 된 교수는 교회의 평화 나눔과 종교간 화해를 위해 피해 보상 모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인 성금은 종교 평화운동을 위해 전액 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우상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한 일련의 행위가 기독교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문제를 삼은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교수의 신앙에 대해 자의적인 심판을 내리고 궁극에는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면을 결정해 버린 것이지요. 사실 이번 결정을 내린 총장을 비롯해 학교측 인사들은 이미 비리 문제로 학교를 떠난 경력이 있었던 인물들입니다. 당시 교수협의회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사실 더 큰 원인이었다고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혹 그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앙을 자의적으로 규정짓고 죄인으로 낙인 찍는 행위를 진정한 기독교적 가치라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이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교단의 신학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스캔들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11장 6절을 보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걸려 넘어지다’는 말의 원어가 스캔들의 어원이 되는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o)를 사용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복 있는 사람은 스캔들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걸릴 것이 없는 신앙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는 거룩한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시선이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듯 신앙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자기의 십자가도 기쁘게 질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를 더 받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 보다 하나를 더 주면서 감사와 기쁨을 느끼는 사랑 많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를 타인에게 배로 되갚으려는 밖으로 난 가시가 아니라 자신의 가시같은 상처도 삼켜서 녹일 수 있는 사려깊은 신앙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말 복 있는 사람이 맞을까요? 이제 우리는 변모주일을 지나 사순절의 기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설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구원자되신 그 분을 분명하게 깨닫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40일 동안 함께 걸어가야 할 고난의 여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이 되어, 스캔들이 아니라 마음껏 복을 누리는 주님의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