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출애굽기 12:12-14

로마서 13:8-10

 

지난 주 한국에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장면의 사진으로 인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동네 선배 여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건방지다는 이유 하나로 여학생들이 한 학생에게 집단 폭행을 무자비하게 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금 한국에서는 청소년의 중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를 위해 입법 청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물론 처벌의 강도를 높여서 이와 같은 폭행 사건을 줄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원점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생명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까지 만들면서도 양심의 가책 조차 느끼지 못하는 비정한 현실에 대해 모두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장면은 장애아동들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 아동의 부모들이 마음을 돌이켜 학교 건립에 찬성해 줄 것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장애 아동을 위한 시설이 동네에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도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장애인 특수학교가 생기면 왜 자녀 교육에 문제가 생기고, 집값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지독하게 이기적인 님비(NIMBY)현상 아닌가요? 결국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비정한 현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오히려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요? 오히려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2000년 전 사도 바울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빚을 진다는 것은 갚아야 할 의무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결국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좋다고 하는 감정의 표현이나 선택적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의무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사건을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 시대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건강한 사회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서로에게 행해야 할 바를 다하기 보다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짓으로 빚을 더하는 비정상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갚아야 할 빚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산 지경에 이를 만큼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 중 하나는 사랑을 빚으로 표현한 사도 바울의 정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우리에게 빚처럼 주어진 까닭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인해 늘 빚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모든 정성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겁니다. 나아가 받은 사랑의 빚을 서로에게 갚아 나갈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빚에 대한 서로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오직 사랑의 빚만을 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빚진 자처럼 살 때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과 유혹, 힘과 물질적 풍요의 욕망에 사로 잡혀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정작 갚아 나가야 할 빚에 대해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빚이 해야할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기 힘들도록 막아서는 일종의 문턱(threshold)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사랑 하기 보다 부를 얻고 힘을 과시하며 자기 자신의 편안함 만을 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생명을 자신의 기분에 들지 않는다며 마구 유린하고, 생명을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는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물고기가 맨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이 물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물고기가 태어나 물 밖에 올라와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살던 곳이 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현실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태어나 자라나면서 매순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 가지요. 첫 걸음마를 떼는 순간처럼 인생은 끊임없이 앞에 놓인 문턱을 넘어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는 두려움으로 물러서기를 여러 번 하다가 마침내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다음 단계로 성장해 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용기와 자신감도 생기지요. 그러면서 또 다른 문턱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문턱 앞에서 주저앉게 되면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은 고사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자신감마저 잃어 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장이 멈추고 제자리 걸음을 하며 점차 퇴보해 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의 본문은 이와 같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문턱의 의미를 다른 맥락에서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땅에서 구하기 위해 끝까지 말을 듣지 않던 애굽에 커다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 살아있는 모든 첫 열매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 죽음의 사자가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해서 사람들은 유월절(파사: Passover)이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마치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사를 많이 드린다 해도 마음 속에 품은 죄와 악한 행동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 어떠한 희생 제물도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음의 문턱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얻게 하신 겁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곧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오늘 우리의 삶에 놓인 여러 문턱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자라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생명을 자기 맘대로 밟아버리고 상처를 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생명을 세상의 헛된 재물과 편견과 견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상처를 보살피고 억눌린 생명에게 자유와 평안을 줍니다. 금과 은 보다도 작은 생명 하나의 가치도 소중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삶의 문턱에 다다라도 또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빚질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져야 할 유일한 빚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