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을까?

창세기 25: 24-34, 마태복음 13: 3-9

 

최근 바티칸 교황청에서 각 교회의 성찬 예식에 사용되는 빵과 와인에 대한 전통적 규정을 재차 확인하는 판결을 내놓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글루텐 프리(gluten-free) 빵과 자연산 포도주가 아닌 제품은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로 판결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글루텐이 함유된 빵이나 음식을 피하려 하고, 와인도 다양한 제품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엄격한 규제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는데, 결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해서, 성찬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이 성찬예식에서 받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주님을 기념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변화되는 세상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신념을 고수해야 한다는 카톨릭 교회의 원칙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사회의 변화와 흐름에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신교의 입장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만도 없습니다. 맞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쉽게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연약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상징적 의미와 내용만을 강조하다 보니 점차 성찬식 자체를 경시 여기는 듯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형식에 대한 경시가 때로는 내용에 대한 의미도 점차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보아왔습니다.

먹는 것과 관련해서 지난 주 한국에서도 관심을 끄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학교 급식노동자들을 가리켜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고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은 아마도 천직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 못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급식 노동자들을 직업적으로 하대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더불어 누구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밥을 먹이기 위해 노동하는 이 땅의 아줌마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판단해 버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혹자는 밥을 먹기 위해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 할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 밥입니다. 하물며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그들이 먹어야 할 밥짓는 수고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밥 문제를 마음대로 저울질 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밥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변화된 현실 조건과는 상관없이 성찬에 대한 교회의 원칙을 고수하는 문제나 밥 먹는 일에도 분명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을 접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됩니다. 바로 ‘먹는 것에도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기준이 있어야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유대의 율법처럼 먹는 것에도 철저한 규정이 존재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일정한 범위라도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셈입니다. 도대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옳을까요? 먹고 사는 문제는 단순히 생존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삶의 목적과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무엇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두 개의 서로 다른 본문 이야기를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할 때마다, 비유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곤 했습니다. 그 이유를 마태복음 13장13절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영적으로 무감각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숨은 보화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바로 믿음의 태만에서 찾으셨습니다. 두드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조차 얻고자 하는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은혜를 주어도 은혜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불행한 모습과 같은 것이지요. 사람들이 그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만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한가’ 라는 한탄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정말 먹고 마셔야 할 생명의 양식은 구하지 않고, 당장 눈 앞의 문제에만 급급한 현실의 상황을 예수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던 겁니다.

생명의 양식의 중요성에 대해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조차 육신의 삶이란 분명 유한하고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알면서도 깨닫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모순도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교인은 될 수 있어도 아직 제자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되고 싶은데, 시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똑같은 논리입니다. 구원은 좋은데 희생과 헌신의 신앙생활은 불편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아들이 누리는 특권은 갖고 싶어도 이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과 책임은 지기 싫은 것이지요. 눈 앞의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버릴 만큼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 에서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사실 맏아들(어원: 비코르 בְּכוֹר)은 어원의 의미처럼 첫 열매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첫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것이니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결국 맏아들의 권리는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은혜와 더불어 마땅히 하나님께 속한 자녀 답게 자신을 살아있는 영적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결단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맏아들의 권리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향해 던지는 문제제기가 이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을까?” 라는 질문에 관해 교회가 세상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것 조차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세상처럼 성장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현실적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결코 거룩한 신앙공동체로서의 변별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빵과 와인을 두고 벌이는 논쟁 조차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여전히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삶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산 오가닉 빵과 와인에 대한 집착은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더 멀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리에 대한 위배나 신성 모독이라는 말이 생존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딴 세상의 소리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배고프고 갈급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러한 논쟁은 그다지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무엇을 먹고 마실까의 신학적 논쟁 이전에 지금도 여전히 밥의 문제로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먼저 염려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참 생명과 진리로 우리의 영을 채우고자 했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 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성찬에 대한 논쟁과 달리 많은 개신 교회는 요즘 예배의 형식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고 근사한 예배의 모습이라 해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우리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과연 이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도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익숙한 농사의 기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농경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는 조금 다른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여러 작물을 수확하기 위한 윤작을 하지 않아서, 하나의 작물을 거둔 뒤에 밭을 완전히 일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결과 원래의 밭 안에 길바닥도 나있고 돌밭과 가시덤불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이 꼭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흡사하다고 보셨던 겁니다. 밭 사이를 거닐다가 우연히 생겨난 길바닥이나 잘 돌보지 않아 일어난 돌밭과 가시덤불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게 변화무쌍하다는 것이지요.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평탄할 수만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여러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요? 그러다 보니 씨앗이 자라나기에 좋은 토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단단한 부분도 늘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가꾸는 노력이 없이 있는 그대로 두게 되면 때로는 씨 뿌리는 결실을 맺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주어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나서 회피해 버리거나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뿌리는 자의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이를 받아야 할 개인들에게 자신의 마음 밭을 가꾸라고 하신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다양하게 생겨날 수 있는 현실의 조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 뿌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믿음이라는 토양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좋은 토양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달리 표현하면, 바로 맏아들의 권리를 얻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격을 갖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축복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에 걸맞는 자녀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배가 고파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을 보는 시선도 변화됩니다. 세상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가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내 밥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밥그릇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에서 우리의 영을 살찌우는 변화가 일어난 결과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나 혼자만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는 모습을 벗어나, 더불어 함께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며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좋은 토양을 가꾸어 갈 수 있기를 소방합니다. 그리하여 주어진 맏아들의 권리를 다 행사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