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라잡이

요한복음 11:17-45

 

얼마 전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직업만족도 조사 결과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1위는 판사였고, 2위는 도선사, 그리고 3위는 놀랍게도 목사였습니다. 판사는 오늘날 세상사는 길이라 할 수 있는 법을 다루는 직업이고, 도선사는 항구나 해협에서 배를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둘 다 “길라잡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직업이지요. 비록 고소득 직종은 아니지만 길라잡이라는 점에서 목사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향해 가는 길을 인도하는 부름받은 종으로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루고자 하는 부활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목사가 전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직업만족도에서는 3위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만족도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시인인 T.S Elliot는 “끝은 곧 시작이다. 끝나는 곳은 새로 시작하는 곳이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그곳에서 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시작과 끝은 언제나 함께 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삶과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끝은 죽음의 시작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음의 끝에도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부활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끝에 또 다른 삶의 시작이 있다는 신비로운 생명의 원리가 부활로 인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부활에서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생명의 역사라고 말한다면, 부활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고리를 완성시켜 주는 핵심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육신의 삶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도 포함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땅의 흙으로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완전한 생명체로 만드셨다는 말씀은 이를 뒷받침 해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이 그 수명을 다해 끝을 맞이한다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생명의 마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그 자체로 복음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놀랍고도 기쁜 소식입니까?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기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누구라도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늘 그 순간은 지금이 아닌 저 멀리 있을 것이란 막연함과 현실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동네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합니다. 오라비인 나사로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의 위험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병은 악화되었고, 결국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분명 치유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이는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니, 분명 자신들의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와 주리시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뒤에야 나사로에게 향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시기 바로 이틀 전에 나사로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지켜봐야 했던 자매의 마음은 너무나 비통했습니다. 이틀만 더 버틸 수 있었으면 예수께서 치유해 주시고 더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텐데,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떠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을 겁니다. 조금만 더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마도 가슴에 한처럼 남아 있지 않았을까요?

급기야 자매의 안타까운 마음은 늦게 도착한 예수님을 향한 아쉬움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옆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에게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던 겁니다. 예루살렘을 드나드실 때마다 그들의 집에 머물기도 하면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들린 자들도 고치시곤 했던 예수님이 정작 자신들의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 서운한 감정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더구나 예상보다 이틀이나 더 늦게 도착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을지 모릅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의 초조함이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나고, 무엇보다 며칠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죽은 오라비를 생각하니 상처가 더욱 커져만 갔을 겁니다. 혹 버림받았다는 생각까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람들도 잘 돕고 예수님의 사역에도 열심이었는데,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의 안중에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는 마르다의 말은 이러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의 탓으로 돌려 버리려 했던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한 죽음 앞에서 하늘을 원망하며 운명의 탓으로 자신의 울분을 대신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쉽사리 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호소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은 왜 가만히 계셨나요? 왜 그 곁을 지키지 않으셨나요?” 원망하는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24절)라고 즉각적으로 응수합니다. 사실 마르다의 대답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믿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마르다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믿음이 끓어 올라서 행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표출되어 내뱉은 일종의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처를 안은 사람에게 위로라고 해주는 말인데, 그 입장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틀린 말도 아니고, 너무나 맞는 말인데도 너무 힘이 드니까 들리지도 않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분명 신앙심도 깊고 섬김과 봉사에도 열심을 다한 믿음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진심 속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은 되는데, 정말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39절에서 나사로의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옮기라는 명령에 냄새가 난다며 말리는 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부활에 대한 소망은 갖고 있었지만, 정작 눈 앞에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기적은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부활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죽음의 끝에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처럼 놀라우면서도 감사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이 우리 모두에게는 선물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마르다 조차 부활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저 멀리 누군가에게나 일어날 막연한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신비로운 사건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마르다는 부활은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지금 눈 앞에서 죽은 오빠를 살리시리라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겁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자기 삶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 하고 있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마르다는 예수를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그분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리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는 갖고 있었으면서, 정작 그분이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온전하게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이루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끝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해서 나타나나요? 바로 지금 예수님이 계시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마르다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믿음. 바로 그것이 부활의 신비를 이루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그분이 지금 육신으로 꼭 옆에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앓고 있는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께 오실 필요도 없이 그저 말씀만으로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마5:8).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그분을 우리 스스로 모시는 행위나 다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을 내 삶 가운데 온전히 모시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먼저 체험해야 할 부활은 바로 내 안에서 주님을 모심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를 까마득한 미래의 알 수 없는 남의 일로만 치부하지 않고, 오늘 지금 내게 이루어질 역사로 받아들이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을 성수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주일은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고 체험하는 날입니다. 억지로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지금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매주일 우리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힘들고 고된 한 주를 다시 이겨내고 소망과 기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은 부활의 신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는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기쁨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직업만족도 조사에서는 3위에 머물렀지만, 부활의 신비로 인도하는 길이 정말 최고의 소명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직업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믿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명은 하나님 나라의 직업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서로에게 생명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향해 가는 길을 서로를 위해 인도하는 것이지요. 그 길의 시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