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Coram Deo)

마가복음 13:28-37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합니다. 영어로는 Advent이고, 우리말로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예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그날이라는 말로 종종 부르기도 하는 그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D-day를 향해 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날이 언제인가 보다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는가 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그날을 종말이라고 생각해 보면, 언제 오는가의 문제도 분명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날이 언제 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물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답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그날이 올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반드시 온다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게 될 그날을 어떻게 예비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현명한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보더라도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종말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다 그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날이 언제인가를 정말 궁금해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질문도 없을 겁니다. 사실 모두에게 중요한 부분도 그것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게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유대인들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더디 오기를 바란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복음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말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우리 개인이 맞이할 그날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기쁨의 뉴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새로운 하늘과 땅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니 지금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날이 언제인가를 묻기 보다는 어떻게 믿음 생활을 잘하며 예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무화가 나무의 비유처럼 그 징조를 아는 것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병이 드는 것처럼 증세를 파악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물론이고 일반 교인들 조차 어떤 현상이 바로 그날을 보여주는 징조라고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중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잘못된 신앙의 자세를 갖게 만들 가능성 마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대한 한결같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그날을 묻는 것은 은연중에 가까이 다가와야 다급하게 준비하려는 영적 나태함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치 학생들이 시험 때가 가까워져야 비로소 발등에 불이 떨어져 공부에 집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한 공부에 빠져 있지 못할 때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신앙적으로도 사람들은 마치 그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야만 무언가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영적 태도를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깨어있지 않겠다는 무의식적 다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호합니다. 평소에 공부 안하는 사람들, 그날이 가까워 오고 막상 그날이 되도 똑같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으로 깨어있지 않아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때에 닥쳐서 하겠다는 사람처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 그날은 말그대로 복음의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요한의 예언처럼 그날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문밖에 서 계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하는 의지와 실천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제 깨어서 그날을 예비하는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내년도 목회 계획을 세우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발견한 말씀입니다. “코람데오(Coram Deo)”라는 표어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 존 칼빈(Calvin)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도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였다고 합니다. 라틴어인 ‘코람데오’는  ‘앞에’라는 ‘코람’과 하나님을 뜻하는 ‘Deo’ 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풀이하자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처럼 살지 않은 교회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의 능력을 믿었던 교회의 모습이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멀리 숨어서 마치 하나님은 모르신다는 착각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가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다시 서기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결국 깨어 있는 신앙의 결단을 행한 모습입니다.

독일의 종교철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코람데오의 결과로 인해 사람들은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매혹적 신비(mysterium fascinosum)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스러운 하나님 앞에서는 체험은 두렵고 압도적인 느낌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리게 만드는 매혹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이 모세가 호렙산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아마도 두려움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포라기 보다는 경외감으로 가득찬 떨림에 가까운 느낌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한 뒤에는 뭔가 끌리는 감정이 들겠지요. 다시 또 한번 체험하고 싶은 그런 매혹적인 이끌림처럼 말입니다.

내년도에 우리 교회가 함께 이 코람데오를 실천하며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연약하고 흔들리는 신앙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신앙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더 다가서면 두려움이 먼저 생겨날 겁니다. 몸에 익숙한 습관과 생각들을 포기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면, 우리를 이끄는 그 매혹적인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그 매력에 또 다시 한걸음 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깨어서 그날을 예비하는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대림절을 맞이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력을 따라가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 모두가 코람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