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창세기 17: 15-21, 마가복음 8: 31-34

 

오늘로 지난 2월 9일부터 시작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선수들이 15개 분야의 여러 세부 종목에 걸쳐서 자신의 이름과 국가를 대표하여 최선의 경쟁을 벌인 지구촌 축제의 장이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지요. 특별히 금번 올림픽은 우리 고국에서 주최된 까닭에 해외 동포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차가 있어 경기를 중계방송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저 역시 마음 속으로 함께 응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동계 올림픽이라 그런지 몇몇 종목을 빼놓고는 사실 저에게는 생소한 경기가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계올림픽에 참여하여 메달을 따는 국가는 모두가 지구의 북반구에 자리잡은 나라들입니다. 특히 유럽의 백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몇몇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경쟁하고 있는 정도이지요. 한마디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들 위주의 대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 올림픽의 정신은 경쟁이 아닌 상생과 평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국가는 참여하기도 어렵고, 참가한다 해도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아마추어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올림픽의 뒤에서는 국가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이권 쟁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림픽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것은 경쟁과 이권쟁탈의  논란 속에서도 상생과 평화의 정신을 굳건하게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 스피드 스케이트 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인 한국과 일본의 두 선수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은 퇴색되어가는 올림픽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워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오랜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깊이 패인 감정의 골때문에 국민적 정서는 좋을리 없지만, 이를 넘어서 상생과 평화라는 올림픽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두 선수의 우정은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배려와 상생의 길을 통해서 말이지요.

특별히 금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북이 단합을 모색하는 화해의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적 적대관계를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를 찾고자 대화와 교류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평화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선제타격과 같은 군사적 방식을 통해 무력으로라도 제압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가지고 올 엄청난 재앙과 생명 손실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듯한 주장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쟁은 차치하고, 이러한 호전적인 대응과 강경한 태도에 대해 저는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무력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고 말이지요.

올림픽의 정신처럼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구절이 오늘 신약의 본문인 마가복음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따라 사는 제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부인해야 할 자기는 다른 말로 사람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거워도 짊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성경본문인 창세기의 말씀은 이러한 구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전인 13년 전에, 그러니까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 훨씬 이전에도 똑같은 약속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하늘의 별처럼 그를 통해 온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민족은 고사하고 당장 자신의 유산을 물려 줄 자식 하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인 사라는 몸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갖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비록 정실의 자식은 아니더라도 분명 아브라함의 피가 섞인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얼마 안 가 분쟁의 불씨가 됩니다. 언약의 말씀대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되자, 이복 형제간의 불가피한 갈등이 시작된 겁니다.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말그대로 천덕꾸러기가 되고, 아들을 둘러싸고 가족들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4장 23절을 보면, 이스마엘을 육신의 자녀라고 하면서, 이삭은 언약의 자녀라고 구별하여 정의내린 구절이 있습니다. 대놓고 두 명의 아들을 차별한 것이지요.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억울할 만한 일입니다. 대대로 자신의 이름이 이삭과 대비되어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납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본처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제를 삼는다면 그 대상이 왜 이스마엘이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문제를 만든 장본인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이니,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바울도 이스마엘과 이삭을 각각 육신의 자녀와 언약의 자녀로 구별한 이유가 윤리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육신의 아들과 언약의 아들이라는 구분은 사람이 아니라, 아들을 얻게 된 방식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육신의 나이가 백세가 다 된 아브라함과 이미 아흔이 넘은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의 방식으로 아이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자기방식대로 해석해 버린 결과입니다. 일은 사람의 방식으로 처리해 놓고, 모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을 얻는 과정은 철저히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였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삭은 말 그대로 언약의 성취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오랜 기다림이라는 인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삭을 언약의 자녀로 부른 것은 그가 이스마엘과는 다른 인격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삭의 탄생 자체가 바로 사람의 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우리 맘대로 차별하여 보려는 시선 자체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과 아랍계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차별과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보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민족을 구별짓고 분쟁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삭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따르는 신앙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시고 이를 소중히 여기셔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일처럼 분쟁과 갈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복을 이삭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도 허락하신 하나님입니다. 특별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메달을 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선수들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의 진정한 의미는 경쟁에서 승리한 몇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상생과 평화를 나누는 축제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했어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열정과 경쟁이 끝난 뒤 서로의 노고를 함께 치하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그 마음이야 말로 올림픽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의 우위와 승리가 목표가 된 오늘의 현실은 어쩌면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다른 수많은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경쟁에서 뒤진 패배자와 낙오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희생자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스마엘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차별시켜도 좋을 대상. 때로는 공격을 통해 제압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만큼 증오의 대상. 차라리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믿는 쓸모 없는 존재로 말이지요.

지난 주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사고로 17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기 관련 사고로 인한 피해는 더 이상 미국사회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이 직접 총기규제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어른들의 결정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항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지난 주 학생 대표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주장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내놓은 해결책이  선생님들을 총으로 무장시키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총기를 손에 쥐게 해서 총기로 인한 사고를 막자는 이야기 입니다. 총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총기로 막아 보자는 생각. 혹 이것이야 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요? 상생과 배려의 가치 보다 적자생존의 경쟁가치가 우세하고,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평화와 화해의 방식 보다는 당장 눈 앞에서 해결해 보고 말자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과연 이 시대에 우리가 무겁고 힘들어도 짊어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 곧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