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을 견디는 능력

요한복음 14:15-21

지난 2011년 4월 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난 후, 일본에서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진 이후 결혼하는 커플의 급증 현상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혼만이 아니라 이혼 건수도 평상시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결혼과 이혼이 열풍처럼 일본열도를 덮친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 이유에 대해 제이미 홈스라는 미국의 한 연구원이 관심을 갖고 분석을 시도하여 <난센스>라는 책을 발표 하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인간이 갖는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복잡하고 모호한 상황을 가능한한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하는 “종결 욕구”에서 찾았습니다. 인간들은 좀처럼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감정을 크게 느낄수록 평소 신뢰하는 대상에게는 더 큰 신뢰를 주어 확실하게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반대로 평소 불신하던 것에 대해서는 더 강한 불신을 가짐으로써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삶의 여러가지 모호함에 대해 점차적으로 정리해 나가다가 급기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지진으로 삶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사람들이 결혼과 이혼이라는 양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도 결국 인간의 종결 욕구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극단적인 양 끝의 결론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모호성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기업들은 이러한 모호함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기업의 조직이나 문화의 시스템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미국중앙정보국CIA는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반대의견만을 제시하는 일명 레드팀을 두었다고 합니다. 찬성과 반대의 적극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스스로 길러나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을 이렇게 조언 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결정을 지금 해야 하는 순간에 놓여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내일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것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보다는 가능한 한 결정을 미루어 보라고 말입니다. 모호한 상황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창조적일 수 있는 길을 찾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을 한층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확신함을 지닌 추진력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을 견뎌낼 수 있는 자제력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모호함이라는 순간을 경험하기는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셨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두려움이자 불안함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의문은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있거나 적어도 볼 수만 있다해도 그들의 믿음은 확고하게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 온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새긴 증거판을 주시기 위해 그의 종 모세를 시내산 위에 혼자 올라오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출 24장). 모세가 그곳에서 40일을 머무는 동안,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는 우를 범합니다. 잠시 동안의 불안과 모호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호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금송아지라도 보고 있는 편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증거를 원했던 도마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20:29)”는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 조차 그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24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거짓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징과 기적을 보여서 믿는 자들조차 유혹한다고도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대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도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호함이라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교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의 기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의심없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초능력과 같은 은사를 체험하고 싶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과 보는 것을 동일시한 결과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체험을 해보았습니다. 오순절 교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방언의 은사도 경험해 보았고, 극심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영적으로 체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는 저희 어머니가 하시던 치유와 축귀의 기적 이야기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능력과 같은 신비적 현상 만을 좇는다면, 엉뚱한 길로 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반드시 기독교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의 골목길에 무당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무당도 제법 신기를 보여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비싼 돈 내가며 굿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한동안은 신내림이 있어서 신통한 것 같더니,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나 봅니다. 얼마 지난 뒤부터는 기적적인 현상을 나타내 주지 못하니까 결국 무당집도 문을 닫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옆에서 지켜 보니까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영빨”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만은 아닌 듯 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사는 것에 치이다 보니 교회 생활도 그렇고 신앙의 열정이 점차 식어 가면서 어느새 신비한 은사도 사라진 것 같다는 겁니다.

무분별한 은사의 강조가 위험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말그대로 은사는 성령의 표징입니다. 길로 비유하자면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인 셈입니다. 막막하고 모든 것이 모호해 보이는 구원의 길에서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처럼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길은 끝없는 여정인데, 만일 표지판만 보고 그곳에 멈추어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눈에 보이는 표지판만 보고 서 있으면 결국 누구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뒷부분인 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성령을 오직 제자들만 알아 볼 수 있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을 보내 주어도,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6절 말씀을 통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모든 것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이전의 말씀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까닭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순간의 모호함으로 인해 종결 욕구가 생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도 않습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 대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보여 주어야 안심하고 믿겠다는 얄팍한 신비주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내로써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어서, 그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호함을 견디는 자제력,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주어지는 축복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