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나무를 심는 교회

이사야 61:1-3, 요한복음 1:6-8, 19-23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중략)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하지만 대한민국의 권역외상센터가 안고 있는 현실 상황은 과연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병원과 의료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지난 주 한국 검찰은 전임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불미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국정농단의 핵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최순실에게 징역25년과 벌금 1185억원이라는 중형을 구형했습니다. 최씨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국정에 개입한 것은 물론, 여러 대기업과 정부차원의 사업에서 막대한 사익을 챙긴 혐의로 기소가 된 상태였습니다. 한 국가의 국정운영이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에 의해, 그것도 개인의 탐욕을 위해 악용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대하는 국민들의 반응 역시 실망과 분노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었습니다. 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국민들은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도록 만든 국정 파탄의 주범들에 대해 매우 엄격한 처벌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엄벌백계를 통해 다시는 이러한 국정농단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게 공직자로서의 위치에 걸맞는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선 실세나 사조직과 같이 비합법적이고 불의한 세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한결같은 기대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한마디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깨달아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요청도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사명에 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5:13-14).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주님의 현실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상은 어둡고 부패한 곳이라는 시각입니다. 일부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곳곳에서도 악하고 불의한 죄의 요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가 어둠을 밝히고 부패를 막는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함께 사명을 명확하게 규정하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내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제가 어둡고 불의한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할 빛의 자녀들이 그 빛을 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짠맛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부패해 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거룩한 신앙공동체로서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과 크게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담임목사 세습문제로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는가 하면, 최근에는 교단의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금품수수가 있었다는 제보로 인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걱정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말로는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교회의 단체들은 분열과 파행을 거듭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이권과 세력을 얻기 위해 이전 투구를 벌인 결과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단적으로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에 대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점점 빛과 소금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공해 주는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부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며, 당시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선지자였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그를 추종하는 많은 세력을 얻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결코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장차 오실 주인공을 위해 선택 받은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은 잊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 스스로가 어둠을 밝히는 참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저 장차 오실 그리스도라는 빛을 증언하기 위해 선택 받은 도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마태복음 5장 14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자녀가 그 자체로 빛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교회는 빛을 담는 도구일 뿐입니다. 아무리 양초가 많이 있다해도 불이 없으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참빛이신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담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우리 스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라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쉽게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믿음의 자녀는 빛을 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빛이 나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도 결국은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의 행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증언자일 뿐입니다. 빛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증언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얼마나 중요한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굴곡이 있거나 얼룩이 생기면 빛도 원래 그대로 전달되지 않듯이, 빛의 증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자녀가 먼저 성결하지 않으면 왜곡되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자기 부인이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완전히 투명한 유리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 그대로를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되라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우리 교회가 보이면 안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보여서도 안됩니다. 선행을 행하는 일에 내가 드러나서도 안됩니다. 그저 주님의 이름이 기억되면 그만일 뿐입니다. 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이 나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종 이사야를 통해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선포를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병들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재 대신 화관을 쓰고, 슬픔 대신에 기쁨을 누리는 상황이 눈 앞에 벌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더 이상 고통과 좌절, 낙망이 아니라 기쁨의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날을 예비하는 겁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당신이 누구인가”라는 세상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빛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가난과 상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의의 나무가 될 수 있도록 희망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교회가 바로 의의 나무를 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