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름은?

마태복음 25:1-13

 

지난 주일에 텍사스주 서덜랜드 스프링스의 한 작은 침례교회에 괴한이 들어와 총기를 난사하여 27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자 중에 절반은 2세 영아를 비롯한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가족 중에는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증손자까지 모두 8명을 잃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지 채 한 달 만에 총기로 인한 대량 살상이 또 다시 일어나자 미국 전역에서는 총기 규제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딸을 이번 사고로 잃게 된 텍사스 교회의 담임목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총을 소지한 채로 강단에 오르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교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지난 주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를 방문 중이었던 트럼프 대통령도 이 소식을 듣고, 이번 참사의 원인은 총기 소지가 아니라 정신 건강의 문제라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오히려 동네 주민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덕택에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대선 캠페인 중에 총기 소지를 확장해야 총기 사건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다 보면 함부로 총기난사와 같은 가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란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총기 소지의 확장이 사고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실제로 총기 소지를 규제하고 있는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대형 총기 참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총기 자체를 살상무기로 사용할 방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총기 소유에 대한 자유와 권익 옹호는 지난 주 한국을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으로써 그가 내세운 외교방향과는 매우 동떨어진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아시아 방문 내내 트럼프는 주변국들에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강력한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논리대로라면 이미 핵을 보유한 나라가 다수 있는 상황 하에서 위험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핵무기를 모두가 갖는 것이 아닌가요? 규제가 아니라 장려라도 해야할 판국이 아닌가 라는 말입니다.

물론 적에게는 예외조항을 두어서 적용할 수 없다는 변명을 늘어 놓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소위 동맹국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의 무기를 판매하는 세일즈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득을 보는 거래였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파는 사람이야 이득이 되니까 그렇다 쳐도 사는 사람은 왜 사려 할까요? 물론 국가차원에서는 외교적인 압박과 전략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심리는 국가나 개인이나 할 것없이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텍사스 교회의 목사가 앞으로도 발생할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총을 준비한다고 말한 것처럼, 각 국가들도 만일의 전쟁 사태에 대비하여 무기를 확충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안고 사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기다리기 보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준비하려는 경향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저축을 한다든가 보험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합리적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현실에 대한 부분은 가능하면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신앙의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사이비와 같은 불합리한 생각에 동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현실보다 더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후의 영적 세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요?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로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며 사는 것이 옳을까요?

오늘 본문의 비유는 혼인잔치에서 벌어진 한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없는 미래의 상황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의 전통에서도 결혼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대사로 여겼습니다. 이는 주변의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결혼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족간의 결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문화를 가진 사회에서는 여전히 부모가 결혼에 중요한 의사결정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도 부모, 특히 양측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들이 먼저 결혼 계약을 하는데, 신랑측이 신부 가족에게 결혼기탁금을 미리 주고 신부의 아버지로부터 딸의 권리를 넘겨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당시 평균 혼인연령이 여성은 12-13세, 남성은 20세가량 이었다고 하니 수긍이 갈 만도 합니다. 성인이 되기 바로 직전인 12세에 정혼을 하고, 그 후로 일년이 지난 후에 정식 결혼식을 하는데, 그 때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처가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가 되어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오자 당시의 풍습대로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마중 나간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비유의 상황처럼 늦은 시간에 신랑이 올 때에는 들러리들이 등불을 비추기 위해서라도 마중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신랑의 도착과 함께 신부 집에서는 성대한 결혼 잔치가 시작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워낙 성대하게 치르는 결혼 풍습 때문인지, 성서에서는 ‘하늘나라 잔치’를 묘사할 때마다 종종 혼인 잔치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이 상황을 비유로 똑같이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결혼 잔치의 비유를 통해 장차 일어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말씀해 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가 유독 신랑이 더디 온다는 상황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나간 처녀들 모두 한결같이 다 졸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랑이 예정보다 많이 늦게 도착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부분입니다. 왜 비유의 상황을 이렇게 설정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묻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의 온갖 수난과 고통에 더하여 불확실한 미래가 그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안심은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든 아니면 주님이 계신 곳으로 자신들이 가는 것으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것이었지요. 어떤 의미에서 당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흔히 말하는 종말론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주님의 재림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쉽게 서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쉴 곳을 예비하고 다시 돌아오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다리는 고통은 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힘든 일입니다. 결국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중에는 더디 걸리는 약속에 지쳐가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교회 안에서도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인 종말주의자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오직 신앙에만 전념을 쏟으라는 열광적 신앙이 기승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깨어 있어라”고 하신 말씀을 신앙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그날을 생각하면 잠시도 한눈 팔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한 숨도 자지 않고 늘 깨어 있을 수 있나요? 항상 깨어 있는 것이 아마도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실제로 원어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는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늘 경계하며 준비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다리다 지쳐 재림과 같은 일은 없다며 냉소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나 종말의 상황에서 신앙생활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소용없다는 “맹목주의적 신앙”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은 포기하고 다른 한편은 막무가내로 올인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니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더불어 강박관념처럼 다 쏟아 부어 스스로를 괴롭힐 일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준비하고 있으라 당부하십니다.

비유 이야기의 핵심이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했는가의 여부에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등불을 밝히려면 당연히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입니다. 그 자체로 합리적인 판단 아닙니까?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은 준비할 수 있는 상태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이는 일에도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른다고 포기하거나 모른다고 모 아니면 도라는 방식으로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닙니다. 이는 현실의 살아가는 방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그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신앙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준비가 없이도 내일은 오겠지만, 오늘의 준비 없이 맞이하는 내일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구요. 20세기 대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기독교 신앙은,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금을 포기하거나 요행을 바라듯 불합리한 맹목적 신앙생활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을 더 깨어서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지금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서 씨를 뿌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신앙입니다. 비록 지금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없을지라도, 희망이라는 등불을 밝히기 위해 오늘 믿음의 기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수고를 다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그 나라는 현실이 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 차원에서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새로운 주거문화가 생겨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구의 구별이 뚜렷한 아파트 생활의 특성상 개인주의가 더 강해지고 이웃과의 마찰도 이전 보다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요즘은 아파트의 공용면적에 해당하는 베란다를 확장하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서 새로 건축된 아파트의 99% 이상이 아예 개인 전용면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베란다는 화재나 위험상황에 대비해서 서로간 대피를 위해 마련된 공유지입니다. 개인 땅이 아니라 아파트 거주자들을 위한 공동의 땅입니다. 어느새부터 나만 편하면 좋다는 의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이 되어, 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은 주거 공간을 소유하기 위해 공동체의 안전에 대한 대비를 포기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으로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적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함께 뿌려야 할 씨앗 가운데는 바로 공동체를 위한 평화와 상생의 노력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소통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처럼 여러 지역에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국가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분쟁의 도구인 무기도 마구 판매되는 현실 속에서,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가 준비해야 할 기름은 바로 평화와 상생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