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복음 5:13-20

 

지난 이웃 교회의 부흥회에 기도를 맡아 다녀 일이 있었습니다. 알려진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에게 새삼 새로울 것이 있겠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했습니다. 가서 보니 생각 보다 부흥회에 참석한 인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좋다고 소문나면 구름처럼 모여들던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현실에 내심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데에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도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가 말씀 자체 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비중을 두려는 교회와 교인들의 시선에서 찾을 있습니다. 언변이 뛰어나거나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이룬 목회자에게 매우 후한 점수를 두려는 경향은 오랫동안 한국교회에서 지속되어온 관행 하나입니다. 이를 사람들은 카리스마가 있다거나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다는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누구를 통해서 전달이 되든, 목적 자체는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말씀 보다 이를 포장하는 능력이나 기술에 관심을 둔다면, 마치 안에 들어 있는 보석 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보석함을 보고 값을 치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찾는 중심 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없습니다. 이처럼 말씀 자체 보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금새 싫증이 나거나 특별한 관심들을 잃어 가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원하면 언제든지 있고 들을 있는 말씀을 골라서 찾다 보니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희소성이 그만큼 감소한 것이지요. 결국 말씀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고, 그나마 갈급하여 찾던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 신앙의 수요 공백이 발생한 것이라 말할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기대 없이 마음을 비우고 말씀을 들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설교 도중에 마음을 자극하는 말씀을 듣게 것입니다. 성령께 맡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설교 때마다 하던 이야기인데, 그날 따라 마음에 크게 닿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말씀 조차도 생각과 판단으로 듣고 있던 저에게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맡기라 말씀이 갑자기 자신의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시고 하신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강사 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들리는 소문처럼 신비한 체험을 있는가를 먼저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의심부터 하려는 삐딱한 못된 습성이 저도 몰래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안수기도를 받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말씀을 분명히 깨닫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무언가 내게 말씀을 주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시면서 여호수아 1 5-9절을 읽어 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제자리에 돌아와 저는 성경을 펴고 주신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안에 오늘 내게 주신 보물과 같은 말씀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구하며 말이지요

네가 사는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율법책의 말씀을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너무나 알려진 구절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고 역시 전심으로 읽자 의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걱정하지 말라며 용기를 주시고 성공을 보장하는 약속에 눈이 머물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을 흔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라.” 지금까지 부름 받은 주의 종으로 스스로를 성령에 의지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행하는 일이 저에게는 아주 당연한 사명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맡기고 살았는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살았는가? 라는 질문에 갑자기 말을 잃어 버렸던 겁니다. 매주 설교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나름 고민하며 씨름하던 것과는 별개로 과연 나는 말씀을 제대로 먹고 말씀대로 살았는가 라는 질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이상한 주였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겪은 얼마 되지도 않아, 묘한 상황을 접하게 것이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이 제게 주님을 만나기 바란다는 조언을 해주신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잘못 들어서 목사님이 주님을 이제 만나고 싶다고 하신 알고, 노쇠한 그분께 아직 때가 이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게 하신 말씀이더군요. 얼핏 말은 아직 제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으로 들려서, 내심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목사에게 아직 주님을 만났다고 말하면, 거의 무시하거나 모욕에 가까울 수도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불쾌한 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스스로 다시 물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말 나는 지금 주님을 만난 것처럼 사는 것이 맞는가?” 라고 말이지요. 저는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명령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말씀도 똑같은 관점에서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현실의 부패를 막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16절에 언급한대로 착한 행실이라고 말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착하게 사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사는 일이니 이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결국 윤리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는 착한 모습이라 단정할 있는 걸까요? 만일 수준에 머물러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았던 수많은 현자들이나 영웅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부처나 공자의 가르침과 무슨 차이가 있다 말할 있겠습니까? 모든 종교의 경전이나 행동강령이 윤리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만 본다면 다른 종교나 신념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당대의 유대사회에서도 율법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길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강조했던 것이구요. 만일 규정이나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아직 소금과 빛이 될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취급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나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니 분명 옳은 말이지만, 한계에 부딪히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거나 양심을 잃어 버리고 위선적인 모습을 위험이 그만큼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년초에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하신 분들 중에 벌써 실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자책하거나 남들의 눈을 의식해 마치 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려는 이들이 아마 있을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봉사하고 섬기는 일이 점점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한편으로 착한 제자가 되지 못한 같아 속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지로 하려다 보니 스스로 힘에 부치는 상황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당장 앞에 보이는 결실이 없을 때면 더더욱 불안해 지기도 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보이는 결과로 판단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금욕을 행하며 수련의 길을 가는 수도승이나 철저하게 율법의 통제 하에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이 갖는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완벽할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완전함에 이르지 못해 스스로 자책하거나 기껏해야 남들의 눈을 피해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위선적 모습을 취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행태가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단순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율법의 윤리 도덕적 요구로 해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도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것이었지, 그렇게 되라는 명령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억지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 본연의 모습이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짜게 되려고 해서 맛이 나는 아니고, 빛도 일부러 내려고 해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처럼 말이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원래 그렇게 생겼으니 더이상 것이 없다는 무책임의 허용인 걸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17절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빛과 소금이 것을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본래가 그들은 빛과 소금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쥐어짠다고 해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산다거나 윤리 도덕적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사는 삶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것이 어떻게 나타날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조항이나 의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완성시킬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컨대 빗자루를 생각해 보면, 빗자루는 쓸기 위한 도구라는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빗자루는 혼자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들고 비로소 빗자루는 자신의 본연의 역할을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는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고백을 있습니다.  

소금의 맛은 물에 녹을 나타납니다. 양초의 밝은 빛은 불이 붙을 가능한 일입니다. 본래 가진 짠맛과 빛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분명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나 짠맛과 어둠을 밝히는 힘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안에 살아 계셔서 역사하실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는 소금과 빛으로 우리가 마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일할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받았던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던져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이 맞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만난 세상의 소금과 빛처럼 살고 있습니까?” 오늘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될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참된 빛과 소금이 되어 각자의 심령이 영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킬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