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정체성

마태복음 16:13-19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다소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껏 스승의 뒤를 따라 다니며 여러 사역의 현장을 목격하고, 증거하시는 말씀들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제자들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질문 자체는 제자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제자들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여과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지금까지도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동일한 고대 근동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당대의 뛰어난 스승이나 종교 지도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적 지도자나 선지자로 본다는 것은 매우 우호적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부 유대 성전세력들이 비판한 것처럼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같은 극단적인 평가는 면한 것이니 말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대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이렇게 급작스러운 질문을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서 행하신 것일까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갖는 당시의 의미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정확한 의도는 파악할 수 없지만, 한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점은 거대한 도시의 위용 앞에서 제자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되짚어 보시려는 의도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도시의 이름이 로마의 황제를 따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그 도시가 평범한 곳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 받던 로마의 황제를 기리는 신전과 이를 우상화시킨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도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문에 이러한 도시적 배경 속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더냐”고 묻는 예수님의 의도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현실의 위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제자들이 분명한 신앙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려는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질문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풍랑 속에서 구해 주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명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주지시켜 주셨습니다. 풍랑이 위협이 되는 외적 요인이라면, 위압감을 주는 도시와 우상숭배의 문화는 유혹을 줄 수 있는 외적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외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신앙의 근본을 잘 지키고 있는지 재차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처럼 유혹거리가 날마다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파고 앞에 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당장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떠한 과학적 발견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낡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거대한 현대사회의 톱니바퀴 같은 현실 속에 신앙은 참 초라하고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점점 고령화 되어가면서 결국은 교회 건물이 빈 공간으로 남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천년 전 당시 상황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대로 당시 사람들도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일로 바라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삶이 편해 지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도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이들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장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의 진로도 불분명한 상황인데, 바쁜 시간 쪼개어 교회에 가는 것도 그렇고 신앙과 관련된 일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비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아예 자식들에게 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미리 엄포를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도 엄격한 규정을 내려버리는 것이지요.

저도 그렇게 해서 인생을 올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업을 마치고 인생살이를 조금이라도 해 보신 분들은 그 이유를 다 이해하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조급함과 그 틈새를 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현실은 우리의 선택을 언제나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늘 신앙적으로 흔들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매우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그 때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말이지요. 베드로의 이 대답은 2천년 교회 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제자와 그들이 세워 갈 교회에 주셨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겁니다. 이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의 나라에서도 매고 풀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신 것이지요. 이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교회에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꾸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 땅에 그대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소명에 가까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명을 통해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모습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겁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교회의 정체성을 이야기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본인에 대한 정체성을 묻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를 믿는 제자와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2천년이 흐른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새로운 길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과 새롭게 마음을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지금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맞나요?” 바라기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의 입술과 결단을 통해서 분명한 제자와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