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요나

요나 3:1-5, 마가복음 1:14-20

 

새해를 맞이하여 목회 계획을 점검하면서, 개인적으로 요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사명이라는 것에 적극 동감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구원과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양육하는 개인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눈에 띠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조바심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만을 놓고 보더라도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가 먼저 해야할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되물어 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과연 한 영혼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행여 교회의 사역자가 담임목사의 목회에 일방적인 도구가 되어 버리고, 교인들도 교회의 행정적인 업무나 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반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 수입이 증가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되어버린 비정상적인 상황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도 변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되짚어 보기 위해서 입니다. 행여 교회를 생각한다며, 정작 교인 하나하나의 삶에 대해서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부족한 자신의 연약함과 무관심을 탓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대형교회의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가 “주의 종에 대적하면 하나님이 치워버리신다”는 말씀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이지만,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생각해 보면 거의 공갈 협박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에게 대들면 없던 병도 생기고 삶에 어려움이 닥친다는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목사가 더 기도하지 못하고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목사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도 교회의 역할을 온전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목사가 곧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교회를 사유화하거나 교인들을 도구화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전에 전도사님 중 한 분이 저에게 “교회가 나서서 좀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데, 저는 지금도 그 교회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속으로 생각하며 교회를 말한 것 아닌가 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교회론에 대해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헷갈릴 만큼, 우리는 실제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매우 불확실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교회란 정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란 결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예배당, 그리고 예배와 교회 사역에 필요한 도구를 제외하면, 교회는 단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적 의미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 어떠한 정의를 통해서만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문제의 소지가 있는 교회를 교회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교회에 대한 일정한 정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하튼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 개념적 정의’를 과연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신약의 복음서 말씀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시던 예수께서 그물질 하던 어부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이를 하던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곧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소명에 관한 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도를 이야기할 때마다 “따른다”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말뜻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작하면서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교회가 맡아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가 되는 목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사람 낚는 어부”는 고기 낚는 어부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까지 제자들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물질의 목적이 바로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반면에 사람을 낚는 어부는 그물질의 목적을 사람에 두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도 결국은 그 목적을 사람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세나 건물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나 일 중심의 교회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인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지키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명 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교회가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생명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나누기 위해 각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주셨을 때,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배에 남겨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여기서 그물을 버렸다는 말은 어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겨두고 떠난 배는 소유한 재산과 삶의 터전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며, 그곳에 아버지마저 남겨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사사로운 인간관계 마저도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두고 길을 떠났던 아브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결국 제자가 되는 길, 혹은 바꾸어 표현하자면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는 첫 출발은 바로 버리고 내려놓는 ‘포기’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포기가 바로 교회와 제자를 정의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선택은 그 외 다른 것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나서고자 하는 선택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여기던 것들을 포기해야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기독교 신앙을 “떠남”이나 “내려놓음”의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15절의 말씀처럼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예수께서 하신 첫 선포의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다른 말로 포기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래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어’는 옳은 선택을 위해 잘못된 부분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제자의 자세를 바로 포기에서 찾으신 것이지요. 복음을 따라서 구원을 갈망하며 모이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회개라는 포기의 행위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제자가 된다는 것 혹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춘다는 말의 의미는 더이상 물고기를 목적으로 삼는 삶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목적으로 하는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회개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바로 구약에 등장하는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적국의 심장부인 니느웨로 들어가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너무 겁이 나고 마음도 내키지도 않아서 가라는 곳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서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기 위해 물고기를 포기했는데, 요나는 오히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욕망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요나의 신세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해 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신세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고 그 끝은 결국 멸망 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지요. 이후 그는 물고기의 배에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위한 고기잡이, 물질 숭배와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이 지배하는 세상을 포기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이 자리도 요나와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과 부르심으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이지요. 제자로 부르신 겁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시대의 또다른 요나로 우리 모두를 부르신 것이지요. 사람 낚는 요나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