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고 묻거든

요한복음 9:1-7

 

지난 주 한국에서 일어난 두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 30대 남성이 대형마트에서 아기 분유와 기저귀를 비롯한 여러 생필품을 훔치다 경찰에 덜미를 잡힌 사건입니다. 경찰 조사 중에 알고 보니 그는 어린 세 딸을 둔 가장이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가족들과 떨어져 자동차에서 쪽잠을 자가며 생활비를 벌어 생계를 유지했지만, 딸 아이의 수술비까지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비록 죄를 짓기는 했어도 그의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수사를 진행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보도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도 동정 어린 시선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질 만큼 개인의 범행 보다 환경적 요인에 탓을 돌리는 경향이 적지 않았던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침몰된 지 3년 만에 인양작업을 시작했다는 “세월호”에 관한 보도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를 향해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면서 실종자 9명을 포함해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발생한 지 3년만의 일입니다. 사건 직후부터 침몰된 세월호를 빨리 인양해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실종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자는 요구가 지속적으로 요청되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인양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재작년인 2015년 3월 초에 세월호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 두 분이 북가주 지역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윤민이와 재욱이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만났을 때, 저희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분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의 기간 동안 저는 일상이라는 삶의 무게와 함께 아이들의 이름도 깊은 기억 속에 묻어 두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진통 끝에 세월호가 인양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 이름들도 기억의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동안 인양되지 못한 것은 세월호 만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기억도 함께 였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사건 발생 직후 수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가도록 만든 한국 사회의 탐욕과 안전 불감증, 그리고 무능력한 대처방식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유가족들을 향한 위로의 손길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가운데는 점차 피로도를 호소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급기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대상으로 삼으며 비난의 수위를 높이려는 시도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희생자들과 유가족들 조차 국민의 혈세로 보상을 노리는 염치없는 가해자처럼 취급 받게 되고, 이 사건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성향이 불순한 것처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이듬해 한국을 방문해서 저는 아버지와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아버지는 제게 “그만하면 됐는데, 유가족들이 생떼를 쓰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놀러가다 생긴 일에 국가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일 희생된 아이들이 아버지의 손녀였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답변은 “그건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손녀들에게는 그런 일이 결코 생겨날 리가 없다는 다소 억지에 가까운 대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후에도 저는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각을 접하면서 저에게는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희생된 아이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남다른 조건이나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희생자들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시선을 보면서, “첫 번째 사건의 경우처럼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 나타나는 관대함이 왜 세월호의 유가족과 같은 피해자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아닌 세상의 문제로 돌리면서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에게는 오히려 개인의 탓이나 운명으로 돌리려는 경향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보통 우리는 모든 일의 결과를 인과응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고 물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시각은 행복과 불행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처럼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간주하였습니다. 여기서 전제가 된 것은 바로 소경이라는 태생적 장애는 불행한 일이고, 이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죄의 결과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죄가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소경이 된 것은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행한 공과로 그의 상황을 바라보려던 유대의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셨던 겁니다. 다만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다소 애매한 답변만을 남겨주셨습니다. 애매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만일 소경이 된 것을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기 위한 구실로 이해할 경우, 소경의 입장에서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대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씨를 얻기 위해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고쳐준 놀부의 심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소경이 된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라기 보다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일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의 탓으로 문제의 원인을 삼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제자들처럼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그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원인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라는 말에는 “무엇으로 인해” 혹은 “무엇 때문에”라는 원인에 대한 질문 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라는 목적에 대한 질문도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궁금증이나 의문은 늘 불완전한 상로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나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은 과학적 분석이나 이성적인 판단으로 밝힐 수 있지만, 타고난 조건과 같은 운명적인 문제나 생명과 관련해서는 말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궁극적인 목적까지는 도대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는 풀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자라나는지 그 성장의 비밀은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자라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직접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은 운전자의 기계적 작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고, 그 목적도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왜 사냐고 물으면”, 우리의 말문은 막히고 맙니다. 생명의 원인이야 과학적으로 밝혀낸다 해도 그 목적까지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삶의 이유를 찾아 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풀이 자라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해도,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고 사용되는지에 의해 그 존재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바로 이러한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는지가 아닌,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지로 응답하신 겁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스스로를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 알려 주셨습니다. 곧 구체적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환히 보여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을 다름 아닌 소경의 눈을 고치신 치유의 모습에서 찾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된 원인이 무엇인가에만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은 어떻게든 그들의 잘못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장애를 갖게 된  피해자에게 오히려 죄를 묻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 겁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의 관심은 소경의 눈을 고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난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 뒤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그들의 상처를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관한 삶의 목적도 역설적으로 대답해 주신 것이지요.

이 세상에 상처와 장애를 안고 살아도 마땅한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알 수 없는 상처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서로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신 이유입니다. “왜”라는 질문으로 전혀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바라보려던 제자들에게 “어떻게”라는 대답으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직접 보듬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삶의 이유에 대한 더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

세월호의 인양과 함께 우리는 또 한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라는 질문입니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진행될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또 인간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일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 그 원인을 밝힐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 점 의혹이 없이 명백하게 사고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신 목적에 대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이상하리만큼 가해자의 딱한 사정에는 관대한 아량을 베푸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모습은 바로 희생자의 상처에 관심과 온정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소경이 누구인가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왜 희생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이전에, 희생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어떻게 다가서야 할 지 모르는 이들.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보다는 현재의 이익과 무관심으로 눈을 감고 있는 이들. 바로 그들이야말로 불행한 소경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상처받은 이들의 위로가 되어주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를 통해 진실에 눈감은 수많은 소경들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누구라도 왜 사냐고 묻거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