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요한복음 20:19-29

 

부활의 주일 아침 “주님을 보았습니다”라는 마리아의 고백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신앙의 고백을 나눈 바 있습니다. 물론 나는 그런 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실제로 부활을 증거하기는커녕 여전히 세상에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도마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직접 그를 목격한 마리아 이외에도 제자들은 자신들을 찾아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도마처럼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아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보지도 않고 믿으라는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해 안다는 말이기도 한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믿으라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본다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깨닫는다고 생각해 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이라고 하는 다소 추상적인 말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꼭 눈으로 보아야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는 사랑은 오히려 사랑을 설명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보여지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활의 참뜻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이 하나의 말장난과 같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각 개인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열매인 것처럼, 부활도 오늘 우리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신앙고백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체험을 우리 각자가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보았다는 것은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각자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체험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부활의 사건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사는 회심의 역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지금도 부활을 각자의 삶을 통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열매는 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통해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 속에서 여전히 부활의 증거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은 과연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모습이 맞나요? 혹 보이는 것이 없다고 먼저 의심부터 하는 것은 아니었던가요? 정말 부활의 열매를 보려한다면 마치 감이 떨어지듯 하늘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활의 증거를 찾기 위해 잘못된 부분을 찾아서 과감히 부인해 버리고 다시 새롭게 변화되어 부활의 열매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이 아닐까요?

부활 이후 제자들을 직접 다시 찾아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부활의 의미를 세상 속에 알려 주신 것처럼, 이제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뜻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 서로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좀 부활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시나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여전히 의심과 무지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제자들을 위해 직접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당시 제자들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십자가의 사건 이후에 그들이 처한 위기는 그들을 두려움과 공포라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몰아갔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생존을 위해 자기방어의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 조차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먼저 걱정해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가치보다 개인의 유익과 안정이 더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자기 자신 외에는 어디서도 찾지 못해 궁극적인 방향을 잃어 버린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개인들의 삶에 구심점이 되어주던 공동체가 그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자 그 누구도 마음 놓고 편하게 믿고 의지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국가를 비롯한 어떠한 조직도 개인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약해져 버린 까닭입니다. 한마디로 명확하게 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베스트셀러로 한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가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불치의 암 선고를 받고 죽기 전까지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폴 칼라티니라는 신경외과 의사였습니다. 저자인 폴은 인도계 2세로 스탠포드대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이후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로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 명문대학의 교수자리를 제안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폐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의사로서 무수한 암환자를 대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의 그림자는 그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불안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질문하게 됩니다. 그가 암수술을 받기 위해 최고의 폐암 전문의를 찾았을 때도, 그는 의사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 이러한 시선으로 그는 한때 극심한 업무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져 환자를 대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짐하지요. “모든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 조차 환자처럼 대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을 보이는 숫자로, 생명의 소중함 보다 보여지는 외적인 효용성이나 척도로 값을 매기며 사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가처럼 삶을 정리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운 좋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자도 숨결이 바람이 되기 전, 숨이 끊기기 전에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구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꼭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공포에 떨며 앞으로 가야할 삶의 방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숨을 불어 넣어주신 까닭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22절의 숨을 불어넣다는 동사 ‘emphusao’는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45 절을 통해 "첫 사람은 숨을 불어 넣어주셔서 산 영이 되었지만 마지막 사람, 곧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고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숨결이 우리의 코끝을 지나가 버리면 하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결의 히브리어 ‘hebel’이 동사형이 되면 ‘헛되다(habal)’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이 바람 같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큼 헛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숨 쉬고 있어도 마치 죽은 영처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욕과 의미를 잃어버린 제자들이 꼭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숨결을 불어 넣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처럼 모든 희망이 어디론가 흩어져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이들에게, 헛바람만 일으키며 세상의 허무한 욕망에 눈이 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래바람을 일으키듯 온갖 의심과 의혹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며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세속적 물질만능주의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 불어 넣어주고 계십니다. 금새 그치고 말 미풍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와 생명의 숨결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숨결이 바람되는 그 순간에도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