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힘

창세기 9:8-17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홍수 사건의 결말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홍수를 통해 온 인류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다는 부분에 관한 신학적 질문은 물론이고, 과연 그것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사실여부의 논쟁도 그 논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창조과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는 사실이 믿음에 대한 확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확인시켜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고 싶다는 충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 자체가 믿음의 부족에서 오는 조급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하려 드는 우리들의 조급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풍부하면서도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벽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학적 상상력을 완전히 막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홍수 사건을 인류에 대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를 조금만 고민해 보면, 과연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혹은 정반대로 노아와 그 가족만이 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벌하시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하신 심판이라고 한다면 뭐라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생각을 아무 질문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다른 재앙이나 사건에도 적용시켜 버리면 금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연적 재앙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하나님의 당연한 심판의 결과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피해자가 된 무고한 생명들에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른 것이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 근거를 믿음에서 찾는다면, 과연 누가 그 믿음을 정당한 것이라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실제로 노아홍수 이야기와 관련된 창세기 6-9장의 말씀을 보면, 홍수로 인한 심판의 기록은 아주 간략하게만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창 7:21-24). 오히려 말씀의 대부분은 심판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방주의 제작과정과 홍수 이후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하는 핵심은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구원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체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체벌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사랑이 중요한 테마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종말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날에 이루어질 심판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종말이나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언의 핵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언의 말씀을 통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근원적인 질문을 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믿음 안에서 변화된 이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생명의 언약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종말의 예언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소망 안에서 믿음의 중심을 세워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의 사건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 홍수 사건 이후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것도 어떠한 조건을  붙이지 아니하고 맺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어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비록 홍수로 인한 심판은 죄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조건을 달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삶의 여러가지 재난과 고통이 마치 대홍수로 인한 심판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알 수 없는 삶의 다양한 불행과 아픔을 당할 때마다 우리도 그 이유를 먼저 잘못된 세상의 불의나 자기 자신의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응징이나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방주를 만들어 예비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의 중심을 제대로 세워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맞이하도록 인도하고 계신 것이지요.

물론 우리 삶에 대홍수와 같이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재난이 불어 닥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홍수의 사건도 처벌과 심판의 재앙으로만 보이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시선을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굳은 약속을 다시 해 주셨습니다. 결코 홍수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이는 우리 삶에 전혀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다만 알 수 없이 불어닥친 삶의 고통을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듯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홍수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심판의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향해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 것이지요. 어릴 적 말을 듣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 보니 제가 독한 구석이 있어서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눈물 한방울 조차 흘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린 맘에도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잘못을 했어도 매를 맞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인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눈물을 흘린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매를 맞고 잠든 아들을 보니까, 그게 더 안쓰러우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도 말 안듣고 끝까지 버티는 아들에게 막상 회초리를 들었지만, 맞아서 상처가 난 다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는 겁니다. 아들의 다리만이 아니라 사실은 어머니의 마음에도 상처가 난 것이지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자는 줄 알았던 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때 비로소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용서를 구하며 울더라는 겁니다. 회초리는 맞으면서도 버티던 녀석이 어머니의 눈물에는 금방 손을 들고 만 것이지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서도 주인공의 심장에 박혀 얼음같이 차가와진 사람으로 만든 거울 파편을 녹여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눈물, 그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살리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의 힘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회초리 이전에, 사실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도 바로 그 홍수의 사건을 하나님의 눈물로 기억하는 우리의 믿음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은 점차 눈물이 마르고 있는 시대라고 합니다. 으레 눈물바다가 되던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쿨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니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밀가룩 범벅을 만들고 옷을 찢는 폭력적 행위가 더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헌데 눈물의 의미를 잊고 지내는 세대가 안게 될 역설적인 모순은 결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눈물은 피눈물과 같은 고통의 눈물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 곧 홍수의 의미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 곧 십자가의 보혈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눈물의 힘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었음을 재확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