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세가지 질문

마태복음 4:1-11

 

진학이나 취업과 같은 진로 문제를 가지고 저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늘 제가 되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보라고 권면을 해주곤 합니다. 그 질문은 다음의 세가지 물음입니다. 첫째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둘째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인가?”, 셋째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가지 질문은 선택의 방향과 방법 그리고 이를 성취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나가는 방향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정말 자기가 원하고 해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만 가지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대로 다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현 가능한 꿈을 꾸는 것은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취향과 능력이 갖추어 진다 해도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면 언젠가는 회의감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사는 의미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목적과 방향,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 세가지 모두가 균형 잡혀있을 때 온전한 성취도 가능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가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를 우리 인생 전반에 걸친 보편적 신앙의 언어로 이렇게 바꾸어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며 사는가?(어떤 선택 혹은 어느 방향)”,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어떻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최종 목적)”의 세가지 질문입니다. 이 역시 우리 인생의 방향, 방법, 그리고 목적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 질문들은 결국 자기 신앙의 고백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과 방향 그리고 그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40일 동안의 금식 기도를 하시던 예수께서 악마로부터 받은 세가지 시험은 사실 이 질문들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시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선택의 연속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유혹과 시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끊임없는 유혹과의 싸움터’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과 유혹은 이를 아주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은 바로 “무엇으로 사는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40일을 금식하고 난 예수께 제일 먼저 한 유혹의 질문이 돌을 먹을 수 있는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일 약한 부분을 공략한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빵을 먹고 싶고, 당연히 먹어야 하지만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궁극적인 수단의 선택과 이를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을 빵의 힘으로 한번 살아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빵은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을 뜻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빵을 돈이나 재물 혹은 권력으로 바꾸어 읽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갖고 있습니다. 예전에 육체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많은 어른들은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개중에는 가진 것이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산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별로 가진 것 없이 자신의 몸과 자부심으로 버텨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돈으로’ 원하는 것을 다하며 산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권력으로’ 모든 것을 주무르며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재물이나 권력처럼 외부에 있는 유무형의 자산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으로 여겨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꿈꾸며 살고 싶은 세상의 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든 밥힘이나 자존심이 돈과 권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기도 한다는 겁니다. 마치 돌이 빵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느냐는 매우 현실적 방식으로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재물이나 권력처럼 욕망을 외적으로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분명 그것 역시 사는 데 필요한 도구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강조점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필요 만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을 채우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만 빚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인생을 빵으로만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창고가 아무리 빵으로 가득찬다해도, 오늘밤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 아닙니까?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려다 놓고, 천사들이 붙들어 줄 것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한 번 뛰어내려 봐라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하며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인생의 방향과 연관된 질문이라 할 수 있지요. 악마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받은 바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능력을 증명해 보라는 사람들의 조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구속의 역사를 완수하셨습니다. 말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묵묵하게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긴다는 ‘자기부인’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방향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처럼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을 더 드러내고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현실의 눈으로 보면 참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는 선택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바보처럼 사는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함께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가는 운명공동체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사는 삶에 더 큰 의미를 두셨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이유도 결국은 우리 모두가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소 순진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나’라는 개인 보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한 선택이 더 축복된 길이라 가르쳐 주셨던 겁니다.  이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도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면서 과연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왔고 또 할 수 있는 가를 먼저 고민하 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번째 마지막 유혹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궁극적 삶의 목적과 관련된 질문이었습니다. 악마는 산꼭대기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온 세상을 줄 테니 자신을 경배하라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직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 만을 섬기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께만 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든 그 궁극적인 행위의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두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선택을 하여 그것에 필요한 방식을 정하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앙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가위는 양날이 정확하게 맞물려 부딪힐 때 잘라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그 일은 성취되기 어렵습니다.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 해도 자신에게 맞는 은사가 아니면 그 길은 가기 어렵습니다. 주어진 은사와 맞는다 해도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말 그대로 시험의 대상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섬김과 봉사에 힘쓰는 삶을 살더라도, 만일 그것이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에 그치면 쉽게 지치고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가위질의 핵심은 가위를 든 사람의 몫입니다. 가위가 가위질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은 도구로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공동체를 위한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그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장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내 삶의 최종 목적으로 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말인 ‘페이라조(πειράξω)’는 시험의 주체가 내가 되면 말 그대로 시험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체가 되면 그 때 그것은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간을 지나며 우리의 신앙 훈련이 여기에 집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가지 시험을 잘 치루어 내서 부활의 날, 주님이 허락하시는 큰 영광의 기쁨을 누리시는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