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야한다면

마가복음9:38-41

원활한인간관계를유지하기위해서해서는안될이야기주제가두가지있다고합니다. 정치와종교에관한이야기입니다. 인간사에서빼놓을수없는매우중요한주제인데, 왜사람들사이에서기피의대상이되어버린걸까요? 그것은이야기를통해함께소통하기보다는자기의견해나주장을일방적으로남에게설득하려는경향때문에그렇다는겁니다. 사실이기고지는게임이아님에도불구하고, 정치나종교는자신의입장을어떻게든다른사람에게전하는정도가아니라그사람을이해시키고나아가자신의생각으로동의를얻으려는주제가될가능성이높기때문이라는것이지요.

특히대화문화가보편화되어있지않은우리정서상, 이두가지주제는사람들사이를갈라놓기딱좋은문제가아닐수없습니다. 부모와자식, 부부그리고친구관계를명확하게가르는토론주제가될수있다는겁니다(예,추석에가족갈등원인). 결국남는건상처뿐이라는말이일리가있습니다. 대화를통해서로소통한다는것은남의생각과입장을배려하며이해한다는뜻입니다. 그런데자신의주장을설득시킨다는것은대화라기보다는일종의테스트가될가능성이높습니다. 왜냐하면상대방이나와같은생각을갖고있는가의여부를가지고일종의편가르기를하는셈이니말입니다. 

수천년동안정치와종교는인간의역사를분쟁의역사로만드는데커다란공헌을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기독교의역사도한때는암흑의시기라할만큼매우공격적이고배타적인성향을보여주기도했습니다. 당시는종교와정치가뗄래야뗄수도없이밀착되어있던시기이기도했습니다. 믿음을통해편을가르는일종의정치적성향이강하게나타났기때문입니다. 같은믿음이아니면다른것으로끝나는것이아니라, 무너뜨려야할적이되는상황이었으니말입니다.  지금도많은사람들이기독교를비판적으로바라보며, 성경의말씀이나실제교회의모습이너무배타적인것아니냐는이야기를합니다. 믿지않는다는이유로혹은유대의백성이아닌이방인이라는이유로수많은사람들을학살하는성경의이야기는믿지않는사람들은물론이고믿는이들조차혼란스럽게만드는부분이기도합니다.

물론성경을문자그대로이해하려한다면그럴수있을겁니다. 무조건맞다고말하는사람들도위험하지만, 마치기독교의가르침이실제그런것아니냐며말하는이들역시단순하기는마찬가지입니다. 문자그대로이해하면서, 사실많은이들이실제로그렇게살지도못하고있을뿐만아니라그렇게살수도없다는사실은인정하려들지않는모순을여기저기서볼수있습니다. 대개는자기편한대로, 혹은자기생각에끼워맞추어서괜찮으면따르고, 아니면무시해버리는경우가더많습니다. 이런교회의편향된생각이오늘날세상사람들에게오해를만든이유가되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저는이런시각을가진분들에게이런질문을던지곤합니다. 거꾸로생각해보면, “이치에도맞지않고, 앞뒤가모순인경우가많은논쟁이되는이야기들을굳이성경에그대로기록하고있을까?” 라고말이지요.

이에대한기독교의가르침을제대로파악하는방법은의외로아주단순할수있습니다. 그것은바로예수님의말씀입니다. 그분이곧하나님의말씀입니다. 우리가우로나좌로치우치지아니하고따라야할진리의말씀이바로그분의말씀입니다. 그러니예수님의말씀을통해서거꾸로성경의가르침을해석하고이해하면, 보다명쾌하고올바른해답을얻게될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오늘본문말씀의이야기를통해배타적인인간의속성에관한예수님의생각을함께살펴보려고합니다.

본문의마가복음말씀은요한을비롯한제자들이예수님을찾아와그들이한일에대한보고로부터시작합니다. 그것은예수를따르던제자의무리에속하지않은어떤한사람이예수님의이름으로귀신을내쫓는것에대해더는그와같은일을하지못하도록막은일이었습니다. 아마도제자들은아무나스승의이름을들어귀신을축출하는행위는온당치못하다는생각을한듯합니다. 그이유를요한은자신들을따르지않았기때문이라고말합니다. 여기서따른다는말은공동체에속하지않았다는뜻입니다. 한마디로우리사람이아니라는말이지요. 때문에그가'주의이름'으로귀신을내쫓는선한의도를보여주었다할지라도, 우리사람이아닌, 말그대로‘외부인’에게그러한권한을주기는곤란하다는것입니다. 

이는당시제자들이얼마나배타적인성향을갖고있었는가를보여주는모습이라할수있습니다. 그도그럴것이이때제자들은자기들사이에서도서열에따라논공행상을따지던상황이었다는것을바로앞의구절을통해서도볼수있습니다. 하물며소속도되어있지않은외부인이자신들과같은행세를한다는사실을받아들이기쉽지않았을겁니다. 이것만놓고보면, 제자들도큰착각을하고있었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마치사람들을고치는데예수의이름을사용하는것이특허권이라도되는것처럼그소유권을주장하고있으니말입니다. 

사도바울은누구든지주의이름을부름으로써구원을얻을수있다고말한바있습니다(롬10:13). 그런데제자들은그이름을아무나사용할수없다고경계를만든것입니다. 그것도자기들이외의사람들에게는권한을뺏어버렸습니다. 주의이름을부를수있는권한은오직자기들의조직안에있는소위“우리사람”에게만주어진것이라생각했던것이지요. 이것만놓고보면, 제자들의세계관이매우단순하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흑과백,우리들과외부인이라는이분법적인시각이라는겁니다.

모든것을우군과적군이라는이분법적인세계관으로보는사람에게인생은어쩌면바둑판같아보일지도모르겠습니다. 흰 돌과검은돌로이루어진게임의세계와같이말입니다. 설사그렇게본다해도한가지분명한사실이있습니다. 이게임과같은세상이존재하기위해필요한가장근본적인룰은바로검은돌과흰돌둘다있어야한다는점입니다. 비록바둑판처럼세상이서로를잡아먹고많은것을차지하기위한게임같다할지라도, 변하지않는한가지점은서로함께있어야만가능하다는것이지요. 어떠한경우에든서로를인정해야한다는겁니다.

오래전한인목회자들의모임에참석을한일이있었습니다. 그런데모임중간에어떤목사님한분이제게와서정중하게인사하며, 후배님아니시냐고묻는것이었습니다. 저는처음보는분이라제가어떻게후배가되는지를되물었습니다. 그러자그분은특정신학대학을지칭하면서, 제가그곳출신이라생각했다는겁니다. 조금은겸연쩍게저는한국의신학교출신이아니라는사실을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나서생각해보니, 이상하게그분과같이있던몇분들이그전부터제게매우호감을가지고친절하게대해주신이유를알것같았습니다. 그리고바로이런생각이불현듯스쳐지나갔습니다. “이제는그전처럼대하지는않으시겠구나”

미국에유학와이곳에서신학교를졸업한저에게붙어다니는한가지꼬리표가있습니다. 그것은“미신”이라는겁니다. 장신, 감신, 연신이라고줄여서한국의특정신학교출신들을지칭하듯이, 미국에서공부한사람이라고해서미신이라고부르는것이지요. 사실미국의신학교가몇배는더많은데, 하나로뭉뚱그려부른다는것도흥미롭습니다. 그래서그안에서도세분화시키는데, 그범주에따르면저는미신가운데서도“잡신” 출신이라는겁니다. 특히한국감리교신학대학출신이상대적으로많은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는나름대로출신성분을구분하는방법이있다고합니다. 신라시대의골품제에비유하여, 성골이라해서감리교목회자집안의아들, 진골은감리교신학대학부를나온목회자, 그리고육두품이라해서학부가아닌대학원을감리교신학대학에서나온사람들. 나머지는그냥어둠의자식들이라고부른다는우스개소리가있습니다.

언젠가는미국신학교에서조차종강모임을마치고출신별로소모임을다나누어갖는데, 저는갈곳이없어서교수님과한조가되는호사를누린일도있습니다. 또어느모임에가서는섬기는교회의규모별로나누어소모임을갖는데, 당시청년수는허수라고해서저는교인수를세지못해어정쩡하게밖에나가커피를혼자마신일도있었습니다. 모임의밖에서있는다는것.그건쓸쓸함보다더한씁쓸한고독감을주었습니다. 게다가다한쪽에몰려서서, 그경계밖에선몇안되는사람에게“좌파” 내지는“문제있는사람들”이라는이름을달아줄때는참쉽지않은자리라는생각이들기도합니다. 그때마다저는자연스럽게성찰의시간을갖곤했습니다. “내가뭘잘못했는가?”라는질문과함께말이지요.  

우리안에속하지않은외부인을경계하는제자들에게예수님은이렇게대답하셨습니다. “금하지말라. 내이름으로기적을행하는자가나를욕할이유가없다. 결국우리를반대하지않는사람이우리와함께하는자다.” 사실우리를반대하지않는사람이우리와함께하는사람이라는예수님의말씀은논리적으로적절한대답은아닙니다. 물론반대하지않는사람들중에는지지하는사람도있겠지만, 분명아닌사람들도있을수있기때문입니다. 예컨대정부여당의정책을반대하지않는다고해서꼭그들을지지한다고는볼수없는것과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예수님의의도는다른각도에서살펴볼필요가있습니다. 제자들과는달리예수님은‘우리’와‘남’이라는이분법적인시각에서말씀하신것이아니라는뜻입니다. 예수께서는오히려그경계를없애려하신것이지요. 우리와외부인을가르는경계를없앰으로써모두가‘우리’가될수도있다는사실을알려주신겁니다. 하나님의뜻안에서모두가하나가될수있는길을보여주신것이지요. 왜냐하면제자들은누가주님의이름으로귀신을좇는가에관심을두고있었지만, 예수님은누가행한것이아니라그일을통해구원을얻게될사람들에게초점을두고계셨기때문입니다. 목말라죽어가는사람들에게복음이라는생명수를전하는것이우선이지, 그일을누가맡아서할것인가는그다음의문제였다는것이지요. 

반면제자들은자신들이하는일과그것을할수있는특권에대해서만생각을하고있었습니다. 그러나예수님은처음부터도움을필요로하는사람들에게모든관심을쏟고계셨던겁니다.  어떤조건이충족되어서그무엇때문에사랑하신것이결코아니라는뜻입니다. 그냥사랑하신것이지요. 그래서41절말씀에서자기받을상을받는사람에대한정의도되새겨볼필요가있습니다. 누구든지그리스도의사람이라고해서물한잔주는사람은무엇을지칭하는걸까요? 이말씀은제자들이라는것을알아보며, 그들에게베푸는사람을지칭하는것이아닙니다. 마치목사를잘대접하는사람에게만상이있을것이란뜻이아닙니다. 교회에속한우리교인만잘챙기면된다는무한이기적발상으로하신말씀이아니라는것입니다.

오히려예수님은그경계를무너뜨린분입니다. 우리와외부인의경계를허물고, 그리스도안에서모두가하나되는모습을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어떻게가능하냐? 그리고그것이어떤모습인가? 예수님의말씀은물한그릇줄수있는것이라고가르쳐줍니다. 누구라도이제그리스도안에서하나가된것을믿고, 구별하지않고그에게아무조건없이물한그릇을내줄수있는사람. 그사람에게제자들이그토록바라던상이있을것이라는뜻입니다. 그것이바로진짜사랑이기때문입니다.

영국의빅토리아시대여류시인가운데하나인엘리자베스배릿(Elizabeth Barett)은15세때낙마사고로인해척추를다친이후, 시한부인생을살았습니다. 그런데연인을만나주위의반대를무릅쓰고결혼을합니다. 그리고사랑에대해이런시를썼습니다.

“당신이날사랑해야한다면오로지/ 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주세요/ ‘난저여자를사랑해/ 미소때문에예쁘기때문에/ 부드러운말씨때문에/ 나와꼭어울리기때문에/ 어느날즐거움을주었기때문에‘ 라고/ 말하지마세요/ 그러한것은그자체가변하거나/ 당신으로하여금변하게할테니까요/ 그처럼맺어진사랑은그처럼풀려버릴거에요…오로지사랑을위해날사랑해주세요/ 그래서언제까지나/ 당신이사랑할수있게”

사랑은무엇때문에하는것이아니라는시인의말은감성에호소한말이라기보다는논리적이라고하는편이옳습니다. 왜냐하면그조건과그조건을바라보는사람의판단은언제나변할수있기때문입니다. 무엇보다오직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달라는시인의말은오늘예수님의말씀을연상시키기에충분합니다. 사랑은무엇때문에주는조건적인것이아니라고예수님은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도저히사랑할수없는원수까지사랑하라고가르치셨던겁니다. 할수있어서, 하고싶어서하는것은사랑이아닐수도있습니다. 할수없을것같은그순간에, 그리고하고싶지않은바로그때에행하는사랑이야말로진정한사랑이라할수있습니다. 그러니사랑해야한다면, 무엇때문이아니라그저사랑을위해서만사랑해주시기바랍니다. 그것이다받을여러분의상이니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