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창세기 2:1-7

마태복음 28: 16-20

 

팝 아트로 유명한 미국의 예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이런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이면 유명해 질 수 있다.” 이 말이 증명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그만큼 쉬워졌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유명해지거나 큰 물질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15분은 우리 인생에서 순식간에 지나칠 수도 있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15분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두커니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거리거나 멍하게 아무 생각하지 않고도 흘려 보낼 수 있을 만큼 짧은 찰나로 그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그 15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절명의 순간으로 남을 만큼 간절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운명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요.   

얼마 전 광주의 한 아파트 12층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스물 한 살짜리 딸을 어머니가 난간에서 팔을 잡고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 15분간의 사투를 버린 사건이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정신지체로 어려움을 겪던 딸이 순식간에 벌인 일이었는데, 어머니가 이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떨어지는 딸의 팔을 붙들고 15분간이나 버틴 것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하더라도 스무 살 된 여성의 몸무게를 팔 힘만 가지고 15분간을 버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모성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팔힘이 빠져서 간신히 매달린 딸의 손을 놓치기라도 했다면 생명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혼신의 힘을 다 쏟아내야 했던 겁니다. 노년의 여인으로서는 1초도 버티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 15분이라는 시간은 어머니에게 마치 수십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딸의 생사기로에서 어머니에게 15분은 너무나도 절박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그 간절했던 모성애는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15분의 힘겨운 사투는 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소중한 시간이 된 것이지요.

누군가 인생을 한시간에 비유하면서 15분은 인생의 나머지 45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 한바 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15분이 딸의 생명을 구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15분은 어쩌면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신앙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창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구약의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엿새’라는 기간 동안 인간을 비롯하여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엿새’라는 기간을 우리의 시간 개념 그대로 적용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하루의 과정에 이루어진 창조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가 ‘설교 준비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말할 때, 핵심은 하루라는 기간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들었던 정성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주만물의 창조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성과 사랑에 더 초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창조의 과정을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준비단계라고 보는 이기주의적 해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인간중심의 이기주의적 시선은 인간의 손길이 닿기 이전부터 우주만물이 존재했던 이유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위해 미리 창조된 것이라 간주합니다.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와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와 연관해서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엿새 동안 창조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일곱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을 가지셨다는 말씀을 단순히 창조의 끝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창조의 과정은 손을 댈 필요가 없는 완제품이라는 뜻이지요. 결과적으로 창조의 주인공인 인간은 그저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리는 것 외에는 덧붙여 해야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누리는 자유는 가지면서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윤리적 진공상태’라는 엄청난 문제를 떠안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니 책임도 하나님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감사와 찬양 보다 원망과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대한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생명체 마다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정성껏 부여한 사랑의 실행 과정이었습니다. 오직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인간이 제 마음대로 다루기 위한 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땅의 피조물이 인간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땅을 갈아야 할 사명으로 주신 것이라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존재 이유가 되면서 동시에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제시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엿새의 시간으로 마무리 되어 모든 것이 다 완결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창조의 과정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신다는 계획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전히 창조의 15분, 곧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만 내 맡기고 손 놓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생명의 기운을 안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함께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낼 뿐인 것이지요. 스스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려 하거나, 아니면 자기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마다 불평만 늘어 놓는 경우가 꼭 그와 같습니다. 교회 와서도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토로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대개의 경우는 진짜 갈급하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무엇보다 은혜도 쟁취하여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데, 은혜는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하나님은 이 땅에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직접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 가시는 창조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창조는 만들어서 세상에 완제품으로 출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결코 내려놓지 않으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15분간 생사 기로에 있는 딸을 붙들고 지켜냈던 어머니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어가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박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엿새의 창조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외면하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의 증표를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했던 유대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성경 본문인 마태복음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끝까지 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자들에게 예수께서 직접 답변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의 존재는 불필요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창조의 역사는 이미 엿새의 일로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선택 받은 주인공으로써 마음껏 누리며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박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고 말입니다. 창조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권한을 위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가 시작하신 창조의 역사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은 그 대리자로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소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 창조의 소명을 안고 오신 그리스도처럼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 빠져서, 자기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만 안주하지 말고, 그곳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따라 소중한 생명들을 일깨우고 살리는 창조의 과정에 동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세상을 주님의 말씀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15분의 시간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 삶의 45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기업이, 우리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와 세상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몫으로만 남겨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그 시간에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신 것이라면, 성령강림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권능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활이 15분 이후에 올 나머지 45분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준 것이라면, 성령강림은 나머지 45분을 위해 지금 15분을 부단히 버틸 수 있는 권능을 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늘의 권한을 위임 받은 것입니다. 그 권능으로 창조의 역사에 함께 동참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힘써 일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15분, 그 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