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믿음은?

마태복음 14:22-33

 

말씀을 전하기 전에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갈등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군사적 강경 대응이 대화와 협력의 평화적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더불어 지난 주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백인 우월주의와 반인종주의 시위대 간의 유혈 충돌 사태가 상호이해와 존중이라는 민주적 이념을 통해 해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국제 왼손잡이의 날이기도 합니다.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지만, 결국은 소수자의 권익을 함께 나누고자 제정된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일 모레면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주권을 회복한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한자로 풀이하면 빛을 회복한 날이지요. 저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분쟁, 그리고 편견과 반목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빛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분명하게 생각해 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분쟁과 갈등으로 상처난 이 땅에 화해와 평화로 가득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평안의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도 바로 이를 재확인시켜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홀로 산에 오르신 뒤에, 제자들은 먼저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강을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몹시 불어서 제자들이 탄 배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해집니다. 때가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녘이라고 한 것을 보면, 거센 풍랑과 더불어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은 배에 탄 제자들을 더욱 두렵고 막막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면서 거칠 수도 있는 풍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나름대로 그 분야에 잔뼈 굵은 뱃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의 핵심은 풍랑에서 제자들을 구해주신 부분 보다는 물 위를 걸어 오시면서 보여주신 초능력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다 강화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물론 본문에 기록된 내용처럼 예수님의 초능력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바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만들거나 본문 앞 바로 앞 사건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야기하며 이미 강조한 것처럼 예수께서 행하고자 한 사역의 핵심은 이와 같은 초능력이나 마법과 같은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면서도 시험 받기 쉬운 무조건적 사랑이나 용서를 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전하는 초자연적 사건은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본문 이야기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론이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예수님의 부재 이후 겪게 될 신앙공동체의 위기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재를 2천년 동안 경험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그 추종자들로 구성된 초기의 신앙공동체는 적어도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보거나 적어도 동시대에 반향을 일으킬만한 일들에 대해 간접적으로라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책으로만 보고 이해하는 우리 시대와는 엄청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오늘날 교회의 위기라는 말은 당장 꼬리를 감추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만일 제가 이 자리에서 병자 몇 분을 기도로 치유하고, 공중 부양을 해서 물 위를 걷듯 예배당 곳곳을 허공으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사람들이 이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아마도 말씀을 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교회는 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 첫번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친 제자들의 말, 곧 “유령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요즘도 아직 그런 분들이 가끔 계시기도 한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나 큰 호수 아래에는 악령과 같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미신이 존재합니다. 뱃사람들이 거센 풍랑을 만날 때마다 제사를 지낸 것도 결국은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악령의 심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바다의 풍랑을 주관하는 악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악령”이라고 소리쳤던 제자들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초대의 신앙공동체가 가진 예수님의 이미지와 이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앙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비한 능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면서 믿음을 갖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믿음이 출발부터 잘못된 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그 한계도 뚜렷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가 하면, 초능력을 보고 믿는 신앙은 극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조건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아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는 법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마치 악령의 심기를 달래는 것처럼,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말 뜻 그대로 예수님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버리는 역설적 모순이 발생해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뜻마저 맘대로 조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우리의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나 중세의 기독교 신앙이 바로 이러한 모순에 빠져 있었던 사례입니다.

결국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가 뒤바뀐 꼴이 되고 만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교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최근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 실망해서 “안나가”는 교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질주의가 팽배하여 기복신앙이 만연한 한국교회를 일컬어 어떤 이들은 “뽕 맞은 기독교”라는 독설을 서슴없이 내뱉을 만큼 교회에 대한 불신이 극단에까지 차오른 상태입니다.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 않고 세상의 논리에 물들어서 복음의 중심이 흔들린 교회는 더 이상 빛과 소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먼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주장만을 펴려 한 결과가 아닐까요?

기적을 체험한 교회가 오히려 어려움에 봉착한 두번째 이유는 바로 외적인 환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베드로의 흔들리는 믿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려 한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물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이를 교회의 상황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베드로가 두려워한 바람은 제자들이 탄 배, 곧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불어 닥친 외적인 환경을 뜻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가 처한 현실 상황은 거센 바람을 만난 흔들리는 배와 같았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환경이 교인들에게는 늘 위협적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서 중심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경우는 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항상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지요.

초기 신앙공동체는 생명의 위협을 가하던 외부의 적들 뿐만 아니라, 세상과는 모순된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해 늘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만 해도 사람들은 미완의 실패로 생각했던 때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현실 보다 이상을 좇는 광신도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외부의 공격은 오히려 내실을 기할 수 있는 기회라도 됩니다. 더 무서운 적은 외부에서의 공격이 아니라 사실은 외적인 환경에 스스로 무너질 때 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제자들의 초대 교회보다 더 위협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행복의 근원이라 믿는 세상 복음이 교회에 이미 뿌리 깊이 침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세상의 논리에 맞섰던 초대 교인들과는 달리 오늘날 교회는 이미 세상의 풍파 앞에 무릎을 꿇어 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바로 우리의 믿음에서 찾으셨습니다.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인가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본질에 대한 말씀인 것이지요. 여전히 예수님을 유령 쯤으로 생각하는 미신과 같은 신앙이 아니었는가 되돌아 보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눈으로 보일만한 성과가 있어야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되는 것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찾으려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인은 아니었던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소위 말하는 “뽕 맞은 기독교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여 흔들리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에고 에이미” 눈으로 보여 주어야 그나마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그 마저도 작은 풍랑이 일면 쉽게 내려 놓으려는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내가 그 해답”이라는 겁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공동체가 의지하고 따라야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유령 같은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어떠한 환란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다시 모시는 광복을 지금도 함께 기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 땅에 가득 한 분열과 갈등을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가 통치하는 평화와 화해의 땅으로 변화시켜 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