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9:35-38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신학자 가운데 송천성(C.S.Song)이라는 대만 출신의 학자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버클리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그 분의 수업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제 지도교수님으로 가르침을 받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송천성 교수는 다수의 저명한 학술 서적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란 책입니다. 대자대비라는 말은 불교의 영향권 하에 있던 동양사회에서는 매우 익숙한 개념입니다. 말뜻 그대로 해석하자면 “큰 자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는 “mercy”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의 의미를 다 담아 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대개 mercy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이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이에게 베푸는 일종의 아량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에 대자대비는 “베품”이라는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보다 “함께함”이라는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대자대비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단순히 베푸는 행위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서로가 함께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세를 낮춤으로써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함께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자대비라는 말은 단순히 연민의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라기 보다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만큼 서로가 하나된 모습을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6에서 사도 바울도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하나된 모습이 되는 길이라면서 말이지요. 이 역시 대자대비라는 말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자대비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36절에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불쌍”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입니다. 우리 말에 “불쌍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짝이 없다는 말과 불쌍이라는 말을 함께 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쌍의 어원이 한자어로 짝이 없다는 “불쌍(不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쌍은 짝이 없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라는 겁니다. 물론 남녀가 서로 짝을 찾지 못한 모습을 두고 쓴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마음으로 함께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통할 수 있을 만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것처럼 불쌍한 일도 없다는 뜻이지요.

이는 원어인 헬라어 본문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원문에서는 “splagchnizomai (σπλαγχνίζομαι)”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 의하면 그 때도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무리들을 보시고 똑같은 마음을 품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오늘 본문과 똑 같았습니다. 바로 목자 잃은 양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근동지역에서 목자 없는 양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늘 생명의 위협을 안고 대책없이 사는 양에게 목자는 운명을 책임지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던 겁니다. 때문에 고대 근동지역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나의 쌍을 이룬 운명공동체로 보았다고 합니다. 목자 잃은 양을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까닭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의 어원도 흥미롭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우리말로 “창자 혹은 애간장”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창자와 같은 인체의 기관을 통해 연민이나 긍휼함과 같은 감정이 생겨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말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애간장이 끓는다”거나 “애간장이 탄다”는 식의 표현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일이야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애간장을 태울 만큼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자식의 아픔을 마치 자신이 겪는 것처럼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식의 감정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타인에 대해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상황을 보며 자신도 애간장이 타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의 심정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일치감을 갖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 질 수 있는 겁니다. 영어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번역을 compassio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송천성 교수가 하나님의 모습을 대자대비하다고 표현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와 같이 기독교 교리에 갇혀 지내시는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저 밖에서 지켜보시며 잘잘못을 심판하시기만 하는 무서운 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께서 부르신대로 “아빠 아버지”의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위에서 내려보시는 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대자대비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나타내 주신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목자 잃은 양처럼 살아가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그대로 공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한 몸을 이룬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는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해 주시기 까지 하였습니다. 우리와 하나의 쌍을 이루는 친밀한 관계를 맺어 주신 것입니다. 저 멀리에 계신 무서운 신의 모습이 아니라 친히 낮은 곳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마음을 함께 나누는 대자대비하신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말씀대로 함께 공감하며 사는 대자대비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본문 37절에서 예수님이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불쌍한 무리들의 진정한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짝이 되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과는 달리 현실의 우리는 점점 공감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서로의 진실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마음을 함께 나누어 주셨는데, 정작 우리들은 서로간에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추수할 것이 많은 이유도 사실은 그만큼 서로를 향해 진실한 짝을 찾지 못한 불쌍한 무리가 많은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함께 공감을 나누며 사랑해야 할 이웃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듯 많은 사람을 교회로 불러와서 성장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일할 일꾼들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단순히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도 누군가를 향한 진실된 마음, 함께 공감하며 서로를 향해 대자대비한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턱없이 부족한 것은 일꾼 자체가 아니라 공감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따라 그 공감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공감의 능력입니다. 대자대비한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자대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진실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청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들어 아이들이 커가면서 가끔씩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대학을 간 큰 아이가 엄마와는 자주 통화를 하면서도 아빠에게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을 때 더 그렇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전화를 가끔 합니다. 그런데 통화의 내용이 좀 다르지요. 주로 돈을 좀 보내달라거나, 무슨 일이 있으니 해결을 좀 해내라는 식입니다. 그렇다고 딸에게 뭐라고 할말이 없는 것이, 막상 아무 일 없이 전화를 하면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어서 엄마에게 곧장 전화를 바꾸어 주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이전에는 나름대로 가정적이고 자녀들에게 다정다감하며 아이들 표현대로 쿨(cool)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놓치며 지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과 자주 대화의 시간을 갖고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한마디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놓친 것이지요. 그래서 가끔씩 아이들에게 아빠랑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타박을 듣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나 해야할 설교를 집에서도 늘어놓고,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돌아보면 제 아이들처럼 그 맘 때 저도 아버지가 제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심지어는 크게 받은 것도 없다먀 불효막심한 투정을 아버지에게 서슴없이 부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아이들이 커가고, 또 목회의 소명을 받아 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는 누가 요즘 어떠시냐?”는 그 흔한 말조차 묻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요즘은 제게 만날 때마다 권사님 한 분이 늘 “평안하시냐?”고 물어 봐 주시는 분이 있어서 달라지기는 했지만, 한 때 저 스스로 참 힘들고 막막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민 오신 분들도 다 경험 하신 것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없이 유학와서 정말 무일푼으로 생활하며 목회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힘들 때는 잘 몰랐는데, 마치 고개를 숙이고 숨가쁘게 달려가다 어느 순간 허리를 펴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는데 이상하리만큼 서운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게 미안해 지는 감정을 갖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되돌이키기도 힘들고 그냥 이대로 오던 길 마저 가자니 앞이 캄캄해 질 때 말입니다. 게다가 나름대로 노력은 기울인 것 같은데,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하거나 무관심 그 자체일 때가 있습니다. 꼭 알아주어야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혼자 이 어둔 터널을 지나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답답한 순간들을 아마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동료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힘들죠? 그래도 씩씩하게 잘 버티는 모습에 응원합니다.” 전화통 너머로 들리는 이 짧은 이야기에 저는 가슴에 담아 두었던 눈물이 한순간 쏟아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분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고생하는 후배 목사를 격려한다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저에게 체크 한 장을 써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제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전한 것이지요. 이 일로 인해 저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서운함과 억울한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안 저에게 목사로서 해야할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요구하고 책임을 물으면서도, 정작 그 젊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목사와 그 식솔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누구 하나 한 번도 묻지 않는 무심함에 서운해 했던 감정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얻은 누군가로부터의 공감이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저에게 생겨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목회를 하면서 더 이상 어떠한 개인적 사심으로 인한 시험에 걸려 넘어질 요인 하나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이 더욱 단단해져서,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와 무관심으로부터 상처를 쉽게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저에게는 하나의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전혀 공감대가 없다고 불평했던 그 아버지에게, 과연 나는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힘들지는 않으신가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추수할 일꾼들이라고 모인 성도들에게는 진심으로 묻고 있는가?

저는 오늘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면합니다. 추수할 일꾼을 찾는 그 시작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답으로 부터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을 닮아 서로를 향한 공감의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 가기 위해 먼저 서로간에 진실된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바라기는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우리들이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공감할 수 있는 신앙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