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사람

마태복음 15:10-20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의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의 전통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장의 3절에서는 이를 장로들의 전통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란 오경에 기록된 율법 이외에 율법의 원리를 현실 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유대 랍비들에 의해 정리된 일종의 생활 규범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탈무드는 이러한 장로들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에 의해 율법을 해석하여 적용한 규범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에게 장로들의 전통은 그 자체로 율법과 마찬가지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적용한 것이니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적 사항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문제를 삼았던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을 동일한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사람에 의해 해석된 구체적인 생활 규범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장로들의 전통은 말 그대로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도덕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사회적인 위신과 더불어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전에 종교적 전통에 따라 손을 씻는 것이 갖는 의미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위생의 문제도 그렇고, 먹는 것 하나에도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합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 씻는 전통을 강조하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서슴없이 비판하셨습니다. 식전에 손 씻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보다 앞서야 할 율법의 정신이 위배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전통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되어야 할 것은 전통으로 명문화된 세부적인 규칙 그 자체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손 씻는 일처럼 명문화된 규칙 하나하나를 아주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하여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손 씻는 행위 보다도 마음을 씻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행위에는 유독 신경을 쓰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그들의 위선을 꼬집은 것이지요. 정말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먹는 것 때문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것 조차 보지 못해 세상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눈 먼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기는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나, 뭘 좀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나 매한가지라는 지적입니다. 서로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먼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누가 누구를 인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다가는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 보셨던 겁니다.

그렇다고 인도하는 길잡이가 적어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부모들이 종종 자식들에게 “너 보다 똑똑한 아이와 어울려 놀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비교우위에 대한 사회적 강박관념을 갖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 자식도 남보다 나은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첩경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눈 먼 사람과 그들 중 길잡이가 되는 이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 먼 사람’이라는 말의 헬라어 어원이 “tufao, τυφόω”인데, 그 의미가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우리 말에 흔히 “뜬구름 잡는다”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쭐대며 으쓱댄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확실한 상황과 자만에 빠진 상태를 동시에 갖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예수께서 하신 말에 적용해 보면, 뜬구름 잡듯이 절대적인 해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마치 무언가를 다 아는 것인양 우쭐대며 우겨대는 꼴과 다름없다는 겁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눈 먼 사람이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눈 먼 길잡이’ 라고 칭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이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길잡이도 큰 틀에서는 눈 먼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길잡이라고 해서 남보다 월등하게 난 사람을 뜻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좋은 길잡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으며 행여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먼저 감수하여 뒤 따라 오는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듯 “잘 난 사람”이라기 보다는 믿고 따를 만한 “든든한” 사람인 것이지요.

교육학의 절대 명제처럼 주장되는 말 가운데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의 수준이 결국 교육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눈 먼 길잡이가 가져올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하다는 것이지요. 교육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한자로는 가르칠 교(敎)를 써서,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배움에 앞서 가르침이 선행되는 것이지요.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education’의 어원인 라틴어 ‘educare’ 는 본래 젖을 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엄마가 젖을 주면 아이는 그걸 먹고 양육 받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주는 쪽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젖먹는 힘을 다해 먹어야 하는 아이의 몫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움이 상대적으로 동양보다는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젖을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에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바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교육의 질을 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참된 배움과 양육이 가능하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어떤 상황인가요?

교육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한자 구절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번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방식이 매우 자의적이지요. 교육의 목적과 방향 보다는 외적인 교육 환경에만 집중하려는 시각이 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요즘 현대 사회의 교육에서는 이로 인해 오히려 “교육열”을 조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한다는 생각도 그래서 나온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는 미국 땅 만해도 학군을 따라 사람들이 밀집해 살 뿐만 아니라 덩달아 집값도 오르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의 이주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자체 보다는 오히려 축복과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보려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시각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맹자의 엄마야 말로 정말 맹한 사람 아닐까요? 적어도 두 번의 이사는 실패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시선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해 집니다. 맹자가 뛰어난 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의 교육만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라는 관점입니다. 오히려 첫번째 공동묘지 옆에 살 때는 아이에게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두번째 장터 옆에 살면서는 생존 현장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살아있는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란 주장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한 뒤에야 비로소 참교육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이지요. 때문에 마지막 세번째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간 맹자는 그 때까지 보고 경험한 바를 통해 이제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육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모든 것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배움의 의지를 키워나갈 때 교육의 방향과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사성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동적인 배움의 과정을 통해 교육의 참 목적인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이유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교사나 학생, 목사와 변호사, 그리고 의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교육은 바로 그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오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들이 지금도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위기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비춰지기 보다, 오히려 세상이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비판이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눈 먼 길잡이와 눈 먼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교육을 덜 받았거나 지적인 수준이 형편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와 교인들의 수준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과 방향이 퇴색되고 변질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육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질문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의 배를 채우듯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길잡이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르침과 배움의 중심이 흔들리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영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야 말로 눈 먼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