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의 증인

사도행전 1:6-11

 

선교의 사명을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이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8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흔히 “미답지론(未踏地論)”이라 해서,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선교를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답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문제는 보다 세분화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미답지는 전형적인 해외선교의 방식처럼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거나, 교회의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곳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역량도 이처럼 교회의 미개척지에 쏟아 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방식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다보면 자기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많은 기독교 국가와 민족들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편의점보다 교회의 수가 더 많다고 알려진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을 이러한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답지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방식이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미답지를 세상의 시선 밖에서 아직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관심의 사각지대로 정의를 내리는 접근입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고지론(高地論)에 대한 반박 논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지론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고지를 점령하듯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도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고지를 차지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승리를 얻게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고지론이 현실 세상 속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달리, 미답지론은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으로 향해 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실제로 사회의 파워 엘리트 중에 상당 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그 자리에 올랐는지, 아니면 개인의 영욕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두 명의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 한국 기독교가 여전히 비판의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의 눈이 머물러야 한다는 미답지론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가야할 땅 끝의 선교지는 공간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머물러야 할 영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8절에 언급된 지명들은 특정한 지역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기 위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녀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와 땅 끝은 이방인과 믿음의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나라나 민족이 머무는 지역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삶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우리가 청교도 전통의 미국사회에서 교회에 등록된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다 해도,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이 아니라면 사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예루살렘의 성지가 아니라 땅 끝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 죄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곳이야 말로 이방숭배에 빠진 사마리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우리가 서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사실입니다. 8절의 핵심도 그런 점에서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명령대로 내 증인이 되라는 부분에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선교를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의 논쟁 보다 우선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증인이 되지 않는 한 그곳이 어디이던, 또 어디를 향해 가던 그것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증인된 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께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셔야 했던 당시의 배경 상황을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부활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사십 일 동안 그들과 함께 하시고 승천하기 바로 직전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순간 조차 제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언제인가를 물어 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제국의 지배로부터의 주권 회복이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회복이 곧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민족의 정치적인 주권 회복을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제자들의 시선이 여전히 고지론과 같이 현실 정치의 성공이나 번영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해 매우 세속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예수께서 생전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나누는 순간 조차 누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던 제자들의 속물 근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증인이 되기 보다 누가 더 큰 제자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이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21장에서도 이를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베드로와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마지막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의외의 대화로 끝을 맺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스승을 다시 만난 감격 속에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만일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을 몇 번이고 되 뇌였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찾아 주셨으니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확신이라는 차원에서 믿음을 이야기 한다면, 당시 베드로의 믿음은 자기 이름만큼이나 굳건한 반석 같지 않았을까요?

이를 아신 예수님도 베드로의 믿음을 확인하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는 제자로서의 소명을 주셨던 겁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목회의 소명을 주신 것이었지요. 당연히 베드로도 두말 하지 않고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던 또 다른 제자 요한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이 나옵니다. 소명을 받고 난 뒤에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바로 동료이자 강력한 라이벌 중의 하나인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 그리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본능적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호 했습니다. “그것이 너랑 무슨 상관이냐?” 지금 필요한 것은 너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제자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를 바라보며 남 탓하고 자기 신세타령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너 자신의 모습을 신앙의 거울로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남과 비교하며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에 마음을 두지 말고, 먼저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승천을 앞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신 말씀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선은 보이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자신들이 재확인할 수 있는 상태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증인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 알바가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대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어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기도 한 권능(δύναμις, dynamis)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폭발력을 가질 만큼 강력한 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능은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는 소유의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신 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폭발하는 힘은 갖기 위함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권능은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권능은 바로 변화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권능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지요.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바로 성령을 통해 우리가 받은 그 권능입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이 땅의 끝까지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 그리스도를 따라 오늘 우리도 땅끝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진 증인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