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태복음 11: 16-20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인 요한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 이후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당시 세대를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대의 모습을 장터에서 이루어지던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이들의 놀이 중에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편에서 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장례 때의 곡을 하면 슬픈 연기를 하며 노는 게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시장바닥에서 편 갈라 노는 아이들처럼 당시의 세태가 예수님의 눈에는 편이 나뉘어진 갈등 상황으로 비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와 ‘너희’로 갈라져서 서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을 일삼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일침을 놓고자 한 것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3장5-6절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등장과 수많은 기적의 역사는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유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좋게 바라볼 리 만무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이야기와는 모순된 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와 “너희”라는 구별과 대립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갈등 관계였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 세대’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특정한 유대의 종교 세력을 염두해 두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두를 뭉뚱그려 비판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며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마23:2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23:33)”라며 강한 질책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부정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신 첫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예비하며 길을 준비 했던 세례 요한도 늘 그 날이 멀지 않았으니 회개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시대의 아픔에도 전혀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을 “미친 사람” 처럼 취급했습니다. 그가 암울한 세대를 통곡하며 절규하는데, 자신과는 다른 행색과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적하며 그의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낮고 낮은 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을 향해서는 격이 떨어진다며 비난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했던 것이지요.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하고자 했던 예수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들의 마음에 들 수 있다는 것일까요?

결국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자기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외부자일 뿐만 아니라 공공의 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마치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군과 적군의 구별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이 그렇게 서로 편이 갈라져 갈등의 대치 상황 속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까닭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또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던지신 화두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뜻과 방식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에는 Pax Romana라고 해서 평화의 시대라고 믿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Pax Americana 라고 하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Pax의 번역을 “평화”라고 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은 “평정”이 더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방식과 생각 속에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태일 때를 마치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온 것처럼 착각한 것이지요. 차라리 이럴 때 “우리”와 “너희”의 구분이 없는 “가(pseudo)평화”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바꾸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참된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어려서 부모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는 커다란 문제가 없는데, 막상 자식이 성장하면서 자기 생각이 뚜렷해 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갈등이 생겨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생면 부지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견해가 맞부딪히거나 이해 갈등이 발생할 때는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 사이에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여,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갖거나 똑같은 방식으로 신앙생활도 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이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 (롬 8:28)’는 말을 한 것은 모두가 동일한 생각과 방식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보편적이면서도 거룩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에 더 가까운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입니다. 좌우와 고저의 구별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다’ 안에 포함된다는 ‘무작위’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의 본래 의미대로 세상과는 구별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별없이 사람들을 포용하되, 세상과는 차별화되는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교회는 그 한 일로 입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교회는 다른 이들을 구별짓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때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곳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서부지역 목회자 수양회로 아리조나에 있는 나바호 인디언(Native American Indian)보호구역을 다녀왔습니다. 그 지역에서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님을 통해 인디언들의 열악한 현실과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구별없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1년간의 선교를 통해 나바호 인디언들과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간증을 들을 때에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사역하는 교회에서 이제 한국 이름이 아니라  “Yá'át'ééh Shiyáázh (사랑하는 내 아들아)” 라는 인디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떠난 인디언 선교사에서 이제는 그들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지요. 다른 나바호 부족들도 선교사님을 “좋은 친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 말로 친구란 “내 슬픔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어 준 진실된 친구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개별화된 세상을 걱정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삭막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너희’가 뚜렷이 구별되고, 그 골도 깊어져서 함께 어우러져 산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도 “사랑하는 내 아들아”이라고 불러 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좋은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세대는 훗날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이 세대를 과연 무엇에 견주셨을까요? 바라기는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하는 내 아들”로 부름 받은 거룩한 성회가 되어 슬퍼하는 세상과 함께 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