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Seven Words of Jesus Christ on the Cross

성금요예배 설교 모음


  • 첫째 말씀: 성경봉독 : 눅 23 : 32~34장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놓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울음과 비웃음이 섞여 아수라장이 된 골고다 언덕.

십자가위에는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예수가 초라하게 달려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숨 붙이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도대체 그는 누구를 위한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인가?

십자가 밑에 로마 병사들이 보인다. 십자가형이라는 극악무도한 사형의 현장이 마치 자신들의 놀이터라도 되는 듯이, 사형을 즐기는 로마병사들이 보인다. 그렇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상부의 명령만 따랐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충실히. 예수는 생명의 가치보다 사회구조적 권력을 더 중요시 여기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저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인다. 예수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자,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지도자란, 정식 교육을 받고, 가르칠 수 있는 학위가 있는 엘리트여야 했다. 외딴 시골 베들레헴 출신따위가 대세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한채 우월감에 심취하여 권위의식에만 몰두하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저 먼 발치에서 예수를 지켜보는 빌라도가 보인다. 그는 알았다. 예수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두려웠다. 예수가 무죄임을 선포하게 되면 일어나게 될 민란이 두려웠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잃을것을 걱정했다. 예수는 자신의 옳바른 소신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한 그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보인다. 예수를 앎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라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늘 예수를 부인하고, 인간적 쾌락과 탐욕, 욕심을 쫒아 살아가는 우리가 여기 있다. 그리고 십자가 밑으로 돌아와 ‘몰랐기 때문’이라며, 면죄부를 들이미는 우리에게, 예수는 이야기 한다. “너희들이 한 선택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너희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구나. 하나님, 이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by 정다혜 전도사]

  • 둘째 말씀: 성경봉독 눅 23: 39~43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하고 대답하셨다.

  • 셋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 25~27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가족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라는 곳에서 의사로서 또 성직자로서 봉사했던 이태석 신부님 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제목입니다. 그곳에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젊은 이들을 교육하고, 음악을 가르치 고, 무엇보다 신앙과 꿈을 심어주었던 그가 갑자기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톤즈 사람 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비록 인종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그들이 신부님의 죽 음을 애도하며 슬퍼했던 이유는 그가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외면하고, 아무도 가려하지 않은 그곳, 전쟁과 기근, 가난과 질병이 가득한 곳에 가서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이 세상을 떠난 뒤, 톤즈의 젊은이들은 한국에 있는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비록 그의 임종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묻힌 곳에서 이제는 그들이 신부님의 친구가 되어주 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 바로 그곳에 예수님의 친구들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난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호언장담했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 로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맞이했던 군중들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 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 그리고 다른 두 여자들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가족도 아닌데, 이 사람은 왜 거기 있었을까요? 예수님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인데, 제자들은 이미 다 도망갔는데, 그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요? 창과 방 패로 무장한 로마 군인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가, 거기 서 있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는 도대체 왜 거기 서 있었던 걸까요? 그건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그의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 다.” “이렇게 못 박히고, 모욕 당하고, 찟겨진 사람이 바로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서 있던 그 사람,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어머니라.” 아들의 죽음으로 혼자 남게될 어머니에게 예 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 어 주려 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관계, 가족이 되라고 말씀 하십니다. “너와 나”, “당신과 내”가 더 이상 “남”이 아닌 “우리”가 되는 것, “친구 사이”를 뛰어넘어 “가족”이 되 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이 아닐까요? “저기 울고 있는 저 분이 당신의 어머니다”고, “저기 슬퍼하고 있는 저 분이 당신의 아버지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오늘 이밤,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족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by 박현호 전도사]

  • 네째 말씀: 성경봉독 막 15: 33~34   

낮 열두 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상하신 하나님"

지난주 설교 말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은후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 동네 사람들,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일찍 오시지 않으신 예수님과 이미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마음에 깊이 상처가 나있었습니다. 나중에 오셨던 예수님, 그들의 애통함과 죽을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보시며 함께 상한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저는 아직 그렇게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린 경험을 하지 못하여서 그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수는 없지만 슬픔을 경험 할 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변함없이 마음 깊은 곳을 여미는 고통을 느낄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을때, 이별을 경험할때, 혹은 외면을 당할때, 존재의 이유를 거부 당할때 입니다. 그렇게 상한 마음은 배고픔보다, 목마름 보다, 육신이 아플때 보다, 가난보다, 더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아가시며 이 모든 것을, 어쩌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 더 이상으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조차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때 곁에 남아 있지 않았고, 부인하기 까지 하며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처절히 홀로 지고 가신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말씀의 예언적 성취보다, 육체적으로 느끼셨던 극심한 고통가운데 원망이나 좌절하는 말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험한 형벌과 버림 받으심으로 상한 사람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상하신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마지막 절규는 이 세상에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부정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린 사람들, 또한 버리고 외면하고 폭력과 모든 악을 행하는 사람들까지도, 죄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 있는 모든 상한 영혼들을 위한 마지막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신 그 신비의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두려운 떨림과 간절한 소망과 절실한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 상한 사람의 표본이 되셔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바꾸신 상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상처받은 하나님, 오늘도 내일도 그 십자가의 상처를 지니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 될 때,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 갈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갈 때, 세상의 불의한 방법으로 나의 필요와 인권이 빼앗길 때, 부정한 힘에 억눌리고 폭력이 행하여 질때, 상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고백하며 이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가슴에 끌어 않을 수 있는, 애통해 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by 권조셉 전도사]

  • 다섯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28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 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긍휼을 향한 목마름"

저는 목이 마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평화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긍휼에 목이 마릅니다...

 

인생의 목마름 가운데 유일한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셨습니다.

지금도 목말라 하시고 계시는 줄 모릅니다.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신 주님께서

채찍질에 모든 살이 갈기 갈기 찢겨 나가고

거치른 가시나무에 머리가 상하고

인생의 무개 보더 더 무거운 나무기둥를 지다가 수없이 넘어져 무릎과 팔이 상하고

뼈속 깊은 곳에 파고 들어오는 못이 모든 신경이 마비시켜 숨을 쉴 수가 없고

십자가 위에 오랜시간 피를 흘리며 구멍난 머리와 손과 발, 찢겨져 나간 상처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고통을 인한 극심한 갈증 가운데도 끝까지 견디시며

온세상의 죄를 몸으로 견디신 주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이루신것을 아시고 당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신의 고난을 표현하셨습니다

“목 마르다"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저는 목이 마릅니다.

끝없이 달리는것 같아도 결승점에 도달 하지 못하여 목이 마르고

한없이 참고 기다려도 나의 뜻대로 응답하시지 않으시기에 목이 마르고

고통가운데 내려놓음을 반복하여도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 없기에

목이 마릅니다.

 

저는 목이 마릅니다.

끊임없는 비교의식을 통한 자아 비판에 목이 마르고

삶의 희망이라고 예수를 말하지만 거친 폭풍처럼 매일 거세게 몰아치는

의심과 알수 없는 내일의 두려움에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십자가에서 “목 마르다” 하신 예수님 때문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두려움과 의심이 가득찬 나의 목마름 가운데

생명수를 찾을수 있는 유일한 나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의 마음을 이기신 그분을 향한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유일한 나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영혼의 목마름으로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긍휼에 합당한 자리에까지 나아갈 때 까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권조셉 전도사]

  • 여섯째 말씀: 성경봉독 요 19:29~30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드렸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 일곱째 말씀: 성경봉독: 눅 23:44~45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Ecce Homo "Behold the Man"

Ecce Homo, 1871, Antonio Ciseri

Ecce Homo, 1871, Antonio Ciseri

안토니오 시서리의 Ecce Homo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재판의 장면의 주제 -Ecce Homo는 15세기 성서그림의 주제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로 예수 혹은 빌라도의 극도의 감정에  관점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관점은 회중이 예수의 재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재판의 자리에서 회중을 향하는 관점으로 바꾸었다. 유일하게 본디오 빌라도 부인의 표정만 볼수 있게 하였다. 

19세기 낭만주의를 크게 이끌었던 화가 Caspar David Friedrich의 무의식세계를 반영한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관점을 전통적인 Christian Iconography 에 인용한 것으로 전통적인 Ecce Homo의 틀을 깨었지만 라파엘기풍을 따라 오히려 19세기 화가들의 경향을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고집한 것은 그가 유명해지지 못한 이유라고도 할수 있겠다. 

이 그림을 볼 때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나로 하여금 그 재판의 자리에 서게 하기 때문이다. 회중에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던 함성에서 조금 벗어나 재판의 자리에 서 있는 모두의 뒷모습을 보게한다. 빌라도를 회유 했던 부인만 제외하고. 정치/군사/종교적 책임을 회피하는 빌라도의 교묘한 뒷모습, 채찍을 들고 있는 군사의 의기 양양한 뒷모습, 빌라도 부인의 외투를 꼭 쥐고 있는 하녀의 절박한 뒷모습,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의 한복판에서 강직하게 서있는 예수의 덤덤한 뒷모습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리만큼 예수는 몸에 상처나 피흘림의 흔적이 없다. 그리고 그의 몸매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그저 벗겨진 외투만 그의 피흘림을 예고 할 뿐이다.

극심한 고난의 흔적을 봄으로써 예수의 숭고한 희생과 구원의 은총을 묵상할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예수의 뒷모습은 그 이상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뒷모습. 뒷모습은 진실을 이야기 한다. 지난주 목사님 말씀처럼. 아마 안토이오 시세리는 십자가의 고난 한 가운데 서 있는 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The Truth 가 되는 예수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by 권조셉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